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第九回 齊侯送文姜婚魯 祝聃射周王中肩
제9회: 제희공은 문강을 노나라에 시집보내고, 축담은 주왕의 어깨를 쏘아 맞추다.
話說齊僖公生有二女,皆絕色也。長女嫁於衛,即衛宣姜,另有表白在後。單說次女文姜,生得秋水為神,芙蓉如面,比花花解語,比玉玉生香,真乃絕世佳人,古今國色。兼且通今博古,出口成文,因此號為文姜。世子諸兒,原是個酒色之徒,與文姜雖為兄妹,各自一母。諸兒長於文姜只二歲,自小在宮中同行同坐,覷耍頑皮。及文姜漸已長成,出落得如花似玉。諸兒已通情竇,見文姜如此才貌,況且舉動輕薄,每有調戲之意。那文姜妖淫成性,又是個不顧禮義的人,語言戲謔,時及閭巷穢褻,全不避忌。
한편, 제희공은 두 딸을 낳았는데 모두가 천하절색이었다. 장녀는 위나라에 출가하여 위선공(衛宣公)의 부인이 된 선강(宣姜)인데, 따로 뒤에서 이야기할 것이고, 차녀는 문강(文姜)을 이야기하자면. 날 때부터 정신이 가을 물같이 맑고, 얼굴은 부용(芙蓉)과 같이 아름다워서, 꽃에 비하면 꽃이 말을 하고, 옥에 비하면 옥이 향기를 내니, 참으로 절세가인이요, 고금의 국색이었다. 뿐만 아니라 고금의 일에 두루 통하고, 말을 입 밖으로 내면 바로 훌륭한 문장이 되었다. 그로 인해서 호를 문강이라고 했다. 그리고 제희공의 세자 제아(諸兒)는 원래 주색을 밝히는 무리였다. 문강과는 비록 오누이 사이였지만 그 어머니는 각기 달랐다. 제아는 문강보다는 두 살이 많았다. 두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궁중에서 함께 행동하고 희롱하며 말을 듣지 않았다. 문강이 점차 장성함에 따라 옥돌로 빚은 꽃처럼 아름다운 처녀가 되었다. 제아는 이미 문강에 대해서 애정을 갖게 되었고, 문강의 아름다운 용모와 비상한 재능을 보고는, 하는 짓이 경박하고, 매양 문강을 희롱하고자 하는 마음뿐이었다. 문강도 요염하고 음탕한 본성이라 또한 예의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사람이어서, 말이 장난스럽고 저잣거리의 상스럽고 음탕한 이야기를 입에 올리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諸兒生得長身偉幹,粉面朱唇,天生的美男子,與文姜倒是一對人品。可惜產於一家,分為兄妹,不得配合成雙。如今聚於一處,男女無別,遂至並肩攜手,無所不至。只因礙著左右宮人,單少得同衾貼肉了。也是齊侯夫婦溺愛子女,不預為防範,以致兒女成禽獸之行,後來諸兒身弒國危,禍皆由此。自鄭世子忽大敗戎師,齊僖公在文姜面前,誇獎他許多英雄,今與議婚,文姜不勝之喜。及聞世子忽堅辭不允,心中鬱悶,染成一疾,暮熱朝涼,精神恍惚,半坐半眠,寢食俱廢。有詩為證:二八深閨不解羞,一樁情事鎖眉頭。鸞凰不入情絲網,野鳥家雞總是愁。
제아도 나면서부터 키가 크고 자라면서 뼈대가 굵었다. 게다가 얼굴은 분을 바른 것 같고 입술은 붉어서 타고난 미남자였다. 문강과는 어울리는 한 쌍이 될 만도 하였으나 애석하게도 같은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 오라비와 누이 사이가 되어 짝을 이룰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지금껏 그들은 같은 장소에 머무르며 남녀의 구별도 없이 지내면서, 어깨를 맞대고 손을 마주 잡고 돌아다니는데 못 가는 곳이 없었다. 좌우의 궁인들 때문에 살을 맞대며 한 이불 속으로 들지는 못했다. 또한 제희공 부부가 그 자식을 너무 사랑하여, 미리 예방하지 못한 탓에 후에 그 자식들이 금수와 같은 행위를 하게 되고, 제아는 신하에게 살해되어, 나라를 위태롭게 만든 재앙은 모두 이로 인한 것이었다. 정나라 세자 홀이 융병을 크게 물리치자 제희공은 문강의 면전에서 세자 홀이 영웅의 풍모를 지녔다고 칭찬하고, 그와 혼인을 시켜주겠다고 말해 주었다. 문강은 마음속으로 매우 기뻐해 마지않았다. 후에 세자 홀이 굳이 사양하여 혼인을 거절했다는 소식을 듣고, 문강은 마음속으로 고민하다가 병이 되었다. 저녁에는 열이 났다가 아침에는 오한이 들고, 정신이 혼미하여 반은 앉고, 반은 잤다. 문강은 먹고 자는 것을 전폐했다. 이것을 증험하는 시에 이르기를, “열여섯 살 처녀가 규방에서 시름을 풀지 못하고, 사랑에 매달려 눈썹을 찌푸리고 있구나. 난새와 봉황이 정념의 그물에 날아들지 않으니, 들새나 집닭이거나 모두가 근심에 쌓여 있도다!” 했다.
