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 3일·자택 2일”… 코로나19 이후 ‘하이브리드 워킹’이 뜬다
김윤종 파리 특파원 동아일보 2021-06-24 17일 스위스 제네바 국제노동기구(ILO) 본부에서 열린 ‘일의 세계 정상회담’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화상을 통해 코로나19와 고용 피해, 일의 미래를 주제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그 아래에서 가이 라이더 ILO 사무총장(왼쪽)이 대면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ILO 제공
《17일(현지 시간) 오전 11시 스위스 제네바 국제노동기구(ILO) 본부에서 ‘일의 세계 정상회담(World of Work Summit)’이란 행사가 열렸다. 하루 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정상회담이 제네바에서 이뤄진 탓에 많은 관심을 받진 못했지만 일반인의 삶에 매우 중요한 논의들이 오갔다. 화상 기조 연설자로 나선 프란치스코 교황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으로 세계가 전례 없는 고용 감소를 겪었다”며 이번 사태를 계기로 사람이 중심인 ‘일의 미래’를 만들자고 촉구했다.》
교황의 기조연설은 1919년 ILO 설립 후 102년 만에 처음이다. 이날 187개 회원국 정부, 노사단체 대표들은 코로나19에 따른 일자리 감소,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노동, 인간의 가치 등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코로나19로 대면 노동 특히 타격
스위스 제네바의 국제노동기구(ILO) 본부 전경. 건물 내부는 3개의 큰 공간이 연결된 구조로 ‘노사 정의와 소통’을 상징한다. 제네바=김윤종 특파원 zozo@donga.com ILO에 따르면 코로나19로 지난해 전 세계에서 사라진 일자리는 총 2억5500만 개다. 세계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사라진 일자리의 4배에 해당한다. 지난해 전 세계 총 노동시간 또한 2019년보다 8.8% 감소했다. 이로 인해 3조7000억 달러(약 4200조 원)의 손실이 발생했다.
코로나19 백신 접종이 이뤄지고 있지만 올해도 상황을 낙관하기 어렵다. ILO는 올해 역시 최대 1억3000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코로나19에 따른 일자리 감소는 특히 저소득층의 삶을 어렵게 하고 있다. 배달, 청소, 돌봄, 건설 등 대면 업무가 많고 임금이 낮은 직군의 일자리가 주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프랑스 파리11구에 사는 프리랜서 이리나 로타뤼 씨(40)는 최근 컴퓨터 코딩 공부를 시작했다. 성인이 된 후 줄곧 미술 전시 및 교육 업무를 했지만 코로나19로 전시회가 줄줄이 취소되자 컴퓨터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절실해졌다. 르몽드에 따르면 프랑스 필수 노동자의 코로나19 사망률은 일반 근로자의 2배에 달했다. 영국의 일부 택배회사들은 비용 절감을 이유로 소속 택배 기사에게 마스크 등 방역장비를 제대로 공급하지 않아 거센 질타를 받았다.
이에 유럽 각국은 필수 노동자 살리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프랑스는 소득이 전년 동기 대비 50% 이상 감소한 자영업자, 필수노동자에게 월 최대 1500유로(약 202만 원)를 지급하고 있다. 독일과 이탈리아 역시 비슷한 제도를 운용하고 있다.
이런 보조금이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이번 ‘일의 세계 정상회담’에서도 “변이 바이러스 창궐 등으로 코로나19 사태가 예상보다 훨씬 장기화할 가능성이 큰 만큼 지속적인 지원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재택·비대면·무인의 일상화
세계 노동계의 또 다른 화두는 ‘코로나19가 대폭 앞당긴 노동의 변화’다. 인공지능(AI), 빅데이터, 4차 산업혁명으로 재택근무, 비대면 업무, 무인화 등이 일상이 됐다.
파리 근교 르발루아에 위치한 세계 최대 종합화장품 회사 로레알 본사에서는 코로나19를 계기로 직장문화가 대대적으로 바뀌었다. 21일 만난 직원 마농 씨는 “코로나19에 따른 전면 봉쇄 조치가 끝났음에도 현재 주 2, 3일 재택근무 체제가 굳어졌다”며 “과거에는 새로운 성분 개발 등을 중시했지만 코로나19 이후에는 환경친화적 제품 개발에 힘쓰고 있다”고 소개했다.
