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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09
에베소서 1장 11절 [제7-8문]
우리가 믿어야 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설명할 때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으로 구분해서 설명합니다. 존재에 대해서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에서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의 속성을 통하여, 그리고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한 분 안에 삼위로 계신다는 내용을 통하여 배울 수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사역으로 넘어가게 되는데, 일반적으로 구분하자면 내적 사역이 있고 외적 사역이 있습니다. 외적 사역은 피조물을 향한 사역으로 창조와 섭리, 구원과 심판의 전 역사를 통해 나타납니다. 반면 내적 사역은 피조물을 향한 직접적인 사역에 앞서 하나님 안에서의 일하심인데, 보통 작정이 여기에 속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피게 되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7문이 작정에 대한 내용이고, 8문 이하 38문까지가 작정의 실행으로서 창조와 섭리, 그리고 구원과 심판의 전 내용을 다룹니다.
우선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7문을 보시면 하나님의 작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제7문. 하나님의 작정은 무엇입니까?
답. 하나님의 작정은 그의 뜻의 의논에 따른 영원한 목적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 이 작정에 의해 일어날 일은 무엇이든지 미리 정하셨습니다(엡1:4,11, 롬9:22-23).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에서는 하나님의 작정을 그의 뜻의 의논에 따른 영원한 목적이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달리 표현하자면 하나님께서 앞으로 될 모든 일들을 영원 전에 미리 계획하시고 정하신 것을 작정이라고 합니다. 시간이 창조되기도 전, 공간이 만들어지기기도 전에, 다시 말해 창세기 1장의 시작이 있기도 전에 하나님은 모든 일을 자신의 뜻을 따라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에베소서 1장 11절을 보시면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라고 하는데, 우리말 번역에서 ‘계획’이라는 단어가 본래는 ‘작정’이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그리고 ‘결정’대로 일하신다는 것도 결정이 아니라 ‘의논’입니다. 올바르게 번역하면 “모든 일을 그의 뜻의 의논대로 일(역사)하시는 이의 작정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입니다. 즉 하나님은 작정하시는데, 어떻게 작정하시느냐? 모든 일을 그의 뜻의 의논대로 작정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작정하신대로만 일하시는데, 그것이 어떻게 실행되느냐 할 때 소요리문답은 창조와 섭리로 실행된다고 고백합니다. 그것이 제8문입니다.
제8문. 하나님은 그의 작정을 어떻게 실행하십니까?
답. 하나님은 그의 작정을 창조와 섭리의 역사 안에서 실행하십니다.
다시 에베소서 1장 11절을 보시면 “모든 일을 그의 뜻의 의논대로 일하시는 이의 작정을 따라...”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영원 전에 미리 계획하시고 정하신 것이기 때문에 시간적 순서가 아니라 논리적 순서입니다. 이런 논리적 순서를 따르자면 하나님의 작정이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자신의 뜻에 따라 영원한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서 일하시는데, 이 뜻 없이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고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소위 우연이라는 것이 있는가? 우연이라는 말은 사전적인 의미로 아무런 인과 관계가 없이 뜻하지 아니하게 일어난 일을 말하는데, 그런 일이 있는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7장 26절에 보면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인류에 많은 족속이 있지만 그들을 한 혈통을 만드신 것도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았으며, 나아가 그들이 흩어져 온 땅에 살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인류의 모든 역사가 하나님의 뜻 안에만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밖에서 일어나는 일은 결코 없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마태복음 10장에서는 참새 한 마리가 살고 죽는 것조차 하나님의 뜻 없이는 일어날 수 없다고까지 말씀합니다(마10:29).
