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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귀의 한
1971.02.19 (금), 한국 서대문교회
[기 도]
아버님, 자비로우신 은사와 더불어 저희와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저희 개개인의 심령은 각각 다를지라도 아버지께서 바라보실 때에는 모두가 당신의 마음 가운데 있는 아들과 딸인 줄 알고 있사옵니다. 이제 당신이 바라시는 마음과 일치가 될 수 있고, 당신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아들이 되고 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앞에 저희의 모든 것을 스스로 솔직하게 내놓고 긍휼의 은사를 바라는 겸손한 자가 되게 하시옵소서. 스스로 낮고 천한 자신을 탄식하는 마음보다도 높고 귀하신 당신의 거룩하신 은사를 흠모하는 마음이 저희 개개인의 마음 동산에 부풀어 오르게 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을 위하고자 하는 소원의 마음이 그 누구보다 간절하게 저희 각자의 마음속에서 솟구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이 존재하고 계신 것을 실제로 느낄 수 있고, 중심이 되시는 아버지를 흠모할 수 있는 자리에 설 수 있는 은사를 베풀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세상의 그 누구도 바라보지 않는 부족한 저희들이오나, 당신의 높고 귀하신 은사로 말미암아 저희들을 택하여 주신 것을 고맙게 생각하옵니다. 이때까지 아버지께서 얼마나 수고로운 노정을 참고 참아 나오시면서 저희 들을 찾으셨다는 사실을 생각할 적마다, 저희는 부족한 자신을 탄식하는 것보다 수고하신 아버지 앞에 감격의 눈물을 지을 수 있는 자녀가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지난날의 과오를 뉘우치면서 현실적으로 저희들이 부족한 것을 깨닫고, 미래에는 저희 스스로 그런 것을 완전히 청산짓고 아버지 앞에 서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다짐하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서로서로 그리던 당신의 자녀들과 이렇게 만날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여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여기에 아버지의 사정이, 아버지의 심정이, 아버지의 소원이 저희들의 인연 가운데 온전히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이 진행하시는 목적 앞에 순응할 수 있는 겸손한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일체를 당신께 봉헌하고, 당신의 명령과 더불어 화합할수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여 아버지께 일체를 귀결시킬 수 있는 거룩한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이 자리를 친히 지켜 주시옵소서. 오늘은 이번 순회노정의 마지막 날이오니, 아버지, 여기에서 친히 결실을 맺으시옵고 당신의 축복의 손길을 두터이 내려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더우기 사랑하는 아들이 싸워 나가는 길 앞에 당신의 무한한 사랑으로 같이하시어서 통일의 이념이 그 생활과 그 계획 가운데 나타나게 하시옵소서. 이 서대문 지구를 통해서 아버지께서 바라시는 소원의 일부를 감당할 수 있는 당신의 교회, 당신의 아들들이 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허락하신 이 시간을 아버지 뜻 가운데서 지낼 수 있게끔 보호 육성하여 주시옵길 재삼 바라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오늘은 '복귀의 한'이란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복귀라는 말의 뜻은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타락하기 전의 본연의 상태로 다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아담 해와가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지음받아 축복의 은사권내에 잠겨 있던 자리는 그야말로 거룩한 자리요, 온 만물이 찬양할 수 있는 승리의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인류의 조상인 아담 해와는 생애를 바쳐 하나님으로부터 상속을 받고, 또 생활노정을 통하여 그것을 지니고 살아야 했는데도 불구하고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그 모든 축복을 상실했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아담 해와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심정
인간 조상 아담 해와는 타락하기 전에는 하나님과 같이 있을 수 있었지만, 타락한 후부터는 하나님과 같이 있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타락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대표하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만물들 가운데에서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딸인 그들과 관계를 맺지 않은 것이 없었지만, 타락한 후에는 이 모든 피조만물들이 그들과 상관할래야 상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함으로 인하여 이렇게 비참한 자리에 떨어졌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얼마만큼 비참한 자리에 떨어졌느냐 하면, 만유의 존재 전체를 허락받을 수 없는 자리에 떨어졌습니다. 모든 상대적 세계를 허락받을 수 없음과 동시에 자기 자신도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래야 맺을 수 없는 입장에 떨어졌습니다. 이렇게 된 것이 타락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아들딸이라는 입장을 잃어버린 것은 물론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입장에 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주관해야 할 모든 피조 만물을 잃어버렸고, 자기 자체의 생명의 근원이 되는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렸고, 하나님을 중심삼은 모든 인연까지 상실해 버린 것이 타락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타락한 것으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타락했지만 타락한 그대로 버려질 수 없는 운명을 지니고 나온 것이 오늘날 우리 인생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모가 사랑하는 자식이 큰 죄를 지어서 자식과의 인연을 끊는다고 선포할 수 있는 자리에 떨어졌다 하더라도, 그 부모는 자식에 대한 첫 정이나 첫 인연을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 부모의 심정도 이와 같은데. 세상 부모보다 높은 사랑의 마음을 가지신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시조인 아담 해와가 타락했다 하더라도, 타락한 아담 해와를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내심적인 동정의 마음을 아니 가질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아담 해와에게 허락하신 영광의 가치 기준이 지극히 높으면 높을수록 거기에 비례하여 상반되는 서글픔과 비참함이 남아지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올래야 돌아올 수 없는, 영영 저끄러진 아담 해와를 다시 만날 수 있는 하나의 길을 모색할 수만 있다면, 부모 되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 하나의 길을 모색해서 용서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고 싶은 마음을 안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모의 입장에 계신 하나님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영영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입장에 떨어진 아담 해와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타락하기 이전에 사랑하고 싶을 때에 마음대로 사랑하고, 대하고 싶을 때에 마음대로 대하던, 자유스럽고 행복한 기준을 중심삼고 느낀 감정을 버릴래야 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담 해와가 타락하기 전에 먼저 아담 해와를 대해서 느낀 행복의 기준이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대해서 가질 수 있었던 행복의 마음을 잊을래야 잊을 수 없었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한 날, 한스러운 타락의 결과로 말미암아 빚어진 아담 해와를 바라볼 때, 이 타락의 결과를 취소시켜 버리고 전부 다 망각해 버릴 수 있는 입장에 섰으면 좋겠지만, 사랑의 귀결이라는 것은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오늘날 이 땅 위의 타락한 인간끼리도 서로 인연을 맺고 나오다가 멀리 떨어지게 되면 떨어지게 될수록, 혹은 이와 비슷한 환경이나 어떤 조건이 성립되면 될수록 서로서로가 그리워하고 생각을 아니 할래야 아니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타락한 우리 인간의 심정을 헤아려 볼 때도 그러하거늘, 사랑의 심정을 가지신 본연의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해와를 대해 끊어버릴래야 끊어버릴 수 없는 입장에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정이요, 하나님의 심정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무리 그런 심정을 가지고 아담 해와를 생각한다 하더라도 그들이 하나님의 생각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대상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슬픔을 돌려드리는 입장에 서서 하나님이 가시려는 길을 막는 여건으로 남아지게 되었을 때, 여기에 내심적으로 부딪쳐 오는 하나님의 심정적 한이 얼마나 컸겠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인간의 타락을 책임지려고 하시는 하나님
아담 해와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불쌍하고 비참한 자리에 떨어졌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리에 떨어진 아들딸을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의 아들딸인 아담 해와는 그런 자리에 떨어져서는 안될 것이었습니다.
아담 해와는 무한한 영광 가운데 인류의 참된 선의 조상으로서 만민으로부터 추앙을 받고, 만민의 사랑의 중심이 되어 만우주와 더불어 화동 하고 만우주의 생명의 근원이 되는 절대적인 입장에 서야 했습니다. 그것이 완성된 인간의 가치였습니다.
완성의 가치를 지니지 못하고 타락하여 비참한 상태에 떨어진 인간을 바라보시는 하나님께서 높고 낮은 그 차이의 한계점을, 높은 자리에서부터 낮은 자리까지의 심정적인 모든 느낌을 취소해 버린다면 모르겠지만, 심정의 세계에서는 그것을 취소할래야 취소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입장에서 아담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내적 고충이 얼마나 컸겠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입장에 떨어지게 된 동기가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인 아담 해와가 책임을 못함으로 말미암아 그런 결과가 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그 책임을 맡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영영 돌아올래야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이미 떨어진 인간, 파괴된 인간은 자기 스스로 파괴되지 아니한 어떤 환경이나 어떤 기준까지 올라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모든 것을 맡겨서 처리될 수 없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또한 그 책임을 인간에게 맡긴다면 인간은 영영 파괴된 자체로 끝을 맺게 된다는 것을 확실히 아셨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타락한 것에 대해 당신이 창조한 연고로, 당신이 책임을 다하지 못한 연고로 그런 결과가 되었다는 마음을 일으켜 가지고 그 타락의 책임을 인간에게 맡길 것이 아니라 당신이 책임져야 되겠다는 마음을 가지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저끄러진 그 모든 상처를 수습하여 용서의 마음을 가지고 타락의 책임을 하나님 스스로 진다고 결심할 때까지의 과정에 얽힌 하나님의 심정적 사연은 우리 인간으로서는 헤아리기 어려운 것입니다.
세상에서 볼 때, 지극히 사랑하는 아들딸, 특히 외동아들이나 외동딸이 있다면 그를 위해 그 부모는 있는 정성을 다할 것입니다. 어느 부모가 철없이 자녀를 낳아서 철없는 입장에서 그 자녀를 키웠다면 모르지만, 세상에서 느낄 것을 다 느껴 보고, 인간으로서 체험해 볼 것은 다 체험하며 소원하고 소원하던 중에 나이가 들어 귀한 아들딸을 얻었다면, 애지중지하며 정성을 다하여 키울 것입니다. 그렇게 정성을 들여 키웠는데 만약 그 아들딸이 타락의 길로 가서 부모를 저버리고 부모를 배반한 자리에 섰다면, 그 부모의 고충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부모로서는 그것을 옹호할 수 있는 아무런 내용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에서 열까지 책망할 것밖에 없고, 또 부모로서 그 자녀를 추방할수밖에 없더라도 부모는 그 자녀가 어떠한 조건을 세워서 소생할 수 있는 길,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소망의 한 점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타락한 이 세상의 부모도 관계를 맺을래야 맺을 수 없는 자식을 세워 놓고 상심하며 그런 마음을 가지거늘, 그렇지 않은 본연의 하나님께서는 어떠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도 그러한 마음을 가지지 않을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타락한 아담으로서는 다시 희생할 길이라는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을 희생시키는 책임을 지시고, 인간이 희생할 수 있는 하나의 어떠한 조건을 제시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인간을 대하기 시작하셨을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 자체로서는 희생할 도리가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에게 어떤 조건을 세우게 해서라도 희생시키려 하셨던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비참함이 절정에 달했을지라도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하고,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 도리를 다했다는 상대적인 조건을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조건을 요구하지 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입장이 얼마나 고통스러웠겠느냐 하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래야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타락한 사랑을 중심삼고 태어났기 때문에 모든 생명과 소원의 동기가 이상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시작한 것이 아니라, 이상적인 하나님의 사랑이라든가 하나님의 생명을 반대하고 방해하며 배척하는 입장에서 출발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랑으로 맺은 생명의 인연이 되었기 때문에, 인간 자체가 갖고 있고 느끼고 소망하는 것은 절대적이고 참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소원과 하나님의 생명력과는 상치된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소원권 내로, 하나님의 생명권내로, 하나님의 사랑권내로 돌이키느냐 하는 것이 지극히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서려면
인간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려면 서로서로가 화합할 수 있는 바탕이 있어 가지고 하나가 움직일 때 둘이 움직일 수 있는 내적인 동기라도 지니고 있었더라면, 여기에는 모든 것이 가능할 수 있는 접촉점이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이 상치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플러스로 나타나면 인간은 마이너스로 나타나서 대응관계 혹은 상대적 관계로 화합할 수 있는 기반을 넓혀 나갈 수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선한 플러스 앞에 악한 플러스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플러스와 플러스는 하나 못 됩니다. 동질적인 플러스와 플러스도 반발 하는데 동질적인 플러스가 아니라 반대적인 플러스 형태로 나타났으니 그 반발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러한 입장에 떨어진 인간을 끌어들여서 다시 이 플러스 앞에 접속시킬 수 있는 요소나 그런 조건을 제시해야 하는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그리고 인간은 그것을 제시하기 위해서 얼마나 비참한 길을 가야 하고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되겠습니까?
