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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내가 '태양의 후예'였었다>의 줄거리:
드라마 '태양의 후예'의 기획 의도는 "돈"과 "힘"보다 "인간으로서의 미덕과 가치"를 추구하는 "우리 마음 속 진짜 영웅"을 그리는 것이었답니다. 그런데 이런 의도가 무색하게 인류는 타락한 아담의 후손으로서 본래 태양의 후예였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의미상 '죄인'의 다른 말이 곧 ‘태양의 후예’인 샘이지요. 진짜 영웅은 '태양의 후예'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후예'입니다. 왜 죄인이 태양의 후예일까요? 그리고 진짜 영웅인 하나님의 후예는 어떤 모습일까요?
내가 ‘태양의 후예’였었다
(에스겔 8:1~18)
16. 그가 또 나를 데리고 여호와의 성전 안뜰에 들어가시니라 보라 여호와의 성전 문 곧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 약 스물다섯 명이 여호와의 성전을 등지고 낯을 동쪽으로 향하여 동쪽 태양에게 예배하더라
17.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보았느냐 유다 족속이 여기에서 행한 가증한 일을 적다 하겠느냐 그들이 그 땅을 폭행으로 채우고 또 다시 내 노여움을 일으키며 심지어 나뭇가지를 그 코에 두었느니라
18. 그러므로 나도 분노로 갚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을 베풀지도 아니하리니 그들이 큰 소리로 내 귀에 부르짖을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내가 ‘태양의 후예’였었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내가 ‘태양의 후예’였었다
말씀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본문의 내용을 다시 한 번 짚어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제사장 스물다섯 명이 여호와의 성전을 등지고 낯을 동쪽으로 향하여 동쪽 태양에게 숭배하는 모습을 에스겔이 환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 중에서 17절을 보면 ‘심지어 나뭇가지를 그 코에 두었느니라’라는 특이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페르시아에서 전래 된 태양숭배의 방법이었습니다. 거룩하고 신성환 태양빛이 자신들의 호흡으로 인해 오염될까봐 종려나무나 석류나무 가지로 자신의 코를 가리며 태양을 숭배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오늘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드라마 ‘태양의 후예’는 김은숙 작가가 쓴 시나리오입니다. 이 김은숙 작가의 고향은 바로 제가 살고 있는 강릉입니다. 강릉은 특이하게도 예로부터 여성 문인들의 고장이었습니다. 조선시대에 대표적인 여성 문인인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이 바로 강릉 출신입니다. 김은숙 작가도 이 시대의 대표적 문인 중의 한 명으로써 드라마 ‘태양의 후예’를 통해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한편 이 드라마의 기획 의도를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돈”과 “힘”보다 “인간으로서의 미덕과 가치”를 추구하는 “우리 마음 속 진짜 영웅”을 그리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신앙적으로 보자면 작가의 의도가 무색해집니다. 타락한 아담의 후손인 인류는 본래 태양의 후예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새삼스럽게 태양의 후예를 따로 묘사하고 그려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태양의 후예는 마음 속 영웅이 아닌 죄인입니다.
우리가 읽은 부분에서는 제사장들이 태양을 숭배하는 모습이 환상으로 주어집니다. 이것은 제사장들이 선민들을 하나님의 후예가 아닌 태양의 후예로 만들었음을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자들을 용서하실 수가 없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후예와 태양의 후예가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심리학에서 터널 비전(tunnel vision)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우리말로는 터널 시야입니다. 차를 타고 깜깜한 터널에 들어간 것을 생각해봅니다. 대한민국에서는 시설이 잘되어 있어서 어두운 터널은 없습니다만 외국에 나가보면 등이 없는 터널이 꽤 있습니다. 깜깜한 터널 속에 진입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반대편의 출구만 보입니다. 터널 내에 누군가 있을지라도 모든 시야가 출구 쪽의 빛을 향해서만 집중되기 때문에 인식하지 못합니다. 이처럼 눈앞에 있는 대상에만 집중해서 주변을 파악할 수 없게 된 상황을 심리학에서는 터널 비전 현상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한 청년이 사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오직 한 여성만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주변의 다른 여성들은 더 이상 이성으로 보이지 않게 됩니다. 또 다른 예로는 일중독도 마찬가지입니다. 취미에 빠지거나 알코올이나 도박에 사로잡히는 것도 터널 비전 현상으로 접어 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터널 비전 이론을 신앙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약간의 보완이 필요합니다. 우리말로 터널 시야는 반드시 태양 시야와 연결이 됩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한 예를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 수전노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항상 돈을 밝히 보는 사람입니다. 돈에 대해 터널 비전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에 돈은 이 사람에게 터널의 출구이자 태양 빛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됩니다. 사람을 만나든지 사건을 접하든지 돈이라는 태양빛 아래에서만 관계하게 됩니다. 사람을 만날 때에는 먼저 그가 내 돈에 관심이 있는지 없는지를 생각합니다. 혹은 내 돈을 더 불리기에 유익한지 아닌지를 따지게 됩니다.
