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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성회
부제: 신약성서가 말하는 교회의 의미
히브리서 12:22~24
설교 목적:
지난 10월 23일 주일설교에서 나는 히브리서 11장을 중심으로 그리스도인의의 정체성과 소임에 대하여 소개했다. 그때 나는 위 본문을 설교안에 포함했는데 설교 시간에는 다루지 않았다. 이 본문은 우리 교회가 속한 교단의 명칭(하나님의 성회)을 담고 있다.
나는 이번 설교에서 이 본문을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신약성서가 말하는 교회란 무엇인지를 설명해 보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 교단의 명칭이 담고 있는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예정이다.
이 설교는 우리에게 교회의 본질과 소임에 대하여 다시 한번 일깨워줄 것이다. 그리고 이 설교를 통하여 우리는 교회에 대한 성경의 비유들이 잘못 사용되는 예를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교회의 일원으로서 어떤 일을 위해 수고해야 하는지를 더욱 명확하게 포착할 수 있을 것이다.
설교 개요:
1. 우리나라 개신교회의 교단들
2. ‘하나님의 성회’란 말의 기원
3. 교회는 시온성이다
4. 교회는 새 예루살렘이다
5. 교회는 누구와 함께 있는가?
6. 하나님의 장자들
7.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8. 장자들의 기업
1. 우리나라 개신교회의 교단들
우리 교회가 속한 교단의 명칭은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기하성)입니다. 이 말은 대한민국에 있는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으로서 특별히 그 이름을 ‘하나님의 성회’라고 하는 교회들의 연합이라고 풀어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기독교회 중 개신교회에 속한 교단들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장로교나 감리교, 성결교나 침례교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이들은 다른 이름을 가졌지만 한 분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른다는 점에서는 모두 동일합니다.
장로교는 교회를 치리하고 운영하는 주체가 당회입니다. 당회(堂會)는 목사와 장로로 구성됩니다. 장로교회에는 교회의 상급기관으로 노회(老會)와 총회(總會)가 있어서 교회의 치리(治理)에 대하여 지도와 감독을 합니다.
장로교회와 달리 개별 교회 회중들이 뜻을 모아서 교회를 운영하는 교회를 ‘회중교회’라고 부릅니다. 장로교회들은 당회를 중심으로 운영되며 상급기관인 노회의 감독을 받지만 회중교회들은 오로지 교회의 구성원들의 결정에 따라 교회가 운영됩니다.
현재 우리나라에 있는 대부분의 개신교회들의 조직과 체제는 장로교회의 그것과 유사합니다. 교회 안에는 책임을 맡은 대표자들이 선출되어 담임목사와 함께 교회를 운영하며, 교회는 노회나 지방회, 그리고 총회의 치리를 받습니다. 순수하게 회중들만의 결정으로 운영되는 교회는 거의 없다고 봐도 됩니다. 그렇다고 노회나 총회가 개교회의 문제에 대하여 모든 권한을 행사하는 것도 아닙니다.
교단마다 교리적 특징이 있지만 교회가 운영되는 방식은 대체적으로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각 교회는 자신이 속한 교단의 헌법에 충실하고 소속된 교단 안에서 서로 연합하고 협력하면 그 자체로 안전하게 소속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개별 교회가 교회의 본분을 잘 이해하고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저는 우리 교회가 속한 교단의 명칭을 소개하면서 교회의 본분과 사명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2. ‘하나님의 성회’란 말의 기원
우리 교회가 속한 교단의 이름은 ‘하나님의 성회’입니다. 우리는 우리나라 어떤 교회들의 이름에 ‘하나님의 교회’라는 단어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이름을 가진 가장 대표적인 집단은 본래 ‘안상홍 증인회’라는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안상홍(1948~1985)이라는 사람을 ‘재림 예수’로 믿으며, 하나님을 아버지(안상홍)와 어머니(장길자)로 믿습니다. 그리고 유월절을 문자 그대로 지켜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한국의 주요한 교단들은 안상홍교에서 출발한 ‘하나님의 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를 이단으로 규정합니다. 정통교회들이 어떤 교회들을 이단으로 규정하는 이유는 그런 교회들이 기독교 신앙의 가르침을 왜곡하여 사람들을 그릇된 길로 이끌어 결국 사람들을 해롭게 한다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과 같이 사상과 종교의 자유가 널리 인정되는 시대에 이단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은 조심스러운 일이기는 하지만 신앙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믿는 신앙의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바르게 이해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토록 정성을 다하여 따르는 길이 그릇된 길이라면 얼마나 허무하겠습니까?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대한민국에서 이단으로 판명된 교회들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신자들은 이단에 대해서는 교회의 지도자들이나 교단 총회에서 결정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을 제대로 공부하면 할수록 이단들의 가르침이 왜 거짓되고 위험한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교회가 속한 하나님의 성회라는 교단명칭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 교단의 이름은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회’입니다. 여기서 성회(聖會)라는 말은 거룩한 모임이라는 뜻으로서 히브리서 12장 23절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22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23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24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