우리가 보기에 우연처럼 보이는 일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비뽑기가 그것입니다. 그러나 잠언 16장 33절은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즉 우연처럼 보이는 일도 실제로는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실행되고 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악인까지도 악한 날을 위하여 지으셨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말 번역으로는 잠언 16장 4절이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고 되어 있지만, 원문에 맞는 번역은 이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자신을 위해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을 위해 지으셨느니라” 하나님은 악인조차 자신의 뜻을 두고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을 하나님이 악인을 만드셨다는 그런 뜻으로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창조 부분에서 우리가 확인하겠지만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다 만드시고 난 뒤 만드신 모든 만물에 대하여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은 창조의 역사를 통해 죄를 만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죄 문제와 관련해 하나님의 작정만 나오면 하나님이 마치 죄를 창조하신 것처럼 말하는 이들이 있지만, 하나님은 결코 죄를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의 증거에 의하면 죄는 인간의 불순종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잠언 16장 4절의 말씀은 하나님이 죄를 창조했다, 하나님이 악을 창조했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적어도 죄와 악이 하나님의 뜻 밖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는 내용입니다. 죄와 악조차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해되어야 할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결코 우연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를 만나고, 자녀를 낳아 기르는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습니다. 이 사람과의 만남, 저 사람과의 만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그런 만남 속에서 여러 가지 일들을 겪게 되는 모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일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런 일들 속에서 우리는 기뻐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고 때로는 힘들어 하기도 합니다. 여기에 우연이 있는가? 없습니다. 다 하나님의 뜻이 있기에 겪게 되는 일들입니다. 어려움만큼은 없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겠지만 하나님의 뜻 밖에서 우연히 일어나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볼 때 좋지 않은 일에 대하여 종종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시는가?”란 질문을 하게 됩니다. 한 예로 죄가 아담의 불순종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금하신 열매를 먹음으로 인해 죄가 들어오게 되었고, 그 결과 모든 인류가 죄 가운데 놓이게 되었습니다. 또한 죄로 말미암는 고통 가운데 놓이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대해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는 왜 선악과를 만드셨는가?”란 질문을 하기도 합니다. 마치 하나님이 실수라도 한 것처럼 그렇게 질문하는 경우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되는 것이 있는데, 하나님의 뜻의 이유나 원인은 물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로마서 11장 33절로 답하자면 이것입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심지어 하나님의 뜻의 이유나 원인은 묻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어떤 오류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완전한 분이 뜻의 의논을 따라 작정하시고 작정하신 바대로 실행하시는데, 어떻게 오류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죄조차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았다고 한다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실수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그것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왜’라는 질문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심으셨는가?”, “왜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범하도록 뜻을 세우셨는가?” 이렇게 생각하시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록된 말씀을 넘어가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자신의 선하심과 완전한 지혜로 모든 일을 행하시는 줄 알아야 합니다. 죄를 뜻하셨지만 죄를 통해서조차 결국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공의와 선을 드러내실 목적으로 그렇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뜻하신 바의 이유나 원인을 묻는 것이 아니라, 이 일을 통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즉 “죄 조차 하나님의 뜻 가운데 두셨는데,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바가 무엇인가?” 이렇게 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자신의 뜻을 따라 행하신다고 할 때 모든 일이 하나님의 완전한 지혜로부터 나와 자신의 영광을 드러낼 목적으로 일하신다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조금 전에 잠언 16장 4절을 언급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온갖 것을 그 자신을 위해 지으셨다고 할 때 악인도 악한 날을 위해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이때 자신을 위해서라는 말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말과 같습니다. 