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우주의 근본 - 부자관계 1) 우주의 근본은 부자의 관계다
천지의 중심과 우주의 근본은 무엇입니까? 선생님이 신비스러운 경지에 들어가 하나님께 기도해 보니 아버지와 아들딸의 관계, 즉 부자의 관계라고 하셨습니다. 모르는 사람들은 육친의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과의 관계인 줄 알겠지만,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19-160)
그래서 선생님이 기도하는 가운데 깊은 경지에 들어가 가지고 몸부림 치며 싸워서 우주의 비밀, 우주 신비의 모든 근본을 알았다구요. 우주의 근본이 뭐예요? 간단해요. 부자의 관계라는 답이 딱 나오더라 이거예요. 그러면 부자의 관계가 무엇이냐 이거예요. 그것은 사랑을 빼놓고는 해설을 못하는 거예요. 무엇을? 부자의 관계에서 사랑을 빼놓고 해설하면 안 되는 거예요. 사랑을 빼놓고는 해설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은 세상 사람 부자관계같이 알았겠지만 선생님은 그렇게 알지 않고 그걸 해명하다 보니 이것이 다 나온 거예요, 이론적으로. (144-250)
여러분이 신비스러운 경지에 들어가 가지고 기도하게 될 때, 인간은 피조세계의 중심인데 이 우주의 중심은 뭐냐고 묻게 되면 부자지관계 (父子之關係)라는 답을 얻게 됩니다. 우주의 중심이 뭐냐? 한마디로 딱 결론을 지어 주는데 부자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이거 보통 사람들은 자기를 낳아 준 어머니 아버지를 말하는 줄 알고 있다는 거예요. 부자의 관계라고 하는 것을 보통 생각하는 자기 어머니 아버지, 즉 인륜도덕을 중심삼은 부자의 인연을 말하는 줄 알고 있다구요.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입체적인 입장에서 보게 되면, 하나님과 인간이 부자관계의 정 (情)을 중심삼고 하나되어 있는 그 자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결론이 나온다는 거예요. (48- 209)
우주의 근본이 무엇입니까? 부모와 자식입니다. 부모와 나, 부자의 관계가 우주의 근본입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요 나는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아들딸입니다. 최후의 근본이 부자의 관계요, 최고의 목표도 그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것을 찾아가야 됩니다.
선생님은 이것을 찾으려고 고난의 길도 마다 않고 걸어왔습니다. 사탄의 시험에 들어도 순식간에 물리칠 수 있는 것은 부자의 관계입니다. 사탄세계에 들어가 잠을 자더라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부자의 관계입니다. 그런 것을 잃어버렸으므로 원통하고 분하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12-258)
여러분은 영계를 모르지만 신비로운 경지에 들어가 가지고 하늘 앞에 담판을 지어야 됩니다. '이 우주의 진리가 무엇이오? 하나님이 인류를 지어 망치기 위한 뜻 가운데 인류를 만들어 놓았다면 당신은 포악한 하나님이요 잔인한 하나님입니다' 이럴 때에 답이 달라진다구요.
우주의 진리는, 천리의 대도의 원칙이 뭐냐 하면 부자의 관계인 것입니다. 그 부자의 관계는 오늘날 타락한 세계에서 자기를 낳아 준 어머니와 아버지와의 관계가 아닙니다. 횡적인 부부의 사랑이 하나님의 이상적사랑으로 완전히 꽃피워 가지고 그 사랑의 향취가 온 천지에 진동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이 가해 가지고 아버지와 아들딸의 자리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아들딸의 행복을 노래하고, 아들딸의 희망과 아들딸의 만사를 찬양할 수 있고 사랑을 노래할 수 있는 겁니다. 그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가진 그 사랑의 귀한 선물 위에 입체적 사랑을 가해 가지고 이 우주가 부웅 부풀게 될 것입니다. 고무 주머니(풍선) 알지요? 납작 달라붙은 고무 주머니를 '푸' 불면 커지듯이 우주가 부풀어서 존재세계의 만물이 그 가운데에 들어가더라도 만민이 웃을 수 있는 우주가 됩니다. 모든 것을 충만시킬 수 있는 사랑의 힘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생각하면 기분 좋지요? (101-34)
2) 본연의 부자관계의 기준 우리 세상에서 미루어 보게 될 때, 만일에 하나님이 부모의 자리에 있다면…. 인정과 천정이 연결될 수 있는 최고의 자리는 어떠한 자리일 것이냐? 아무리 우리가 찾아 올라가 봐도 하나님은 부모이기 때문에, 인간은 자식의 자리를 추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하늘을 대하여 아버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늘은 우리 인간에 대하여 자녀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자의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부자관계의 기준이 어떠한 것이냐? 타락선 하(下)냐 타락선 상(上)이냐 할 때, 이것은 타락선 상도 될 수 없는 것이요 타락선 하도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타락선 이상의 자리일 것입니다.