世子諸兒以候病為名,時時闖入閨中,挨坐牀頭,遍體撫摩,指問疾苦。但耳目之際,僅不及亂。一日,齊僖公偶到文姜處看視,見諸兒在房,責之曰:「汝雖則兄妹,禮宜避嫌。今後但遣宮人致候,不必自到。」諸兒唯唯而出,自此相見遂稀。未幾,僖公為諸兒娶宋女。魯莒俱有媵,諸兒愛戀新婚,兄妹蹤跡益疏。文姜深閨寂寞,懷念諸兒,病勢愈加,卻是胸中展轉,難以出口。正是:「啞子漫嘗黃柏味,自家有苦自家知。」有詩為證:春草醉春煙,深閨人獨眠。積恨顏將老,相思心欲燃。幾回明月夜,飛夢到郎邊。
세자 제아가 병문안을 한다는 핑계로 시도 때도 없이, 문강이 거처하고 있는 규방을 함부로 드나들었다. 침대 곁에 앉아서 문강의 몸을 어루만지며 얼마나 아프냐고 묻곤 했다. 그러나 주위에 여러 이목이 있어 감히 음란한 행동은 하지 못했다. 하루는 제희공이 문강의 처소에서 와서 제아가 방에 있는 모습을 보고, 꾸짖어 말하기를, “너와 문강은 비록 오누이 사이라고 하나 예로는 마땅히 서로 자리를 피해야 하지 않느냐? 앞으로는 궁인을 보내 문병하고, 네가 직접 오지 말아라.” 했다. 제아가 “예, 예”하고 나갔다. 이후로는 두 사람이 서로 만나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제희공은 제아에게 송장공의 딸을 배필로 삼아 주었다. (송녀가 시집올 때 데려온) 노나라와 거나라 출신의 잉첩(媵妾;시집올 때 데려온 몸종)도 있었다. 제아가 신혼에 재미를 붙여 오누이의 사이는 더욱 소원해졌다. 문강은 깊은 규방에서 더욱 적막해지고, 제아를 생각하여 병세가 더욱 심해졌으나, 가슴속에만 묻어 둘뿐 입 밖으로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야말로 벙어리가 황백(黃柏;소태)의 맛을 보고 그 쓴맛을 자기만 알고 있는 것과 같았다. 이것을 증험한 시에 이르기를, “봄날의 풀들은 아지랑이에 취했고, 깊은 규방의 가인은 홀로 자는구나. 쌓인 한은 얼굴만 늙게 하고, 사모하는 마음 불타듯 하여, 몇 번이나 달 밝은 밤이면, 꿈속에서 님 곁으로 날아간다네.” 했다.
卻說魯桓公即位之年,年齒已長,尚未聘有夫人。大夫臧孫達進曰:「古者,國君年十五而生子。今君內主尚虛,異日主器何望?非所以重宗廟也。」公子翬曰:「臣聞齊侯有愛女文姜,欲妻鄭世子忽而不果。君盍求之?」桓公曰:「諾。」即使公子翬求婚於齊。齊僖公以文姜病中,請緩其期。宮人卻將魯侯請婚的喜信,報知文姜。文姜本是過時思想之症,得此消息,心下稍舒,病覺漸減。及齊魯為宋公一事,共會於稷,魯侯當面又以姻事為請。齊侯期以明歲。至魯桓公三年,又親至嬴地,與齊侯為會。齊僖公感其慇懃,許之。
한편, 노환공은 즉위년에 이미 나이가 많았으나 아직 부인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대부 장손달(臧孫達)이 아뢰기를, “옛날에는 나라의 임금은 나이 15세면 자식을 두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지금 주공은 안주인 자리가 아직 비어 있는데 앞으로 군주의 자리를 누구에게 전하실 생각이십니까? 이는 종묘사직을 존중하는 바가 아닙니다.” 했다. 공자 휘가 말하기를, “신이 들으니 제희공에게 사랑하는 딸 문강이 있는데, 정나라의 세자 홀에게 혼사를 청했다가 성사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주공께서 청혼해 보면 어떻겠습니까?” 하니. 노환공이 말하기를, “그럽시다.” 하고, 즉시 공자휘를 제나라에 보내 구혼했다. 제희공은 문강이 병중이라 조금의 말미를 달라고 했다. 궁인들은 곧바로 노환공이 청혼을 해 왔다는 소식을 문강에게 전했다. 문강은 본래 상사의 병을 앓고 있었던지라, 이 소식을 듣자 몸과 마음이 거뜬해지고 병이 점차로 나아졌다. 그리고 얼마 후에 제희공과 노환공이 송장공의 일로 해서 직(稷)에서 회동하게 되었을 때, 노환공이 다시 제희공에게 청혼했다. 제희공은 다음 해나 보자고 기약했다. 이듬해 노환공 3년(기원전 709년)에, 노환공이 친히 영(嬴)이라는 땅에 가서 제희공과 만나 청혼하자 제희공이 그 은근함에 감동하여 혼인을 허락했다.
