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스키 타러 가는 날, 석훈인 이미 어제 서울에서 내려왔지만
큰 아들이 서울에서 어제 내려오지 않아 오늘 부랴부랴 ktx천안아산역에서 만나 직접 태우고 양평으로 날랐다
그런데 아뿔사 소노호텔 양평 비발디파크 예약을 해 놓는다는 것이 실수로 소노벨 양평을 예약하여 취소하고 다시 잡으려했더니 당일은 안된단다
올라가면서 이리저리 리조트 예약을 애쓰다가 포기하고 지산으로 틀었다
가면 묵을 곳이야 어디든 있겠지 하고...
지산에 도착해 애들만 스키와 보드 렌탈을 하고 나는 처가 스키를 안 탄다 하여 같이 주변 관광을 하기로 했다
지산과 가까운 용인 포곡 정윤복, 정호선 묘역을 찾았다
지산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20여분 이동하니 용인 에버랜드 앞 포곡읍에 도착했다
먼저 신도비가 반겨준다
정윤복의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개석(介錫). 정수강(丁壽崗)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병조판서 정옥형(丁玉亨)이고, 아버지는 좌찬성 정응두(丁應斗)이며, 어머니는 군수 송충세(宋忠世)의 딸이다.
우리가 잘 아는 다산 정약용 선생의 8대조이다
1567년(선조 즉위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그 해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에 등용되고, 이어 예조좌랑·수찬·집의·우승지·대사성·부제학·도승지·병조판서·동지중추부사 등을 지냈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난이 일어나자 정여립과 친하였다는 이유로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가 다시 행호군으로 보직되었으나, 계속 말썽이 일어나므로 물러나 수년 동안 한거하였다.
임진왜란 때 동서로호소사(東西路號召使)로 기용되고, 이어 우통어사(右統禦使)가 되었다.
선조가 북쪽으로 피란할 때 다리가 불편하여 따라가지 못하고, 분조(分朝)인 이천(伊川)으로 가서 병조참판을 제수받고 가산군에 이르렀을 때 병이 심해져 죽었다.
이준의 찬, 윤필병의 전으로 되어있는
아들 정호선의 신도비와 같이 두 기가 나란히 비각에 보호되어 대로변에 있었다
신도비각 왼쪽 아래에는 후손의 효자각이 있었다
재자 돌림인 것을 보니 정윤복 선생으로부터 7대를 내려온 항렬의 후손이다
처음엔 신도비각 위쪽에 묘가 있나 하고 올라가보았더니 묘가 있긴 있는데 평강채씨들의 묘였다
다시 내려와 서쪽 방향의 길로 이동하니 묘역이 보였다 주변이 다 개발되어 단독주택지가 되어 어느 길이 옛 길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이불을 터는 주민에게 물으니 나주압해정씨에 대한 내용은 모른채 묘역이 있다는 정보만 알려주어 찾았다
범상치 않은 보호수를 보니 이제야 옛 사람의 품격이 나타나는 곳임이 느껴졌다
묘역 앞에서 잘 관리된 재실 및 사당이 보인다
대사헌공 재실이라고 표지석에는 쓰여 있었다
사당과 재실은 닫혀있어 들어가보진 못했고 역시 사당 쪽과 연결된 묘역으론 올라가지 못해 옆 집의 밭을 이용해 묘역의 산에 올랐다
높이가 다른 밭 두 곳에 따로 두 동의 비닐하우스를 두고 한 곳에선 할아버지들이 한쪽에선 할머니들이 모여 앉아 차가운 겨울햇살을 맞으며 도란도란 말씀들을 하고 계셨다
오미크론까지 변이된 지독한 코로나 탓에 동네 경로당이 문을 닫으니 생긴 풍경들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