오늘날 타락된 인간들을 놓고 봐도 그렇지 않느냐? 이것은 타락 이하의 부자관계의 사랑이지만 그 부자관계의 그 사랑을 가지고도 기가 막히다고 우리가 말할 수 있다 할진대는, 타락하지 않은 자리에 있는 부모가 불효자식을 맞았다면 그 부모는 얼마나 기가 막히겠느냐? 우리가 일상생활 주변에서 부자간의 사랑이라는 문제를 두고 생각해 보게 될 때 그 배후를 가히 측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타락선 이상의 사랑을 가지고 자식을 사랑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냐? 그러면 그 사랑은 얼마나 강하였겠느냐? 타락선 이상의 자리에 섰던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우리 인간은 원리로 말하면 장성기 완성급에서 타락했습니다. 완성의 자리를 이어받지 못한 자리에서 타락한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이상적인 요소를 접할 수 있는 자리와 결연되어 있는 것이 아니냐? 이상의 모든 요건을 우리가 자유로이 받아들일 수 있는 자리에서 타락하지 않은 것을 생각하게 될 때, 그 이상에 설 수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것은 얼마나 차원이 높을 것이냐? 그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자리가 아니냐?
그러면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효자 효녀, '그 아무개 집 아들은 효자야! 아무개 집 딸은 효녀야!' 하고 말하는 그런 효자 효녀의 마음을 가지고 본연의 하늘 부모 앞에, 그 심정 앞에 나설 수 있는, 참자녀의 자리에 설 수 있는 사람이 있었느냐 할 때, 역사 이래 그런 사람이 없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100을 사랑하려고 하는데 100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있었더냐? 없었다 이거예요. 하나님이 사랑하고 있는 그 사랑을 아는 사람이 있었느냐 할 때 아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아는 사람이 없었지만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하나님이라 할진대는 그분은 비참한 분이 아니냐 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62-20)
3) 부자관계의 본질 부자관계는 종적인 면을 대표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자관계의 사랑은 변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 역사상에도 그렇잖아요? 부부의 사랑은 횡적인 면의 인연이기 때문에 사방성을 갖춘 겁니다. 그러므로 부모가 자식을 버릴 수 없고 자식이 부모를 버릴 수 없다는 겁니다. (145-275)
하나님의 사랑의 발굴지는 어디냐? 형제지간에 서로 사랑하는 거기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나오느냐? 아닙니다. 남녀가 사랑하는 그 사랑을 중심삼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이 세워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은 부자관계의 사랑에 의해서 세워집니다. 피와 살이 연결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전통으로 남기고 영원히 남기기 위해서는 피와 살이 연결되어야 됩니다. 종적 관계가 성립되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 종적 관계는 부모의 사랑을 받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부자의 사랑 이외에는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 사랑에는 거리가 없습니다. 이 종적 관계에 있어서는 하나의 중심이 있어야 됩니다. 중심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중심은 제일의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중심이 둘이면 세상에서는 싸움이 벌어집니다. (28- 169)
자식에게 있어서 부모를 대하는 기쁨은 그야말로 세계를 대표한 기쁨이 되어야 되고, 부모에게 있어서 자식을 대하는 기쁨은 세계를 대표한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기쁨이 되어야 됩니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보게 될 때, 부자의 관계는 그야말로 우주의 근본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기쁨의 근본이 거기에서부터 싹틀 것이고, 슬픔이 시작된다면 그 이상의 슬픈 자리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여기서 결론을 지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세계의 외적인 딴 문제를 전부 다 잃어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자식을 대해 가지고 행복스럽게 살 수 있는 소망의 자리라는 것은 부모 앞에 있어서는 단 하나밖에 없지 않느냐. 그것만이 제일이 아니냐. 그 부자의 관계가 세계에 드러날 수 있는 자리에서 살고 싶은 것이 부모의 욕망이 아닐 수 없는 것이 아니냐. 부모가 그렇다면 자식도 그럴 것이 아니냐.