魯侯遂於嬴地納幣,視常禮加倍隆重。僖公大喜。約定秋九月,自送文姜至魯成婚。魯侯乃使公子翬至齊迎女。齊世子諸兒聞文姜將嫁他國,從前狂心,不覺復萌,使宮人假送花朵於文姜,附以詩曰:「桃有華,燦燦其霞。當戶不折,飄而為苴。吁嗟兮復吁嗟!」文姜得詩,已解其情,亦復以詩曰:「桃有英,燁燁其靈,今茲不折,詎無來春?叮嚀兮復叮嚀!」諸兒讀其答詩,知文姜有心於彼,想慕轉切。未幾,魯使上卿公子翬如齊,迎取文姜。齊僖公以愛女之故,欲親自往送。
노환공은 곧 영 땅에서 납폐하고 제희공을 정중하고 융숭하게 접대했다. 제희공이 크게 기뻐하며, 그해 가을 9월에 문강을 노나라에 보내 혼례를 치르기로 했다. 노환공이 즉시 공자 휘를 제나라에 보내 문강을 맞이해 오게 했다. 제나라 세자 제아가 문강이 다른 나라에 시집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예전의 미친 마음이 모르는 사이에 다시 솟아나서, 궁인을 시켜 문강에게 꽃을 보내면서 그 속에 부친 시에 이르기를, “복숭아꽃이 피었는데, 그 빛이 찬란하기 노을빛 같도다. 문 앞에 있지만 꺾지 못하니, 바람에 나부끼는 부평초 같아라. 아아, 탄식하네. 아아, 다시 탄식하네.” 했다. 문강이 그 시를 받아 보고, 제아의 마음을 짐작하고 자기도 시를 지어 이르기를, “복숭아꽃이 피었는데, 그 아름다움이 무르익었네. 이제 그 가지를 꺾지 않아도, 어찌 오는 봄을 막을 수 있겠는가? 틀림없구나. 정녕 틀림없구나!” 했다. 제아가 그 답시를 읽고 나서, 문강이 자기에게 마음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고, 사모하는 마음을 더욱 간절해졌다. 이윽고 문강을 모셔 가기 위해 노나라에서 상경 공자 휘가 사절로 제나라에 당도했다. 제희공은 사랑하는 딸이었으므로 친히 데려다주려고 했다.
諸兒聞之,請於父曰:「聞妹子將適魯侯,齊魯世好,此誠美事。但魯侯既不親迎,必須親人往送。父親國事在身,不便遠離,孩兒不才,願代一行。」僖公曰:「吾已親口許下自往送親,安可失信?」說猶未畢,人報:「魯侯停駕讙邑,專候迎親。」僖公曰:「魯,禮義之國,中道迎親,正恐勞吾入境。吾不可以不往。」諸兒默然而退。姜氏心中亦如有所失。其時,秋九月初旬,吉期已迫。文姜別過六宮妃眷,到東宮來別哥哥諸兒。諸兒整酒相待,四目相視,各不相捨,只多了元妃在坐。且其父僖公遣宮人守候,不能交言,暗暗嗟嘆。
제아가 듣고 부친에게 청하기를, “누이가 노환공에게 출가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제나라와 노나라는 대를 이어 우호 관계를 맺어왔습니다. 이번 혼사는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다만 노환공이 문강을 데리러 이곳까지 친히 오지 않으니, 반드시 친족이 데려다주어야 합니다. 국사에 매인 부친께서 멀리 가는 것은 불편하니 소자가 재주는 모자라지만, 부친을 대신해 가겠습니다.” 했다. 제희공이 말하기를, “나는 이미 내가 직접 데려다주겠다고 언약했다. 어찌 신의를 잃을 수 있겠느냐?” 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람이 와서 고하기를, “노환공이 수레를 환읍(讙邑)에 세워두고 신부를 맞이하려 기다린다고 합니다.” 하니, 제희공이 말하기를, “노나라는 예의를 중시하는 나라다. 중도에서 신부를 맞이함은 내가 노나라 경내에 들어가는 수고를 염려한 것이다. 내가 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 했다. 제아가 말없이 물러 나왔다. 강씨(문강)도 마음속에 역시 무엇인가를 잃은 것만 같았다. 그때는 9월 초순이었다. 결혼 날짜가 임박해지자 문강이 육궁의 궁인들 및 권속들과 작별을 고하고, 오빠 제아에게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동궁에 들렸다. 제아는 술상을 차려 놓고 서로 쳐다보면서 서로 눈길을 떼지 못했다. 단지 제아의 원비가 옆에 있고 또 그 부친 희공이 궁인을 보내 지키게 하였으므로 아무 말도 못하고 속으로만 탄식할 뿐이었다.