스위스 바젤의 제약사에 다니는 파트리크 씨는 파리에서 재택근무를 한다. 필요할 때만 스위스로 건너가 본사에서 업무를 본다. 그는 “물가가 비싼 스위스 기준으로 월급을 받으면서 상대적으로 물가가 싼 프랑스에서 거주하니 금상첨화”라고 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유럽 직장인 4700명 중 72%가 “주 5일 내내 사무실로 출근하는 방식을 거부하겠다”고 답했다. 상당수 영국 기업들은 다음 달 19일 봉쇄 조치가 해제된 후에도 출근과 재택근무를 병행하는 유연근무제를 고려하고 있다.
각종 인프라가 몰려 있지만 물가가 비싸고 인구 밀집도 또한 높은 대도시 대신 물가가 싸고 쾌적한 환경을 갖춘 중소 도시가 각광받는 모습도 뚜렷하다.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에서 약 220km 떨어진 더니골 지역에 위치한 소프트웨어 업체 ‘3D이슈’는 주 4일제와 재택근무를 앞세워 더블린에 살던 정보기술(IT) 업계 인재를 속속 끌어들였다. 파리 지하철에도 수도권에서 멀리 떨어진 남동부 보르도 지역 기업의 구인 광고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원격 근무가 가능한 세상이 가져온 풍경이다.
세계적 대기업들은 사무실 면적 또한 속속 줄이고 있다. 영국 HSBC는 기존 사무실 면적의 40%를 줄이기로 했다. 미국 최대 은행 JP모건체이스 역시 직원 100명당 평균 60석의 좌석만 유지하기로 했다. ‘줌’ 같은 단순 화상회의를 넘어 가상현실(VR), 3차원(3D) 기술을 이용한 업무도 빠르게 늘고 있다.
‘노동의 소멸’ 우려도
코로나19 사태로 대면 업무가 어려워지면서 유통, 서비스업을 중심으로 한 ‘노동의 소멸’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2월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일자리의 14%가 자동화될 위험에 처했다. 맥킨지 컨설팅 역시 유럽연합(EU) 전체 근로자 5300만 명의 22%가 2030년까지 자동화의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프랑스 대형 유통업체 카르푸는 코로나19 후 ‘무인 배송’을 대폭 늘렸다.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앱)으로 제품을 주문하면 특정 소비자의 집에서 가장 가까운 지점으로 물품을 보내주는 식이다. 유통업계의 육체 노동자들은 “우리 일자리가 사라지는 것 아니냐”며 불안감을 표시한다. 프랑스 타이어회사 미쉐린, 농식품기업 다농은 최근 각각 2000여 명의 구조조정 계획을 발표했다.
원격 근무의 단점을 지적하는 사람도 늘고 있다. 제네바에서 만난 30대 회사원 알렉산드로 씨는 “재택근무를 오래하다 보니 일과 사생활의 경계가 오히려 더 불분명해졌다. 집에서 일하니까 효율성이 떨어져서 오히려 사무실로 출근하고 싶다”고 말했다. 영국 노동 전문 컨설팅업체 리스맨에 따르면 20대 직장인의 72%가 “집이 좁아 업무 전용 공간을 마련하기 힘들다. 또 사회적 친목을 위해서라도 사무실에서 근무하고 싶다”고 답했다. 재택근무로 동료와의 협력 및 토론 기회가 사라지고 집단지성을 통한 혁신 또한 감소한다는 지적도 상당하다.
재택근무에 따른 사생활 침해 논란도 빼놓을 수 없다. 대부분의 유럽 회사는 웹캠, 원격 접속을 통한 재택근무자 업무 측정을 금하고 있다. 이에 따라 사무실 근무와 재택근무의 적절한 ‘중간점’을 찾자는 움직임이 본격화하고 있다. 영국 시사 매체 이코노미스트는 “일부는 사무실에서, 일부는 집에서, 일부는 또 다른 곳에서 일하는 ‘하이브리드’ 모델이 일의 미래가 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제네바에서
김윤종 파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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