이런 인간관계, 타락한 우리 인간을 통해 가지고도 그러한 관계를 우리가 예상할진대는, 하늘과 땅, 혹은 하나님과 우리 인간과의 관계도 마찬가지가 아니냐.
인륜이 있는 반면 천륜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인정이 있는 반면 천정이 있어야 될 것입니다. 하늘은 위고 땅은 아래라 할진대, 부모는 위와 마찬가지요 자식은 아래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상하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땅에 사는 사람이 자식이고 하늘이 부모라 할진대, 부모의 마음과 자녀의 마음은 방향이 상대적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부모는 사랑을 하려고 하고 자식은 사랑을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부모가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자리에 서든가 자식이 사랑할 수 있는 자리에 서든가 해야 합니다. 여기서 주고자 하는 마음과 받고자 하는 마음이 끊어지게 된다면 사랑은 성립되지 않는 것입니다.
만일 주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데 이것을 막는 길이 생기게 될 때는, 받고자 하더라도 받을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심정생활에 있어서, 가정에서 잘 체휼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은 위에 있고 땅은 아래에 있습니다. 부모는 위에 있고 자식은 아래에 있다 할진대 하나님과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부모의 자리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을 놓고는 위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게 마련입니다. (62- 18)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중심삼고 볼 때, 하나님이 인간의 아버지이고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인간 대해서 '하나님보다 잘생겼구만' 하면 하나님이 기분 좋겠어요, 나쁘겠어요? (웃음) 나쁘다면 하나님은 인간만 못하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만 못해요. (웃음) 틀림없이 하나님도 좋아하실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사랑이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여러분은 하나님보다 잘나고 싶어요, 못나고 싶어요? 대답해 보세요.「잘나고 싶어요」(웃음) 너무 그러면 실례가 되지요. 미안하지만 잘나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겁니다.
옛날 동양에서는 매일 아침 저녁으로 아버지한테 문안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내가 아버지 한번 되어 보고, 아버지가 나와 같이 한번 되어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아버지는 언제나 위에 있고 나는 언제나 아래에 있으란 말이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안 그렇겠어요? 상하관계가 좋긴 좋지만 언제나 그러면 싫다는 겁니다. 자기도 아버지가 될 수 있는 때가 있으면 괜찮지만 말이예요. 언제나 아버지는 윗자리, 아들은 아랫자리이면 기분 나쁘다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 안 들어요? 그럴 수도 있다는 거예요.