히브리서 12:22~24
이 본문은 교회가 지금 어디에 와 있는가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영적인 지위와 위치가 어디인가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가 설명하는 핵심 내용은 옛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고 제사를 지내며 살았는데 지금 우리들은 그들보다 더 나은 시대와 환경 속에서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지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언약을 맺은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전에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탈출하여 도착한 곳이 시내산이었는데, 그곳에 함부로 가까이 가다가는 짐승이라도 죽을 수 있었습니다. 그곳은 화염과 흑암과 폭풍과 나팔소리가 있는 두려운 장소였습니다. 그곳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세도 말하기를 심히 두렵고 떨린다고 했습니다(히 12:18~20). 그런데 지금 교회가 이른 곳은 그들보다 훨씬 나은 곳이라는 설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가 지금 이른 곳은 시온산과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입니다. 이것들은 신약의 교회가 옛 이스라엘에 비해서 영적으로 얼마나 영광스럽고 우월한 지위와 위치에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특히 23절에 ‘장자들의 모임’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서 ‘모임’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파네귀리스(pane:gyris < pan, all 전체 + agora, gathering 모임)라고 합니다. 이것을 영어로 옮기면 어셈블리(assembly)가 되는데, 이 단어는 흔히 총회(總會) 또는 국회(國會)로 번역됩니다. 개혁한글판 성경(1961)은 이 단어를 ‘총회’로 옮겼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단을 설립한 미국의 선교사들은 ‘어셈블리 오브 갓’(Assembly of God)이라는 교단에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명칭을 우리말로 번역할 때 우리 교단의 선배들은 ‘하나님의 성회’로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단의 이름이 ‘하나님의 성회’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 교단의 명칭은 신약성서가 말하는 교회의 지위와 위치를 설명하는 용어들 중에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장로교회가 교회를 운영하고 치리하는 방식에 대한 명칭이라면, 감리교회도 감독이 교회들을 감독하는 방식으로 운영되는 교회를 가리키는 말이며, 성결교회나 침례교회는 신앙생활의 어떤 부분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단의 명칭인 ‘하나님의 성회’는 교회 자체를 가리키는 신약성서의 설명에서 왔습니다.
물론 우리 교단의 교회들이 교회를 운영하는 방식은 장로교회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 교단의 명칭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를 우리는 잘 알아 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히브리서가 소개하는 신약성서의 교회는 어떤 특징이 있는지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3. 교회는 시온성이다
히브리서는 교회가 이른 곳은 시온산이라고 소개합니다. 시온산은 본래 다윗이 정복하여 세운 다윗성이 있는 자리입니다. 그곳은 나중에 예루살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므로 시온산은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전은 삶의 중심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시온산은 하나님이 머무시는 산이라고 그들이 믿기 때문입니다. 자손들은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직분을 맡았습니다. 시편을 보면, 고라 자손들의 찬양이 나오는데, 그들은 시온산은 하나님의 산이며, 그곳에 하나님의 거룩한 성이 있다고 노래했습니다(시 48:1~2).
하나님이 온 세상만민에게 복을 주시려고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가나안 땅이 약속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 땅에서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고 아브라함의 언약대로 온 세상에 복이 되는 나라를 건설할 때 그 중심에 시온산이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시온산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보여주는 표현들이 나옵니다. 시온산은 온 세상을 비추는 등대와 같으며, 세상 만민이 시온에서부터 나오는 율법을 배움으로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사 2:3). 시온에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영광이 비치며(시 50:2), 사람들은 시온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서원을 갚을 것입니다(시 65:1).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복을 주십니다(시 134:3).
구약성경이 설명하는 시온산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시온산에 임재하여 거주하시며, 그 백성의 찬송이 하나님께 끊임없이 올라가는 곳이며, 만민을 구원할 말씀이 나오는 곳이며, 만민이 복을 받는 곳입니다. 그곳은 마치 하늘과 땅이 하나되는 장소인 에덴동산과 같습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산이며 하나님이 성이기 때문입니다.