臨別之際,諸兒挨至車前,單道個「妹子留心,莫忘『叮嚀』之句。」文姜答言:「哥哥保重,相見有日。」齊僖公命諸兒守國,親送文姜至讙,與魯侯相見。魯侯敘甥舅之禮,設席款待。從人皆有厚賜。僖公辭歸。魯侯引文姜到國成親。一來,齊是個大國,二來,文姜如花絕色,魯侯十分愛重。三朝見廟,大夫宗婦,俱來朝見君夫人。僖公復使其弟夷仲年聘魯,問候姜氏。自此齊魯親密。不在話下。無名子有詩,單道文姜出嫁事。詩云:從來男女慎嫌微,兄妹如何不隔離?只為臨歧言保重,致令他日玷中闈。
이윽고 헤어질 때가 되자, 제아는 수레 앞에서 마주 보고 간단하게 말하기를, “누이는 유념하고 ‘정녕(叮嚀)’이라는 시구를 잊지 말아라.” 했다. 문강이 대답하기를, “오라버님도 보중하면 서로 만날 날이 있을 것이오.” 했다. 제희공이 제아에게 나라를 지키라고 명하고, 몸소 문강을 환읍까지 데리고 가서 노환공과 만났다. 노환공은 사위가 장인에게 행하는 예를 올리고 잔치를 열어 대접했다. 제희공을 따라온 종자들 모두에게도 선물을 후하게 주었다. 제희공이 감사의 말을 한 후에 본국으로 돌아가고, 노환공도 문강을 노나라로 데리고 와서 혼례를 올렸다. 노환공은 첫째, 제나라가 대국인 것이 좋았고, 둘째, 문강이 꽃같이 아름다운 절색인 것이 좋아서, 문강을 지극히 사랑했다. 노환공은 사흘에 한 번 묘당(조정)에서 신하를 만났다. 대부와 종부도 내궁까지 들어가야만 군주와 부인을 만날 수 있었다. 제희공은 다시 그의 동생 이중년을 노나라에 사자로 보내어 강씨(문강)의 소식을 알아보게 했다. 이후로 제나라와 노나라가 친밀해진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무명 인사가 문강이 출가한 일에 대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원래 남녀 사이란 하찮은 일에도 삼가고 조심해야 하거늘, 어찌하여 오라비와 누이를 떼어 놓지 않았는가? 이별할 때 몸조심하라는 말 한마디에, 훗날에 이르러 궁중의 내전이 더럽혀지게 되었다.” 했다.
話分兩頭。再說周桓王自聞鄭伯假命伐宋,心中大怒。竟使虢公林父獨秉朝政,不用鄭伯。鄭莊公聞知此信,心怨桓王,一連五年不朝。桓王曰:「鄭寤生無禮甚矣!若不討之,人將效尤。朕當親帥六軍,往聲其罪。」虢公林父諫曰:「鄭有累世卿士之勞,今日奪其政柄,是以不朝。且宜下詔徵之,不必自往,以褻天威。」桓王忿然作色曰:「寤生欺朕,非止一次。朕與寤生誓不兩立!」乃召蔡、衛、陳三國,一同興師伐鄭。
이야기는 두 갈래로 나뉜다. 한편, 주환왕은 정장공이 왕명을 조작하여 송나라를 정벌했다는 사실을 알고, 마음속으로 크게 노했다. 결국 괵공 임보(林父) 한 사람에게 주나라 조정의 정사를 모두 맡기고, 정장공을 쓰지 않았다. 정장공이 그 소식을 듣고 환왕을 원망하게 되어 5년이 넘도록 한 번도 주나라에 조정에 가서 환왕을 뵙지 않았다. 환왕이 말하기를, “정나라 오생이 무례하기가 심하구나. 만약 토벌하지 않는다면 다른 제후들도 그 허물을 본받을 것이다. 짐이 친히 육군(六軍)을 거느리고 가서 그 죄를 성토하겠다.” 하니, 괵공 임보가 간하기를, “정나라는 여러 대를 걸쳐 경사의 임무를 수행하공로가 있니다. 지금 그가 벼슬을 뺏겼으니 조정에 오지 않는 것입니다. 마땅히 조서를 내려 부르시고, 친히 가셔서 천자의 위엄을 손상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했다. 환왕이 분연히 얼굴색을 바꾸며 말하기를, “오생이 짐을 기만하기를 이번 한 번뿐이 아니오. 짐은 오생과 맹세코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지 않겠소.” 했다. 즉시 채나라, 위나라, 진나라 삼국에 조칙을 내리고, 동시에 군사를 일으켜 정나라를 정벌하겠다는 명령을 내렸다.
是時陳侯鮑方薨,其弟公子佗字伍父,弒太子免而自立,謚鮑為桓公。國人不服,紛紛逃散。周使徵兵,公子佗初即位,不敢違王之命。只得糾集車徒,遣大夫伯爰諸統領,望鄭國進發。蔡衛各遣兵從征。桓王使虢公林父將右軍,以蔡衛之兵屬之;使周公黑肩將左軍,陳兵屬之;王自統大兵為中軍,左右策應。鄭莊公聞王師將至,乃集諸大夫問計,群臣莫敢先應。正卿祭足曰:「天子親自將兵,責我不朝,名正言順。不如遣使謝罪,轉禍為福。」莊公怒曰:「王奪我政權,又加兵於我,三世勤王之績,付與東流。此番若不挫其銳氣,宗社難保。」
이때 진환공(陳桓公) 포(鮑)가 죽고, 그 동생 공자 타(佗)가 자는 오보(伍父)인데, 태자 면(免)을 시해하고 스스로 군주 자리에 앉아 선왕 포(鮑)에게 환공(桓公)이라는 시호를 올렸다. 진나라 사람들은 복종하지 않고 뿔뿔이 흩어졌다. 주나라가 사신을 보내 군사를 일으키라 하니, 공자 타(佗)가 즉위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감히 주환왕의 명을 어길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전차와 보병을 모아 대부 백원제(伯爰諸)가 거느리고 정나라를 향해 출발하게 했다. 채나라와 위나라도 각각 군사를 보내어 정벌에 참여했다. 주환왕은 괵공 임보에게 우군(右軍)을 거느리게 하여 채나라와 위나라의 군사를 배속시키고, 주공 흑견에게 좌군을 맡겨서 진나라 군사를 지휘하게 했다. 주환왕 자신은 친히 주나라 대군을 통솔하여 중군을 맡아 좌우 양군과 호응하기로 했다. 정장공은 왕이 거느린 군대가 곧 이를 것이라는 말을 듣고, 여러 대부들을 모아 계책을 물었으나, 신하들이 감히 먼저 나서지 않았다. 정경 제족이 말하기를, “천자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우리가 입조하지 않은 죄를 물으러 왔습니다. 명분이 바르고 말이 순리에 맞습니다. 사절을 보내 사죄하여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으십시오.” 하니, 정장공이 화를 내어 말하기를, “주환왕이 나의 벼슬을 빼앗고, 또 군사를 이끌고 우리 정나라를 토벌하러 왔소. 우리 정나라는 삼대에 걸쳐 왕을 섬겼건만, 그 공적을 동쪽으로 흘러가는 물결에 띄워 버렸소. 내가 이번에 주왕의 기를 꺾어 놓지 않으면 우리 정나라는 사직을 보존하기 어려울 것이오.” 했다.