부자관계는 격위에 있어서 상하관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들이 아버지에게 '아버지 자리 나 한번 주소. 아버지 자리에 한번 가 보고 싶소'할 때, '야 이놈아, 안 된다' 하면 거 안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절대자로서 그것까지 염려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어떤 자리에 세워 놓을 것이냐 하는 것이 하나님편에서 볼 때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어떤 자리에 세워 놓으려고 했느냐 하면 격위에 있어서는 상하관계이지만 사는 데 있어서는 전후관계요 내외관계에 세워 놓으려 하셨습니다. 이런 문제를 추구해 들어가야 하나님이 어디에 계셔야 되느냐 하는 문제의 해답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외관계가 되려면 하나님은 어디에 계셔야 되느냐? 하나님은 무형의 신(神)인데 인간과 어떤 자리에 있어야 되느냐? 언제나 위에 있어서는 안 된다 그 말이지요? 위에만 있으면 안 되기 때문에 부자의 관계에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40- 342)
부자관계를 중심삼고 보면 아버지는 위에 있고 아들은 아래에 있는 것입니다. 즉, 상하관계입니다. 아들이 '나, 아버지 자리에 한번 오르고 싶소'라고 할 때, 하나님이 '야 너 그만두어라'고 한다면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것을 알고 상하관계뿐만이 아니라, 동등한 안팎관계, 마음과 몸과 같은 관계에까지 우리를 놓아 두려고 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아들로 만들고, 둘째는 하나가 되고, 셋째는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까지 주고 싶어하는 겁니다. 이래서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면서 기뻐하시던 것까지도 갖고 싶어하는 겁니다. 여기에 있는 여러분, 나이가 많으신 분이나 혹은 젊은 사람들도 다 경험이 있겠지만 부모가 좋은 것을 갖고 있으면 전부 다 자기가 갖고 싶어합니다. 자기 것 만들고 싶은 겁니다. 이렇게 보게 되면 아버지 것은 내 것이라는 것입니다. (53- 225)
4) 부자관계의 변화
부모와 자식지간에는 엄연히 상하의 질서가 있는 것이지만, 사랑을 중심삼고 볼 때에는 종적 질서가 횡적 질서로 바뀐다 하더라도 무리가 없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아버지가 아들에게 명령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아들이 '아버지, 이리로 오세요' 할 때 아버지는 안 갈 수 없는 거예요. 암만 두 살 난 딸이라도 '아빠, 이리 와' 하면 아버지는 안 갈 수 없다는 거예요. 종적인 기준이 횡적으로 움직이는 엇갈리는 자리라 하더라도, 모순과 상충이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가치적인 기준을 찬양할 수 있고 도리어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이 기준은 사랑에 의해서만 되어지는 것입니다. (49-54)
어머니 아버지는 자식이 다 자랄 때까지는 자식을 기르는 데만 주력합니다. 자식은 커 가면 커 갈수록 부모와 상대적 입장에 서게 됩니다. 그렇지요? 그것이 정상적입니다. 자식이 커도 '아! 나는 어머니 아버지 품에서 젖 먹는 것이 제일이다'며 젖만 먹습니까? 일을 해야 합니다. 상하관계가 상대적 관계로 변천해 가는 거예요. (42-110)
부모가 귀한 것은 자식을 위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꿔치는 거예요. 나이 많은 부모는 전부 어린애가 되는 거예요. 옛날에는 부모가 자식의 선생이 되었지만 말이예요, 나이가 70, 80이 되게 되면 애기가 되는 거예요. 그때는 자식이 아버지를 대신하는 것입니다, 자식이. 자식은 부모가 자기를 키워 주었던 대신 그 부모를 사랑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것이 천지의 이치예요. (137-96)
가정에서 부모와 자식지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가 잘못할 때는 자식이 관리해야 되고, 자식이 잘못할 때는 부모가 관리해서 공동 목적을 완성해야 합니다. 이런 조건이 있다는 거예요. (118- 121)
어렸을 때에는 어머니 아버지가 아들딸을 지배하지만, 나이가 많아지면 아들딸이 어머니 아버지를 지배합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그렇습니다」 그게 왜 그래요? 천지 이치가 그렇다구요. (123-230)
