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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춤추는 몸은 다 아름답다>의 줄거리:
"이 세상이 창조되던 그 아침에 나는 아버지와 함께 춤을 추었다. 내가 베들레헴에 태어났을 때도 하늘의 춤을 추었다. 춤춰라 어디서든지 힘차게 멋있게 춤춰라. 나는 춤의 왕, 너 어디 있든지 춤 속에 너 인도 하련다" '춤의 왕' 예수님에게 인도함을 받으려면 어디서든 힘차고 멋있게 춤을 춰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밥먹을 때에도 일 할 때에도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려면 춤춰야 합니다. 예수님은 댄싱 킹, 우리는 그의 품속에 안긴 댄싱 퀸입니다.
춤추는 몸은 다 아름답다
(아가 7:1~13)
1. 귀한 자의 딸아 신을 신은 네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네 넓적다리는 둥글어서 숙련공의 손이 만든 구슬꿰미 같구나
2. 배꼽은 섞은 포도주를 가득히 부은 둥근 잔 같고 허리는 백합화로 두른 밀단 같구나
3. 두 유방은 암사슴의 쌍태 새끼 같고
4. 목은 상아 망대 같구나 눈은 헤스본 바드랍빔 문 곁에 있는 연못 같고 코는 다메섹을 향한 레바논 망대 같구나
5. 머리는 갈멜 산 같고 드리운 머리털은 자주 빛이 있으니 왕이 그 머리카락에 매이었구나
오늘 말씀 중심으로 <춤추는 몸은 다 아름답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춤추는 몸은 다 아름답다’
오늘 본문에는 민망할 정도로 술람미 여인의 아름다움을 칭찬하는 표현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미 보았던 앞장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예루살렘 여인들의 요청에 따라 솔로몬이 신부에게 춤을 권하고 술람미 여인은 이에 호응하여 춤을 추게 됩니다. 신부가 춤을 추었다는 묘사가 따로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정황상 춤을 추는 모습을 보고 솔로몬이 그 아름다움에 감탄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도 ‘춤추는 몸은 다 아름답다’고 정해보았습니다.
춤과 연관 지어서 생각나는 복음성가가 있는데 “춤의 왕”이라는 제목의 노래입니다.
“이 세상이 창조되던 그 아침에 나는 아버지와 함께 춤을 추었다 / 내가 베들레헴에 태어났을 때에도 하늘의 춤을 추었다 / 춤춰라 어디서든지 힘차게 멋있게 춤춰라 / 나는 춤의 왕, 너 어디 있든지 춤 속에 너 인도 하련다”라는 내용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모습이 마치 춤추는 모습 같다는 것입니다. 춤을 추시는 주님의 인도를 받기 위해서는 우리가 뻣뻣하게 서있을 수는 없습니다. 같이 춤을 추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춤을 출 때에 주님의 인도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 복음성가의 가사가 깊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왜 굳이 예수님을 춤의 왕으로 비유했을까요? 성경에 보면 춤추는 장면은 많이 나타납니다. 홍해를 건넌 뒤에 미리암과 모든 이스라엘 여인들이 기쁨의 춤을 추었고, 언약궤가 예루살렘으로 들어올 때에도 다윗이 그에 앞서서 격렬한 춤을 추기도 하였습니다. 이외에도 다양한 춤의 모습이 나오는데 굳이 예수님을 춤의 왕으로 칭한 이유를 우리 나름대로 생각해보기로 합니다.
춤의 사전적 정의를 보면 “장단에 맞추거나 흥에 겨워 몸을 놀리는 동작을 말한다.”라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수식어를 다 빼면 ‘춤은 몸을 놀리는 동작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몸을 움직이는 동작은 춤뿐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면서 움직이는 모든 행동이 몸을 놀리는 동작입니다. 결국 단순한 움직임과 춤을 구분 짓는 것은 장단이나 흥겨움입니다.
한편 사복음서에서 예수님의 행적을 보면 흥에 겨워 춤을 추셨다는 기록은 전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복음성가는 왜 예수님을 춤의 왕으로 비유하였을까요?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생각을 좀 바꾸어봅니다. 흥에 겹거나 장단에 맞춘다는 것은 생산적이고 실용적인 목적이 없는 동작입니다. 다시 말해 춤은 무엇인가를 만들거나 성취하기 위한 의도나 목적이 들어있지 않은 몸놀림입니다. 우리가 가정이나 직장에서 생활할 때에 이루어지는 모든 행동에는 의도와 목적이 분명합니다. 무엇인가를 이루거나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나 춤에는 이러한 실용적 의도와 목적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춤의 왕이신 이유를 유추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이 창조되던 그 아침에 나는 아버지와 함께 춤을 추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요한복음 1장 1~3절을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창조되던 아침에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함께 춤을 추셨다는 것은 우리가 반복해서 배워왔듯이 예수님과 하나님은 서로를 채우시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 들어오신 상태에서 창조주의 행위가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창조라는 생산적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신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말씀하시는 대로 예수님께서는 곧 말씀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창조를 이루셨습니다. 이 창조에는 예수님의 의도와 목적이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오직 아버지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을 표현하고 계셨을 뿐입니다. 밖에서 볼 때에는 예수님이 마치 춤을 추는 것과 같았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0~11절을 보면 빌립이 예수님께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주시기를 요청하자 예수님께서는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에서 춤의 사전적 정의에서 보았던 성향이 느껴집니다. 춤은 곧 생산적인 의도나 실용적 목적이 없는 몸놀림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동안 많은 일을 행하셨지만 그 모든 일은 예수님 안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목적과 의도에 따라 예수님은 몸을 움직이셨을 뿐입니다.
