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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과 영지주의
1. 사도신경과 영지주의
사도신경은 열두 개의 신앙고백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흔히 열두 사도가 하나씩 만들어 합한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하지만 현재의 사도신경 본문은 3, 4세기 로마에서 사용한 세례신조와 비슷하며, 6세기 말 또는 7세기 초에 남 프랑스에서 그 최종적인 형태가 확립되었고, 점차 세례신조를 대신하게 되었고, 교황 이노첸시오 3세(1198~1216 재위)가 서방 로마가톨릭 교회의 공식 신앙진술로 인정했다고 한다.
제임스 패커(J.I. Packer, 1926~2020)의 사도행전 강해(Affirming the Apostles’ Creed)에 의하면,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파될 때 세례를 받고 정식으로 기독교에 입교하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을 가르치는데 보통 3년의 시간이 필요했다고 한다. 그리고 수세자들은 부활절 전야에 신앙고백과 세례식을 갖고 부활절에 최초의 성만찬에 참여했다고 한다.
그런데 사도신경이 최초로 만들어지던 2세기 상황을 보면, 교회는 양도둑 같은 영지주의자들의 위협에 맞서고 있었다. 영지주의자들은 오늘날 이단들처럼 자신들만이 진리를 바르게 알고 있다고 주장했는데,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두 종류의 신들이 있었다. 그 중에 한 신은 어리석은 신으로서 모든 인간의 몸을 포함한 물질세계를 만들었으며 그로 인하여 세상에는 문제가 많이 발생했다. 다른 한 신은 현명한 신으로서 오로지 영적인 존재로서 인간의 몸에 들어와 있는 우리의 영혼을 지으신 분으로서, 그 신은 우리를 가르쳐 우리의 영혼이 육체를 벗어나 신의 세계에 들어가 복락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을 알게 한다.
영지주의자들이 보기에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괴상한 착오로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영적인 존재로서 지혜로우신 하나님이 우리의 스승으로 보내셨는데, 인간 예수가 세례를 받을 때 그의 몸에 들어가 재판을 받을 때 그 몸을 떠났다고 한다. 그러므로 인간 예수가 고난을 받았으며 결코 그리스도가 죽은 것이 아니라고 한다.
교회는 이런 영지주의를 대적하기 위해 마리아의 태 중에서 신성과 인성이 견고하게 하나로 연합하여 고난을 당하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 지금도 하나님 우편 보좌에서 다스리신다고 가르쳤다.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은 사탄과 죄, 그리고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
사도신경에 예수님의 잉태와 수난, 그리고 죽음과 부활이 낱낱이 기록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요한서신에서도 영지주의에 대한 다음과 같은 경고가 교회에 주어졌다: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런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요한이서 1:7
이로 보건대 신앙고백은 그 당시의 시대적 필요와 도전에 대한 응답을 포함한다. 그래야 고백자들과 수세자들(catechumen)에게 꼭 필요한 가르침이 될 것이다. 성경은 언제나 그렇게 기록되었다!
2. 창세기와 에누마 엘리쉬
창세기 1장은 천지창조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실 근동에는 이미 고대로부터 창조 이야기들이 있었다. 그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바빌로니아 창세서사시인 에누마 엘리쉬다. 거기에 나오는 신들은 인간들처럼 결혼하고 자손을 낳으며 계략을 세우고 반란을 일으킨다. 에누마 엘리쉬라는 바빌로니아의 창조 이야기를 읽고 나서 성경 창세기를 읽으면 성경의 창조 이야기가 얼마나 엄숙하고 장엄한지 분명히 알 수 있다.
특히 에누마 엘리쉬의 창조 이야기에서, 강력한 힘을 가진 신 마르둑은 티아마트의 몸을 둘로 쪼개어 하늘과 땅을 만들며, 하늘에는 신들의 모양을 새겨 넣었다. 여기에는 온갖 신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성경의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을 만드셨다고 기록한다. 그것들은 그저 빛나는 것들이다. 창세기에는 근동의 다른 신화들에서 볼 수 있는 신들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큰 광명체와 작은 광명체라고 함으로써 의도적으로 해와 달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다. 학자들은 이것을 의도적으로 다른 신들을 배제하기 위한 글쓰기 방식이라고 한다.