이것은 정상적인 것이 아니라 비정상적인 것입니다. 비정상적인 결의를 하고 나서지 않고는 새로운 무엇도 결정지을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때, 인간 자체가 비정상적인 입장에서 하나님과 상응될 수 있고 화합할수 있는 행동을 할 수 있을 것이냐?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조건이라도 세우게 하기 위해서 배후에서 조정하시면서 열이면 아홉의 조건이라도 세울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가르쳐 주어야 된다는 문제를 두고 볼 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직접 나타나시어서 가르쳐 줄수 있느냐? 그렇게 가르쳐 줄 수 없습니다. 그렇게 가르쳐 줄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가르쳐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에게는 가르쳐 줄 수 있고 상관할 수 있는 다른 어떤 존재가 없습니다. 천사와 단 둘밖에 없던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제 3의 어떤 인간이 있다면 모르지만 인간을 대해서 가르쳐 줄 수 있는 존재가 없다는 것입니다.
타락하여 갈 길을 모르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좋은 자리에서 자기가 바라는 환경이 그냥 그대로 순리적으로 벌어지고 모든 것이 원하는 대로 되었다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끝나서 그것으로서 흘러가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람들을 다시 회생시키려니 하나님께서 그들이 가는 길을 막는 것입니다. 공포를 느끼게 '이놈' 하기도 하고, 위에서 누르면서 눈빛이 돌아가게 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길은 고해입니다. 얼마나 고해냐 하면 죽지 못해서 사는 것입니다. 방법을 정해 놓고 가만히 있으면 돌아갈 수가 없기 때문에, 가는 길을 막고 공통적인 길을 마련하여 그 길을 따라가게 하면 자기도 모르게 그 경지에 들어가서 포위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런 작전은 성공할 수 있는 작전입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그러므로 인간은 고생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30세까지의 젊었을 때는 바빠야 하고 고생해야 합니다. 그런데 편안한 자리에서 안식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들은 가만두면 내려가니까 그냥 두면 안 됩니다. 뒤로 돌아갈래야 갈 수 없고 옆으로 갈래야 갈 수 없는 조그만 길을 내놓고 내몰아야 합니다. 밀가루를 반죽하여 한쪽이 뚫린 통에다 넣고 들이밀면 그곳으로 삐져 나오는 것처럼 들이모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 이외의 방법이 있겠어요?
그러면 누구부터 내몰아야 되겠어요? 남자부터 나가야 되겠나, 여자부터 나가야 되겠나?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들이내몰아야 되기 때문에 인류 역사노정에는 강제가 가해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자식이 하자는 대로 가만두면 그 자식이 어떻게 될까요? 열이면 열, 전부 다 흘러가 버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식은 여행을 시켜야 되고, 사랑하는 자식에게는 가장 초라한 초가집을 주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렇게 해라' 하는 강제법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식이 좋다는 데로 그냥 갔다가는 큰일납니다. 자식이 좋다는 데로 그냥 갔다가는 전부 다 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싫다는 데로 내몰아야 합니다. 누가 싫다는 데로 내 모느냐? 악마가 내모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악마권내에 인연되어 있기 때문에 그냥 꺼떡꺼떡하다가 끌려가면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선한 신도들을 그런 데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 반대로 내모는 것입니다. 먹겠다면 못 먹게 하고, 가겠다면 못 가게 하고, 보겠다면 못 보게 하고, 왼쪽으로 가려 하면 오른쪽으로 가게 하고, 전부 다 반대로 역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참된 길일수록 고난이 많아
여러분이 '그 집안은 괜찮은 가문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기준이 되어 있다고 해도 그 집안의 자식들은 무엇이든지 조심해야 합니다. 즉, 훌륭한 가문에서 자라난 아들들은 무엇이든 조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한 발자국을 옮기더라도 조심해야 하고,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조심해야 하고,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조심해야 합니다. 예법이 복잡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요즈음엔 자유가 지나치다 보니 방종적인 자유가 되어 이젠 포화상태에까지 이르러 아주 심각하게 되었습니다. 요즈음의 젊은 사람들이 그런 예법을 좋아합니까? 그러니 그냥 그대로 두었다가는 다 망하는 거예요. 갈 곳이 없다는 말입니다.
위엄이 있는 집안에서는 자식을 교육할 수 있는 자료가 많이 있습니다. 어른을 대할 때, 형제를 대할 때, 부모를 대할 때 어떻게 하라고 자라는 아이들을 모아 놓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학생들, 학교에 가는 것이 좋아요?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을 좋아해요? 사실상 공부하기 좋을 게 뭐 있어요? 생각해 보세요. 아침 일찍 학교에 가 가지고 다섯 시간, 여섯 시간 동안 버티고 앉아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면 뭘 합니까? 당장에 무슨 수가 나는 것 같지도 않은데…. 공부한다고 하지만 그것이 배가 고플때 먹는 밥처럼 맛이 나요? 이건 답답하다는 겁니다. 이런 입장에서 보게 될 때 공부하는 것을 전부 다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겠으니까 할수없이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 세상에서는 우리 자체가 마음대로 살고자 하고, 마음대로 행하고자 하면 반드시 브레이크가 걸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그냥 그대로 두면 망하기 때문입니다. 참된 길일수록 거기에 비례하여 브레이크가 백 퍼센트 걸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통일교회 교인이니까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지요?「예」이 얘기는 하나님이 계신지에 대해서부터 얘기해야 하는데, 여러분이 안다니까 그 얘기는 하지 않겠어요.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하고자 하는 일을 백 퍼센트 막는 역사를 벌이시는데, 그러지 않고는 타락된 인간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상충된 입장에 선 타락 인간을 구원하는 방법은 인간 자체가 모색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모색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모색하시느냐? 인간 자체를 그냥 두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로 가지 못하게 끌어다가 성중에다 가두어 놓고 가르쳐야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납치하는 식입니다.
악한 사람이 선한 사람을 납치해다가 악한 사람을 만들면 그것은 악입니다. 그렇지만 선한 사람이 악한 사람을 납치해다가 들이패거나 온갖 치욕을 주더라도 선한 사람으로 만들면 이게 선입니까, 악입니까? 악한 사람을 납치해서 말을 듣지 않으면 몽둥이로 들이패고, 다리를 꺾고, 코를 꿰어 끌고 다녀서라도 올바른 사람을 만들어 가지고 그 사람이 '아! 나는 선한 사람이다'라고 할 수 있게 됐다면 그렇게 한 사람은 선한 사람입니다. 납치해다가 코를 꿰고, 고생을 시키고, 몽둥이 찜질을 하고, 주먹으로 때려서 그 사람을 나쁘게 하고, 그 사람을 망하게 했다면 그것은 악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했더라도 훌륭하게 만들었다면 그 사람에게 감사하겠어요, 분하다고 하겠어요? 어떻게 대답하겠어요? 분해요, 감사해요?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악한 인간을 선한 길로 이끄시는 방법
여기 아가씨들이 아무리 열심히 공부를 한다고 하더라도 대통령부인이 될 가망성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을 납치해다가 매달아 치고 밟고 그저 죽도록 고생시키고 훈련시켜 가지고 대통령 부인이 되게 했다면 감사 하겠어요, 분하겠어요? 그렇게 되면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납치한 것이 선이요, 악이요? 기합을 주고 고생시킨 것이 선이요, 악이요? 납치하고 기합을 주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그게 왜 선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선한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몽둥이로 들이패더라도 그것은 선한 입장에서 하시는 것입니다. 죽을 고비에 잡아매더라도 선한 입장에서 하지 않으면 가짜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무리 무자비하고 옥살박살이 되도록 채찍을 내리친다 하더라도 그것은 선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전멸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쳐서 복을 주기 위한 것일 때는 악이예요, 선이예요?「선입니다」 그것은 선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깡패 녀석들이 선한 사람들을 납치해다가 악하게 만드는 것이 선이예요, 악이예요? 그것은 악입니다. 이때는 잡아가는 것도 악이요, 채찍으로 때리는 것도 악이요, 그 결과도 악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그냥 그대로 놓아두지 않고 갈곳을 못 가게 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한 곳으로 들이몰아 가지고 악한 패들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끌어 가겠다는 방법이 좋은 방법이요, 나쁜 방법이요? 그런 방법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을 한 곳으로 들이몰기 위해 어떤 작전을 쓰시느냐? 악한 녀석들한테 스스로 몰리게 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악한 녀석들한테 몰리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코를 꿰어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몰리게 되면 악한 녀석들을 따라가고 싶겠어요, 떨어지고 싶겠어요? 남들은 다 가는데 거지 모양이 되어서 '아이구' 하고 있겠지요?
땅을 봐도 소용이 없고, 하늘을 봐도 소용이 없고, 건너다 봐도 소용이 없고, 내려다 봐도 소용이 없고, 모든 사람들이 다 싫어하는 자리에 몰리게 되면 악한 사람 대부분이 떼로 몰려가게 됩니다. 그렇게 해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납치한다면 말이 안 되지만 브레이크를 걸어 악한 사람과 절교할 수 있는 입장에 세우게 되면 그 모든 악한 무리들이 그 사람을 몰아내게 되고 미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같이 합할 수 있겠어요? 없습니다. 그래서 고독단신이 되는 것입니다. '역사상에 믿을래야 믿을 사람이 없고, 믿을 나라가 없고, 믿을 세계가 없구나. 나는 죽을래야 죽을 수 없고, 갈래야 갈 수 없고, 살래야 살수 없으니 어떻게 해야 되는가? ' 이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일 인간이 아닌 다른 무엇이 나를 데려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는 데서부터 신앙심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그 무엇을 추구할 수 있는 큰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한 인간에게 그런 바탕을 빚어내기 위해서, 타락한 인간을 생명의 동산에 이끌기 위해 하나님께 서는 수고하시면서 이러한 길을 재촉하여 오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을 알게 될 때, 고독한 자리에 선 것은 불행이 아닙니다. 고독한 자리에 서서 스스로 자기의 과거를 반성하고 인간의 근본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면서 태양이나 이 우주를 보게 되면 그냥 그대로 생겨나지 않았다는 것을 틀림없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절대자인 신이 있다면 그 신과 더불어 인연 맺을 수 있는 방법이나 그 길을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을 위한 소망이 다 끊어지고, 인간이 가야 할 행로에서 낙오자가 된 그 사람은 솟아오르는 태양을 봐도 소망으로 맞는 것이 아니라 지는 저녁놀을 바라보는 것처럼 절망으로서 그날을 보내는 것입니다. 밤을 지새우며 죽느냐 사느냐 하는 귀로에서 신음하면서 '신이여 존재하거든 내 갈 길을 가르쳐 주소서'라고 하는 사람 등 별의별 사람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이런 공상을 하다 보니 세상에서 낙오자가 되어 자동적으로 세상 사람들과 떨어지겠어요, 안 떨어지겠어요? 자동적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납치하니 자동적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인들은 인간생활노정에 있어서 낙오자가 되는 것입니다. 종교인들은 전부 다 낙오자지요? 그래요, 안 그래요? 그것은 왜 그러냐?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방법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통일교회 문선생도 낙오자라는 말이냐? 나는 낙오자가 아닙니다. 기분 나쁘다구요. 난 통일교회 문선생이예요.
하여튼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역사하십니다. 그러지 않고는 길이 없습니다. 길이 없어요. 타락한 인간에게는 그것을 끊을 수 있는 자기 자체의 능력이 없습니다. 가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망하는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갈래야 갈 수 없게끔 다 끊어 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절망 가운데서 나는 죽는다고 할 수 있는 생사지경, 즉 죽느냐 사느냐 하는 고빗길에 있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작전을 개시하는 때
여러분, 이 세상을 보면 춘하추동이 있지요?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에게도 춘하추동과 같은 것이 있고, 마음의 세계에도 그런 것이 있습니다. 인간을 보게 되면 봄철과 같은 소년시대, 여름철과 같은 장년시대. 가을철과 같은 노년시대, 겨울철과 같은 죽음의 시대가 있습니다. 하루를 보게 되면 아침은 봄에 해당하는 것이요, 낮은 여름에 해당하는 것이요, 저녁은 가을에 해당하는 것이요, 밤은 겨울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천지가 다 이렇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봄이 되면 꽃이 핍니다. 여러분의 소년시기와 같은 봄이 찾아오게 되면 모든 식물은 전부 다 푸르러 가지고 다시 새로운 꽃이 피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도 수난의 길을 거쳐 가게 되면 주기적으로 본향이 그리워지게 됩니다. 무엇인지 모르게 본향에 계신 아버지를 간절히 생각하는 마음의 작용이 자동적으로 솟구쳐 오를 때가 있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그럴 때는 인간의 마음의 문이 딱 열린다는 것입니다. 365일이 일년동안 돌아가지만 그 마음의 문이 일년 내내 하나님과 더불어 맞아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3년, 7년이 지나다 보면 어느 한때에는 딱 맞을 때가 있습니다. 알겠어요? 마음의 문이 하나님과 맞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마음의 문이 하나님의 문과 딱 들어맞을 때에 봄철과 같이 화답할 수 있는 때가 되는 것입니다.