5) 부자간의 심정의 인연 여러분은 부모에 의해서 태어났습니다. 그러기에 태어나서 말할 수 있는 대상이 누구겠습니까? 부모입니다, 부모. 그렇지 않아요? 내가 태어나서 가장 먼저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뭐냐? 아빠 엄마입니다. 그 이상 뭐가 있겠어요? 내가 부르는 아빠 엄마는 옛날 인간이 본연의 자리에서 부르던 아빠 엄마입니다. 재미있는 일입니다. 여러분, 아빠 엄마를 천번 만번 불러 보십시오. 아빠 엄마의 맛이 어떤가를 알아보십시오. 그 맛이 무궁무진할 것입니다. 아빠 엄마를 부르는데 그 아빠 엄마가 대답하지 않겠습니까? 부르면 대답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 하면 주체와 대상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대상이 있으면 완전한 주체가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이것이 원칙이라면 아빠 엄마를 부르면 반드시 대답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서로 좋아하게 되는 것입니다. 수없이 불러도 대답이 없는데 좋아하게 됩니까? 하나님을 찾아가는 데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린아이가 아빠 엄마와 지내는 것과 같은 입장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야 합니다. (29- 138)
여러분이 가정을 두고 볼 때, 집이 좋고 그 주위환경이 좋다고 해서 좋은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아무리 환경이 나쁘고 집이 초라하더라도 그것을 안식처로 삼고, 거기에 자기의 사연과 생애와 생활의 모든 기준을 인연맺고자 하는 가정이 좋은 가정인 것입니다. 거기에는 부모와 자식간에 서로 위해 주는 심정이 있습니다, 이것이 추억의 본향이요 모든 생활의 동기가 되기 때문에 우리 생활에서 행복을 좌우하는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그건 왜 그러냐? 부모와 자식간의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사랑의 인연과 부모와 자식간의 단 한번 밖에 없는 혈통적인 사랑의 인연이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부모와 형제의 사랑이 동기가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생활에 그리움의 대상으로 연결되는 겁니다. (29- 17)
부모와 자식간의 심정의 인연이라는 것은 역사가 변천해 나간다고, 혹은 시일이 지나고 연한이 길어진다고 해서 희미해지는 법이 없습니다. 역사가 오래 되면 오래 될수록, 시간이 지나가면 지나갈수록 희미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이 두터워지는 것입니다. 결집되는 것입니다.
만일에 부모와 자식이 떨어져 있을 때에, 아들이 있는 곳에서 부모에게 소식이 온다든가, 혹은 부모가 아들에게 소식을 전한다면, 그 소식은 지금까지의 모든 소원을 충족시킬 수 있는 자극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 소식이 제2의 출발의 요인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51-71)
6) 부자일신(父子一身)의 숙명적 관계 세상에 아무리 부모가 많다 하더라도 내 부모는 절대적으로 역사시대에 나하고 관계되어 있는 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세계 인류를 주고도 바꿀 수 없습니다. 바꿀 수 있어요? 그다음에 하나님을 주고 바꿀 수 있어요? 하나님 주고도 바꿀 수 없고, 하나님이 또 바꾸라고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74- 18)
부자의 관계라는 것은 뭘 두고 말하는 거예요? 이것은 핏줄이 연결된 것입니다, 핏줄이. 오늘날 기성교인들은 막연히 '하나님 아버지! '라고 합니다. 왜 아버지라고 하느냐 이거예요. 하나님 주인이라고 하지 않고 말이예요. 아버지라는 그 말 가운데는 사랑이 개재돼 있고 핏줄이 개재돼 있다는 것입니다, 핏줄이. 안 그래요? 직계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사랑으로 한몸이 돼야 됩니다. 핏줄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피는 생명을 구성 하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부모님의 전통을 이어받은 생명을 지니는 거예요. 무엇에 의해서? 사랑에 의해서. (142-267)
부자의 관계는 어떤 무엇으로도 깰 수 없습니다. 원자탄으로도 깰 수 없습니다. 절대로 깰 수 없고, 헤어질 수 없고, 버릴 수 없는 관계입니다. (21-69)
부부관계는 운명이라 생각하지만, 그러나 부자관계는 운명이 아니예요. 숙명이예요, 숙명. 이 말을 이해해야 되는데, 이건 뭐…. 운명이 뭣이고 숙명이 뭣이고 그저 어중떠중 설명하면 큰일이라구요. 운명은 변해요. 변경할 수 있습니다. 숙명은 변하지 않아요. 그 아버지의 아들딸로 태어났으면 무슨 요사스러운 것이 다 있고, 별의별 조화를 부려도 변할 수 없어요. 그건 그저 그런 거예요. 변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느 것이 더 종적이고 어느 것이 더 횡적이예요? 부자관계가 종적이고, 부부관계는 변할 수 있으니까 횡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부제일주의를 주장하는 패들은 횡적 패요, 부자제일주의를 주장하는 자들은 종적 패입니다. (169-59)
'하나님의 사랑은 출발과 동시에 현현되는 것이 아니고 남자 여자의 사랑과 같이 성숙한 그때에 사춘기에 들어가서 현현된다, 그것이 부부의 사랑이다' 할 때, 그 부부의 사랑이라는 것은 중간에서 시작하는 거라구요. 그럼 창조함과 동시에 출발할 수 있었던 사랑의 절대 가치적 기준의 상대형이 누구냐? 말을 빌어서 갖다 붙인다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부자관계입니다.