신약성서는 교회가 지금 시온산에 이르렀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영적인 지위와 위치는 시온산에 있습니다. 어떤 교회들이 그 이름을 시온성교회라고 짓는다면 그 이유는 명확합니다(다음 검색 결과 국내에 시온성교회는 146개 장소가 있음, 새에덴교회는 42개, 새소망교회는 186개). 교회가 바로 시온성과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교회에 거하시고 교회를 통하여 그 빛을 만방에 비추시며 온 세상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시온산과 같은 오늘의 교회입니다(찬송가 210장 시온성과 같은 교회).
4. 교회는 새 예루살렘이다
교회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예루살렘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을 설명하는 수식어는 두 가지입니다. 그 하나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the city of the living God)이며, 나머지 하나는 ‘하늘의 예루살렘’(the heavenly Jerusalem)입니다. 하늘의 예루살렘에 대해서는 지난 설교에서 한번 설명한 바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도착한 곳이 시온산이며 예루살렘이라고 할 때 우리가 기억할 점은 이 두 설명이 모두 ‘비유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시온산은 지금의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에 있습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이 ‘문자 그대로’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구원이 임할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신약성경이 말하는 시온산이나 예루살렘은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면 교회가 예루살렘에 도착했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이 말은 교회가 시온산에 도착한 것과 같습니다. 이는 교회가 하나님이 계시는 거룩한 곳으로 인도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초기교회 당시에 지상의 예루살렘에는 타락한 종교지도자들이 있었으며 그곳은 결국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있는 예루살렘은 하늘의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예루살렘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하늘의 예루살렘’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늘의 예루살렘에서 ‘하늘의’(heavenly)라는 단어는 헬라어 ‘에뿌라니오스’(epouranios)인데 그 의미에 대해서 사전은 ‘하늘에 있는’(existing in heaven) 또는 ‘하늘의 특성을 가진’(of heavenly nature)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도달한 영적인 위치는 하늘의 특성을 가진 예루살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하늘에 올라가 있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의 영적인 지위가 그렇다는 말입니다.
본래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건축하게 하신 하나님의 처소요 집입니다(왕상 9:3).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그 언약을 깨뜨렸을 때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예루살렘은 더 이상 하나님의 이름이 머무는 집이 아닙니다. 그곳은 멸망의 가증한 것이 차지하고 더럽혀졌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두신다는 말은 하나님이 거기 머무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거기 머무신다는 의미는 하나님의 영을 그곳에 충만하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씻김을 받고 그들의 죄 사함을 받았을 때 하나님은 교회에게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성령이 이제 거룩한 백성들에게 임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옛 예루살렘 성전처럼 하나님이 그 거룩한 영으로 임하시는 새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하나님이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게 하시고 그들과 함께 사시겠다고 약속하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에덴동산에서 최초의 인간과 더불어 성취하려고 계획하신 바로 그 일이 아닙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약속하신 바로 그 일이 아닙니까? 그것은 천하만민에게 복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세계가 생명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충만한 세상, 그것이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통해서 이루고자 계획하신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예루살렘에 거하는 백성들이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공도를 지키고 그 언약에 충실하면 되는 것입니다(창 18:19).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하여 한 가정을 이루고 서로에게 진실하고 충실한다면 그 가정에는 태의 열매가 생기고 번창하는 가문이 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그 백성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머무신다면 그 백성들은 하나님께 진실하고 그 언약에 충실한다면 그들이 머무는 곳인 예루살렘은 세상 만물을 회복하는 생명수가 흘러나오는 생수의 근원이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목회자라면 성지순례를 꼭 해보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예수님이 거니시던 마을과 성경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현장에 가 보는 것은 정말 특별한 경험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니 지금 우리가 있는 교회가 바로 시온산이며 하늘의 특성을 가진 예루살렘이며 하나님이 거룩한 영을 두신 처소라면 우리가 볼품없는 성벽만 겨우 남은 통곡의 벽에 가보지 않았다고 해서 아쉬울 것은 없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그 거룩한 영을 부어 주시고 머무시는 진짜 예루살렘에 우리가 와 있는데 지리적인 예루살렘을 갈망할 이유는 없습니다. 성지순례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감사한 일이지만, 우리가 기억할 점은 신약성경이 말하는 바는 바로 여기 우리가 있는 곳이 예루살렘이라는 사실입니다.
5. 교회는 누구와 함께 있는가?