이때가 되면 비로소 화답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귀의하고 자기의 새로운 살 길을 모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들한테 천대받는 환경을 돌파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는 마음이 사무쳐 가지고 '신이여, 저를 도우소서. 제 갈 길을 가르쳐 주소서'라고 하며 어려움에 부딪쳐 신음하게될 때, 이것이 심문(心門) 천문(天門)이 딱 맞는 것이 되면 하나님께서는 '오냐' 하며 그때에 비로소 작전을 개시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그때에야 작전을 개시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때는 변번이 있는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때에 이 세상 사람에게 작전을 개시해서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거기에서 뒤넘이쳐 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만이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같이 간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하나님께서 새로이 시작을 하기 위해 들이치는 것입니다.
자동차 타이어라든가 자전거 타이어에 펌프로 공기를 압축해 넣을 때 무시고무의 끝이 딱 붙어 있으면 바람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걸 빼어서 공기를 밀어 넣으면 붙었던 것이 탁 터지면서 공기가 들어갑니다. 그와 같은 작용이 인간과 하나님사이에도 있기를 바라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최후 절정의 고비 끝에 막혔던 것이 터져 나갈 기막히는 때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때는 짧은 순간입니다.
그 무시고무와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이 도주로서 선한 사람이고 역사적으로 심정이 좋은 선한 선조의 후손으로 태어났으면 메시아의 자리까지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게 되면 당장에 힘이 온다는 것입니다.
이래 가지고 내 몸에서 뒤넘이치는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싸움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놈의 악당하고 말이야. 지금 서로가 잘났다고 싸움을 하고 있잖아요? 그렇지요? 서로가 주인이 되겠다고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몸뚱이에 악착같이 들러붙어 있는 나를 포기해 버리고, 승리적 기반을 닦아 해방의 기쁨을 맞게 된다면 그 사람은 공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이러한 사람이 예언자가 되고 선지자가 되는 것입니다. 선지자가 그때 나오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하나되려는 노력과 정성
그러면 그러한 기간이 자동적으로 돌아가는데 그때를 맞추기가 쉬워요? 한번 맞추고 두 번 맞추게 되면 방향을 알 수 있습니다. 해가 높이 떠오른 다음에는 사방이 전부 훤하기 때문에 해가 여기에서 올라왔는지 저기에서 올라왔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새벽에 해가 떠오를 시간이 되면 해가 뜨는 곳이 점점 환해지기 때문에 어떤 곳으로 올라오는지 알 수 있는 겁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마음이 몇번 하늘과 접하고 열리기 시작하면 방향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마음의 문은 하나님께서 돌아가는 데로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문을 열고 준비하고 있다가 하늘이 지나갈 때 열어야 합니다. 하늘이 지나가는 시간은 짧기 때문에 문을 열어야 할 시간에 그냥 그대로 가만히 있으면 슬쩍 지나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 순간을 잘 포착 하여 그 동기의 인연, 생명의 인연, 감정의 인연, 체휼의 인연, 감각의 인연을 붙들고 따라가야 합니다. 따라가게 되면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문을 열어야 됩니다. 그러한 체험을 하고 그러한 경지에 찾아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감정과 그런 체휼의 경지를 찾아 들어가서 하나님과 더불어 하나되기 위해서 노력하고 정성들이는 것이 기도 입니다. 이것은 다이얼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여러분, 라디오는 전파가 있지요? KBS라디오의 주파수는 710킬로헬츠인가 그렇지요? 그 전파를 잡기 위해 다이얼을 맞추는 것과 같이 마음 문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 주파수를 찾기 위해서 라디오 다이얼을 돌리게 되면 웅웅하며 전파가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종교생활을 하다 보면 이제 진짜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았다고 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전파가 오는 걸 보게 되면 먼저 웅웅웅 잡음이 들려옵니다. 그렇게 잡음이 들리다가 다이얼이 기준점에 맞게 되면 생생한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은혜를 받자는 것입니다. 채널이 딱 들어 맞게 되면 방송국에서 보내는 소리가 조금도 소모없이 그냥 그대로 생생하게 들려오게 됩니다.
그 맛을 보고 그 맛을 안 사람이 있다면 하루만 따라가겠어요? 일년만 따라가겠어요? 늙어 죽도록 따라가고 싶어할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의 맛을 본 사람은 목이 잘리더라도 가고, 가지 말라 해도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인생의 낙오자가 불쌍하지 않습니다. 인간지말이 됐다고 해서…. 끝이 있으면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 망하지 않으면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망할 자리에 들어가더라도 '나는 망했다'라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 이 타락한 세상, 부모도 못 믿겠고, 처자도 못 믿겠고, 친구도 못믿겠고, 스승도 못 믿겠고, 그 누구도 못 믿겠다! 내가 부모 이상 믿을수 있고, 형제 이상 믿을 수 있는 분이 어디에 있느냐….이런 문제를 중심삼고 나가야 합니다. 나갈 녀석은 다 나가라 이거야. 나가게 도와주는 거야. 이래서 낙오자가 되어 가는 길에 신이 있거든 신과 인연 맺고 관계를 맺기 위해 몸부림쳐야 되는 것입니다. 딴 면의 소원을 품고 거기에서 절망하지 않고 새로운 소망을 갖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는 망하지 않는 새로운 출발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래야 합니다.
종교인들이 지배하는 시대가 온다
그래서 타락한 인간이 참된 길을 가기 위해서는 타락 세계와는 백 퍼센트 반대의 길로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되겠어요, 안 그래야 되겠어요? 세계적으로 잘사는 사람이 행복하냐, 못사는 사람이 행복하냐 할 때, 사탄세계에서는 못사는 사람보다 잘사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지요? 그러니 세계적으로 잘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브레이크를 걸겠어요, 안 걸겠어요?
오늘날 선진국가인 미국이 앞으로 계속해서 세계를 지배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때가 바꿔지게 되면 높았던 사람들이 낮아지게 됩니다. 공산당 이론을 보게 되면 노동자 농민이 출세할 때가 온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지식층의 사람들, 즉 머리가 좋은 사람들이 권세를 잡고 출세를 했습니다. 이제는 어깨가 크고 힘이 센 사람들이 출세할 때가 왔습니다. 그렇지요? 지금은 힘이 있어야 됩니다. 지금 때가 군벌시대입니다. 힘 앞에는 누구나 굴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힘으로 굴복시키면 그것으로 끝날 줄 알지만 그게 아닙니다.
그 다음에는 무엇이냐 하면 손과 발입니다. 바로 노동자 농민이 지배하게 되는 시대가 오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세상이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머리가 좋은 사람들이 지배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힘, 즉 주먹을 쓰는 사람들이 지배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손발이 지배하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노동자 농민들이 출세하려고 야단입니다.
머리 좋은 사람들이 세계를 한 번 지배했고, 다음에는 힘이 있는 사람 들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고, 이제는 노동자 농민들까지 세계를 지배하려고 하고 있는데, 뭐 하나 내세울 것 없는 지지리 못난 사람들이 바로 종교인들입니다.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출세해 가지고 세계를 지배해 본 때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무시하지 말라는 거예요. 인간 세계의 낙오자로서 폐물과 같이 천대를 받았지만 그들은 누구의 도구가 되기 쉬웠느냐?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브레이크를 걸 수 있고 소망할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제 그들이 자리를 잡고 어깨를 펴고 숨을 크게 내쉬면서 세계를 향하여 호령하는 날에는 머리 좋은 사람들도, 힘이 좋은 사람들도, 노동자 농민을 동원해 가지고 세계를 지배하려는 공산주의도 다 망하는 것입니다.
지금 종교권내에는 20억 이상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제 종교인이 출세할 때가 왔습니다. 공산주의는 노동자 농민을 동원해 가지고 세계를 지배하려고 하고 있지요? 앞으로는 이 세계 인류 가운데 양심적인 사람들을 동원하라는 표어를 내걸고 종교의 대행군이 이 세계에서 벌어지게 될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날에는 머리가 좋은 사람도 간곳이 없고, 힘이 좋은 사람도 간곳없고, 노동자 농민을 동원해 가지고 세계를 지배하려던 공산주의도 간곳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출세하느냐? 하나님이 출세합니다. 누구와 더불어? 인간 가운데 가장 낙오자와 같은 입장에 있는 종교인들과 더불어. 알겠지요? 보면 그렇게 되는 거라구요 세상이. 이제 최후의 출세권이 누구에게 남았느냐? 노동자 농민의 시대도 지나갑니다. 지금은 소련과 중공이 서로 싸우게 되어 있습니다. 종교도 서로 싸우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때가 오기 때문에 통일교회는 '세계의 모든 종교는 하나될지어다'라는 깃발을 들고 나온 것입니다.
그것은 잘했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종교를 통일할지 못할지 모르지만 종교를 통일하겠다는 주장을 하고 깃발을 내꽂은 것만 해도 한국이 자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국이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이것밖에 없습니다.
이 깃발을 통일교회 문선생이 내걸었으니 별수없이 통일교회 문선생을 칭찬해야 되는 것입니다.
고생할 각오를 하라
통일교회 패들은 통일교회 문선생을 따라가려고 해도 걱정이 태산 같다고 합니다. 소위 대학생들은 뭐가 어떻고 어떻고 하는데 큰소리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도 대학생 시절을 다 지내 봤습니다. 별것 아니라구요. 괜히 으시대고 바람 피우고 야단하는데 그 속을 보면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보면 건데기도 없습니다. 그저 썩은 해골통 같다는 겁니다. 섭섭하게 생각해도 할 수 없습니다. 항의할 사람은 항의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그런 것을 다 들춰 보고 지금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세계의 정치가, 미국의 대통령이 '나는 통일교인이다' 라는 깃발을 꽂게 되고, 통일교회가 미국의 종교를 통일하는 날에는 통일교회 승락 없이는 미국의 대통령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미국의 1억 8천만 국민 가운데 3분의 2가 명부에 올라 있는 기독교 신자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만 통일해 놓으면 미국의 대통령도 통일시킨 사람의 사인을 받지 않고는 대통령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한국에도 종교인이 1, 500만이 넘습니다. 국민의 절반 이상이 종교인입니다. 이들을 다 통일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면 어떠한 자리에서 통일해야 되겠습니까? 여러분이 좋다고 하는 자리에서 통일하면 통일 하나마나 입니다. 알겠어요? 자기가 좋다는 자리에서 통일하길 바라는 사람은 악마의 새끼입니다, 기분이 나쁜 얘기지만 할수없습니다. 그 자리에서는 통일을 못 합니다. 그런 자리에서 통일을 한다 하더라도 또 싸우게 되고, 또 깨져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통일을 하려면 반대로 들이쳐야 됩니다. 반대로 들이쳐도 악착같이 가야 합니다. 가다가 정신을 잃더라도 안 가면 죽는다는 각오로 박박 기어 올라 가야 됩니다.