참고:
바빌로니아 창조 이야기를 간략하게 정리한 글:
https://blog.naver.com/apollonkim/221982542757
성경의 기록자들은 만신전(pantheon)의 세계에서 유일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창조 이야기를 장엄하게 기록함으로 그 백성들의 마음을 오로지 한 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한다. 유일하신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그 백성들을 위한 창조 이야기에는 이방 신들의 그림자나 악취는 결코 찾아볼 수 없다. 창세기는 다신교 사회에서 유일신을 섬기던 구도자들의 신앙고백이었기 때문이다.
3. WCC 선교선언문
교회는 언제나 시대의 도전과 요구에 대답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 최초의 노력은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예루살렘 총회였을 것이다. 물론 신구약 성경 전체를 자세히 관찰해 보면 그 시대의 도전에 어떻게 대답했는지 그 작은 차이들을 발견할 수 있다. 앞에서 말한 사도신경도 영지주의자들의 도전에 대한 교회의 대답을 담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사도신경을 고백하면서 마음에 비장함이 덜한 까닭은 오늘날에는 영지주의자들의 도전을 교회가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오늘에 맞는 신앙고백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한완상 전 통일부장관이 그런 분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기리고 본받고자 하는 내용의 신앙고백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늘 입으로 고백하는 것에 우리의 추구점과 목표를 담는 것은 중요하다고 나도 생각한다.
나는 대담하게도 오늘의 신앙고백을 만들어 보기도 했다:
https://cafe.daum.net/Wellspring/8SB1/204
미국연합장로교회는 1967년에 새로운 신앙고백서를 만들었다:
https://cafe.daum.net/Wellspring/8SB1/279
미국연합장로교회의 1967년 신앙고백서의 키워드는 ‘화목사역’이다. 그 고백서는 핵심 주제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9.06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화목의 역사와 그의 교회를 불러서 맡기신 화목의 사명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복음의 핵심이 된다. 우리 세대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화목들을 특별히 필요로 하는 입장에 있다. 따라서 1967 년 신앙고백은 이 주제를 토대로 하여 형성되었다.
2013년 부산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WCC) 총회는 새로운 시대에 변화된 지형 속에서 선교와 전도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그리고 부산총회에서 새로운 선교선언문을 발표했다. 그것은 오늘 우리가 마주하는 지구적 도전과 과제에 대한 교회의 대답이었다. 그 중에 핵심이 되는 구절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모든 생명의 창조자, 구속자, 양육자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oikoumene)을 당신의 형상 안에서 창조하셨고, 세상에서 계속 일하면서 생명을 유지시키신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의 생명이요,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성육신(요 3:16)으로 믿는다. 생명을 충만하게 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궁극적 관심이며 선교이다(요 10:10). 우리는 생명의 시여자(施與者)이신 성령 하나님을 믿는다. 그 분은 생명을 지탱(支撑)하시고, 생명에 힘을 주시며, 온 피조물을 새롭게 하신다(창 2:7, 요 3:8). 생명을 부정하는 것은 생명의 하나님을 거절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생명 살리기 선교로 초대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만물이 충만하게 생명을 누리는 비전을 증거하도록 권능을 주셨다. 오늘날 하나님 선교에 참여할 수 있게 해주는 하나님의 생명 살리기 선교를 어떻게 그리고 어디에서 분별할 수 있을까?
WCC부산총회의 주제는 ‘함께 생명을 향하여’(Together towards Life)였다.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사역은 미국연합장로교회의 신앙고백에서 하나님의 화목사역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의 문제가 갈등과 죽음이라는 것을 인식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갈등의 원인에는 인종이나 빈부의 차이 또는 종교 등을 들 수 있다. 화목하지 못하면 지구적 위기를 극복해 나갈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곧 파멸이자 죽음이다.