이렇게 마음의 터널 시야를 형성하는 대상은 비단 돈뿐만이 아닙니다. 자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인 성 과부의 경우 외아들이 터널 시야의 대상이었습니다. 아들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였습니다. 사람도 만나고 일도 했겠지만 어디까지나 외아들에게 유익이 되는 사람과 안 되는 사람으로 대하고, 물건에 대해서도 외아들에게 유익이 되는 물건과 안 되는 물건으로만 생각했을 것입니다. 외아들이라는 태양빛 아래에서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 불치병에 걸린 사람은 건강이라는 터널 시야에 빠져듭니다. 모든 대화 속에서 건강이 빠지지를 않습니다. 건강이라는 태양빛 아래에서 살기 때문에 건강과 관계없는 것들에는 아무 관심이 생기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터널 시야와 태양 시야는 서로 겹쳐있습니다. 터널 비전이라는 말은 본래 좁은 시야를 의미합니다. 집중해서 보는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전혀 제대로 보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가 태양 시야라는 말과도 연관이 됩니다. 태양빛 아래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같을지라도 실제로는 어둠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자신은 태양 아래에서 밝히 본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그러나 그 태양은 실은 터널의 출구에서 들어오는 빛입니다. 출구에 집중하는 동안에는 터널 내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실제로는 어둠 속에서 아무것도 파악하지 못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태양의 후예의 특징이 됩니다.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대낮에 등불을 들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디오게네스는 “나는 사람을 찾고 있는 중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세상에 사람다운 사람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신앙적으로 대낮에 등불을 드는 행동이 이치에 맞습니다.
돈을 터널의 출구로 삼아서 집중할 때에 돈은 태양 빛이 됩니다. 돈이라는 빛 아래에서 세상을 밝히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완전한 어둠속에 갇혀있는 것입니다. 아담이 타락한 이후에 모든 인간은 이러한 태양의 후예로써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터널의 출구는 돈 뿐만 아니라 무엇이든 될 수 있습니다. 일단 출구로서 인식하게 되면 그것에 집중하게 됩니다. 우리가 그 동안 마음의 공백에 대해 배워왔습니다. 이것이 터널 시야에도 적용됩니다. 마음의 공백이 채워질 때에만 기쁨과 만족이 생겨나기 때문에 그렇게 믿어지는 대상을 붙잡습니다. 그 믿어지는 대상이 터널의 출구이고 태양이 됩니다. 그것을 태양이라 믿기에 정작 자신이 터널이라는 어둠속에 갇혀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타락한 아담의 후예로 살아가는 것이 태양의 후예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살아가는 곳은 어둠속입니다. 내가 믿는 태양은 정말로 어둠을 비추는 태양이 아닌 터널의 출구에서 들어오는 빛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류는 아담의 타락 이후로 이 가짜 태양의 빛 아래에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터널의 출구를 태양 삼아서 밝히 보고 있다고 착각하며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태양의 후예로 살아가는 것이 죄인인 이유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오늘 본문은 에스겔이 또 다시 본 환상입니다. 시기적으로는 에스겔이 첫 번째 환상을 본 이후로 1년 2개월이 지난 후였습니다.