통일교회는 누구나 마음대로 들어오지 못합니다. 들어오더라도 문선생의 단련에 견디지 못합니다. 신사든 숙녀든 등뼈가 불쑥 튀어 나오도록 일을 시킨다는 것입니다. 항상 좋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기성교회 목사들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봤어요? 모두들 오라고 선전하지 오지 말라고 선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라고만 하니 무슨 곡절인지 모릅니다. 오라고 하는 곳에서 망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보다 오지 말라고 하는 곳에서 망하는 일이 벌어지면 덜 섭섭한 것입니다. 분해도 덜 분하다는 거예요. 그런데 망한다는 곳에서 흥하면 그것보다 좋은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오라는 곳보다 오지 말라는 곳에 가는 것이 더 재미있지요? 중고등학교 때 영화구경을 하지 말라고 지켜 서 있는 선생님을 피해 영화관에 들어가서 보는 영화가 더 재미있지요?(웃음)
그렇기 때문에 선한 길을 가겠다고 하면서 지금 그 자리에서 선을 찾는 사람은 미친 사람입니다. 그 자리에서 신을 찾겠다고 하면 절대 안 되는 것입니다. 이미 뿌리가 악에 박혀 있는데 거기에서 선이 나올 것 같아요? 거기에 선이 있다면 악한테 잡혀먹힐 텐데요. 근본을 뜯어 고쳐야 돼요. 그렇잖아요? 근본이 악에서 출발했는데 거기에서 그냥 좋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시장에 가 보게 되면 가짜 약을 파는 약장수들이 '좋소 좋소' 하고 선전을 하며 오고 가는 아주머니들의 마음을 설레게 합니다. 그 약을 먹으면 가슴앓이니 고열이니 몸살이니 만병이 다 낫는다고 하며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처럼 감칠맛이 나도록 선전을 합니다. 선전을 잘하여 약을 팔고는 '옛다 먹어라' 하고는 보따리를 싸 가지고 뺑소니를 치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통일교회의 길은 아무나 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통일교회의 말씀은 좋지만 고생을 하라고 하니 싫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가짜입니다. 통일교회 말씀도 좋고 고생도 좋다고 하는 사람과 통일교회 말씀은 좋은데 고생은 싫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누가 더 선해요? 어디 학생들 얘기해 보세요? 원리도 좋지만 고생도 좋다는 사람과 원리는 좋지만 고생은 싫다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택할 것 같아요? 둘 중에 고생을 좋아하는 사람을 택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에 훌륭한 애국자가 많이 있다고 합시다. 그 많은 애국자 가운데에서 최고 훌륭한 애국자 한 사람만 뽑는다고 할 때, 다 떨어져 나가고 두 사람만이 남았다고 합시다. 한 애국자는 키도 조그마하고 몸집도 작습니다. 그는 남자 축에도 못 들어갈 정도로 작다는 것입니다. 키도 작고 몸집도 작은 사람한테 시집가고 싶다는 여자 있어요? 남자 축에 못 들어 가지만 할수없이 남자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허우대도 좋고 몸집도 좋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두 사람이 있다고 할 때, 누가 더 훌륭한 애국자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여러분은 누가 더 훌륭한 애국자이면 좋겠어요? 이 두 사람 가운데 누가 더 훌륭한 애국자이면 좋겠느냐라고 할 때, 일반적으로 보면 잘나고 허우대 좋은 사람이 애국자이면 좋겠다고 할 것입니다. 천 사람이면 천 사람, 만 사람이면 만 사람이 다 틀림없이 그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이 진짜 훌륭한 애국자냐는 것입니다. 이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은 떨어져야 됩니다. 여기에서 허우대 좋은 사람은 애국자는 애국자인데 그는 불과 한 달 동안에 애국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키가 작은 사람은 일생을 거쳐 오면서 공적을 세워 애국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누구를 더 훌륭한 애국자로 선출해야 되겠습니까? 일생을 거쳐 오면서 공적을 세운 그 애국자를 선택해야 부작용이 없는 것입니다.
결국 그 말이 무엇이냐 하면 같은 애국자 가운데서도 보다 훌륭한 애국자는 나라를 위해서 좀더 고생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나라를 위해서 죽을 뻔했다가 세 번 살아난 사람과 네 번 살아난 사람이 있다면 누가 더 애국자입니까? 이것은 물어 볼 것도 없습니다. 국민학생에게 물어 봐도 다 아는 것입니다. 나라를 위한 진짜 애국자는 역사 이래 이 나라를 위해 가장 고생을 많이 한 사람입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그렇습니다」
그러면 대한민국 애국자 한 명을 세워 놓고 세계의 애국자 가운데 등수로 꼽는다면 몇 등이나 될까요? 대한민국이 올림픽 대회에 나가면 몇 등이나 합니까? 나라에서는 일등한다고 큰소리를 하지만 세계 무대에서는 꼴찌를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형편이 무인지경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최고의 효자 효녀로 공인받으려면
자기가 행동을 하고 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어디를 가게 되더라도 '울기 위해서 간다'고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웃기 위해서 가고, 하나라도 내가 더 좋아질 수 있는 상대적인 그 무엇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좋을 수 있는, 필요 요건을 충당시킬 수 있는 상대를 찾아 가는 것입니다. 오늘 자기가 10만원의 돈을 벌고 싶어서 간다 할 때는 기쁜 거지요?
하나님께 애국자라는 공인을 받으려면 한국적이어야 되겠어요, 세계적이어야 되겠어요? 세계적이어야 됩니다. 그러면 그것이 시대적이어야 되겠어요, 역사적이어야 되겠어요? 역사적이어야 됩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전체를 보더라도 이런 사람 이상의 사람은 나올 수 없다는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께서 '아무개야 이리 와라. 네가 애국자다'라고 하시면서 세계의 애국자 대장으로 세우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세계를 위해 하나님을 위해 얼마나 충성하고 얼마나 정성을 다했겠습니까? 백 번 죽어 살아나고, 천 번 죽어 또 살아나더라도 하늘 앞에 충신의 도리를 다하고 죽으면 한이 없겠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한을 풀기 위해서 몸부림친 사람이 아니었겠어요?
이 말이 실감이 안 나거든 하나의 예를 들어서 얘기해 봅시다. 아들 다섯과 딸 다섯을 가진 한 부모가 있다고 합시다. 여기에서 딸은 시집을 가면 남의 집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부모를 위해서 효성을 하는 데는 아들보다 낫습니다. 아들들은 전부 다 건달꾼이라는 것입니다. 여러 분들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니까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아들들은 돈만 생기면 주막으로 가서 별의별 놀음을 다한다는 것입니다. 처음에 한아들이 아버지께 '아버지! 나 이러이러한 일이 있어서 돈이 좀 필요한데 좀 주소!' 하면 아버지는 '그래 주지' 하면서 돈을 줍니다. 이렇게 해서 달라고 할 때마다 한 번 주고 두 번 주고 세 번 주고 나서 가만히 알아 보니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 준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세 번까지는 주다가 더 이상은 주지 않을 때 그 아들은 어떻겠어요? 반대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아버지가 이제는 못 준다 하면 자식은 '아버지, 이만큼은 내가 활동하는 데 꼭 필요한 돈인데 그 돈도 못 써요? 하며 반발하는 것입니다. 반발하는 거기에서는 부자의 인연이 끊어지는 것이지요? 그런데 '아버지, 젊은 사람이 돈을 좀 쓴다고 왜 그러십니까? 나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이렇게 아버지가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면 한 번이라도 돈을 더 탈 수 있는 겁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그런 반면 딸 중에도 막내딸이 있는데 그는 평상시에도 아버지가 말하기 전에 알아서 척척 모십니다. 이리 가라 하면 이리 가고, 저리 가라 하면 저리 가고, 가다가 오라 하면 오고, 또 가라 하면 가고 합니다. 그렇게 왔다 갔다 열 번이라도 하면서도 오히려 아버지께서 저희들 때문에 이러시니 얼마나 힘들고 얼마나 생각이 번잡하시겠나 하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젊은 사람은 괜찮으니까 그저 아버지께서 하라는 대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딸은 먹을 것이 있으면 안 먹고 아버지께 드리려고 하고, 아버지께서 저녁에 일찍 돌아오지 않으면 대문밖에 나가서 울면서 아버지를 기다립니다. 그러면 소문이 퍼지게 되지요? 그 얼마나 사랑스러운 거예요?
조그만 일에도 정성입니다. 뭐 빵 한 개 가지고도 아버지께 드리겠다고 하니 소문이 쫙 퍼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딸은 자라는 데 있어서 학교에 안 가도 좋다고 합니다. '학교에 가면 뭘 합니까? 저 오빠같이 아버지 어머니 속썩이는 사람 되면 뭘 합니까? 대학교도 싫고, 국민학교도 싫고, 다 싫고 아버지 어머니 좋게 해드리고 기쁘게 해드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열 살이 되고 스무 살이 되고 서른 살이 되도록 시집을 못 갔다는 거예요.
그러면 아버지 어머니가 그 딸을 보게 될 때 시집가지 못한 것을 한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아버지 어머니는 그 딸이 시집갈까봐 걱정할 것입니다. 그렇게도 재미있게 그렇게도 소중하게 그렇게도 편하게 그렇게도 사랑한 딸을 시집보내 놓고 살 수 있겠어요? 그 딸이 시집가게 된다면 다른 아들딸을 다 버리고 그 딸을 따라가겠다고 할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따라 나선다면 그 아버지 어머니의 재산은 어떻게 되겠어요? 아버지가 아들딸을 모아 놓고 너는 장남이니까 내 소유의 절반을 뚝떼어 준다고 하겠어요? 아들딸 각자에게 재산을 전부다 분배해 주겠어요? 그러겠어요, 안 그러겠어요? 안 그런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어머니의 마음을 몽땅 사로잡고, 밤이나 낮이나 언제나 부모를 위해서 고생한 딸에게 재산을 몽땅 상속해 준다는 것입니다. 둘도 없는 딸을 가졌다고 생각하게 될 때, 부모는 다른 아들딸을 모두 버리고 시집가는 그 딸을 따라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부모는 재산이고 무엇이고 몽땅 그 딸에게 상속해 주는 것입니다.
결국은 무엇이냐 하면, 부모를 위해서 다른 형제들보다 더 슬퍼하고, 더 마음을 쓰고, 더 고생을 하고, 더 참고, 더 서러워하고, 더 눈물을 흘리고. 더 억울함을 당하면서도 부모를 붙들고 가는 사람에게 부모의 모든 것을 상속해 주는 것을 우리 인간 세상에서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인간 세상에서도 그러한데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그렇게 살게 되면 하나님도 그럴 게 아니겠어요? 하나님을 위해서는 백번 천번 죽어도 좋고, 욕을 먹어도 좋고. 감옥에 들어가도 좋고, 마귀 사탄이니 이단의 괴수니 하는 비난을 들어도 좋다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는 백번 죽어도 마땅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맨 마지막 고비는 시험입니다. 그런데 누구나 다 할수 있는 일을 가지고는 시험하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나 하지 못할 것으로 시험하는 것입니다. 천 사람이 같은 급에 있으면 천 사람이 다 할 수 있는 것으로는 하지 않습니다. 천 사람 중에서 999명은 떨어져 나가고 한 사람만이 남을 수 있는, 그런 내용을 가지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상적이요, 비정상 적이요? 여기서 하나님이 '해라' 했을 때 하지 못하는 사람은 전부다 꺾여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길을 가는 데 있어서 '나는 이런 것은 믿고 저런 것은 안 믿겠다' 혹은 '이런 것은 생각하고 저런 것은 생각하지 않겠다'라는 어떤 한계선을 정하면 가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백 년이고 천 년이고 상관없이 죽으라면 죽고 가라면 가겠다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계적이고 역사적인 아들딸이 있으면 하나님은 누구를 붙들고 사정하겠습니까 ? 누구를 붙들고 역사하고, 누구에게 찾아와서 가만가만 일러주겠습니까? 내가 정통이요. 통일교회는 이단이라고 하는 목사들에게 그러겠습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이단이란 소리를 들으면서도 한번도 신문광고를 통하여 반박 성명을 내 본적이 없습니다. 내가 반박하지 않아도 대한민국 전체, 세계 전체에서 통일교인들이 나타나 세계를 대해 반박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핍박을 하더라도 선생님은 가만히 앉아서 못난이 놀음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못나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죽음의 길로 내모시는 이유
나를 죽이기 위해 모질게 밟았지만 나는 죽지 않았습니다. 오늘까지 죽지 않았기에 이곳 서대문 교회에 와서 여러분을 만났습니다. 여기 처음 온 사람이 있으면 기분이 나쁠지 모르지만 내가 바로 통일교회 문선생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처럼 만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한번 시작하면 사생결단을 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대를 받으면서도 지금까지 세계적 기반을 형성해 나온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는 잘먹고 잘살면서 가자는 거예요, 못먹고 고생하면서 가자는 거예요? 어떤 거예요? 잘먹고 잘살자는 거예요, 못먹고 고생하자는 거예요?「못먹고 고생하자는 겁니다」 누구를 위해서요? 통일교회 문선생을 위해서요? 누구를 위해서예요? 하나님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녹여내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습니다.
