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다음을 읽고 <작성 방법>에 따라 서술하시오. [4점]
일제는 도시를 식민통치의 거점으로 삼으려는 의도로 ㉠1914년 부제(府制)를 시행했다. 이로 인해 조선시대부터 성장한 대다수 전통도시의 위상은 크게 떨어졌고, 신흥도시가 이 자리를 대신했다. 신흥도시는 철도 건설로 사회․경제적 영향력을 갖게 된 경우가 많았으며, 그중에는 일본과의 무역을 위해 개발된 항만도시, 북부 지방의 공업도시 및 군사도시 등도 있었다. 1910년 당시 인구 5만 명 이상의 도시는 경성과 부산 두 곳에 불과하였으나 1925년에는 5개로 늘었고, 인구 1만~5만의 도시는 12개에서 26개가 되었다. 1910년대 도시인구의 비율은 조선 전체 인구의 3% 미만이었으나 1940년에는 11.6%로 증가했다. ㉡조선 농민의 빈곤화와 도시 유입이 1920년대 이후 도시인구 확대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일제 강점기 재조(在朝) 일본인의 수는 최대 70만 명으로 총인구의 3%에 불과했으나, 도시에서는 인구의 약 20%, 납세액의 약 60%를 담당할 정도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경성과 같은 대도시는 상품경제와 소비문화의 중심지로 외형적 성장을 거듭했으나, 조선인 세궁민과 실업자의 수는 격증하여 ㉢도시 공간은 확연하게 이원화되었다. 중일전쟁 이후에는 군수물자의 생산과 유통을 위한 사회·경제 전반의 통제가 가속화되는 가운데, 도시에서는 소비 절약과 생활 간소화 등이 강조되었다. 일제는 1939년 ‘조선 미곡 배급 조정령’을 제정하여 식량의 강제 공출과 배급을 추진했으며, ‘사치품 제조 판매 금지규칙’을 공포하였다. 나아가 원활한 물자 통제와 황국신민화 정책을 수행하고 주민의 일상생활을 감시하기 위해, 국민총력조선연맹의 말단 기구로 ( ㉣ )을/를 조직했다. |
<작성 방법> ◦밑줄 친 ㉠의 내용을 서술할 것. ◦밑줄 친 ㉡의 원인을 일제의 1920년대 농업정책의 실행 방법과 관련지어 서술하고, 밑줄 친 ㉢의 내용을 서술할 것. ◦괄호 안의 ㉣에 들어갈 명칭을 쓸 것. |
[세상의 모든 역사 한국사 601, 603쪽]
㉠1914년 부제(府制) 시행(1913년 부제 공포)를 통해 부윤의 자문기관으로 부협의회 설치
[우리역사넷 신편한국사] 1913년<부제>(제령 제7호)를 공포하여 부윤의 자문기관으로 부협의회를 설치하였다. 1920년에는<부제>(제령 제12호)와<면제>(제령 제13호)의 개정을 행하고<도 지방비령>(제령 제15호)을 새롭게 제정하였다. 이를 통하여 도의 자문기관으로 도평의회를, 면(지정면)의 자문기관으로 면협의회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부의원은 선출직으로, 그 외 협의회원은 임명직으로 하였다. 이들 지방의 자문기관은 각 지방단체의 세출입과 起債·지방세·사용료 등 부과세에 대한 사항만을 자문하도록 되어있다.
[마무리 5회 A 3번] [한국근대사2, 152쪽, 푸른역사] 일제는 본국과의 연결 고리, 식민지 지배와 수탈의 기지로 새로운 도시 체계를 만들려고 했다. 이러한 목적에 따라 1914년 4월부터 새로 부제와 지정면제가 도입되었다. 새로운 지방행정제도에 따라 전국이 13도 12부 220군 2522면으로 재편되었다. 일제 강점기 지방 행정 체계에서 도시라고 공인된 것은 12개 부와 24개 지정면뿐이었다.
㉡조선농민의 빈곤화와 도시 유입 원인 : 1920년대 농업정책. 산미증식계획 관련. 즉, 산미증식계획으로 일반적인 자영농민층 몰락. 임노동자화. 도시로 유입
㉢도시공간의 이원화 : [2015개정 천재 한국사 204쪽] 일본인과 한국인의 거주 지역 구분되었다. 서울에서는 청계천을 중심으로 남쪽의 일본인 거리를 남촌, 북쪽의 한국인 거리를 북촌이라고 불렀다. 남촌은 도로 시설과 은행, 백화점, 상가 등 근대적 도시의 모습을 갖추었으나 북촌은 그렇지 못하였다.
㉣애국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