즉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악인조차 두실만큼 그렇게 지혜롭게 일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의인을 두신 것은 더더욱 하나님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전도서 3장 14절에서는 하나님의 백성과 관련해 다음의 목적도 있다는 것을 말씀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그 위에 더 할 수도 없고 그것에서 덜 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 즉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경외토록 하기 위해서 자신의 뜻을 펼치신다는 것입니다. 특히 전도서 3장을 어떤 말씀으로 시작하느냐?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전3:1-4) 한 마디로 사람은 여러 가지 일을 겪는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자신이 하시는 일의 시작과 끝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고, 형통한 일과 곤고한 일을 병행하사 사람으로 장래의 일을 전혀 알 수 없게 하셨습니다(전3:11, 7:14). 때문에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을 능히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전8:17). 그러나 이 모든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목적하시는 바가 있는데, 그것이 뭐냐? 적어도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리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형통한 일이 있어도 그렇게 해야 하고, 혹 곤고한 일이 있다 할지라도 그리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 가운데 우연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뜻을 정하시고 실행하시는데, 그런 점에서 우리는 어떤 일들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려야 합니다. 욥기 1장에 나오는 욥의 신앙이 그러했습니다. 하루아침에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외적인 복을 잃어버렸습니다. 어느 정도 물질의 복을 받았지만 하루아침에 거지꼴이 된 것입니다. 이때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대부분 원망하고 불평하지 않겠습니까?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하면서 답답해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욥은 주신 이도 여호와시고 거두신 이도 여호와이시기 때문에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아야 한다고 고백했습니다(욥1:21). 우리가 모든 일 앞에서 갖추어야 할 자세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전도서의 말씀대로 하자면 복을 주실 때만 하나님의 경외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되고, 주신 복을 거두어 가실 때도 하나님의 경외하는 자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에베소서 1장 11절을 보시면 “모든 일을 그의 뜻의 의논대로 일하시는 이의 작정을 따라...” 이렇게 되어 있는데, 모든 일이 그의 뜻의 의논대로 작정되었다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의논이라는 말은 사람들이 서로의 견해를 나눔으로 자신의 부족한 생각을 채우는 그런 개념이 아닙니다. 만약 의논을 그렇게 생각한다면,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의논을 인간의 의논처럼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지혜를 피조물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것으로 있게 될 것입니다. 인간이야 지혜와 명철에 있어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의논해서 더 좋다고 여기는 일을 결정하는 일이 있지만, 하나님께 그런 일이 있는가? 결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과 명철에는 한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속성을 다룬 바 있고, 또 하나님의 존재하심에 있어서 삼위일체로 계시다는 것을 살핀 바 있는데, 성부 성자 성령은 동일본질로 계십니다. 동일본질이시기 때문에 모든 속성에 있어 차이가 없습니다. 성부가 무한하시다면 성자도 무한하시고 성령도 무한하십니다. 성부가 영원하시다면 성자도 영원하시고 성령도 영원하십니다. 성부가 불변하시다면 성자도 불변하시고 성령도 불변하십니다. 그렇다면 지혜와 지식은 어떠하겠습니까? 명철은 어떠하겠습니까? 성경은 하나님의 지혜와 명철이 한계가 없다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때문에 누가 하나님을 지도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선지자 이사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여호와의 영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그가 누구와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에게 정의의 길로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 주었느냐”(사40:13-14) 사도 바울 역시 동일하게 표현합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롬11:33-34)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논은 인간의 의논처럼 생각해서는 안 되고, 본질과 속성이 동일하며 동등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통하심’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교통하시되 성부의 뜻과 성자의 뜻과 성령의 뜻이 다른 것이 아니라 일치 된 그런 교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교통하심에 대하여 다 알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뜻의 목적이 자신의 영광이듯 하나님의 의논의 목적 또한 자신의 영광이라는 것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모든 것을 작정하실 때 에베소서 1장 11절에서 증거 하고 있는 것처럼 자신의 뜻의 의논을 따라 작정하시는데, 이 작정 안에 다루어지지 않는 내용은 하나도 없습니다. 즉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작정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죄조차 하나님의 작정 안에 있습니다. 보통 모든 만물과 그 현상에 대하여 미리 정하시는 것을 작정 혹은 일반 작정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안에 선택과 유기의 내용으로 하는 특별한 작정이 있는데, 이것을 예정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선택과 유기의 대상은 인격적 피조물로써 천사와 인간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만물에 대하여 작정하신 하나님은 천사와 인간에 대하여 특별한 작정을 하셨는데, 이것을 우리는 예정론이라고 합니다.