기성교회에 아무리 수백만, 수억의 신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자랑하지 말라는 겁니다. 나보다도 하나님을 위해서 더 고생하고, 누구보다도 죽음을 각오하며 어려운 것을 책임져 가지고, 하나님을 대변하는 수난길을 자기의 운명길로 알고 가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백년 천년 만년 끝까지 갈 수있는 운동을 남기는 그런 주의를 이 땅 위에 심고 가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기독교를 몽땅 삼켜 버리고도 남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통일교회 교인에게는 하나님께서 브레이크를 거는데 거기에 가하여 통일교회 문선생이 또 브레이크를 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백 퍼센트 브레이크를 거는데도 불구하고 통일교회 문선생이 또 브레이크를 건다는 것입니다. 악당이나 독재자도 이보다는 덜할 것입니다. 동정은 못할망정 브레이크를 또 걸지요? 그렇게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고, 힘이 없어 다리가 휘청거려도 '이게 뭐야, 이 녀석아' 하면서 더 때리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그가 자기의 원수요. 자기의 제일 가까운 편이요? 자기편입니다.
선생님은 이북에서 피난 올 때 그런 일을 다 겪었습니다. 뒤에서는 중공군이 따라오는데 데리고 가는 사람은 다리가 부러졌고, 버리고 갈 수없는 사정이 있고. 데리고 가려니 앞길은 막혔습니다. 지나가는 트럭은 전부다 군사물자로 가득하고 길은 이중 삼중으로 막혔습니다. 나보다 큰사람을 데리고 내려 오는데 업고 올 수 없어서 자전거에 태우고 오려니 큰일이었습니다. 가자니 갈 수 없고 죽자니 죽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래도 죽기를 각오하고 갔습니다. 피난민 중에서 제일 고생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나라에 찾아왔던 환란 가운데 제일 고생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면, 통일교회 문선생을 빼놓고는 못 준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그런 마음을 먹고 갔습니다. 여기 김전무(김원필)는 눈을 뜬 채로 졸면서 갔습니다. 인민군이 점점 가까이 오고 있는지도 모르며 자고 있는 것입니다. 인민군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걸 모르니까 자고 있었겠지요. 그때 한 고개만 넘으면 살 길이 있다면 악착같이 내몰아야 되겠어요, 안 내몰아야 되겠어요? 안 가겠다고 하면 들이쳐야 합니다. 멱살을 잡고 억지로라도 끌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알겠어요?
여러분 지금 세상은 환란의 때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목전에 그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이때에 악착같은 통일의 무리가 생겨난 것은 세상에서 구경할 만한 장면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인간 자체를 그냥 그대로 두면 악에서 구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들을 죽음의 길로 내모는 것입니다. 인간 세상에서 낙오자가 되게 하여 거기에서 한탄할 수 있는 입장에 서게 함으로써 하나님과 인연맺게 하시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기 위해서라면 아들딸까지도 희생시키시는 하나님
내가 지금 편안하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을 데려다 괴롭히고, 사람들을 데려다 싸움을 벌이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깡패들이 사람들을 데려다가 깡패를 만드는 거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사람을 데려다가 하나님 대신 싸움을 하게 하기 위해서 사지에 내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편을 위해서 죽겠다고 하는 사람들을 데려다가 복을 줘서 잘살게 했던 것이 아니라, 죽음 길로 내보냈던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하나님의 역사노정입니다.
그것은 왜? 이왕지사 하나님 편에 서 있으면 하나님의 사람이요, 하나님의 대신이요, 하나님의 종이니 그들을 희생시켜 가지고 원수의 종들을 살려주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알겠어요? 내 종을 희생시켜 원수의 종들을 구하고자 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내 아들 딸을 희생시켜 원수의 아들딸을 살려주기 위한 일을 하는 것보다 더 큰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이 희생하는 자리에 나가 원수를 해방시켜 주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원수는 이에 대해 항거할 어떠한 조건도 없습니다.
여기서부터 평화의 기준을 세우고 새로운 천지의 복귀점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본래의 목적인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가지고 원수가 굴복하게 될 때는 내가 아들딸을 사랑하는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아들딸을 희생시킴으로 말미암아 그 나라면 그 나라에 있어서 충신이라든가 공신이라는 이름을 틀림없이 갖게 되는 것입니다. 악한 세상이지만 그를 추모할 수 있는 중심의 인물로 역사에 남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아들이 역사에 남겨졌으면 그것은 그 부모의 공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남겨졌으면 그것은 하나님의 공로입니다. 그가 개척한 사상은 악한 세상을 가로지르게 되고, 새로운 인류의 복귀 동산의 새로운 소식이 들려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세계 인간들이 새로운 동산으로 돌아오기 위한 길을 마련하려면 몇몇 자식. 몇몇의 종들을 희생시키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죽었다고 해서 그것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 말미암아 승리적인 선은 결정적으로 거두어지는 것입니다. 손해를 안 보는 것입니다. 손해 안 보는 자리에서 원수의 자녀를 빼앗아 올 수 있는, 반비례적인 수확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작전을 안 할수 없기 때문에 지금까지 기독교는 많은 희생을 치르며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아들딸들을 희생시켜 원수의 세계에서 하늘편으로 넘어올 수 있는 길을 뚫으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새로운 기독교 사상권을 만들어 가지고 원수의 세계에 있는 사람들을 하늘권으로 몽땅 빼앗아 나오는 작전을 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여러분이 이대로 천국 가겠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망상
여러분 자신들이 타락한 인간이라고 공인한다면, 현재에 있어서 그냥 그대로 천국에 가고 싶다는 것은 망상입니다. 그렇게 갈 수 있다면 통일 교회 문선생은 벌써 갔을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보다 머리가 좋지 못하고, 지혜가 없고, 미욱해서 타락한 이 세계를 구원하기 위한 일을 하는게 아닙니다. 이 길밖에 갈 길이 없기 때문에, 이 방법밖에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작전 안 하고는 구할 도리가 없기 때문에 그런 작전을 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작전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런 작전이 아니고는 작전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요, 그 길밖에 인간이 갈 수 있는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길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작전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목을 잡아 끌고서라도 이 길을 가야 합니다. 통일교회에서는 화장을 하고 핸드백을 들고 그렇게 멋내고 나온 사람은 필요없습니다. 여러분의 멋을 내는 그 시간에도 선생님은 사생결단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껴야 됩니다. 결투의 날을 몇 날 앞두고 그날을 준비하는 그 이상의 심각한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날 통일교인은 달라야 합니다. 내 몸과 내 주위에서 사탄이 겨누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신을 가다듬어야 합니다. 생사권을 판결짓기 위해서 엄숙하게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런 생각을 해봤어요? 전부다 거지들처럼 얻어먹으려 하고 있습니다. 내가 씨를 뿌리고 키우고 거두어 가지고 남에게 떡을 해주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해보았느냐는 말입니다. 전부다 얻어먹으려고만 한다는 것입니다.
얻어먹는 거지들은 동네의 양반을 먼저 알아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아무개 목사가 훌륭하니 가자 하며 거지 떼처럼 몰려다닙니다. 어느 목사 설교 잘하니 그 목사에게 가자 그러면서 거지떼같이 몰려다닌다는 거예요. 만약 통일교회가 그런 사상을 가졌다면 욕을 먹어도 당연합니다.
하나님의 작전은 현실에 살고 있는 우리와는 반대적입니다. 우리를 고립시키는 방법으로 끌어내 가지고, 어느 한 경계선을 넘어 사탄이 따라올수 있는 인연이나 조건을 완전히 없애고 완충지대로 넘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한 번 넘어가더라도 다음 넘어올 수 있는 길을 일단 만들어 놓고, 그 다음에 거기에서 밀명을 주어서 그런 작전을 할 수 있는 사람을 다시 원수의 세계에 파송하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던 것입니다.
그 경계선을 넘게 될 때는 죽느냐 사느냐 하는 심각한 문제를 걸고 넘나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런 것이 여러분의 신앙노정에 한두 번이 아니라 수백 번 수만 번 있어야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통일 교회를 이만큼 발전하게 하기 위해서 내가 죽음길을 한두 번 넘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절대적으로 참된 사람이 되어야 할 인간
이제 본론으로 돌아가자요. 복귀의 한이라…. 인간이 타락해 있는데 하나님의 마음이 편안하겠어요? 전지전능하고 천지를 창조한 대주재이신 하나님께서 하필 이런 방법이 아니면 인간을 구할 도리가 없느냐? 원수 사탄들을 송두리째 잘라 버리고 다시 만들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하겠지만, 그럴 수 있는 천도라면 얼마나 간단하겠습니까? 그렇지만 참된 것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그렇지요? 인간 조상을 세울 때 거짓 것으로 세운 것이 아니라 참된 것으로 세웠기 때문에 참된 것은 둘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참된 것은 하나님과 하나되는 것입니다. 개인도 하나의 참이요, 남자 여자도 하나의 참입니다. 이건 절대적입니다.
인간은 오늘날 자기 스스로 인생문제나 생활문제에 대해 번민하다가, 최후에 생명의 문제를 다짐하는 길에서 이것을 해결하지 못하고 신음하다가 약을 마시고 죽는 그런 무가치한 인간들이 아닙니다. 절대적인 참의 존재인 것입니다.
인간 본연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아담 해와, 인간 종지조상의 모습이라는 것은, 거룩한 하나님을 닮아서 거룩한 자리에 떳떳하게 들어갈 수 있고, 하나님이 절대자라면 절대자인 하나님 앞에 절대적인 상대의 권한을 가지고 나타날 수 있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 서 있는 인간입니다. 그 상대라는 것은 하나이지 둘이 아닙니다. 하나밖에 없는 상대적 절대자의 권한을 가진 것이 인간입니다.
그런 참된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인간 창조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다시 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짓는다는 것은 참을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 입장에 설 수 없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다시 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러면 절대적인 참된 하나의 남자가 나왔느냐? 아닙니다. 절대적인 참된 하나의 여자가 나왔느냐? 아닙니다. 완전하고 절대적인 하나의 가정이 나왔느냐? 아닙니다. 완전하고 절대적인 하나의 가족이 나왔느냐? 아닙니다. 완전하고 절대적인 하나의 민족이 나왔느냐? 아닙니다. 완전 하고 절대적인 하나의 국가가 나왔느냐? 아닙니다. 완전하고 절대적인 하나의 세계가 나왔느냐? 아닙니다. 이런 암흑의 세계에서 참된 세계를 꿈꾼다 하더라도 참된 세계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이상 적인 나라, 이상적인 가정, 이상적인 사랑을 찾아 나가더라도 비운의 고빗길에 부딪치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남성은 어떠한 사람이냐? 절대적인 여성은 어떠한 사람이냐? 완전한 남성과 여성이 하나로 합하여 절대적인 하나님의 보호 아래 하나님의 사랑의 동산에서 보장받는 부부는 어떠한 부부냐? 그런 부부가 됐다면 그 부부는 인류의 참된 부모가 되었을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 조상인 아담 해와가 참된 부부입니까? 여러분은 아담 해와를 찬송합니까, 저주합니까? 아담 해와가 인류의 참조상이 됐어요? 여러분은 아담 해와를 원망해요, 칭찬해요? 기독교의 수많은 신도들이 우리의 조상 아담 해와가 잘했다고 해요, 못했다고 해요? 기도할 때마다 타락한 우리 조상이 나빴다고 하지요? 아담 해와 때문에 망했다고 하지요? 천도를 전부다 망쳐 놓고 인륜을 전부다 망쳐 놓고, 그들이 어디 가서 살 수 있겠어요? 그들의 후손이 되었다는 것이 원통하다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역적 이완용의 손자는 지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자기가 누구의 후손이라는 것이 알려질까봐. 누가 자기 족보를 캘까봐 제일 무서워한다는 것입니다. 이완용이 대한민국을 팔아먹고 싶어서 팔았겠어요? 할수없어서 팔아먹었습니다. 누가 역적이 되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그러면 아담 해와는 이완용보다 죄를 더 지었어요, 죄를 덜 지었어요? 이놈의 죄는 무슨 죄인지 억천만 세 후손들까지 전부다 지옥으로 끌고 가는 죄예요. 그들은 악당의 괴수가 되어 망해 버렸습니다. 그런 악당 괴수의 자손이 된 것이 좋아요?