우리가 장단에 맞추어 움직이면 춤이 되는 것처럼, 예수님의 행동은 아버지의 의도와 생각의 장단에 맞추어서 움직이셨기에 춤과 같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부터 열까지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것만 말씀하셨고 아버지께서 행하신 것이 아니면 움직이지 않으셨습니다. 머리끝부터 사지백체가 다 춤이셨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의식에 따라 움직이셨기에 예수님을 춤의 왕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님만의 실용적 의도나 창조적 목적을 따로 갖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말씀드린 대로 1~5절까지는 예루살렘 여인들이 춤추는 술람미 여인을 보면서 그 몸의 부분 부분에 대한 아름다움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특히 5절을 보면 ‘머리는 갈멜 산 같고 드리운 머리털은 자주 빛이 있으니 왕이 그 머리카락에 매이었구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그 머리카락에 매이었구나’라는 말은 예루살렘 여인들이 보기에 솔로몬 왕이 술람미 여인의 춤추는 모습을 보면서 완전히 넋이 나간 것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6~8절에 “사랑아 네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어찌 그리 화창한지 즐겁게 하는구나 / 네 키는 종려나무 같고 네 유방은 그 열매송이 같구나 / 내가 말하기를 종려나무에 올라가서 그 가지를 잡으리라 하였나니 네 유방은 포도송이 같고 네 콧김은 사과 냄새 같고”라고 하면서 솔로몬 왕이 춤추는 술람미 여인에게서 느끼는 아름다움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 속에는 아름다움에 취한 나머지 둘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 하는 욕구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신앙적 본보기는 아니지만 이렇게 춤에 취한 또 다른 예가 복음서에서 등장합니다.
마가복음 6장 21~22절에 헤롯 왕의 생일에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가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합니다. 헤롯은 이 춤사위에 넋이 나가서 “그 소녀에게 이르되 무엇이든지 네가 원하는 것을 내게 구하라 내가 주리라 하고 / 또 맹세하기를 무엇이든지 네가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 하거늘”라고 하였습니다. 춤을 추는 모습이 아름다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춤에 취한 솔로몬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며 원하시는 것을 드러내줍니다. 우리는 평생 몸을 움직이며 살아갑니다.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의 춤에 취했고 헤롯 왕이 살로메의 춤에 취했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춤추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우리의 춤추는 모습 속에서 아름다움을 보시기를 바라십니다.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의 아름다움에 빠져 단 둘이만 있고 싶은 감정을 느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나와 깊은 연합을 이루시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우리의 외모는 예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외모가 하나님께 아름답게 여겨질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춤입니다. 예수님처럼 춤을 추면됩니다. 춤추는 몸은 아름답습니다. 육체의 외모가 어떤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행동이 춤이 되면 됩니다.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의 사랑에 겨워서 춤을 출 때에 예루살렘 여인들이 감탄하고 솔로몬 왕이 아름답게 여긴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겨워서 춤추는 모습을 보시기를 바라십니다.
결혼을 하면 부부가 가정을 돌보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배우자를 대할 때나 가정을 돌볼 때에나 모든 행동이 하나님의 의도와 생각에 의한 춤이어야 합니다. 내 생각을 가지고 하는 일이 아닐 때에 아름다운 춤이 됩니다. 내 의도가 들어가면 춤이 아닌 동작에 불과합니다. 내 몸의 동작이 춤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처럼 내 마음 안에 하나님 아버지가 들어오셔서 움직이셔야 합니다.
삼위일체에 대한 교리에도 ‘상호침투 혹은 상호내재(Perichoresis)’라는 말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보았던 것처럼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다.’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이러한 삼위일체 안에서 예수님의 모든 활동은 아버지의 의도에 따른 춤이었습니다.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춤과 같은 삶의 모습을 보여주신 이유는 바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의 춤을 보고 기뻐하고, 헤롯 왕이 살로메의 춤을 보고 기뻐했던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기뻐하실 수 있는 사람들이 되도록 본을 보이신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처럼 내 의도나 생각이 배제된 상태에서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움직이셔야 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의 삶은 춤이 됩니다. 직장에 나가서 일하는 것도 춤입니다. 열심히 일하고 승진해서 월급을 많이 받겠다는 의도적인 생각으로 하는 활동은 춤이 될 수 없습니다. 참 신앙에는 몸치가 없습니다. 춤꾼이 아니면 선민이 아닙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주님과 연합해야만 하는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춤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댄싱 킹이라면 우리는 예수님의 인도를 받는 댄싱 퀸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 들어오신 하늘 아버지의 영이 곧 성령이십니다. 이렇게 우리가 예수님과 연합하여 하나님이 영인 성령으로 충만해질 때에 우리는 춤꾼이 됩니다.
