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담 이윤우 조의 장인이며, 낙촌 이도장의 외조인 송담 채응린의 스승이신 계동 전경창 선생의 발자취에 대해 유림신문(儒林新聞)에서 수록된 글 입니다>>
1. 이 글의 제목인 ‘대구지역의 성리학을 열었다’는 의미에 대하여
대구지역의 유학과 유림에 대하여는 아직 많은 연구가 진행되지 못하였다. 그래서 필자는 대구유림에 대하여 연구를 함에 첫째로 계동 전경창 선생에 대하여 연재를 하고자 한다. 필자는 본 논고의 제목을 <대구지역의 성리학을 연 계동 전경창(1532~1585)>이라고 붙였다. 그래서 이 제목을 붙이게 된 연유에 대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전경창은 조선 명종 조에 대구의 파잠(파동)에서 태어나 선조 대(代)에 활동한 분이다. 전경창에 대하여 괴헌 곽재겸(郭再謙: 1547~1615)의 문집인 『괴헌집(槐軒集)』 권4 부록의 「사우록(師友錄)」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전계동(全溪東)의 휘는 경창(慶昌)이고 자는 계하(季賀)이다. 관직은 지평(持平)에 이르렀고 응교(應敎)에 추증되었다. 국계변무(國係辨誣)의 일에 대하여 소(疏)를 올려 전임사신을 보내게 하였다. 퇴계선생의 문인으로 달성의 성리학의 스승(達城理學之師)이다. 연경서원의 방묘(傍廟)에 배향되었다. 공(괴헌)의 행록(行錄)에 “공에게 근사록 1부를 주면서 ‘이 책은 진실로 그대가 공부해야 할 책이다.[此眞子之書也]’라고 말하였다.
위의 글은 계동 전경창의 자호(字號), 사승관계 및 학문의 성격, 관직, 조정에서의 활동, 서원의 배향 등에 대하여 간략하게 잘 요약하여 말하고 있다. 위의 글 중에서 우리가 주목하여야 할 대목은 ‘퇴계선생(이황: 1501~1570)의 문인으로 대구(달성) 성리학의 스승’이라는 말이다. 이 말은 전경창이 조선 중기 대구지역 유림에 있어서의 위치와 그의 학문의 성격을 말한 것인데 전경창이 퇴계에 의하여 종합된 정주(程朱)의 성리학을 대구지역에 올바르게 정착시켰다는 의미일 것이다.
『괴헌집』에서 말한 전경창에 대한 언급은 당시 대구지역의 유학자와 후학들에 의하여 확인되고 있다. 당시 대구지역의 향장(鄕長: 낙재 서사원이 칭한 말, 낙재는 또한 존장尊丈이라고도 하였다.) 이었던 송담(松潭) 채응린(蔡應麟: 1529~1584)은 전경창의 형인 세심정(洗心亭) 전응창(全應昌: 1529~1586)과 동갑으로 전경창보다 나이가 3살 위였다. 그런데도 채응린은 ‘그를 스승으로 삼겠다.(師事之)’고 말하였다.(『송담실기)』 이것은 전경창이 퇴계선생의 문인으로 그의 학문을 흠모하여 말한 것이다. 채응린은 퇴계 재세시(在世時)에 선생을 배알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였다. 그래서 1580년(선조 13, 경진)에 연정(蓮亭) 류요신(柳堯臣: 1550~1618), 곽재겸과 더불어 도산서원을 방문하여 퇴계의 사당에 배알하였다.
또 대구지역의 존장(尊丈: 낙재 서사원이 칭한 말)이었던 임하(林下) 정사철(鄭師哲: 1530~1592)은 전경창에게 한 만사(輓詞)에서 “반생동안 저버리지 않고 경륜한 뜻은, 한 생각에도 잊지 않았네. 퇴노(退老: 퇴계)의 기약함을!(半生不負經綸志, 一念難忘退老期)”이라고 하고, 제문에서 “어질어도 수명을 얻지 못하였고 벼슬이 덕에 차지 못하였다. … 선비는 시구(蓍龜)를 잃었고 나라는 동량(棟樑)이 꺾였네.”라고 말하고 있다. (『임하실기』)
만사에서 반생(半生)이라고 표현한 것은 전경창이 늦깨 과거에 합격하여 12년 동안밖에 관직에 있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으로 보인다. 위의 시를 살펴보면 전경창이 조정에서 행한 정치적인 포부는 퇴계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그 이상을 실현하려고 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시구(蓍龜)는 주역에서 점을 치는 도구인 거북과 시초이다. 인간사에 의문이 생겨 결단을 내리지 못할 때 이 시초를 가지고 점을 쳐서 길흉을 판단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를 통하여 나타나는 결과를 절대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구를 잃었다’는 말은 ‘선비들이 의지할 곳을 잃었다’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전경창이 당시에 향리에서 차지하고 있었던 그의 위치를 알 수 있다. 또 “나라는 동량이 꺾였다.”라고 하여 조정에서 정무를 시행할 때 그의 큰 비중을 말하고 있다. 이 말은 동향(同鄕)의 벗이 한 말이라고 하여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니다. 이것은 당대의 최고의 관리 및 사우들이 전경창에게 한 만제문(輓祭文)을 보면 알 수 있다.
정사철 역시 퇴계의 문하에 급문(及門)하지 못한 것을 평생 한으로 여겼다. 그는 퇴계선생께서 타계하자 선생의 장례에 참석하였으며 만사를 지었는데 결락되고 ‘ 식동방오도이(歎息東方吾道已)’1구만 남아 있다.
전경창은 채응린, 정사철과 깊이 교유하였는데 이 세분은 조선 중기 대구지역 성리학의 선구자들이다. 정사철은 자신과 전경창의 관계를 백아절현(伯牙絶絃)으로 표현하고 있다. 백아는 중국 춘추시대 거문고의 대가로 그의 곡조를 벗인 종자기(種子期)가 유일하게 알아들었다고 한다. 백아가 거문고를 타면서 고산(高山)에 뜻을 두자 종자기가 ‘높고 높기가 마치 태산 같도다.(峨峨兮若泰山)’하였고, 또 유수(流水)에 뜻을 두자 ‘넓고 넓기가 마치 강하 같도다(洋洋兮若江河)’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자신의 거문고 곡조를 올바르게 알아듣는 사람이 없음을 한탄하고 거문고의 줄을 끊어버렸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아양곡(峨洋曲)이란 곡조가 생겨나게 되었으며 자신을 알아주는 진정한 벗(知己)을 지음(知音)이라고 하는 고사가 생겨나게 되었다. 이 고사는 『열자(列子)』의 「탕문(湯問)」에 보인다.
위에서 정사철이 말한 ‘백아절현’은 채응린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다고 여겨진다. 여기에서 대구지역 제(諸) 선생의 보인(輔仁)과 익우(益友)의 관계를 볼 수 있다. (다음 호에 계속) <bonwkoo@hanmail.net>
※ 이 글은 《유림신문(儒林新聞, 대구향교 유림신문사 발행), 제16호(2009년 3월 15일 발행 1면)》에 수록된 글입니다. 필자는 구본욱(具本旭: 대구향교 장의掌議)입니다. ‘유림신문’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옥산전씨 선영하에 있는 무동재(武洞齋), 그 아래에 계동선생 태생지가 있다.
대구광역시 수성구 파동 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