앞에서는 교회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설명했다면, 이제부터는 교회는 누구와 함께 있는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히브리서 12장 22절부터 24절까지를 보면 우리가 있는 곳은 시온산이며 하늘의 예루살렘이며 바로 그곳에는 천만 천사가 있고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이 있으며, 교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 앞에 있으며, 그 주위에는 온전하게 된 의인들의 영이 있습니다. 그리고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곳에 있습니다.
옛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을 때 중보자가 모세였다면, 이제 새 언약의 중보자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가까이에는 죽기까지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충성되게 살았던 의인들의 영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되어 오늘 우리가 이 땅에서 선한 싸움이라는 경주를 하는 모습을 보고 응원할 것입니다(히 12:1).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은 누구입니까? 그들은 곧 교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본래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들에게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주실 계획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장자였습니다(출 4:22). 그러므로 하나님의 장자들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물려받은 사람들입니다. 신약의 교회는 구약의 교회와 새 예루살렘에서 함께 만납니다. 그런 상황을 보여주려고 요한계시록에서는 하나님과 함께 하늘에 앉은 장로들의 수가 24명이라고 소개합니다(계 4:4, 5:8, 11:16, 19:4).
여기서 장자들의 모임인 교회에 대하여 조금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장자들의 모임이라는 말에서 우리 교단의 명칭이 나왔습니다.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총회가 교회입니다. 그 총회는 거룩한 무리들이므로 성회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교회를 장자들의 성회(총회) 또는 장자들의 모임이라고 부를 때 그 의미는 무엇일까요?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출 4:22)
이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장자라고 부르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왜 자신의 장자라고 부르셨을까요? 장자라는 말을 생각하면 우리는 장자의 명분을 얻기 위해 형에게 팥죽으로 거래한 야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한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에게 축복의 안수기도를 할 때 손을 교차로 얹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장자는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아 그 기업을 이을 사람입니다. 우리나라도 전에는 장남이 조상의 제사를 모시고 재산을 가장 많이 물려받았습니다. 지금은 상속법이 달라졌지만, 전에는 장자에게 특별한 권리와 의무가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장자는 하나님의 기업을 물려받을 사람이며, 하나님의 기업을 이어야 할 의무를 가진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고 했으며, 로마서 8장 17절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상속자’라고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을 교회라고 할 때, 교회는 하나님의 기업을 물려받을 사람들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교회를 장자들이라고 부를까요?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에게 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실까요? 이 문제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6. 하나님의 장자들
여기서 다시 우리는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파라오에게 하신 말씀을 생각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자신의 장자라고 부르신 이유는 그들에게 기업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이 물려받을 기업은 하나님이 전에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약속의 땅, 가나안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그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주셔서 무엇을 이루려고 하신 걸까요? 그것은 그 땅에서 시온산을 중심으로 거룩한 성을 만드시고 그 백성을 거룩하게 하셔서 온 세상을 비추는 등불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시온의 영광이 그 백성을 비추며 시온으로부터 하나님의 구원이 천하만민에게 이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아마 애굽에서 이스라엘이 종살이를 하고 있었다면 천하 만민도 어두움의 권세 아래서 신음하고 있을 것입니다(롬 8:22). 하나님은 그 백성을 먼저 구원하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의 옷을 입히시고 그들을 제사장으로 삼으셔서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이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에덴동산을 별도로 창설하신 후에 그곳에 아담을 들이시고 그에게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게 하신 것과 같습니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면서 그의 권세를 가지고 그의 소임을 다한다면 에덴동산으로부터 생명수가 흘러나와 온 세상을 비옥하게 하며, 동시에 천하만민이 복을 받아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세상과 인간을 향하여 갖고 계신 계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경륜’(God’s Economy or Master Plan, 엡 1:9, 3:2, 9)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의 경륜은 창세 전에 세워진 것이며 이 세상을 지으신 후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아담을 비롯하여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들에게 계시되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천하만민이 복을 받을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고 계시하셨고, 모세에게는 그 백성이 열방을 위한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가 될 것이라고 계시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도 하나님의 경륜은 계시되었는데, 그것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하나로 통일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으로 온 세상이 충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엡 1:10, 23).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은 새로운 피조물을 지으시고 거룩한 성전을 세우십니다. 이 말은 아담과 같이 온 세상을 맡을 장자들을 지으신다는 말이며, 이스라엘과 같이 온 세상을 위해 봉사하여 시온의 영광과 복을 나눌 제사장들을 세우신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7.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창세기 25장을 보면, 아브라함의 손자들이 태어나 자라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그들은 야곱과 에서입니다. 그런데 에서는 형으로서 사냥꾼이 되었고 야곱은 집에서 조용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냥에서 돌아온 에서는 팥죽을 쑤고 있는 야곱을 봅니다. 배가 고파서 팥죽을 좀 달라 하는 에서에게 야곱은 형의 장자의 명분을 팔면 팥죽을 주겠다고 합니다. 그때 형 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창세기 25:32
야곱은 다시 한번 형의 다짐을 받으려고 맹세하게 합니다. 창세기 기자는 이 사건을 정리하면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34절). 히브리서 기자는 에서의 행동을 조금 더 강하게 비판합니다: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히 12:16).