방금도 말했지만 특별한 작정의 내용인 예정론은 선택과 유기를 말합니다. 어떤 이들은 선하시고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유기할 수 있는가, 어떻게 버리실 수 있는가 해서 유기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고 있는 예정은 어떤 자를 영생에 이르도록 선택하셨다는 것만 말하는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자는 영원한 고통과 사망에 이르도록 유기하셨다, 다시 말해 버리셨다는 것까지 함께 말합니다. 이것을 신학 용어로 이중예정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대해 증거로 로마서 9장에 보면 다음의 말씀이 있습니다. 22절과 23절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여기 보면 두 부류가 나오는데, 한 부류는 멸하기로 준비 된 진노의 그릇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 부류는 영광받기로 예비 된 긍휼의 그릇입니다. 전자(진노의 그릇)는 무엇을 위해 준비된 자들인가? 하나님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기 위하여 준비된 자들입니다. 그러나 진노의 그릇이라고 해서 무조건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향하여 오래 참으시고 관용하시는 일도 있다고 말씀합니다. 다만 오래 참으신다고 해서 영원히 참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개인적인 종말도 있고 또 세상의 종말도 있는데, 특히 세상의 종말은 마지막 심판의 때이고, 그때는 저들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 자신의 공의를 드러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진노의 그릇을 두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진노와 능력, 그리고 오래 참으심과 및 공의를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반면 후자(긍휼의 그릇)는 무엇을 위해 준비된 자들인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되,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기 위해서 준비 된 자들입니다. 긍휼의 그릇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의 긍휼이 어떠한지를 알리기 위해 준비 된 자들인 것입니다. 혹은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알도록 하기 위해 준비되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선택과 유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알리고자 하시는 것이 하나님 자신의 거룩한 속성들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편은 진노의 그릇인데, 그들을 향해서는 오래 참으시고 관용하시는 일을 위해,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의 공의의 심판을 알리기 위해 준비된 자들이고, 다른 한편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그리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 준비된 자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 모든 작정의 내용이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한 목적을 가진다고 할 때 선택이든 유기든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 그들을 두셨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은 두 대상을 두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유기하시는 대상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선하신 하나님,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과 모순을 일으키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 안에 모순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모순이라고 여기는 것은 사랑과 공의가 함께 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인데, 하나님 안에는 사랑과 공의가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좀 더 실제적인 내용으로 설명하자면 하나님께서 택자를 향한 사랑을 나타내실 때 공의에 대한 만족 없이 사랑하시는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인류가 죄 아래 놓이게 되었는데, 죄의 결과는 죽음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선택하신 사람들은 사랑하신다는 이유로 죄 문제에 대하여 아무런 조치도 없이 그냥 사랑하시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죄에 대한 공의의 심판을 분명히 행하시고 그 사랑을 더욱 분명하게 나타내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즉 본래는 우리가 공의의 심판을 받아 죽어야 하지만 우리 대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을 받아 죽으셨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신 사건입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는 모순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유기라는 것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해서는 안 되고, 또 선택이라는 것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를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선택이든 유기든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두 대상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시는 속성을 배워야 하고, 그것을 통해 결국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앞서 하나님의 뜻의 이유를 물을 수 없다고 말한 것을 기억한다면, 왜 누구는 선택하시고 누구는 유기하시는가에 대한 물음도 물을 수 없습니다. 이미 그렇게 묻는 것 자체가 무엇을 염두 해 둔 것이냐 하면 선택과 유기의 원인이 하나님 자신의 기뻐하시고 자유로우신 뜻보다는 인간에게 뭔가 있기 때문일 것이라는 그런 사고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선택과 유기는 오로지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자유로우신 뜻을 따라 누구는 사랑하기로 하신 것이고 누구는 미워하기로 하신 것입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이런 가르침을 거부하고 끊임없이 인간에게 있는 무엇을 조건으로 선택과 유기가 있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부류가 알미니안주의입니다. 저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능력으로 인간에게 있을 어떤 믿음이나 행위를 미리 보실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미리 보시고서 누구는 선택하시고 누구는 유기하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자신의 능력으로 인간에게 있을 어떤 믿음이나 행위를 미리 보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미리 보시고서 누구를 선택하시고 누구를 유기하신 것이 아닙니다. 저들은 로마서 8장 29절을 근거로 자신들의 주장이 옳다고 말합니다. 로마서 8장 29절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그러나 이 말씀은 선택과 유기에 있어 무엇을 조건으로 미리 보신다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일단 이 말씀은 철저히 유기자가 아닌 택자와 관련하여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미리 보신다는 것은 조건의 의미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원문의 의미를 더욱 살려 번역하자면 그 아들의 형상과 동일한 형상을 갖도록 하기 위하여 예정했다고 말하기 때문에 목적을 위한 것일 뿐입니다. 즉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모든 것을 아시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기준으로 자기 백성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어떤 목적으로 그들을 예정하셨는가 할 때 그 아들의 형상과 동일한 형상을 갖도록 하기 위하여 예정하셨다는 것입니다.