여기서 나는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을 생각해 본다. 그들은 독선에 빠져 하나님을 오해했다. 육체는 부정하며 오로지 영혼만이 거룩하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을 부인하는 자들이 되었다. 더구나 세상을 바라보는 그들의 관점은 매우 부정적이며 그들의 최고 관심사는 죽음 이후에 들어갈 영혼의 세계였다.
4. 선구자와 순교자
그러면 오늘 21세기 기독교회의 모습은 어떤가? 나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교회 중심으로 살아왔다. 그런데 기독교인으로서 나는 상당히 영지주의적인 신앙을 가지고 살아왔음을 깨달았다. 즉, 이 세상은 추하고 장차 불에 타 없어질 것이며 구원받은 사람들은 공중으로 들림받아 영원한 천국으로 들어간다고 배웠고 그것을 바라며 살아왔다. 심지어 우리는 이런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세상아 잘 있거라 나는 가노라! 7년 환난 오기 전에 나는 가노라.’ 이것은 ‘성도 행진곡’이라는 노래다.
이 세상을 포기하고 낙원에 들어가려는 소망을 기독교 신앙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영지주의자들의 신앙과 다를 바가 없다. 도리어 성경은 아름다운 세상과 그 세상을 치료하고 회복하려는 하나님의 끝없는 노력과 돌봄에 대하여 들려준다. 그것을 이해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화목사역’과 ‘생명 살리기’를 성경의 핵심 메시지라고 발견한 것 아닐까!
바빌로니아 창조 이야기에는 반역과 살인으로 가득하다. 영지주의자들의 이야기에는 세상과 인간에 대한 혐오가 가득하다. 그러나 창세기에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땅을 질서와 생명으로 충만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들려준다. 그리고 사도신경은 인간으로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하게 담고 있다. 그분은 다시 오실 것이며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고백하는 우리들과 더불어 새롭게 된 세상에서 함께 살 것이다.
오늘날 개신교회 신자들은 배타적이고 독선적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것은 다른 종교에는 구원이 없고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구원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바라는 구원은 영지주의자들의 생각처럼 천당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신앙고백은 하나님의 화목사역과 생명 살리는 사역에 동참하는 것임을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예수천당의 신앙이 유일하고 최고의 신앙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어쩌면 500년 전 중세시대에 만들어진 대답을 붙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것은 오늘의 문제에 대한 대답이 아닐 것이다.
서울기독신대 손원영 교수는 1500일이 넘도록 학교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학교의 이사장을 비롯한 몇몇 사람들이 손교수의 가르침이 학교의 정체성과 맞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그의 복직을 반대하기 때문이다. 법원이 손교수의 재임용을 적법하다고 판결했음에도 여전히 학교측은 손교수의 방을 굳게 잠그고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있다. 손교수는 불자들과 교류하면서 종교평화 운동을 펼치고 있다. 내가 보기에 손교수는 오늘의 기독교회가 대답해야 할 시대적 문제에 가장 좋은 대답을 찾아 행동하는 선구자다. 우리는 그런 선구자가 순교자가 되지 않도록 함께 손잡고 미래를 열어가야 한다.
우리 시대는 이미 29년 전 서울금란교회에서 변선환 교수를 이단으로 낙인찍고 죽이고 말았다. 순교자를 만들어 내는 사회는 예루살렘과 같은 운명을 맞을 것이다. 결국 무너지게 될 것이다. 예수님을 처형한 예루살렘이 한 세대가 지나기 전에 심판 받지 않았던가! 변선환 교수를 순교자로 처형한 우리 시대도 임박한 심판 앞에 서 있지 않은가 두려운 마음으로 생각해 본다. 더 늦기 전에 선구자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끝>.
참고.
변선환 교수를 기념하며 쓴 글
낙인:
https://cafe.daum.net/Wellspring/8SB1/319
우리 시대의 종교재판:
https://cafe.daum.net/Wellspring/8SB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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