高渠彌曰:「陳與鄭素睦,其助兵乃不得已也。蔡衛與我夙仇,必然效力。天子震怒自將,其鋒不可當,宜堅壁以待之。俟其意怠,或戰或和,可以如意。」大夫公子元進曰:「以臣戰君,於理不直,宜速不宜遲也。臣雖不才,願獻一計。」莊公曰:「卿計如何?」子元曰:「王師既分為三,亦當為三軍以應之。左右二師,皆結方陣,以左軍當其右軍,以右軍當其左軍,主公自率中軍以當王。」莊公曰:「如此可必勝乎?」子元曰:「陳佗弒君新立,國人不順,勉從徵調,其心必離。若令右軍先犯陳師,出其不意,必然奔竄。再令左軍逕奔蔡衛,蔡衛聞陳敗,亦將潰矣。然後合兵以攻王卒,萬無不勝。」
고거미가 말하기를, “진나라와 우리나라는 평소에 화목하게 지내 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정벌군을 도우는 것은 부득이해서입니다. 채나라와 위나라는 우리나라의 오랜 원수이니 반드시 힘을 다해 싸우려 할 것입니다. 더욱이 천자가 진노하여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왔으니, 그 예봉을 당해 내기 힘들 것입니다. 마땅히 보루를 굳게 쌓아 기다리다가, 그들의 예봉이 무디어질 때를 기다려서 싸우기도 하고 화해도 청하면서 대응하면 우리의 뜻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대부 공자 원(公子元)이 앞으로 나와 말하기를, “신하로서 왕과 싸우는 것은 이치에 어긋납니다. 마땅히 속히 결말을 내야지 느리게 해서는 안 됩니다. 신이 비록 재주는 없으나 한 가지 계책이 있습니다.” 했다. 정장공이 말하기를, “그대의 계책은 무엇이오?” 하니, 공자 원이 말하기를, “왕의 군대는 이미 세 부대로 나누었으니, 우리도 또한 세 부대로 대응해야 합니다. 좌우 두 부대는 모두 방진(方陣)을 치되 왼쪽 부대는 천자의 오른쪽 부대를 담당하고, 우리의 오른쪽 부대는 천자의 왼쪽 부대를 담당하며, 주공은 중군을 거느리고 주환왕과 대적하십시오.” 했다. 장공이 말하기를, “이렇게 하면 틀림없이 이기겠소?” 하니, 공자 원이 말하기를, “진나라 타(佗)는 임금을 죽이고 새로 임금이 되었습니다. 나라 사람들이 따르지 않아 억지로 징발해서 보낸 군사이므로 마음이 흩어져 있습니다. 만약 우리 오른쪽 부대가 뜻밖에 나아가 진나라 군대를 치면 틀림없이 흩어져 달아날 것입니다. 다시 우리 왼쪽 부대가 채나라와 위나라의 군사를 휘몰아치면 채나라와 위나라 군사는 진나라 군사가 패한 것을 듣고 장차 달아날 것입니다. 그런 후에 우리 군사를 합쳐서 주환왕의 군사를 공격하면 결코 실패하지 않습니다.” 했다.