야곱은 장자의 명분을 귀하게 여기고 그것을 얻기 위해 팥죽을 쑤기도 하고 나중에는 모험을 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먼저 태어난 에서가 아니라 야곱을 중심으로 기록됩니다. 야곱은 그 자손들에게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이름을 물려준 인물입니다. 그리고 그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켜 하나님은 자신의 장자라고 부르셨습니다.
여기서 장자의 명분을 얻는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바란다는 것임이 드러납니다. 나중에 야곱은 시력이 약해진 아버지 이삭에게 축복기도를 받습니다. 야곱이 그렇게 한 까닭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늘 그랬습니다. 그런데 에서는 나중에 그것을 깨닫고 축복기도를 받으려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그는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기다가 망령된 일을 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망령된’(bebe:los, crossing the doorway, heathenish, profane, ungodly) 일을 한다는 말은 ‘선을 넘었다’는 의미입니다.
야곱과 에서는 누구입니까? 그들은 아브라함의 손자들입니다. 그들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들려주신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을 것입니다. 그들은 할아버지가 하란을 떠나온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며, 아버지 이삭이 모리아산에 올라가서 번제로 바쳐질 뻔한 이야기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 모든 이야기를 들으면서 하나님이 하신 일과 할아버지에게 주신 약속에 대하여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그 이야기를 믿었고 에서는 그 이야기를 가볍게 여겼습니다. 여기서 믿음과 불신앙이 나뉩니다. 저는 전에 믿음에 대하여 정의를 내린 바 있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이 하신 일과 말씀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반응을 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에서는 자신의 힘만 믿고 살았을 것입니다.
장자의 명분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기대하고 그것을 생각하면서 인내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야곱의 후예들이며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 하나님은 ‘내 아들 내 장자라’고 부르십니다. 그리고 하늘에는 하나님의 언약과 경륜을 소중히 여기고 그것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으로 살아간 장자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전체 모임인 장자들의 총회, 장자들의 성회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the general assembly and church of the first-born who are enrolled in heaven - Heb 12:23, NAS).
8. 장자들의 기업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들인 장자들이 받을 기업은 무엇입니까? 이에 대하여 가장 명확하게 약속하는 성경본문은 시편 2편일 것입니다:
7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8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시편 2:7~8
하나님은 자기 아들에게 이방 나라를 유업으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로마서 8장에서도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에 참여한다고 가르쳤습니다(17절). 여기서 받을 상속은 고난 이후에 다가오는 영광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들이 받을 영광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난 받는 형제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행 14:22).
하나님의 장자들이 물려받을 기업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장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물려받는 까닭은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주리고 목마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참고 인내하기 때문입니다. 비방도 견디고 박해도 참아냅니다. 그들은 은밀하게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갑니다. 그들이 하나님 나라를 물려받는 것을 달리 말하면,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거룩한 모임에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죄인들은 의인들의 모임에 들어오지 못합니다(시 1:5). 또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시 95:11, 히 3:11, 18, 4:3, 5).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에덴동산과 같습니다. 불의한 자나 망령된 자들은 결코 그 길로 다닐 수 없습니다(사 35:8). 그곳은 하나님의 영광이 빛나는 시온성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과 관련하여 설명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에덴동산으로 들어가는 닫힌 문이 열리는 것이며, 그것은 지성소의 휘장이 갈라지는 것이며, 그것은 포로생활을 마치고 시온의 땅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의인들의 모임 또는 장자들의 모임, 또는 온전하게 된 의인들이 있는 곳으로 설명되기도 합니다.
이 모든 표현들이 가리키는 것이 무엇일까요? 이것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이며 시온산과 예루살렘이며, 하나님의 자녀들이 물려받을 기업입니다. 보통 이 모든 것에 대하여 사람들은 천국이나 하늘나라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하늘나라는 우리가 죽어서 들어갈 하늘 위의 세상이라고 상상합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물려받을 기업은 천국이며, 상급도 천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천국은 죽음 이후에 펼쳐지는 내세나 사후세계에서 받을 복락이라고 설명하고 이해합니다.