춤은 기쁨에 흥겨운 움직임입니다. 마태복음 3장 17절에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있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은 앞서 말씀드린 상호침투(상호내재)의 상태를 말합니다. 내가 그 안에 있고, 그가 내 안에 있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기쁨이 생깁니다. 이 기쁨이 춤의 원동력입니다. 기쁘고 만족한 상태에서는 무엇인가를 얻겠다거나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겠다는 성취적이고 실용적인 목적과 의도가 들어있을 수가 없습니다. 내주하시는 하나님에 의한 기쁨과 만족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 기쁨과 만족으로 인한 흥에 겨워서 몸을 움직이는 것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장단에 맞춘 춤이 됩니다. 이제부터는 자녀를 키우면서도 춤을 출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과 연합하여 춤을 출 수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 뜻대로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자녀에게 하는 말 한 마디나 행동 하나까지도 하나님의 보시기에 아름다운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 아름다운 것이라야 바른 것입니다. 하나님 의도에 의한 창조가 하나님 보시기에 좋게 이루어진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은 행동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은 장면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은 사건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우리는 춤꾼이 되어야만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것은 예수님과 연합함으로써만 이루어집니다. 예수님 안에 들어오셨던 하나님 아버지가 성령으로 내 안으로도 들어오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내가 예수님과 똑같은 춤꾼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이 등장하는데 댄싱 킹이신 예수님의 품에 안긴 댄싱 퀸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직장생활도 하고 공부도 하며 배우자를 대하며 부모노릇도 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 하는 행동은 일이 아닌 춤이 됩니다. 주님과 십자가에서 연합함을 통하여 주님 안에 들어오셨던 하나님을 우리 안에도 들어오시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공생애는 오직 아버지의 의도와 생각이 나타나는 춤판이었습니다. 나사로를 살리실 때에도, 바람을 잠잠하게 하실 때에도 이것은 한 편의 뮤지컬과 같습니다. 그 동작과 말 속에는 하나님 아버지의 의도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개별적으로 가지셨던 의도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되어야만 합니다. 자녀를 대할 때에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는 뮤지컬이 되어야 합니다. 아버지로 채워진 마음이 흥에 겨워서 아버지 뜻의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는 것이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이런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과 단 둘이 있고자 하는 마음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여기시며 가장 큰 은혜를 주시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큰 은혜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그저 열심히 하면 되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솔로몬 왕이 술람미 여인의 아름다운 춤을 보면서 둘만 있고 싶어 하는 마음처럼, 하나님과 단 둘이 있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기도가 어려운 이유는 우리가 춤을 추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눈에 아름답게 보이는 춤꾼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세상을 향해 발동되는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모든 의도를 십자가에서 죽여야만 합니다. ‘이것을 이뤄야겠다, 저것을 이뤄야겠다, 이랬으면 좋겠다, 저랬으면 좋겠다.’라는 세상을 향해 가지는 의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추한 행동이 되고 몸치가 되게 합니다.
춤을 못 추는 사람이 뻣뻣하게 억지로 움직이면 보기 민망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추한 모습이 바로 내 의도대로 살아가는 몸치의 삶입니다. 자기 딴에는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움직인다고 믿고 좋은 것이라 여기고 잘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창조적이고 생산적이고 긍정적인 사람들일수록 몸치일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장단으로 춤을 추는 춤꾼이 되어야 합니다. 춤꾼이 되기 위해서는 주님의 십자가에서 생산적이고 창조적으로 움직이려는 의도가 죽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진짜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의도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춤을 출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시고자 하는 강렬한 연합을 위한 바람을 가지실 것입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기도의 문도 열리게 됨으로써 하나님과 더욱더 깊은 관계로 나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 마지막 부분을 보면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과 단둘이 있고자 하는 바람에 대한 응답이 나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가져야 하는 기도의 내용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춤을 추어야 합니다. 몸치로써의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춤꾼이 되기 위해서는 주님의 십자가에서 세상을 향해 생산적이고 실용적이고 창조적으로 믿어지는 나의 생각과 의도와 목적과 소원을 다 죽여야만 합니다. 세상을 향해 죽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내 마음을 끌고 하늘로 가실 것이고 하나님께서 내 마음 안에 들어오시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에 기쁨과 평강과 만족이 생겨나고,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만이 나타나는 춤판이 될 것입니다. 배우자를 향해서 춤을 추고, 직장에서도 춤을 추며, 심지어 원수 앞에서도 기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장단에 맞춘 춤을 추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가장 예뻐하시고 좋아하시는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춤추는 나를 보시는 마음이 술람미 여인의 춤을 보는 솔로몬의 마음과 같게 될 때에, 기도의 문을 열어주시고 더욱더 깊은 연합과 강한 충만함으로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우리 몸의 모든 동작이 빠짐없이 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