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9.27. 연중 27주일. 주교좌임시성당축복식_청주 수동성당. 유낙준주교.
하느님은 늘 우리 안에서 일을 하십니다(필립2:13)
God is always at work in you.
“하느님은 우리들에게 하느님의 뜻에 맞는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주시고 그 일을 할 힘을 주시는 분이십니다(필립2:13).” 우리가 하느님의 목적에 순종하기를 바라고, 우리 안에 하느님의 의지를 만들기 위해 하느님이 늘 일을 하십니다. 그렇게 하느님이 늘 작업을 하시는 이유는 하느님의 목적에 순종하는 마음을 갖게 하시려는 것이고 하느님의 의지를 우리 마음에 만들기 위함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우리 영혼에 하느님의 의지가 새겨지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선포하나이다. 아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의 첫 대목입니다. 성공회 성도들이 관상주제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제목입니다. 하느님은 아들의 아버지이심을 드러내시고, 아들은 아버지의 아들이심을 드러내시는 이 대목은 완전한 관상의 제목입니다. 그렇게 구원은 하느님과 아들과 성령이 함께 하는 자리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묵상할 수 없다면 그저 그분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아빌라의 테레사의 “완덕의 길”에 나오는 글입니다. 기도가 잘 나오지 않을 때 그저 예수님만 바라보는 것이 기도가 됩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관계맺는 것이 신앙생활의 목표이지 원칙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서 하늘은 아버지가 계시다고 말한 자리입니다. 곧 하늘의 본질을 알려주실 것입니다. 특히 어수선한 정신을 가진 사람에게 영혼을 거두어 주는 최선의 길은 “우리 영혼 안에 있는 하늘”을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계셔서 여러분에게 당신의 뜻에 맞는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 주시고 그 일을 할 힘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필립2:13).” 내가 어디 가든지 간에 하느님이 계신 것입니다. 하느님이 계신 곳에는 온통 영광뿐입니다. 고난 속에서조차 내 영혼 안에 하느님이 계시니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됩니다. 성 어거스틴은 여러 곳에서 하느님을 찾다가 결국 자신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했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기쁨을 얻기 위해서 하늘로 올라갈 필요가 없고 큰 소리로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을 찾아가기 위해 날개가 필요없고 오직 홀로 있을 자리를 찾고 내 안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면 됩니다. 그렇게 좋으신 손님을 앞에 두고 서먹해 할 것 없이 다만 겸손되이 아버지께 하듯이 말씀을 드리면 됩니다. 바로 그런 곳이 성당입니다. (Peter Yyler의 “그리스도교 마음챙김 Christian Mindfulness”의 ‘아빌라 테레사’의 “완덕의 길”인용한 것에서).
하느님께서 재난을 맞은 성도들에게 ‘실질적으로 용기와 위로를 주는 주교와 함께 하는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오늘 이 자리에 왔습니다. 우리는 이 성당에서 함께 기도하고 함께 웃고 함께 배울 것입니다. 사제언약식(공동기도서)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았기에 하느님의 은혜를 입어 모든 일할 마음을 주셨고, 이 모든 일을 할 능력을 주셨으니 네게 시작하신 일을 이루게 하셔지이다. 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하노라. 아멘.” 필립인들에게 보낸 사도 바우로의 편지 2장 13절 말씀을 차용한 기도서의 사제언약식의 사제의 고백입니다.
성당의 어느 곳에서든지 제단을 보이게 만들었습니다. 제단은 예수님의 오상(다섯 가지의 상처, 두 손과 두 발과 허리의 상처)이 새겨진 제단이기에 이 제단인 예수님의 십자가 상에서의 희생을 상징하는 오상 덕분에 우리가 변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희생을 상징하는 것이 제단 속에 숨겨진 뜻입니다. 재난을 맞은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오상으로 인하여 안전한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힘을 얻고자 하면 그리스도를 믿고, 위안을 받고자 원한다면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머물고, 친교를 원한다면 성령과 더불어 살고, 서로에 대한 연민과 친절함을 지녀야 합니다(필립2:1).”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사랑에 머물고 성령과 더불어 살면 “같은 생각과 같은 사랑과 같은 마음이 되어 예수님의 기쁨을 완전하게 할 것입니다(필립2:2).” 이는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사랑에 머물고 성령과 더불어 살면 하나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과 성령이 내 안에 머물면 겸손하게 살고 예수님 마음으로 살고 순종하며 살아 완전한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기심과 허영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다고 여기십시오(필립2:3).” “예수님이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필립2:5).” “함께 있을 때나 지금 떨어져 있을 때나 순종하여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힘쓰십시오(필립2:12).” 사도바우로 13개 서신에서 필립보서의 이곳이(필립2:1-13) 최고 신앙의 본질을 펼친 곳이라 봅니다. 이를 자주 가슴에 새기십시오. “하느님의 복이 우리의 모든 일에서 임하시길 빕니다. God’s blessing to you, in all things.”