그럼 부자관계는 어떤 것이냐? 사랑을 중심삼고 무슨 관계겠느냐? 부자관계라는 것은 뭐냐? 부모의 사랑이 원인이라면 그 자식은 사랑의 열매다, 결실이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결실입니다. 그 결실과 원인이 동떨어진 자리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다 이거예요. 결실과 원인이 한 자리에서 출발을 본 것입니다. 부모님의 사랑이 원인인데 그 사랑 가운데 내가 결실로 나타났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 부모님이 현재 사랑하는 자리의 결과로 등장한 것이 '나'라는 거예요. 그러므로 사랑과 더불어 일체화한 원인과 결과의 자리를 대등하게 갖고 태어난 것이 부자의 관계에 있어서 자식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누구냐? 부모의 본연적인 사랑의 출발 근원에 동참한 자요, 부모의 사랑의 결실로 등장한 자인 것입니다. 이것은 원인과 결과가 한 곳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뗄래야 뗄 수 없습니다. 원인적인 부모의 사랑과 결과적인 내 생명의 사랑의 근원은 하나다 이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사랑을 중심삼고 부자 일신이라는 말이 가능하다 이겁니다.
사랑을 빼놓고는 일신이라는 말이, 일체라는 말이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랑이 원인입니다. 나는 복중에서부터 부모의 사랑을 받습니다. 내가 사랑의 본질로 말미암아 복중에 잉태된 그 시간에서부터 부모의 사랑과 모든 관심이 집중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 그러냐? 사랑의 결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으로 태어나, 사랑에서 생명의 인연을 이어받아 가지고, 사랑을 받으면서 커 가지고 상대를 맞을 수 있는 때가 되거들랑 상대를 취하는 거예요. (127- 13)
부자일신이라는 말이 있나요, 없나요? 없나요? 부자일신이란 말 없어요?「있습니다」 부자일신. 그다음에는? 뭐 여자부터 하면 좋아하니까 …. 부부니까 거꾸로 해도 부부(婦夫)고 바로 해도 부부(夫婦)구만. (웃음) 부부일신(夫婦一身) . 그다음엔 형제도 일신이예요, 형제도. 우리는 그걸 알아야 됩니다. 요즘에는 대개 부부일신밖에 모르지요? 타락한 세계에서는 그게 제일의 목적이기 때문에 요즘에는 부부일신밖에 모르는 거예요. 오늘날 부부일신이 되기 전에 부자일신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 말은 본격적으로 안 나왔다구요. 부부일신, 부자일신이예요. 그다음엔 뭐예요?「형제일신」 형제일신이예요. 그렇기 때문에 형제가 죽을 자리에 있으면 내가 죽어요. 그런 일이 있어요, 없어요? 있어요, 없어요?「있습니다」 자기의 팔을 잘라서 동생이 살 수 있으면 자르는 거예요.
우리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 그랬어요. 자기 아들이 말이예요, 눈병신입니다. 소경이예요. 그래 유명한 안과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선생님, 내가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뭐요?','내 눈이 둘이요. 내 눈이 참 좋은데 이 눈을 하나 빼려고 하는데 어떻습니까?','왜 빼요?','줄 사람이 있어서요', '누구에게 주려고 해요?','우리 아들 눈하고 내 눈하고 바꿔 주소' 그랬다는 겁니다. 그거 보면 틀림없이 아버지는 아들에게 더 좋은 것을 주려고 한다구요. 그게 부자일신이예요.