여러분은 참된 말을 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참된 부모가 아니라 거짓된 부모에게서 태어난 거짓된 자식들입니다. 참부모가 나왔어요? 인간 조상이 타락해 버렸는데 유일무이한 참된 부모가 나왔어요? 절대적인 부모가 나왔어요? 나오지 않았습니다. 절대적인 남자가 나왔어요? 절대적인 여자가 나왔어요? 절대적인 가정이 나왔어요? 절대적인 씨족이 나왔어요? 나오지 않았다는 겁니다. 절대적인 씨족이 나왔다면 망하겠어요? 망할 도리가 있겠어요? 하나밖에 없는데….
본래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두 사상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아담의 생활, 즉 아담이 살아가는 그 자체가 주의 사상이 되는 것입니다. 주의는 아담 주의요, 나라는 아담 나라입니다. 그 나라가 곧 천국입니다, 그런데 아담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거짓으로 시작한 이 타락한 세계에 있어서 좋다는 것이 선이 될 수 있어요? 거기서 환영하는 것이 선이 될 수 있겠어요? 그러한 논리법이 있어요?
참된 세계에서 살아 보지 못한 인간
완전한 종교는 완전한 부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참된 선은 타락한 인간에 의해 완전히 부정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같은 분은 '살고자 하는 자는 죽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사느니라'고 말씀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냥 그대로 살겠다고 하는 사람은 망하는 거예요, 흥하는 거예요? 그냥 그대로 하늘나라의 선한 사람이 되겠다고 하는 사람은 망하는 거라구요. 이 세상에서 죽는 자리, 외로운 수난길에 들어가서 희생하는 사람은 살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참된 부모의 모습을 역사상에서 한번이라도 보았습니까? 참된 부모가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내 손을 쓰다듬어 보았습니까? 참된 부모의 품에 안겨 젖을 먹어 보았습니까? 참된 부모의 품에서 길러져 보았습니까? 그러지 못했습니다. 참된 교훈과 생활로서 가르쳐 주는 참된 성인의 아들이 되어 보았습니까? 못 되어 봤습니다.
내가 선한 사나이가 되어 가지고 선한 삼촌과 선한 아주머니, 선한 형님 누나를 모셔 보았느냐? 그렇게 해보았어요? 아직 참된 가족을 만나지 못했으니 참된 친척이 있을 수 없습니다. 참된 친척이 없는데 참된 민족이 있어요? 어림도 없습니다. 참된 민족이 없으면 참된 나라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소망하고 정성들여도 참된 나라를 만날래야 만날 수 없는 악한 나라의 싸움의 교차로에서 방황하는 후손들이라고 자탄하는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그 나라의 충신으로서 그 나라의 주권자에게 충신의 도리를 다할래야 다할 수 없는, 그런 주인이 없는 처량한 운명에 놓여 있는 타락한 인류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선한 사람들이 세계에 팽창하여 만민이 평등한 사랑의 인연을 가지고, 만국이 하나로 결속되어 하나의 군과 같이 하나의 도와 같이 되어 보았습니까? 세계의 열강이 하나의 주권 국가를 이루어 세계적인 주권자를 모셔 보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관을 통하여 보고 싶고, 듣고 싶고, 느껴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듣고 느끼지 못하고 전부다 우리가 원하지 않는, 반대의 것을 보고 듣고 느낄 수밖에 없는 여건에 사로잡혀 살고 있는 것이 현재의 인간이 아닙니까? 이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내가 보기 싫어도 봐야 하고 만나기 싫어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또 살기 싫어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을 탈피하고자 원해서 이 세상에서 격리운동을 전개해 온 것이 역사과정의 종교운동입니다.
지금까지는 남자들이 일선에서 희생해 왔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오늘날 한 사람을 돌이키려면 얼마나 힘이 듭니까? 지금까지 종교의 교주들은 여자가 없습니다. 사람을 돌이 키는 일은 전부다 남자들이 하고 있습니다. 싸움도 전부다 남자들이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여자들은 왜 싸움을 안 하나요? 만약 여자들에게 싸움을 맡기면 몇만 년이라도 계속할 것입니다. 끝이 나지 않는다는 거예요. 하다 말고 자다가 일어나서 또 싸움을 하자고 앵앵 거립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계산을 해보고 여자들에게 싸움을 맡기지 않았습니다. 남자는 항상 후닥닥 후닥닥 싸움을 해서 끝을 내지만 여자들은 한번 싸우면 끝이 안 난다는 것입니다. 남자들은 후닥닥 해 가지고 몇천 년 안 가면 끝이 납니다. 미국과 소련이 서로 싸우고 야단하지만 곧 끝장이 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싸움에서는 남자들이 많이 희생했지요? 남자들이 선두에 서서 싸웠지요? 여자들은 지금까지 선두에 못 섰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여자를 찾아 나오신 것이 아니라 남자를 찾아 나오셨습니다. 왜 남자를 찾아 나오셨느냐? 이것은 타락할 때 천사장이 먼저 타락했지요?
천사장이 타락하고 그 다음에 사람이 타락했습니다. 그리고 누가 먼저 창조되었느냐 하면 천사장입니다. 그 다음에는 남자가 창조되었습니다. 남자는 천사장 입장이므로 남자를 먼저 복귀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남자를 먼저 복귀하는 것은 천사장 복귀 시대권내에 들어 왔기 때문입니다. 천사장이 결혼했습니까? 천사장에게 결혼하는 법도를 허락했어요?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도의 길을 가는 남자 세계에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따라가는 사람은 독신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
천사장 복귀시대가 지나가면 그 다음에는 여자가 득세하는 때가 옵니다. 그것이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1970년대 운세권입니다. 1970년부터 여자들의 운세권내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지금 여자들이 득세할 때가 오고 있는 것입니다. 어디에 취직을 하려고 해도 남자는 못 합니다. 여자가 필요한 때가 왔다는 거예요. 지금 큰 공장들은 전부다 자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밀한 부분은 자동화가 어렵기 때문에 일하는 사람이 재빠르고 한 가지밖에 생각하지 않아야 됩니다. 이런 데에는 여자가 더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데에 남자를 갖다 놓으면 일을 덤벙덤벙하기 때문에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은 여자가 책임해야 할 때
지금은 여자가 필요한 때입니다. 왜 여자가 필요합니까? 천사 세계를 지은 후에 아담 해와를 지었는데 죄악으로 끌고가는 선두에 누가 섰느냐 하면 여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귀시대에 있어서 여자가 먼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미스 코리아, 미스 아메리카, 미스 유니버스라는 말이 있지요? 미스터 코리아, 미스터 아메리카라는 말 들어 봤어요? 미스터는 오시는 주인 양반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알겠어요? 그러면 여자는 뭐냐? 신부입니다. 그 미스터는 누구냐 하면 오시는 재림주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랑 되신 주님입니다.
이제 여자들이 '치마폭이 꽃을 수놓고 토양을 갖추어 가지고 한번 득세해 보세, 세계적으로 주름잡아 보세' 할 때가 온다는 겁니다. 그런 바람이 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여자들이 남자의 뺨을 때려도 법에 안 걸리지만 남자가 여자를 때리면 법에 걸리는 것입니다. 반대지요,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느냐고 하겠지만 그런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남자들은 시세가 없느냐 하면 남자들은 천사장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여자는 주인 마님감이고, 남자는 종감이라는 것입니다. 주인이 살림할 수 있는 시대에 들어와 가지고 아들딸을 찾고 있는데 거기에 종이 필요하겠어요? 그러니까 여자는 득세하고 남자는 시세가 폭락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생님이 지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보라구요. 세계적으로 어떻게 되느냐? 하나는 유심적 대장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절대적인 내적인 대장으로서 중심이었습니다. 천사장은 뭐냐 하면 자기가 외적인 하나님이 되겠다, 유물적인 대장이 되겠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맞대어 타락되었습니다. 그렇게 뿌려 졌고, 그렇게 심어졌기 때문에 세계가 딱 두 갈래로 열매맺게 된 것입니다. 하나는 유물적인 세계관, 하나는 유심적인 세계관, 즉 사탄편과 하늘편이 생겼습니다. 하늘편에는 하늘편 천사장, 하늘편 해와, 하늘편 아담이 찾아져야 됩니다. 하늘편 천사장은 종교권내의 남자들입니다.
여기에서 이제 여자들이 득세할 때가 옵니다. 신부가 신랑을 맞이할 때가 되면 득세할 때가 오는 것입니다. 처녀가 시집가기 전까지는 그 집에서 종살이를 하는 것입니다. 형편이 무인지경입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물가져오라면 '예' 하고, 오빠가 그래도 '예', 동생이 그래도 '예', 전부 다들어주는 종살이하는 여자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때가 되어 시집가는 날이 되면 아버지 어머니는 있는 모든 것을 그냥 주고 싶어합니다. 가서 잘살라고 집안 전체가 복을 비는 것입니다. 같이 살면 좋겠다고 슬픈 눈물을 흘리는 반면 부디 하늘의 천사와 같이 잘살라고 축복해 준다는 것입니다. 들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들리는 자리에서 독수리 같은 신랑이 와서 채 가지고 가는 것이 장가가고 시집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자들이 이러한 때를 맞이했는데 여자들 가운데 자기 아버지 어머니를 모시고 살겠다는 사람이 세상에 있어요?
천사장, 해와, 아담을 복귀해야 하나님의 한이 풀려
역사시대에 있어서 끝날이 어떤 때이냐? 아버지 어머니도 아랑곳없고, 형님 누나도 아랑곳없고, 내가 좋아하는 것만 제일이다 하는 시대입니다. 이때는 처녀 총각의 사춘기 시대와 같습니다. 그러나 옛날 아담 해와가 바람을 피워 타락하던 그런 사춘기가 아닙니다. 새로운 새생명의 사춘기가 왔기 때문에 타락하던 모양의 열매로 거두어지는 일이 세계에서 벌어지는 것입니다. 또, 타락하지 않고 본연의 세계로 들어가는 일도 벌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은 전부 틴에이져(teen-ager), 즉 십대 청소년시절에 다 타락해 버립니다. 오늘날 미국의 대학생들을 보게 되면 90퍼센트 이상이 시집가기 전에 전부다 남녀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부모 몰래 첫사랑을 맺어 망쳐 버린, 그렇게 심었으니 그렇게 세계를 혼란시키고 그렇게 세계를 사되게 만드는 끝날이 왔다는 것입니다. 아담 해와가 20세 전에 타락하여 그렇게 심었기 때문에 그렇게 거두어야 됩니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청소년 문제입니다. 이러한 청소년들을 잘라 버리고 반대로 절대 그럴 수 없다는 때가 나와야 됩니다. 거기서 참된 것이 나오고, 가시밭길에서 참된 것이 나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에 들어오면 연애를 못 하게 되어 있습니다. 연애하게 되어 있어요? 못 하게 되어 있습니다. 뜻을 알고 연애를 한 사람들은 내가 가만 두지 않을 것입니다. 통일교회에 들어오면 7년 동안 수절해야 됩니다. 연애하게 되어 있어요. 못 하게 되어 있어요? 생각해 보세요. 왜 못하는 거예요? 타락이 무엇입니까? 타락은 하나님을 빼놓고 자기들끼리 사랑한 것입니다. 자기들끼리만 사랑했습니다. 오늘날 세계는 자유로운 사회이기 때문에 결혼은 끼리끼리 해야 한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부모가 없는데도 태어날 수 있어요? 부모의 보호를 받지 않고 자랄 수 있어요? 사람이란 부모의 생명의 인연을 받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게 피어 있습니다. 또한 사랑도 생겨나지 않는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누구를 중심삼고 결혼식을 했을까요? 아담 해와가 그냥 자유 결혼하자고 그랬겠어요? 어림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입회하에서 결혼식을 했을 것입니다. 주례는 누가 볼것이냐? 하나님이 보는 것입니다.
아담 해와가 어릴 때는 남매같이 철모르고 지냈지만, 자라고 보니까 상대적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고 사춘기권내에 들어가게 됩니다. 여자로 봐도 때가 다 되었고 남자로 봐도 때가 다 되었다는 것입니다 남자는 얼굴에 수염난 것을 보면 알고, 여자도 다 보면 알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는 생각이 전부다 입체적으로 벌어지기 때문에 표현도 입체적으로 들락날락 하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해와는 하나님께‘아버지, 저 요즘 이상해요. 오빠한테 자꾸 업히고 싶고 가까이 가고 싶어요'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또, 오빠되는 아담도 하나님께 '아버지, 동생인 줄 알았던 해와가 이상하게 느껴져요'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했겠어요, 안 했겠어요? 그렇게 하기 마련입니다.
