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 결혼식을
독일 간 세 아이는 삼십을 훌쩍 넘겼으나 모두 결혼을 안 한다고 했다.
그중에도 딸이 제일 완강했다. 그런데 유학 떠난 지 10년 가까이 되던 해, 느닷없이 딸이 결혼 결심을 알려왔다. 신랑감이 독일 사람이라 우리 가족이 멀리 떨어져 살아야 할 생각에 망설였지만, 아이가 결혼한다는 것만 고마워서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었다. 신랑감은 딸아이와 같은 대학에서 정보학 박사과정에 있다고 했다. 한국에 인사하러 왔을 때 잘생긴 외모에 끌렸고, 딸아이가 말한 대로 착하고 반듯해서 마음에 들었다.
독일에서는 혼인 신고를 하려면 일단 시청에서 결혼식을 해야 한다. 딸과 사위는 그들이 사는 자브뤼켄의 시청에 결혼식 날짜를 잡으려고 봄부터 일찌감치 신청했으나, 순서가 밀려 방학 중인 7월 말에야 겨우 날을 잡을 수 있었다. 우리 부부는 그렇게 딸아이 결혼식에 참석하고자 서둘러 독일로 떠났다.
예물이라야 신랑 아버지가 끼던 백금 반지를 두 개로 나눈 것이었다. 예복은 평소에도 입을 수 있도록, 신랑에게는 양복, 신부에게는 투피스로 장만했다. 화사한 드레스를 입은 딸의 모습이 보고 싶었으나 검소한 아이는 완강하게 거부했다. 시청에서 식이 끝나자 모두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한 명씩 신랑 신부를 포근히 안아준다. 신랑 신부를 안아주려고 길게 줄을 서서 느긋하게 기다리는 사람들, 그 풍경은 일 급수에 사는 열목어를 보는 듯 가슴에 투명한 파문을 일으켰다.
시청 복도에서 기다리던 그들 중 한 사람이 독일어로 무어라고 하니 사람들이 몸을 흔들며 폭소를 터트린다. 마룻바닥에 웃음이 때글때글 튀어 다녀 흡사 분무기로 기쁨을 뿌려주는 것 같았다. 그날, 사람들은 유난히 많이 웃어댔다. 그들이 웃을 때마다 왜 웃는지 궁금했으나, 아이들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물어볼 수 없었다. 한 남자가 갑자기 큰 소리로 축가를 부르자 기쁨을 표현하지 않으면 몸살 날 것 같은지, 모두 몸을 흔들며 따라 부른다. 그러자 나의 경직된 세포가 스르르 풀리며 물색없이 그들 속에 섞이고 싶어졌다.
시청 문을 나서는 신랑 신부를 친구들이 하트가 그려진 큰 천으로 가려버린다. 신랑이 그 하트를 가위로 오린 뒤 뚫어진 구멍을 통해 신부를 안고 나온다. 그러자 시청 광장 근처에 서 있던 차들에서 경적 소리와 휘파람 소리가 요란스레 울린다. 신랑 신부와 아무 상관 없는 사람들이었다. 유리창을 내리고 차 안에 있는 사람도 있고 아예 차에서 내린 사람도 있었다. 모두 박수로 축하를 해주며 신호등이 바뀌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는 신호대기 중이라서 이렇게 차가 밀린 것인가 하고 의아해서 고개를 내밀어 앞을 내다봤다. 그러나 신랑 신부를 축하해 주려고 어떤 앞차가 일부러 차를 세우자 줄줄이 밀려 있었던 것이다. 실로 감동적인 풍경이었다.
피로연은 딸이 다니는 미술대학 뜰의 등나무 아래에 준비했는데, 갑자기 빗발들이 자욱하게 공중을 점령하고 달려왔다. 할 수 없이 건물 안의 조그만 강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자식이란 온종일 보고도 돌아서면 곧바로 또 보고 싶고, 한 사흘만 뜸해도 궁금한데, 이제 아이는 이렇게 결혼을 해버려서 독일에 발을 묻으려고 한다. 비 내리는 창에 이마를 댔다. 유리창에 빗방울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가 물방울이 툭 터지며 내 눈물처럼 흘러내린다. 물방울의 표정은 어쩜 저렇게 풍부하고 다양할까.
시청 문 앞에서 오려냈던 커다란 하트를 벽에 붙이자 하객들이 그 위에 축하의 글을 남긴다. 익살스러운 막내가 “조카를 낳아도.”라고 써서 한참을 웃었다. 안사돈이 축시를 낭독했고, 어느 여인이 축가를 부르자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 합창을 했다. 나는 즉석에서 딸의 행복을 간절한 마음으로 기원하는 글을 써서 낭독하니 아이 후배가 독일어로 통역하여 박수를 받았다.