莊公曰:「卿料敵如指掌,子封不死矣!」正商議間,疆吏報:「王師已至繻葛,三營聯絡不斷。」莊公曰:「但須破其一營,餘不足破也。」乃使大夫曼伯,引一軍為右拒;使正卿祭足,引一軍為左拒;自領上將高渠彌、原繁、瑕叔盈、祝聃等,建「蝥弧」大旗於中軍。祭足進曰:「『蝥孤』所以勝宋許也。『奉天討罪』,以伐諸侯則可,以伐王則不可。」莊公曰:「寡人思不及此!」即命以大旆易之,仍使瑕叔盈執掌。其「蝥弧」寘於武庫,自後不用。高渠彌曰:「臣觀周王,頗知兵法。今番交戰,不比尋常,請為『魚麗』之陣。」
정장공이 말하기를, “경은 적의 형세를 마치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하니, 그대의 형 자봉(子封 ; 공자 려)이 죽지 않고 살아 있는 듯하구나!” 했다. 상의하고 있는 사이에 변경을 지키는 관리가 와서 보고하기를, “천자의 군사가 이미 수갈(繻葛)에 도착하여 세 군데 진을 치고 서로 연결하여 끊을 수 없다고 합니다.” 하니, 정장공이 말하기를, “모름지기 한 곳만 격파하면 나머지는 공격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했다. 곧 정장공이 대부 만백(曼伯)에게 한 무리의 군사를 내주며 천자의 우군을 막게 하고, 정경 제족에게 또 한 무리의 군사를 내주어 천자의 좌군을 막게 했다. 정장공 스스로는 상장 고거미, 원번(原繁), 하숙영, 축담(祝聃) 등을 거느리고 모호대기를 중군에 세웠다. 제족이 앞으로 나와 말하기를, “모호대기는 예전 송나라와 허나라를 정벌할 때 사용한 깃발이었습니다. 모호대기의 ‘봉천토죄(奉天討罪)’라는 글자는 (천자의 명을 받아) 제후를 칠 때는 쓸 수 있지만, 왕과 대적할 때는 쓸 수가 없습니다.” 하니, 정장공이 말하기를, “과인의 생각이 거기까지는 미치지 못했소.” 하고, 즉시 명하여 대패기(大旆旗)로 바꾸어서 하숙영에게 잡게 했다. 그 모호기는 무기고에 넣고 그 후로는 다시 쓰지 않았다. 고거미가 말하기를, “신이 주환왕을 살펴보니 자못 병법을 알고 있습니다. 이번 싸움은 예사로운 싸움과 달라서, 청컨대 ‘어려진(魚麗陣)’을 사용하도록 하십시오.” 했다.
莊公曰:「『魚麗陣』如何?」高渠彌曰:「甲車二十五乘為偏,甲士五人為伍。每車一偏在前,別用甲士五五二十五人隨後,塞其闕漏。車傷一人,伍即補之,有進無退。此陣法極堅極密,難敗易勝。」莊公曰:「善。」三軍將近繻葛,扎住營寨。桓王聞鄭伯出師抵敵,怒不可言,便欲親自出戰。虢公林父諫止之。次日各排陣勢,莊公傳令:「左右二軍,不可輕動。只看軍中大旆展動,一齊進兵。」且說桓王打點一番責鄭的說話,專待鄭君出頭打話,當陣訴說,以折其氣,鄭君雖列陣,只把住陣門,絕無動靜。桓王使人挑戰,並無人應。
정장공이 말하기를, “어려진이 무엇인가?” 하니, 고거미가 말하기를, “무장한 전차 25대를 편(偏)이라 하고 무장병 5명을 오(伍)라 합니다. 일편(一偏)의 전차를 앞에 세우고 전차 한 대에 다섯 오(伍)의 무장병 25명을 뒤따르게 하여 빠진 사람이 있으면 채우며, 전차에 탄 사람이 부상하면 오에서 즉시 보충하여 앞으로만 나아가고 후퇴는 할 수 없는 진법입니다. 이 진법을 사용하면 아주 견고하고 치밀하기 때문에 지기는 어렵고 이기기는 쉽습니다.” 했다. 정장공이 말하기를, “좋소.” 했다. 정나라의 삼군이 수갈 가까운 곳에 진영을 세웠다. 주환왕은 정장공이 군사를 동원하여 대적한다는 말을 듣고, 화가 나서 말도 잘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당장에 직접 출전하려고 하였으나, 괵공 임보가 간하여 중지했다. 다음날 각각 진세를 갖추고, 정장공이 명령하기를, “좌우 두 부대는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 중군의 대패기가 움직이는 것을 잘 보고 일제히 앞으로 공격하라!”고 했다. 한편, 주환왕은 정장공을 한번 크게 꾸짖을 말을 미리 생각해 놓고, 정장공이 출진하여 말 걸기를 기다렸다가 진 앞에서 간곡히 말하여 그 기를 꺾어 놓으려 했다. 그러나 정장공은 비록 진지를 벌려 세웠지만 오로지 진영 안에서만 머물며 전혀 출정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주환왕이 사람을 시켜 싸움을 걸게 했지만 아무도 응하지 않았다.
將至午後,莊公度王卒已怠,教瑕叔盈把大旆麾動,左右二拒,一齊鳴鼓,鼓聲如雷,各各奮勇前進。且說曼伯殺入左軍,陳兵原無鬥志,即時奔散,反將周兵衝動。周公黑肩阻遏不住,大敗而走。再說祭足殺入右軍,只看蔡衛旗號衝突將去。二國不能抵當,各自覓路奔逃。虢公林父仗劍立於車前,約束軍人:「如有亂動者斬!」祭足不敢逼。林父緩緩而退,不折一兵。再說桓王在中軍,聞敵營鼓聲震天,知是出戰,准備相持。只見士卒紛紛耳語,隊伍早亂。原來望見潰兵,知左右二營有失,連中軍也立腳不住。
어느덧 오후가 되자 정장공은 주환왕의 군사들이 이미 해이해졌다고 생각하고, 하숙영에게 대패기를 흔들라고 했다. 정나라의 좌우 두 방진(方陣)이 일제히 북을 울리니 북소리가 우레와 같고 각각 용감하게 전진했다. 한편, 만백이 이끄는 우군이 먼저 주환왕의 좌군을 향해 쇄도해 들어갔다. 진나라 군사는 원래 싸울 의사가 없어서 즉시 흩어져 도망치면서, 오히려 주나라 군사들에게 같이 도망가자고 충동질했다. 결국 주공 흑견은 흩어지는 군사들을 막지 못하고 크게 패하여 도망쳤다. 한편, 제족의 좌군도 주나라 우군 쪽으로 쇄도해 들어가면서 오로지 채나라와 위나라 깃발만을 쳐다보면서 공격했다. 두 나라의 군사들이 당하지 못하고 각자 살길을 찾아 도망했다. 괵공 임보가 전차 앞에서 장검을 뽑아 들고 전차 앞에서 군사들을 단속하기를, “난동자는 참한다!”고 했다. 제족은 감히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괵공 임보는 천천히 후퇴하면서 한 명의 군사도 잃지 않았다. 한편, 주환왕은 중군에 있다가 정나라 진영에서 북소리가 하늘을 진동하자 정장공이 출전했다고 생각하고 상대할 준비를 했다. 진지를 나온 환왕은 군사들이 어지럽게 귓속말을 하면서 대오가 이미 무너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군사들이 흩어지는 것을 바라보고, 좌우의 두 부대가 패배한 것을 알았으므로, 이어서 중군도 오래 버틸 수가 없었다.