에스겔이 선지자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자 장로들이 찾아왔습니다. 이들이 찾아온 의도는 직접적으로 표현되고 있지는 않지만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보여주신 환상의 내용을 통해서 유추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예루살렘 성전의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그곳에서 본 내용들이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전에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다양한 우상숭배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당시에 31살밖에 되지 않았던 에스겔의 예언활동이 장로들의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예루살렘 성과 성전은 건재함을 근거로 백성들에게 회복의 희망을 주고 그렇게 되기를 믿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믿음이 미신적인 수준임을 아시고 에스겔에게 이들의 영적인 실상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는 이 잘못 된 신앙을 깨뜨리시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담겨있습니다.
한편 본문을 보면 특이한 표현들이 등장합니다. 3절을 보면 “…하나님의 환상 가운데에 나를 이끌어 예루살렘으로 가서 안뜰로 들어가는 북향한 문에 이르시니 거기에는 질투의 우상 곧 질투를 일어나게 하는 우상의 자리가 있는 곳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을 질투하시게 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질투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이 들어가셔야 할 선민들의 마음에 다른 대상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이것만 가지면 기쁘겠다 혹은 저것만 가지면 만족하겠다고 믿어지는 대상들입니다. 이 질투의 우상은 구체적으로는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아세라 신상이었으리라 여겨집니다. 하나님이 계셔야 될 선민들의 마음의 자리를 돈과 재물이 차지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어서 10~12절에서는 칠십 인의 장로들이 성전에서 애굽의 방식으로 우상숭배를 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10절을 보면 “내가 들어가 보니 각양 곤충과 가증한 짐승과 이스라엘 족속의 모든 우상을 그 사방 벽에 그렸고”라고 하였습니다. 곤충이나 파충류와 각종 짐승들의 형상을 우상화하여 섬기던 것이 애굽의 우상숭배의 특징이었습니다. 그런데 성전 안에 담으로 가려진 은밀한 곳에서 백성의 지도자였던 장로들이 이러한 애굽의 우상들을 그려놓고 숭배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은밀한 곳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은 장로들이 겉으로만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척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속마음에서는 선진국이자 강대국이었던 애굽을 부러워하며 마음에 담고 추구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인들의 뜰에 대한 묘사가 나타납니다. 성전의 구조를 보면 가장 안쪽에 제사장의 뜰이 있었고 그 바깥으로 차례대로 이스라엘의 뜰, 이스라엘 여인들의 뜰, 이방인의 뜰이 있었습니다. 13~15절에서는 이 여인들의 뜰에서 공공연하게 우상숭배를 하였음이 나타납니다. 14절을 보면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가는 북문에 이르시기로 보니 거기에 여인들이 앉아 담무스를 위하여 애곡하더라”고 하였습니다. 담무스는 다른 우상들과 마찬가지로 풍요를 관장한다고 알려진 바벨론의 신이었습니다.
또 16~18절에서는 우리가 읽은 대로 제사장들이 바로 지성소와 번제단 사이에서 약 스물다섯 명이 여호와의 성전을 등지고 낯을 동쪽으로 향하여 태양을 숭배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여기서 특징적인 부분은 앞서 보았던 백성과 장로와 여인들이 우상숭배를 하는 모습에 대해서는 ‘다른 큰 가증한 일을 보리라’라는 말씀이 이어진 것에 비하여, 제사장들의 태양숭배에 대해서는 ‘더 큰 가증한 일’이라고 표현하고 계십니다. 다른 모든 우상숭배보다 제사장들의 태양숭배가 하나님께는 가장 가증스러운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제사장들이 행하는 태양숭배는 앞서 등장한 다른 모든 우상숭배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하나의 공식을 제공하였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타락한 인류는 터널시야현상과 태양시야현상이 합쳐진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어떠한 대상을 궁극적인 가치로 삼아서 마음을 채우고 기쁨과 만족을 얻으려고 합니다. 이러한 상태는 밝히 보는 것 같으면서 실은 어둠속에 갇혀있는 상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유일하게 보고 있는 터널 출구가 되어버린 가치의 빛 아래에서 보기 때문입니다. 운전자가 터널에서 좁고 왜곡된 시야를 가지게 되는 것처럼 삶은 오류에 빠져들게 됩니다.