매년 부활절 전주일(종려나무주일, 성지주일, 고난주일))은 왕처럼 예수님이 나귀타고 오시기에 성지를 흔들며 환호하는 예루살렘 사람들처럼 우리가 성지를 흔들며 “다윗의 아들로 하느님의 복을 받으실 분이로구나. 호산나!”라며 환호합니다(마태오 21:1-11 참조, 9). 여기서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종종 로마제국에 점령된 작은 나라인 이스라엘이 위험에 처한 상황이라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수도입성을 환호하는 군중들은 로마에게 아첨하는 앞잡이로 로마의 권위로 움직여지는 사람인지? 또는 사두가이파와 바리사이파 사람들로 종교적 권위로 로마에 도전하는 그룹의 사람들인지? 질문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도착하신 후에 곧바로 기도하시러 성전에 가십니다(마태오21:12 참조). 성전 안에서 팔고 사는 이들을 다 쫓아내시고 환금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를 둘러 엎고, 그들에게 “내 집은 사업하는 곳이 아닌 기도하는 집 (13)”이라고 나무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낮에 군중들이 외치는 환호의 소리를 배운 아이들이 저녁때 외칩니다. ‘예수님이 그 다음에 무엇을 하시려는 것일까?’ 라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읺습니까?
“예수님은 성전에서 가르치셨습니다(마태오21:23).” 대사제들과 백성들의 원로들이 예수님께 와서 ‘Please explain! 설명해 주십시오!’ 라고 요청을 하였습니다. 모세가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 썼다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라는 유대율법인 토라를 해석하는 권위를 하느님으로부터 받았다는 이들 종교리더들은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을 철저히 확신하는 자들입니다. 토라에 대한 확신 외에 대안적인 것들은 종교지도자들에게는 위험한 것들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1500년 전에 모세에게 준 하느님의 권위를 예수님께 요청한 것입니다. 이에 에수님은 무슨 권위로 그러한 질문을 하는가라고 되묻습니다. 랍비식의 질문에 랍비식의 되질문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회개를 외친 세례자 요한에게 하느님이 권위를 주셨는가? 그 자신이 주었는가?’를 예수님이 종교지도자들에게 묻습니다(마태오21:25 참조). 군중들에게 인기있는 세례자 요한이 종교지도자들에게 도전했지만 그들은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답을 알고 있지만 그대로 답하지 아니하고 날조된 답으로 ‘알지 못한다 We don’t know(27)’고 답했습니다. 알지 못한다는 말이 솔직한 답일 수 있지만 이렇게 자신을 속이는 답으로도 사용됨을 볼 수 있습니다.
이어서 포도원의 두 아들을 지닌 한 사람을 상상력으로 이야기를 꺼내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자신을 속이는 사람에게 더 깊이 들어가 속을 드러내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첫째 아들은 ‘안 간다’고 말했지만 나중에 뉘우치고 일하러 갔고, 둘째 아들은 ‘간다’고 했지만 일하러 가지 않았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인 제사장들과 원로들은 하느님에 대한 확신을 표현하지 않았지만 포도원에 가서 일한 사람은 한 사람임을 표현했습니다. 포도원에서 일한 그 한 사람이 종교지도자들이 아니라 창녀와 세리인 첫째 아들이라고 자신들이 이야기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예수님은 랍비식으로 질문을 하고 더 나아가 예수님의 방식으로 종교지도자들의 거짓된 믿음을 드러나게 하신 것입니다. 公式的인 믿음을 지녔다는 종교지도자들에게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없음을 드러냈기에 그들의 감정을 헤치고 불화를 일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선이 교차되는 지점까지 지속한 예수님의 질문이셨습니다.
500년전 유럽에서 로마 가톨릭의 권위자들이 지구상에서 성경해석의 최고 권위를 지녔다고 확신했습니다. 1516년 로마교황청은 도미니꼬 수도회의 탁발 수도승인 Johan Tenzel 요한 텐젤을 독일로 보내서 면죄부를 팔아 돈을 올리려고 한 것입니다. 덕이 없는 사람들은 죽어서 영혼이 벌받는 곳인 연옥 pulgatory 에 가는데 교회에 돈을 내면 연옥서 보내는 시간을 줄일 수 있다는 로마가톨릭의 새 교리가 나온 것입니다. 금고함에 돈을 넣으면 연옥의 시간이 줄어든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독일의 신학자와 철학자들은 이 교리에 동의를 하지 않았습니다. 죄는 하느님의 용서를 얻어야 가능한 것이지 돈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마틴 루터는 1517년 10월에 메인츠의 대주교에게 편지를 쓴 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대주교에게 질문했습니다. ‘왜 가난한 사람들의 돈으로 성 베드로성당의 바실리카를 지으려 하는가?’ 지구상에서 가장 큰 부자의 심경을 건드린 질문이었고 이를 로마가톨릭은 수용을 거절했습니다. 선이 교차되는 지점까지 루터는 지속한 것입니다. 루터의 주장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2천년전 유대교 권위자들과 예수님과의 갈등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명료함은 기분 나쁜 진리를 수용하지 않았습니다. 동시에 500년전 로마가톨릭과의 권위의 갈등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마틴 루터도 기분 나쁜 진리를 수용하지 않았습니다. 개혁과 쇄신은 기분 나쁜 진리를 예배 안에서 수용하지 않아야 합니다. 성공회의 종교적 리더쉽은 코로나-19상황에서 창녀와 세리에게 도움이 되는가를 예수님이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종교적인 교리인 하느님이 진리라는 것을 거절하고 차단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자세히 보아야 합니다. 모든 권위는 하느님에게서 나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선포하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