보라구요. 여러분들 찬 방에서 누워 자면 배가 아프지요? 배가 먼저 얼어 들어오지요?「예」 그러면, 이불로 어디를 먼저 덮어 주나요? 어디를 덮어 줘요?「배를 먼저 덮어 줍니다」 배를 먼저 덮어 준다는 말이예요. 또, 발끝이 얼어 오면 배에 덮은 포대기나 이불이라도 발끝에 덮어 주는 그게 일신이예요. 자기의 한 지체 가운데에 조그마한 결함된 기준이 있으면 내 한 부분을 희생시켜서 그것을 보호해 주고, 그것을 본래 상태로 세워 놓기 위해 행동하는 것이 일신입니다. (53- 30)
7) 부자관계의 특정한 내용 여기 서 있는 사람은 신비로운 경지에 들어가 가지고 우주의 근본이 무엇이냐고 알아본 때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대답이 '부자의 관계다. 아버지와 아들이다'였어요. 결론이 그거라구요. 일반 사람 같으면 '아! 우리 어머니 아버지하고 나하고…'라고 생각할 거라구요. 다시 말하면 자기를 낳아 준 아버지와 어머니로 생각하기 쉽다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부자의 관계가 가진 특정한 내용이 무엇이냐? 아버지와 아들이 만날 수 있는 최고의 장소가 어디냐? 사랑이 교차되는 그 중심, 생명이 교차되는 그 중심, 이상이 교차되는 그 중심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사랑과 생명과 이상이 한 자리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 가면 하나님도 사랑이요 나도 사랑이요, 하나님도 생명이요 나도 생명이요, 하나님도 이상이요 나도 이상이 된다 이거예요. 그것을 결정지을 수 있는 최초의 인연과 최초의 통일의 장소가 부자관계가 이루어지는 자리가 아니면 있을 수 없더라 이거예요. 이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69- 78)
여러분이 어머니 아버지한테서 태어날 때는 어머니 아버지가 먼저 사랑의 인연을 맺어서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서로서로 서약해야 되는 거예요. 그다음에는 생명이 일치돼야 돼요. 그리고 사상이 일치돼야 한다구요. 이상이 맞아야 된다구요. 사랑의 일치점, 생명의 일치점, 이상의 일치점이 어디서 이루어지느냐? 우주의 세계에 있어서 어떠한 피조물과 창조주가 있는데 창조주와 피조물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유대를 결정할 수 있는 장소가 어디냐? 그 장소가 최고의 이상적 기준이라면 그 이상적 기준은 어디가 될 것이냐? 이것을 보게 될 때 부자관계 외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걸 보면 동양사상이 놀랍다는 거예요. 놀랍다구요.
내가 제일 귀하게 여기는 것은 사랑이예요. 그다음엔 뭐냐 하면 생명이예요, 생명. 여러분도 그렇잖아요? 뭐가 제일 좋으냐 하면, 사랑이 제일 좋은 거라구요. 그다음에는 뭐냐 하면 생명입니다. 그다음에는 뭐냐 하면 이상입니다. (69- 186)
뜻의 목적은 이상을 찾는 것입니다. 이상은 무엇을 통하여서 이루어지느냐? 하루 세끼 밥을 먹고 배부른 것으로 이상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뜻이 지향하는 목적은 무엇이냐? 밥을 먹어서 배부른 것이 아닙니다. 또한 아무리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술이 목적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보다 더 문제되는 것이 무엇이냐?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일시적인 사랑이 아니요, 싸구려로 사 올 수 있는 몇푼어치의 사랑이 아닙니다. 본질적인 사랑입니다.
이 본질적인 사랑을 분석해 보면 사랑에는 혁명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참사랑에 해당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시조때부터 사람이 자식을 사랑한 마음이나 수천년 후의 후손인 우리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똑같은 것입니다. 또한 수천년 후에 우리의 후손들이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도 같을 것입니다. 사랑에는 발전도 없고 종식도 없는 것입니다. 혁명의 요건이 필요치 않은 순수한 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한 것이냐? 하나님이 어떤 존재를 절대적인 기준의 자리에 세워 놓고 그의 존재성을 인정하고 그를 사랑하신다면 그 사랑은 더 이상 혁명이 필요치 않은 사랑입니다. (1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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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주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참부모님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