저는 이 문제에 대하여 수년동안 고민하고 연구하고 설교도 했습니다. 특히 지난 2019년에는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라는 주제로 시리즈 설교를 했습니다. 그것은 성경이 들려주는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내린 결론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새로운 세상’입니다. 그것은 현재의 세상과는 다릅니다. 현재의 세상과 어떤 점에서 다른가 하면, 예언자들의 환상과 같이 현재의 모습이 사막과 광야라면 오는 세상은 생명으로 충만한 생태평원이 될 것입니다. 현재는 불의와 불법이 활개치지만 오는 세상에서는 공의와 자비가 강물같이 흐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세상을 가리켜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는 삶이라고 말했습니다(롬 14:17).
그런 세상은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사람들에게는 약속의 땅과 같을 것입니다. 그런 세상은 하나님의 성전을 잃고 포로생활 하던 사람들에게는 시온으로 돌아오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기쁨이 충만하고 그들의 입에는 함박웃음이 가득할 것입니다. 그런 세상은 의를 행하는 사람들에게 만족함을 얻는 곳이 될 것입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위로와 보상이 있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미 그런 세상의 삶을 지금 여기서부터 누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그들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는 장차 하나님이 새롭게 하실 이 세상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온 것처럼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뜨거운 마음으로 경배하며, 완전한 길을 걷습니다. 그들은 이미 불의한 자들이 심판을 받은 것처럼 악을 선으로 이기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굳게 믿는 사람들은 사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지으셨으므로 이 모든 것을 바로잡으시고 또 완성하실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약속하셨고 계시로 보여주셨으니까요. 그 기업에 대한 확신이 너무나 분명하기에 그들은 장자의 명분을 사모했던 야곱처럼 열심을 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기업에 대한 약속이 너무 확실했기에 여호수아와 갈렙은 현실의 장애물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전진할 수 있었습니다.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가기를 고대하던 기업은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바벨론 땅에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들이 고대하던 기업은 시온산과 예루살렘입니다. 물론 아담이 다시 들어가기를 고대하던 기업은 에덴동산일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비유들입니다. 그러면 그 비유들이 가리키는 실상이나 실체는 무엇일까요?
우리들은 지금 에덴동산을 찾으러 다니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다시 시온산에 하나님의 성전이 세워지기를 바라는 시온주의자들을 옹호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하늘 위에 있는 새 예루살렘에 올라가기를 바라는 것이 옳다고 여기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새 예루살렘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올 것이기 때문입니다(계 3:13, 21:2).
장자들의 기업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물려받을 영광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나라는 장차 우리에게 열리는 새로운 세상입니다. 그 세상은 오늘 우리의 수고의 결과로 탄생할 것이며, 우리가 기도하듯이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그것을 위해 수고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새로운 세상입니다.
그런 세상이 그토록 아름답고 풍성할 것이라고 예언자들이 노래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노래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그만큼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헬라인들이 바라던 유토피아를 하나님 나라로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 영혼들의 세계로 그리는 그런 세상을 하나님 나라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기를 바랍니다. 이미 우리 가운데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그 일을 완성하실 것을 믿습니다(빌 1:6). 마치 봄에 씨를 뿌리고 여름에 물을 대며 김매기를 하다가 가을이 되면 추수를 하는 농부와 같이, 오늘 여기서 우리가 수고하는 모든 일들이 결실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하나님 나라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새로운 세상’이라고 정의한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성회라는 교단에 속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회는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입니다. 그 장자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기업인 하나님 나라를 확실하게 기대합니다. 그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새로운 세상이며, 오늘 이미 우리들이 누리고 있는 삶이며, 장차 하나님이 완성하실 세상입니다. 그리고 그 세상에서 오늘 우리가 수고한 모든 것에 대한 보상과 열매를 보고 우리는 기뻐하고 또 기뻐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굳게 믿고 살아가는 사람은 아버지를 잃은 고아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날마다 ‘너는 내 아들이다.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라는 말씀을 듣고 삽니다. 또한 하나님의 언약을 굳게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은 남편 몰래 바람 피우는 음란한 여인이 아니라 일편단심 남편을 사랑하는 어여쁜 신부요 어린 양의 아내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성회에 속한 우리 교회는 이런 믿음으로 살아갑시다. 예수께서는 교회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요한계시록 3:11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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