미리 아시는 것이 조건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믿음도 선택의 조건이 아닙니다. 또한 타락도 유기의 이유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직 자신의 뜻만을 원인으로 누구는 선택하기로 하셨고 누구는 유기하기로 하시셨습니다. 피조물에게 원인을 전혀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9장에서 어떻게 표현합니까?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롬9:11).
때문에 믿음보다 선택이 앞서며, 내가 믿기로 했다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셨기 때문에 믿음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에베소서 2장에서는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으로 분명히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엡2:8). 이런 점에서 우리가 믿음이라는 것을 자랑하거나 교만하게 되는 모습이 있다면 그것은 그에게 주어진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공로처럼 여기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원 전에 선택하시고 선택의 결과로 믿음을 주신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거기에는 겸손이라는 열매 외에는 맺힐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선택과 유기와 관련해 한 가지 더 말씀드리면, 하나님께서는 대상만 정하신 것이 아니라 선택하셨다면 선택하신 자가 구원을 받도록 하는 방편도, 그리고 유기하셨다면 결국 유기가 될 수밖에 없는 방편도 함께 정하셨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많은 설명을 드리지는 않겠지만, 택자를 위한 구원의 방편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와 구원의 서정을 정하셨습니다. 때문에 반드시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버지께 이를 수 있습니다(요14:6). 그리고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십니다(고전1:30).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미리 정하신 자들만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겁니다(롬8:30).
반면 유기의 서정도 있는데,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경우 택자와 관련해서만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이 부분과 관련해 조금 설명하고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유기의 서정과 관련해 윌리엄 퍼킨스의 황금사슬을 보면 부르심은 있지만 효력 있는 부르심이 아니라 효력 없는 부르심과 부르심 자체가 없는 두 부분을 나누어 설명합니다. 이것은 성인과 관련된 서정으로 효력 없는 부르심과 관련해서는 효력은 없지만 복음으로 부르실 때 그들도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합니다. 여기에 다섯 단계가 있는데, 첫 번째가 조명입니다. 히브리서 6장에 보면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히6:4)라고 말하는 대상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히6:5-6)
두 번째가 뉘우침(회개)입니다. 뉘우침이 있다는 것은 죄를 안다는 것입니다.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를 느끼고 찔림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죄의 형벌로 인하여 슬퍼합니다. 죄를 고백하기도 합니다. 죄를 징벌하시는 하나님께서 의로우시다는 고백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구원을 원합니다. 고통스러워하며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겠습니다’라는 말로 회개를 약속하기도 합니다. 가룟 유다가 그러했고(마27:3 참조), 북이스라엘 왕 중 가장 타락한 아합 왕도 그러했습니다(왕상21:27 참조). 그러나 참된 회개가 아니라 일시적인 회개일 뿐입니다.