한국 음식을 먹고 싶어 하는 유학생 친구들이 많이 올 것 같아서 몇 가지를 간소하지만 풍부하게 준비했다. 김치와 오이소박이가 적당히 익었다.
안사돈은 피로연에 쓸 케이크와 커다란 통에 담긴 생맥주와 와인과 안주를 푸짐하게 준비했다. 딸은 여자 친구들보다 독일 남자 친구들이 더 많아서 그들과 함께 음악을 준비하고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밴드의 연주와 다 같이 춤을 추는 축하 이벤트가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그들 결혼식엔 축의금이라는 개념이 없었고, 그 대신 소박한 선물로 대신했다. 아이들이 필요한 물건 리스트를 며칠 전부터 인터넷에 올려놓는 것이다. 친구들은 그 리스트 중에 자기가 선물하고 싶은 물건에 체크를 해서, 똑같은 선물을 사는 낭패를 막는다. 주로 벽걸이, 작은 등, 와인 잔 같은 자잘한 소품들이다.
선물을 주면서 하객들은 신랑 신부 양 볼에 뺨을 대고 따뜻하게 껴안아 준다. 행복해하는 딸애를 보니 콧등이 시큰해진다.
피로연 도중에 딸이 의자 뒤에서 시어머니의 어깨에 두 팔을 얹고 자신에 찬 모습으로 담소하는 것을 보니 문득 딸이 아기 때 모습이 떠올랐다.
아이는 통통해서 반바지를 작고 동그란 엉덩이에 끼우고 뛰어다녔고 이마엔 솜털이 보송보송했다. 콧등에 땀을 달고 뺨이 사과같이 익었다. 아이는 유난히 목욕을 좋아해서 분홍색 조그만 손과 말랑말랑한 발로 물을 첨벙거렸다. 그러던 아이가 속성으로 키운 채소같이 나날이 키가 자라 초등학교 때 벌써 고등학생 키가 되었다. 불현듯 딸을 키우던 싱싱한 젊음의 기억이 아슴아슴 밀려왔다.
사돈집에 초대를 받았다. 딸의 시어머니 될 분은 아시아 여행을 많이 다녀서 장식장에는 여행하면서 사 모은 동양풍의 소품이 많았다. 달마 상과 돌부처도 있었다.
그녀는 “내가 너를 만나려고 이렇게 동양 문화를 좋아했던 것 같다.”라면서 딸을 지극히 예뻐했다. 안사돈은 손수 만든 예쁜 초콜릿 상자와 십자수 벽걸이를 선물했다. 한 송이의 꽃과 여러 개의 들풀로 장식하고 그 위에 자디잔 구슬로 하트를 넣어 만든 초콜릿 상자. 그것은 나를 감격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아이들이 결혼하기 전의 내 생일에도 안사돈은 귀걸이, 팔찌, 벽걸이 등 소소하고 깜찍한 선물을 보내오곤 했다. 그녀는 작고 로맨틱한 선물로 나를 타임머신에 태워 싱그러운 소녀로 돌려놓았다.
나도 독일 가기 전 인사동에 들러 전통적인 한국 소품들을 준비했다. 내가 가지고 간 자그만 선물에 황홀해하는 그녀의 표정은 살포시 애틋하기까지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사돈 간에는 서로 어려워서 소소하고 감성적인 선물로 마음을 표현하기는 어려운데.
그날 결혼식에 온 하객들은 모두가 예술가인 듯 다투어 시 낭송을 했다. 흡사 어느 문학회 모임에 온 듯 착각이 들 정도였다. 어울려 춤은 유연하게 흘러갔고, 노인과 청년들이 즉석에서 부르는 합창이 어쩜 그리 호흡이 잘 맞는지. 그들의 우람한 체격에서 저렇게 아름답고 섬세한 정서가 어디에 숨어 있었을까.
우리 부부야 그들 속에 잘 섞이지는 못했지만, 객석에서 한 편의 아름다운 뮤지컬을 감상한 듯했다. 형식적이고 경직된 우리의 결혼 문화에 비하면 그들은 검소하면서도 참으로 감성적이고 투명했다. 지금도 그들 생활 속에 녹아있는 여유와 그 익살스럽고 멋들어진 결혼식을 생각하면, 마음의 일렁임이 감미로울 정도로 따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