돈을 터널의 출구로 여긴다면 돈이라는 태양빛 아래에서 생각하고 판단하게 되지만 이는 다 착각이고 오류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돈을 못 벌면 망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럴 때에 생겨나는 걱정과 근심이 바로 착각과 오류입니다. 반대로 돈을 많이 벌어서 좋다고 여기는 것 또한 거짓이고 속임수입니다. 여전히 어둠속에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만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런 일이 벌어진 이유는 본래 우리 마음이 하나님에 대해서 이러한 관계가 되도록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터널시야현상과 태양시야현상에서 나타나는 마음의 구조는 본래 하나님을 향해서 나타날 때에만 올바른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는 오직 하나님만이 터널의 출구였습니다. 마음의 유일한 빛이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은 터널의 입구에서 들어오는 빈약한 빛이 아닌 터널 전체를 환히 비추시는 발광체이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마음에 모신다는 것은 곧 선악과가 상징하는 판단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생각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다만 아담은 스스로 판단하고 생각하지 않는 대신 하나님의 판단과 생각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빛 아래에서 사는 인간의 참 모습이었습니다.
본문 4절에 보면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거기에 있는데 내가 들에서 본 모습과 같더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영광이 우상숭배에 오염 된 성전을 떠나시는 모습이 묘사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말 그대로 빛입니다. 마치 깜깜한 터널에 들어가면 밝은 출구만 보이듯이 내 마음은 하나님만을 보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변화산에서 베드로가 하나님의 모습으로 변화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산 아래에서 꿈꾸었던 모든 일들을 망각하게 되었던 것과 같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만을 출구이자 빛으로 보는 터널 시야 현상이 일어나는 모습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보게 되면 만나는 모든 대상들을 하나님의 빛으로 바라보며 살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본래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던 하나님의 후예로서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후예로써 터널시야현상 속에 계셨던 것입니다. 이 터널시야현상 속에서 출구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백합화를 보아도 하나님 아버지를 보시고 공중에 나는 새를 보실 때에도 하나님 아버지의 빛 아래에서 보셨습니다. 풍랑을 만났을 때에도 하나님 아버지의 빛 아래에서 대하셨습니다. 심지어는 가룟 유다나 빌라도조차 하나님의 빛 아래에서 대면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리를 비롯한 죄인들과 더 가깝게 지내셨던 이유도 하나님이라는 빛 아래에서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랬기에 오히려 바리새인들을 저주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판단하시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빛 아래에서 드러나게 된 그들의 진실과 마주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후예로 살아가는 자들의 참 모습입니다.
그러나 아담의 타락 이후로 모든 인류는 태양의 후예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제사장들이 태양을 숭배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 태양은 상징적으로 이 세상의 최고의 자리입니다. 여인들이 바벨론의 풍요의 신 담무스를 섬겼다고 했습니다. 태양의 자리에 돈을 담았던 것입니다. 장로들은 애굽 방식의 우상숭배를 통해 백성들이 애굽처럼 부강하고 강대한 나라가되기를 소원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대신한 터널의 출구이자 태양으로써 받아들여졌던 것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제사장들이 태양숭배에 물들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제사장이 본래 하는 일은 마음에서 터널의 출구이자 태양의 자리에 하나님을 모시도록 인도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세상 대신 하나님을 보게 하는 일이 바로 성전에서 아침저녁으로 드려지는 상번제였습니다. 돈을 터널의 출구이자 태양으로 삼은 사람이 있다면 제물로 드려지는 양과 동일시함으로써 다시 태어나 하나님이 터널 출구가 되어서 하나님의 빛 아래에서만 살게 해주는 것이 제사장의 역할이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들이 하나님을 등지고 태양을 향해 절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터널의 출구이자 태양으로 삼도록 선민들을 미혹시켰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제사장들의 태양숭배를 선민들의 우상숭배보다 더 큰 가증스러운 일로 여기셨습니다. 하나님을 터널의 출구이자 태양이심을 알고 백성들을 이끌어야 할 자들이 오히려 하나님을 등지고 세상의 가치들을 터널의 출구이자 태양으로 삼도록 인도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은 지금 우리 교계에서도 나타납니다. 