세 번째는 믿음인데, 이때도 참된 믿음이 아니라 일시적인 믿음입니다. 저들도 교회 안에 들어와 말씀을 듣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들으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약속들을 어렴풋이 믿습니다. 그러나 어렴풋이 믿을 뿐 자신을 하나님의 약속에 전적으로 맡기지 않습니다. 더욱이 그들은 약속을 적용하려는 결정, 갈망과 노력도 하지 않으며, 심지어 무관심하기까지 합니다. 불신과 싸워야 하는데, 싸우지 않습니다. 실제로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씨 뿌리는 비유 가운데 이런 자들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마13:20-21) 요한복음에는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요2:23-24)
네 번째는 하늘의 은사와 내세의 열매를 맛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총의 탁월함을 분명히 느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누리지 않습니다. 비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연회에서 잔치 음식을 맛볼 뿐 그것을 먹고 자라고자 하지 않습니다. 첫 번째 조명과 관련해서 히브리서 6장의 말씀을 언급했지만 다시 한번 언급하자면,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히6:4-6)
다섯 번째로 외적인 삶의 거룩함입니다. 이 거룩함에는 종교적인 고백에 열심을 내는 것과 하나님의 사역자들을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있고, 나아가 최대한 삶을 개선하기도 합니다. 사도행전 8장에 보면 시몬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에 대하여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그들이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행8:12-13)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공적 고백을 했다는 것이고, 이후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녔다는 것은 그만큼 열심을 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를 통해 이런 책망을 받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행8:20)
이처럼 부름을 받지만 그 부름에 효력이 없습니다. 효력이 없기 때문에 다시금 타락합니다. 죄에 현혹이 되고, 그 마음이 죄로 인하여 완고하게 됩니다. 완고해진 마음은 악하고 타락한 상태가 되며, 이로 인해 불신앙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듣고 깨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더 깊이 알지 못하게 되고, 결국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에서 배교하게 됩니다.
이것이 효력 없는 부르심에 속한 자들의 서정이라면 부르심 자체가 없는 자들은 본성적으로 무지와 마음의 공허함, 맹목과 마음의 강퍅, 상실된 감각, 죄 가운데서 탐심을 가지게 되는 과정 가운데 있게 됩니다. 효력 없는 부르심이든 부르심 자체가 없든 그들 모두는 다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정죄와 의로운 심판을 받게 되는데, 유기의 원인은 하나님께 있지만 정죄를 받는 것은 바로 그들 자신의 죄 때문임을 잘 정리해 두셔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7문을 중심으로 살폈는데, 하나님의 작정, 특히 선택과 유기를 말하는 예정에 대한 부분은 많은 논쟁의 중심에 있는 교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에베소서 1장 11절의 말씀처럼 모든 일을 그의 뜻의 의논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작정을 따라 실행하십니다. 하나님의 뜻 밖에 있는 것은 어떤 것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죄조차 하나님의 뜻 안에, 하나님의 작정 안에 있습니다. 결코 우연적이거나 우발적인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은 죄의 저자는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죄의 저자가 아닌 방식으로 얼마든지 죄에 대하여 작정하실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내용입니다. 성경이 가르치고는 있지만 하나님의 지혜를 어떻게 우리가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유한한 지혜를 그분의 무한한 지혜 아래 내려놓아야 합니다. 칼빈은 그런 의미에서 아는 것이 가능하지도 않고 합당하지도 않은 일들에 대해서는 무식한 것이 유식한 것이라고도 말했습니다(inst.2권23장8). 그리고 “믿는 무지를 경솔한 지식보다 낫다”고도 말했습니다(inst.2권23장5).
더불어 이런 신비의 내용 속에서도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는 언제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서 살아가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누구는 선택하시고, 누구는 유기하셨다고 할 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께서 자기의 영광을 위해 선택하신 자들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하나님의 선택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믿음을 가지고 되었다면 모든 일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하나님을 더욱 경외하는 자로 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욥이 고백한 것처럼 주신 이도 여호와시고, 거두신 이도 여호와란 사실을 인정하는 자로서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만 올려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일을 위해서 주시기도 하시고 거두기도 하시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