卻被鄭兵如牆而進,祝聃在前,原繁在後,曼伯祭足亦領得勝之兵,並力合攻。殺得車傾馬斃,將隕兵亡。桓王傳令速退,親自斷後,且戰且走。祝聃望見繡蓋之下,料是周王。盡著眼力覷真,一箭射去,正中周王左肩。幸裹甲堅厚,傷不甚重。祝聃催車前進,正在危急,卻得虢公林父前來救駕,與祝聃交鋒。原繁曼伯一齊來前,各騁英雄。忽聞鄭中軍鳴金甚急,遂各收軍,桓王引兵退三十里下寨。周公黑肩亦至,訴稱:「陳人不肯用力,以至於敗。」桓王赧然曰:「此朕用人不明之過也!」
오히려 정나라 병사들이 마치 장벽처럼 공격해 오는데 선두에는 축담이, 후위에는 원번이, 만백과 제족도 역시 승리한 군사를 거느리고 힘을 합쳐 공격했다. 전차는 넘어지고 말은 쓰러져 죽었으며, 장수는 무너지고 병졸은 달아났다. 주환왕이 급히 후퇴 명령을 내리고 자기는 친히 뒤를 끊으며 싸우면서 달아났다. 축담이 멀리서 수를 놓은 비단 덮개 아래 서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 그 사람이 주왕이라고 생각했다. 축담은 눈에 온 힘을 집중하여 화살 한 대를 활에 메어 쏘았다. 화살이 주환왕의 어깨를 맞혔다. 다행히 주환왕이 두꺼운 갑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상처는 그리 깊지 않았다. 축담이 전차를 급히 몰아 주환왕의 전차를 추격했다. 주환왕이 바야흐로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괵공 임보가 나타나 환왕을 구하기 위해 축담과 맞붙었다. 원번과 만백이 일제히 다가와 각기 용맹을 뽐내며 괵공 임보를 공격하고 있는데, 갑자기 정나라 중군에서 급히 징을 쳤다. 곧 군사들을 수습하여 정나라 진영으로 되돌아갔다. 주환왕은 군사를 이끌고, 30리를 후퇴하여 진을 세웠다. 주공 흑견도 뒤따라와서 말하기를, “진나라 군사들이 힘을 다하지 않아서 싸움에서 졌습니다.” 하니, 주환왕이 얼굴을 붉히며 말하기를, “이번 일은 짐이 사람을 바르게 쓰지 못한 과실 때문이다.” 했다.
祝聃等回軍,見鄭莊公曰:「臣已射王肩,周王膽落,正待追趕,生擒那廝。何以鳴金?」莊公曰:「本為天子不明,將德為怨,今日應敵,萬非得已。賴諸卿之力,社稷無隕足矣,何敢多求!依你說取回天子,如何發落?即射王亦不可也。萬一重傷殞命,寡人有弒君之名矣!」祭足曰:「主公之言是也。今吾國兵威已立,料周王必當畏懼。宜遣使問安,稍與慇懃,使知射肩,非出主公之意。」莊公曰:「此行非仲不可。」命備牛十二頭,羊百隻,粟芻之物共百餘車,連夜到周王營內。
축담 등이 회군하여 정장공을 뵙고 말하기를, “신이 이미 활을 쏘아 주환왕의 어깨를 맞추어 간담을 떨어뜨렸고, 이어서 추격하여 그놈을 사로잡게 되었는데 어찌하여 징을 울려 퇴군하게 하셨습니까?” 하니, 정장공이 말하기를, “원래 천자가 밝지 못하여 은혜를 원수로 갚았기 때문에 오늘 내가 어쩔 수 없이 대항했지만, 이는 만부득이 한 일이었다. 경들의 노고에 힘입어 사직을 무사히 보존하게 되었는데 어찌 감히 더 많은 것을 구하겠는가? 만일 그대의 말대로 천자를 잡아 왔다면 내가 어떻게 감당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즉 왕을 활로 쏜 행위도 역시 가당치 않은 일이었다. 만일 중상을 입고 운명이라도 했다면 과인은 천자를 죽였다는 오명을 얻을 뻔했다!” 했다. 제족이 말하기를, “주공의 말씀이 옳습니다. 오늘 우리 정나라가 군사들로써 위엄을 세웠으니, 주환왕은 틀림없이 우리를 두려워할 것입니다. 마땅히 사자를 보내 은근한 자세로 문안을 여쭙고, 왕의 팔에 부상을 입힌 일은 주공의 뜻이 아니었다고 알리시기 바랍니다.” 하니, 정장공이 말하기를, “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중(仲; 제족의 字)이 아니면 아니 되오!” 했다. 정장공이 명하여 소 12마리와 양 백 마리 그리고 곡식과 건초 백여 차를 준비시켜 밤을 이어 주왕의 진영에 갖다 바치라고 했다.