목사님이 “교회에 충성하세요. 봉사 열심히 하세요. 헌금 많이 하세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풍요롭고 부흥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라는 말을 어렵지 않게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말씀은 사람들을 오히려 하나님을 등지고 돈을 향하게 할 뿐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지게 되면 하나님도 돈이라는 빛 아래에서 보게 됩니다. 돈을 벌기 위한 유익한 관점에서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가르침이 이어진 결과로 교회가 어떻게 됐는지는 명확합니다. 70년대 초에 “잘 살아보세”라는 표어아래에 새마을 운동이 이루어졌습니다. 모든 교회들도 영적흐름을 이에 맞추어 설교를 했습니다. 그렇지 않은 교회도 있었지만 보편적인 분위기는 확연히 풍요와 다산을 지향하는 나라가 되었고 교회가 이에 발맞추었습니다. 새마을 운동은 끝났지만 교회는 지금도 풍요와 다산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돈 많이 벌고 여유 있게 펑펑 쓸 수 있는 삶의 빛 아래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고 있습니다. 나라가 부유해지고 먹고 살만하니 하나님은 쓸모가 없어졌습니다. 하나님이라는 신의 용도가 없어졌으니 교회를 떠나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돈을 향해 절을 할 때에 교회가 해야만 하는 일은 같이 돈을 향해 절을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에 등 돌리고 하나님을 터널 출구로 삼아 하나님의 빛 아래에서 사는 하나님 나라를 외쳤어야만 했습니다. 변화산의 베드로처럼 터널 시야 현상의 출구를 하나님으로 만들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빛 아래에서 세상의 모든 대상을 바라보며 사는 것이 곧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본분을 잊었고 모든 것을 풍요와 부흥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해방 후 미국에서 들어온 부흥을 강조하는 선교신학이 크게 성장하면서 목사님들과 교인들을 하나님의 후예가 아닌 태양의 후예로 만들어버렸습니다. 드라마에서처럼 태양의 후예는 진짜 영웅이 아니라 진짜 영웅은 하나님의 후예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제는 태양의 후예 됨을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앞서 보았듯이 5절에서 “…제단문 어귀 북쪽에 그 질투의 우상이 있더라”고 하였습니다. 이 질투의 우상 즉 아세라 신상은 돈을 좋아하는 마음의 표현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세상에 좋은 가치들은 많지만 사람들이 가장 보편적으로 추구하는 가치는 돈일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재물을 선민들이 터널의 출구로 붙잡았기에 하나님께서 질투하신다고 했던 것입니다. 돈이라는 태양빛 아래에서 보는 삶에 대해 하나님의 질투는 진노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십자가 생활화가 필요해집니다. 제사장들조차도 하나님을 등지고 태양을 숭배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가진 원죄의 체질은 하나님을 등지고 세상의 가치들을 터널의 출구로 삼게 합니다. 제사장들은 이러한 마음을 가진 자들을 상번제의 어린양과 동일시하여 죽이는 자들이어야 했습니다. 하나님 이외의 터널 출구와 태양이 되어버린 상태의 태양의 후예를 죽였어야 했습니다. 이제는 내가 나의 태양의 후예 됨을 죽여야 합니다.
세상의 가치들을 터널 출구로 여기고 그것들을 추구할 때에만 기쁨과 만족을 얻을 수 있다고 믿을 때에 우리는 태양의 후예가 됩니다. 오늘 하나님만이 터널 시야 현상의 대상이 되셔야만 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후예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모두 태양의 후예였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태양의 후예로 살아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등 돌리게 하고 끊임없이 세상의 가치를 향하는 마음을 십자가에서 죽여야 할 것입니다.
자녀 때문에 걱정이십니까? 그렇다면 마음에 자녀가 터널의 출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돈이나 건강 때문에 걱정이시라면 그것들이 마음에서 태양이 되어서 영광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이러한 태양의 후예로서의 삶을 끊임없이 십자가에서 죽여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며 터널의 출구를 가르쳐주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만이 터널의 출구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십자가는 태양의 후예들이 죽는 자리입니다. 주님의 부활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후예로 거듭나야할 것입니다. 주님이 승천하신 하늘은 우리가 향해야 될 터널의 출구입니다.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동안 이 세상에서 육체로 부딪히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빛 아래에서 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로 하나님을 등진 채 태양의 후예로 살아가는 내가 끊임없이 죽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하나님의 후예가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실제로 내 삶에 임하는 것을 감격과 신비로움에 휩싸여 바라보며 경험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