곤충들은 누가 가르쳐 줘서 새끼를 칩니까? 자연적으로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그 입장에 서서 부부의 인연을 맺어 주는 것입니다. 부부의 인연을 맺는데는 하나님 입회하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주인은 아담도 아니요, 해와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랑의 주인이십니다. 여러분이 사랑을 하면서 내 사랑은 영원하다고 말하지만 그 사랑이 자기 것입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한 여자가 어떤 한 남자를 사랑한다고 해서 자기가 사랑의 주인입니까? 부부끼리 사랑하는데 남편이 자기 아내를 사랑한 다고 해서 그것이 자기의 사랑입니까? 사랑의 주인은 자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뿌리를 끊어 놓고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뿌리에서부터 자라 가지고 아담 해와가 부부가 됐다면 얼마나 멋지게 사랑했겠습니까?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하늘편은 먼저 천사장을 복귀해야 하고, 그 다음에 해와를 복귀해야 합니다. 이는 타락한 해와가 아닙니다. 타락한 여자 들이 길거리에서 남자들을 끌어들이려고 하는데 전부다 그것입니다. 해와가 여자들을 전부 망쳤지 않았어요?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딸,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아들,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천사장이 되지 못한 것이 타락입니다. 그렇지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복귀의 한을 풀려면 어떻게 되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랑할 수 있는 천사장을 갖지 못한 것이 한이니까, 하나님께서 사랑할 수 있는 천사장을 가져야 되겠어요, 못 가져야 되겠어요? 가져야지요? 그러니 천사장형인 후손을 전부다 하나님편에 잡아놓아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딸이 될 수 있는 해와를 찾아야 되고,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아담을 찾아야 됩니다.
이들을 찾는 데에는 개인적으로 찾고, 가정적으로 찾고, 종족적으로 찾고, 민족적으로 찾고, 국가적으로 찾고, 세계적으로 찾아야 합니다. 이것이 복귀노정입니다. 복귀는 개인만 찾아서는 안 됩니다. 먼저 개인끼리 완전히 하나되어 가지고 새로운 가정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 새로운 가정이 새로운 종족을 만들어야 되고, 그 종족은 새로운 민족을 만들어야 되고, 그 민족은 새로운 국가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 국가는 새로운 이념 세계를 형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귀의 길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께 무조건 순종해야
이놈의 세상은 뒤집어 놓아야 됩니다. 자루를 뒤집으면 어떻게 됩니까? 거꾸로입니까, 바로입니까? 자루를 뒤집어 놓으면 옛날과 같은 모습이예요, 반대의 모습이예요?「반대입니다」 그와 같은 세상이 되어야 됩니다. 그래서 여기에 새로운 물건을 담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같이하십니다. 그러려면 여러분 자신들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러한 한의 기준까지 갈 수 있어야 합니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께서 어떤 작전을 하시더라도 거기에 무조건 순응해야 하는 것입니다.
좋은 것을 빼앗아 가고 나쁜 것을 주는 것은 악입니다. 좋은 것을 빼앗아 가고 나쁜 것을 주면 누구나 다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것은 악입니다. 악과 선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좋은 것을 빼앗아 가고 나쁜 것을 주는 것은 악이요, 나쁜 것을 빼앗아 가고 좋은 것을 주는 것은 선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지금 이 세상에 사는데 올바르게 살고 있어요, 그릇되게 살고 있어요? 그릇되게 살고 있습니다. 그릇되게 사는 것을 빼앗아가고 더 좋게 사는 것을 주겠다는데 그것을 받는 것이 선한 사람이예요, 받지 않는 것이 선한 사람이예요? 받아야 선입니다. 여러분의 것을 빼앗으려고 하는 것이 잘한 일이예요, 못한 일이예요? 그릇된 것을 빼앗으려고 하는데 ‘아이고, 나는 그것을 안 빼앗기겠다'고 하는 것이 잘하는 것입니까?
여러분의 것을 빼앗는데 얼마나 빼앗느냐 하면 몽땅 빼앗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옷을 벗기는 데 있어서 내의까지 벗겨야 하는데 죽어도 벗지 않겠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왕 옷을 벗길 바에는 내의까지 벗겨야될 게 아닙니까? 내의를 안 벗겠다고 할때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반죽음을 시켜 늘어지게 해 가지고 옷을 벗겨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만년을 입어도 변하지 않는 훌륭한 옷을 입혀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입고서 춤을 추겠어요, 안 추겠어요? 춤을 출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빼앗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는 이런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좋은 것을 빼앗고 나쁜 것을 주면 악입니다. 만약 나쁜 것을 주는 날에는 전체가 들고 일어나 합동해서 때려 쫓는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 문선생은 이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축복받은 1,200여 가정을 중심삼고 보면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통일교회 교인들은 정말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어려운 생활을 했기에 축복을 받아 잘살려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남비 짜박지 그릇 짜박지 장만해 가지고 살려고 했는데 왕창 버리고 나가라는 겁니다. 남편도 버리고 아들딸도 버리고 전도를 나가야 하는데 그래 남비 짜박지가 귀해요? 다 버리고 나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전도를 나왔는데, 전도를 나가서 가만히 생각해 볼 때, 나는 전부다 빼앗기고 나쁜 것만 받게 되었다고 하면 통일교회 문선생이 쫓겨나겠어요, 붙어 있겠어요? 붙어 있겠다고 아무리 제사를 지내도 붙어 있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거기서 다 빼앗기고 내쫓겼다가 다시 돌다왔는데 그보다 몇 배 낫게 될 때는 마음으로 불평하고 마음으로 공상했던 사람은 선생님 얼굴을 볼 수 있겠어요? 그때는 고개를 푹 숙이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생명을 빼앗기는 자리에 가야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는 생명을 빼앗기는 자리에 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전부터 죽을 것을 생각했겠어요? 예수님은 서른 세 살 때까지만 살다가 죽는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죽게 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죽을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변화산상에서 엘리아와 모세가 나타나 예수님이 죽을 것을 얘기하니 청천벽력이었습니다. 모든 환경이 죽지 않을 수 없도록 딱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겟세마네 등산에 가서“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마 26 :39)”라고 기도했습니다. 이 얼마나 처량합니까? 이게 자식으로서 할 기도입니까?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피하게 하시옵소서. 할 수만 있으면 죽지 않게…' 얼마나 급했으면 이렇게 기도했겠어요? 이것을 볼 때, 죽겠다고 생각한 예수님이었어요? 예수님은 죽는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 안 했다는 것입니다. 돌변지사였습니다.
그렇게 기도해 놓고 미안하니까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한 것입니다. 그것도 한번만 했으면 될 텐데 세번씩이나 했으니 얼마나 처량합니까? 뼛골이 조여 들어가는 판국에 직면 했습니다. 행여나 소식이 있을까 하고 두 번 기도 드려도 소식이 없고, 세번까지 기도 드리고 소식이 있을까 기다렸지만 깜깜 무소식이었습니다. 세번까지 해봤으면 다 알수있지 또 해볼필요가 있어요? 그래서 할수없이 십자가의 길을 택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명 하나를 희생함으로 말미암아 오늘날 기독교가 세계적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때는 예수님을 한 젊은이로밖에 보지 않았습니다. 목수의 아들을 누가 알아주었겠습니까? 형편없는 사람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잡혀가실 때 베드로는 야간도주해 버렸지요? 예수님의 어머니 아버지까지로 예수님이 달린 십자가에 가까이 가 보지 못하고 멀리서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로마제국의 권세가 얼마나 당당했는지 알아요? 그렇게 죽은 예수님이 오늘날 세계를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이 위대한 사실인 것입니다. 그렇게라도 죽지 않았으면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이 무엇이냐 하면, 좋은 것을 빼앗아 가고 나쁜 것을 주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에서 진정한 공무원이라면 국민의 나쁜 것을 빼앗아 가고 좋은 것을 주고 싶어할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 반면 국민의 좋은 것을 빼앗아 가고 나쁜 것을 주면 악입니다. 그렇게 하면 그 나라는 망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문선생이 여러분을 등쳐 먹고 편안하게 지낸 다면 그것은 악입니다.
복귀의 한의 고개를 넘으려면
오늘날 통일교회 교인들은 선생님한테 꼼짝 못합니다. 여러분의 어려운 것을 전부 다 내가 짊어지고 좋은 것을 주겠다고 하니 눈을 못 뜨고 얼굴을 못 들고 따라옵니다. 선생님이 고생을 지긋지긋하게 하니 여러분은 불평 한마디 못 하고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가는 데는 죽더라도 축복을 하고 죽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진정한 길을 걷는 선은 언제나 선입니다. 선 앞에는 누구나 머리를 숙이는 것입니다. 선 앞에는 머리 숙이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에 선한 입장에 선 사람 앞에는 불평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선이 악 앞에 설때는 당당합니다. 그렇지요? 인간의 본성은 나쁜 악이 들어오면 그 악 앞에는 굴복하지 않지만 선이 들어오면 굴복하는 것입니다.
복귀의 한의 고개를 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여러분들이 세상의 나쁜 것은 여러분 자신들이 다 지려 하고 좋은 것은 남에게 주겠다고 할 때, 여러분 자체의 생활권내에 한스러운 길이 메워져 가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그것은 우리 인간이 한스러운 탄식권내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한은 어디서 풀리느냐? 여러분들이 나쁜 것을 주고 좋은 것을 빼앗아 오는데서 풀려 나가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을 주고 나쁜 것을 빼앗아 오는 데서 풀려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어떻게 한이 맺히느냐? 선을 빼앗아 가고 악을 주는 데서 한이 맺히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반대로 선을 주고 악을 빼앗아 가면 하나님의 한은 풀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한을 풀어 드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나의 좋은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의 나쁜 것을 내가 빼앗아 오는 것이 하나님의 한을 풀어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나쁜 것을 주고 좋은 것을 빼앗아 오면, 그것은 하나님께 한을 맺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두 번, 세 번 하게 되면 그만큼 하나님께 한을 더 맺히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성교회 교인들이 하나님께 기도할때 ‘하나님, 내 아들딸이 국민학교, 대학교에 다니는데 그 학교에서 틀림없이 일등하게 해주십시오' 라고 하는데 그렇게 하면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내 아들이 나쁜 일을 해도 하나님 좋은 것을 주십시오' 이런 기도를 하면 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것보다 ‘내 아들이 제일 잘못했습니다. 내 아들이 철이 없습니다. 내 아들은 아무것도 볼 것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이 찾고 계시고 사랑하고 싶은 그 나라에서 제일 힘든 짐을 지고라도 감당할 수 있도록 당신께서 보호하시고 사랑하여 주십시오' 이런 기도를 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누구보다도 있는 정성을 다 들이는 아들을 보면 꼼짝 못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아들이 감옥에 들어갔다고 인정을 내세워 찾아오는 어머니를 대해서 ‘당신의 아들은 졸장부가 아니오. 민족의 서러움과 더불어 온 세계 인류의 서러움을 짊어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인류 앞에 눈물을 흘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류로부터 조롱을 받는 그런 어머니가 되지 말라고 했던 것입니다. 내 앞에서 눈물을 흘리면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시시한 어머니가 되려면 다시는 나타나지 말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때 어머니는 아들이 무슨 뜻을 품었는지 알았거든 당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원수인 왜경들에게 실제 고문을 받고 죽을 사정에 놓여 있었습니다. 최후에 어머니가 이것을 알고 ‘나라에 대한 충절을 버릴소냐! 하늘을 위한 충절을 버릴소냐! 힘차게 빛나게 싸워서 죽음 길에서도 남아지는 사나이가 되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런 부모를 맞았기 때문에 통일교회 선생님이 있게 된 것입니다.
선생님의 아버지 어머니는 나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 선생님은 나의 아버지 어머니보다도, 나의 형제보다도 여러분을 더 사랑했습니다.
좋은 것은 빼앗고 나쁜 것을 주는 것은 악
모든 것은 심는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문선생이 좋아서 지금까지 하나님이 사랑해 주신 것입니까? 천만에요. 공을 들였으니까…. 공든 탑은 무너지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일주일 이상 칼을 꽂고 밤잠을 안 자고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을 그리워한 적도 있습니다. 그냥 그대로 앉아서 타령만 해서 될 것 같아요?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기도하는 식으로….