祭足叩首再三,口稱:「死罪臣寤生,不忍社稷之隕,勒兵自衛。不料軍中不戒,有犯王躬。寤生不勝戰兢觳觫之至!謹遣陪臣足,待罪轅門,敬問無恙。不腆敝賦,聊充勞軍之用。惟天王憐而赦之!」桓王默然,自有慚色。虢公林父從旁代答曰:「寤生既知其罪,當從寬宥,來使便可謝恩。」祭足再拜稽首而出,遍歷各營,俱問安否。史官有詩嘆云:漫誇神箭集王肩,不想君臣等地天。對壘公然全不讓,卻將虛禮媚王前。又髯翁有詩譏桓王,不當輕兵伐鄭,自取其辱。詩云:明珠彈雀古來譏,豈有天王自出車?傳檄四方兼貶爵,鄭人寧不懼王威!
제족이 (주왕의 진영에 당도하여) 머리를 재삼 조아리면서 장공이 전하는 말을 아뢰기를, “신 오생이 죽을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사직이 기우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서 군사를 동원하여 스스로를 지키고자 함이었습니다. 군사들에게 미처 경계하지 못해 왕의 몸을 다치게 하였습니다. 오생이 두려워하는 마음을 이길 수 없게 되었습니다. 감히 저를 대신하여 신하를 보내어 원문 앞에서 죄를 청합니다. 탈은 없으신지 감히 여쭙고 약소한 재물이오나 바치오니 군사들의 노고를 위로하는 데 쓰시기 바랍니다. 오로지 천자께서 저를 불쌍히 여겨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했다. 주환왕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얼굴에는 부끄러운 기색만을 띄울 뿐이었다. 괵공 임보가 옆에서 대신 말하기를, “오생이 이미 자신의 죄를 스스로 깨닫고 사죄하니 그 뜻을 좇아 관대히 용서한다. 사자는 천자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도록 하라!” 했다. 제족이 머리를 조아려 재배하고 원문 밖으로 나가 각 진영을 돌아다니며 모두에게 안부를 물었다. 사관이 이 일을 두고 시를 지어 한탄하기를, “왕의 어깨를 활로 쏘아 맞추었다고 자랑하지 말라! 임금과 신하는 하늘과 땅 같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고, 공공연히 왕에 대항하여 추호도 양보하지 않더니, 이제 와서 거짓 예를 취하며 왕 앞에서 아첨하는가?” 했다. 또 염옹이 시를 지어 주환왕이 경솔하게 군사를 일으켜 정나라를 치다가 스스로 치욕을 당한 것을 비난하기를, “밝은 구슬로 참새를 쏘는 일은 예부터 비웃는데, 어찌하여 천자가 친히 전차를 끌고 나왔는가? 사방에 격문을 돌리고 벼슬까지 빼앗았으나, 정나라 사람들은 오히려 천자를 두려워하지 않았네.” 했다.
桓王兵敗歸周,不勝其忿。便欲傳檄四方,共聲鄭寤生無王之罪。虢公林父諫曰:「王輕舉喪功,若傳檄四方,是自彰其敗也。諸侯自陳、衛、蔡三國而外,莫非鄭黨。徵兵不至,徒為鄭笑。且鄭已遣祭足勞軍謝罪,可借此赦宥,開鄭自新之路。」桓王默然。自此更不言鄭事。卻說蔡侯因遣兵從周伐鄭,軍中探聽得陳國篡亂,人心不服公子佗,於是引兵襲陳。
주환왕이 싸움에서 패하여 왕도로 돌아왔으나 분함을 이기지 못했다. 또다시 사방의 제후들에게 격문을 띄워, 정나라 오생이 왕을 능멸한 죄를 토벌하려고 했다. 괵공 임보가 간하기를, “왕께서 경솔하게 군사를 움직여 공을 세우지 못했는데, 만약에 또다시 격문을 사방의 제후들에게 전한다면 지난번의 패전을 제후들에게 스스로 선전하는 꼴이 됩니다. 제후들 중에서 진, 위, 채 등 세 나라를 제외하면 모두가 정나라와 한패가 아닌 나라가 없어 왕이 불러도 정벌군이 오지 않으면 한갓 정나라의 비웃음만 사게 됩니다. 또 정나라가 이미 제족을 보내어 우리 군사를 위로하고 사죄를 하였으니, 이것을 명분 삼아 용서하여 정나라와는 새롭게 관계를 맺도록 하십시오.” 했다. 주환왕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이후로는 정나라 일에 대해서 다시는 언급하지 않았다. 한편, 채후는 주환왕이 정나라를 칠 때 군사를 파견했는데, 군중에서 진나라의 찬탈 사건에 대한 소문을 듣고, 진나라 백성들이 마음속으로 진나라의 새로운 군주 공자 타에게 불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군사를 끌고 진나라를 습격하였다.
不知勝敗如何,且看下回分解。
승패가 어찌 될지 알 수 없구나, 다음 회를 보면 풀릴 것이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