그렇게 만만한 자리에서 통일교회가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뼈와 살이 녹는 자리, 최고의 정력을 쏟고 힘을 다하는 자리에서 통일교회는 출발한 것입니다. 최고의 절정에서 통일교회가 출발하였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그 이상의 힘을 갖지 않고, 그 이상의 정력을 쏟지 않고는 통일교회를 점령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통일교회는 안 망한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선한 것을 빼앗고 악한 것을 갖다 주는 것은 악이요, 좋은 것을 빼앗고 나쁜 것을 갖다 주는 것도 악입니다. 알겠어요? 둘이 있다가 하나가 떨어져 나가면 망합니다. 그렇지요? 그렇지만 나쁜 것을 빼앗고 좋은 것을 주면 좋아하지 말래도 좋아해요, 안 해요? 좋아하지요. 그러면 오지 말래도 ‘아이구, 나는 언제나 좋아' 하면서 따라옵니다. 따라와요, 안 따라 와요? 그러면 망하라고 해도 그것은 흥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자꾸 그렇게 나가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여기에 있는 사람이 한 50명이 되는데, 이 패들 가운데 한 사람이 그런 일을 한다면 전부다 신세를 지게 됩니다. 패라고 해서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기에 모인 여러분은 통일교회패가 아닙니까? 신세를 거듭해서 세 번 지게 되면 마음으로 신세를 갚아야지 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마음이 있어요, 없어요? 있지요? 갚아야지 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세를 갚으려고 하는데 또 다시 빚을 지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람들은 우리 교회에서 아무개가 제일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 사람은 교회의 중심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가 되지 않겠다고 해도 중심자로 세우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싫다고 도망을 가더라도 교인들이 떼로 몰려가서 그를 중심으로 세우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중심뿐만 아니라 주인의 자리에 세우는 것입니다. 제일 좋은 자리에 세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부모 대신으로 세우려고 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 봉사하면 망하는 줄 알았더니 흥하더라는 것입니다.
공산당식과 하늘 방식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그러한 작전을 해 나오신 것입니다. 기독교는 그런 작전 아래서 발전해 왔기 때문에 오늘날 세계적인 중심종교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기독교가 역사적인 끝날에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해서 자기 권력을 중심삼고 교인들을 등쳐먹기 시작하니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쁜 것을 주고 좋은 것을 빼앗아 가니 망한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는 지금 무엇을 하느냐? 대한민국을 중심삼고 대한민국에 나쁜 것을 주고 대한민국으로부터 좋은 것을 빼앗겠다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에 좋은 것을 주고자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나라를 위해서 있는 정성을 다하고, 피땀을 흘리며 생명을 걸고 일하고, 이 나라를 사랑했지만 찾아오는 것은 욕밖에 없습니다. 알겠어요? 대한민국을 위해서 피어린 투쟁의 길, 피어린 곡절의 길을 가고, 이 민족을 위해서 억울하게 몰리고 쫓기고 눈물 흘리면서 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중에 돌아온 것은 이단이라는 욕밖에 없습니다. 지금까지 욕을 먹고 있습니다.
공산당식은 내 것은 내 것이고 네 것도 내 것입니다. 그리고 나쁜 것은 네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하늘의 방식은 그와 반대입니다. 하늘 방식은 내 것은 네 것이고, 네 것은 나라의 것이고, 나라의 것은 세계의 것이고, 세계의 것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의 자녀의 것입니다.
그러니 너와 나의 것은 누구의 것이냐? 세계의 것이요, 세계의 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것은 네 것이고 네 것은 아버지 것입니다. 둘 다 아버지 것이라고 하기 때문에 아버지의 것은 우리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돌아오는 거예요. 하늘 가는 길이 지금까지 그렇게 하여 나온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귀한 것을 부모의 것으로 돌리라는 것입니다. 내게 좋 은것 성공한 것 칭찬받은 것을 부모의 것으로 돌리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나라의 것으로 돌려야 합니다. 부모들은 자기 자녀를 나라의 것으로 생각해야 됩니다. 그래야 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우리 아들딸이 잘되었다. 나라님도 나만 못하다'라고 자랑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 부모는 그 효자를 나라의 것으로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라님은 세계의 것으로 여기고, 세계의 나라님은 하나님의 것으로 바쳐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가야 할 길입니다.
통일교회 문선생은 여러분들에게 하나님께 충성하라는 사상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 사상은 통일교회 문선생의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정성들인 물건은 함부로 받지 않습니다. 정성들인 물건은 독약보다 더 무서운 것입니다. 내가 그 이상 정성을 들이지 못하고 그것을 함부로 대했다가는 선생님이 그 정성에 깔리어 조건에 걸리는 것입니다. 정성은 그만큼 무서운 것입니다.
정성들이며 사는 사람은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원수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나를 죽이려고 별의별 모함을 많이 했지만 오히려 그들이 다 나가자빠지고 나만 남았습니다. 통일교회 문선생은 그런 사람 입니다. 지금까지 통일교회를 반대하던 사람들은 다 깨져 나갔습니다. 그들 자체뿐만 아니라 그들의 아들딸까지 다 걸려들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들을 원수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불쌍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간끼리 한을 푸는 길이 어디에 있느냐? 한을 풀어 주는 곳이 어디일 것이냐? 빼앗아 가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빚을 지우는 데에 있습니다. 알겠어요? 나쁜 것을 가져 가고 좋은 것을 주라는 것입니다. 빚을 지우고 가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선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다 망하더라도 남아지는 사람입니다.
영원히 남아지는 것은 선과 그 주체 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더불어 남아질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부모가 그런지 모릅니다. 부모가 그렇지요? 부모는 자식의 어려운 것을 전부 다 짊어지고 가니까 부모가 좋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이런 사상을 중심삼으면 형제의 한도 풀 수 있고, 나라의 한도 풀 수 있고,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한도 풀 수 있는 것입니다.
고생길·희생길을 가지 않고는 하나님의 한을 풀 수 없다
하나님의 한, 복귀의 한은 누구에게 있느냐? 먼저는 하나님에게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지금까지 피맺힌 한의 심정을 지니시고 복귀노정을 거쳐 오신 역사적인 사정이 있습니다. 오늘 인간 세상에서 아이고 죽는다고 큰소리치며 죽어 나자빠지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알겠어요? 천지를 지으신 선한 주인이 되셔야 하고, 영광의 아버지가 되셔야 할 하나님께서 인간들보다 더 비참하게 계신다는 것입니다.
열 명의 아들 가운데에 한 아들이 급살맞았다면 그 부모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열명의 아들 가운데 한 아들이 죽었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부모의 마음은 열 아들에 대해 똑같은 것입니다. 가슴을 치며 통곡하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타락된 인류를 지금까지 구하지 못하고, 구해야 할 부모의 입장에서 허덕이는 하나님의 심정은 얼마나 피눈물이 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고통을 받는 데에도 대왕이요, 눈물을 흘리는 데 있어서도 대왕이십니다. 역사상에서 피눈물나는 곡절의 사연을 모두 품고 나오시며 죽음의 자리 피의 제단 가운데에서 순교자의 왕의 자리에 섰었던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비통한 모든 내용을 중심삼고 볼 때, 아무리 인간이 고생을 했더라도 하나님의 고생에 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아버지를 알고 그 아버지를 위하는 효성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당하는 수난과 고통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맏아들이나 독자가 죽었을 때 머리가 헤쳐진 채로 땅을 치며 통곡하는 어머니를 볼 수 있습니다. 나는 그런 걸 많이 보았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인간을 잃어버린 하나님께서는 어떠시겠습니까? 그 어머니는 자기 자식이 죽었다고 처량한 모습으로 한스러운 모양을 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인류에게 무한한 행복과 선의 이상을 주기 위해서 최고의 희망을 가지고 바라보던 아담 해와가 한 날에 간곳없이 전부 깨져 버리는 운명이 되어 버렸을 때, 그것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인간의 슬픔이 아무리 크다 해도 그것에 비할 수 있겠어요? 타락한 인간을 구하기 위해서 온갖 수난을 겪으시고 억울한 자리에 몰려 피어린 고통의 노정을 걸어오신 아버지의 사정에 비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사람은 자식이 급살을 맞아도 눈물을 흘릴 수 없는 것이요, 치가 떨리는 일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을 위로해 드려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 할 인간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인간 끼리끼리에 있어서 어려운 것을 서로 책임지려 하고, 선한 것을 남기려고 하는 사람은 인간세계에서 하나님의 한을 풀어 주는 책임을 할수 있습니다. 인간세계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어려움을 내 일신에 짊어지고 나라와 세계의 선봉에 서 가지고, 죽음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이여 안심하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책임지고 아버지의 수난길에 있어서 방파제가 되어 적진을 향해 달려가겠다는 아들딸이 있으면, 하나님께서는 천신만고 수백 배의 수난이 앞에 가로놓여 있다 하더라도 그 아들딸을 위해서 고생하는 것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하나님이 기쁨의 고생을 하는 입장에 서야 기쁨과 영광이 상달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한을 풀기 위해서는 고생길을 가지 않고는, 희생의 길을 가지 않고는, 남한테 빚을 지우지 않고는 안 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기 도
아버님, 통일의 무리들이 지금까지 외로운 길을 개척하면 서도 자기에게 맡겨진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왔습니다. 아버지여, 여기에 모인 자녀들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망해 썩어질 이 땅 위에 그래도 당신의 거룩하신 뜻을 위해 죽음길을 가로막는 방파제가 되겠다고, 수난의 역군으로 책임하겠다고 눈물 흘리는 당신의 어린 자식들이 있는 것을 아옵니다. 오늘 이 밤에도 그들을 축복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한국을 그리워하는 자녀들에게 소망의 한날이 오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하늘권내에서 서로서로 하나되어 가지고 누구보다 섭리에 충실했다고 아버지께 영광을 드릴 수 있는 무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복귀의 한의 길, 억천만 대에 엉클어진 한의 길을 극복하여야 할 저희의 입장임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 저희들이 진실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피하지 알고 가는 자신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 길은 희생의 길이요, 신세를 지우는 길이요, 나쁜 것을 받고 좋은 것을 남겨 주는 길이라는 것을 저희들이 아옵니다. 그것은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하면 계속할수록 높은 뜻을 향하여 개인시대를 지나고, 가정시대를 지나고, 종족시대를 지나고, 민족시대 국가시대 세계 시대를 지나가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까지 기독교는 연속적인 희생의 길을 찾아 나옴으로 말미암아 세계적인 때를 맞이했습니다. 이제 아버지의 긍휼을 바랄 수 있는 때가 되었고, 아버지의 수난의 길을 다시 책임지겠다고 몸부림쳐야 할 때가 왔사옵니다. 인간 세상의 수난의 길은 물론이지만 아버지의 수난의 길을 책임 져야 할 무리가 나와야만, 이 지구성에서 종교인들을 중심삼고 당신을 모실 수 있는 세계적인 터전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아옵니다. 통일교단이 이러한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온갖 정성을 다할 수 있게 하시옵소서. 그러한 아들딸로서 세워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 이 시간까지 아버지께서 보호하여 주심을 감사하오며, 서울에 있는 식구들, 당신을 부르고 있는 모든 식구들을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날까지 보호하여 주신 은사를 감사하옵니다. 역사적인 인연 가운데 새로 세워진 당신의 자녀들이 내일의 소망 가운데 맡겨진 책임을 다할 수 있고, 온갖 지성을 바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흘러가는 역사와 더불어 흘러가지 말고 흘러가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외로운 고아의 신세에서 절망하는 자리에 있을 것이 아니라 소망의 한 곳을 바라보고 힘차게 달려갈 줄 아는 선한 무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까지 당신이 같이하여 주신 것을 감사하옵니다. 이 시간 이후에도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이 서대문 지구 위에 무한하신 사랑을 내리시어 만복의 터전을 넓히고 이 서울 도성을 복귀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책임을 감당할 수 있게 하여 주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밤에도 이곳을 위해 기도하는 수많은 자녀들 위에 친히 같이하여 주옵길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만만세의 은사와 사랑이 길이길이 당신과 더불어 이 사랑하는 무리 위에 같이하여 주옵기를 부탁드리며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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