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궁경부암을 이겨낸 장순란씨진짜 암환자 되는 것 같아 입원 않고 통원 치료산으로 들로 걷고 나물 캐고, 놀러가 수다 떨고
환자는 병의 발생에 참여하지만 치료에도 참여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의사나 한의사들은 치료는 환자 스스로 하는 것이고 의료인들은 단지 도와줄 뿐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는 치료와 회복에 환자의 긍정적인 자세와 의료진에 대한 믿음이 적지 않게 영향을 미친다는 말입니다. 자궁경부암을 이겨낸 장순란(58)씨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장씨는 우연히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2005년 5월, 장씨는 오빠를 따라 병원에 갔습니다. 몸무게가 갑자기 7㎏나 빠진 오빠가 건강검진을 받기 위해 서울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병원에 간 김에 함께 검진을 받아보자는 말에 응했는데 백혈구 수치가 아주 낮다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정밀 검사를 받았지요. 3주 뒤 그는 ‘자궁경부암 3기 말’이란 판정을 받았습니다. 자궁경부암은 자궁의 입구인 자궁경부에 발생하는 암으로 인유두종바이러스에 의한 감염이 원인인 경우가 90% 이상입니다. 자궁경부암은 여성암의 9.1%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발생 빈도는 그리 높지 않습니다. 유방암, 갑상샘암, 위함, 대장암, 폐암에 이어 여섯 번째로 많이 발생하는 질환입니다.
남편 생각하면 마음 짠했지만 되레 담담 “담담하더라고요.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암에 걸렸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거예요. 남편과 아이들, 친정 식구들 심지어 동네 사람들까지 울고불고 하는데 정작 저는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장씨는 국립암센터에 가서 다시 정밀검사를 받았습니다. 다행히 진행 상태는 2기 말이었습니다. 장씨는 먼저 암을 이기겠다는 결심부터 했습니다. 자신이 세상을 떠났을 경우에 혼자 남을 남편을 생각하면 마음이 짠했다고 합니다. 결과를 통보받은 6월14일 일기에 그는 “나는 꼭 살 것이다. 꼭 살아서, 이 행복을 지키리라 마음먹었다”라고 썼습니다. 자신감도 들었습니다. 자궁경부암 2기 환자의 생존율은 최대 80%나 됩니다. 실제 자궁경부암의 5년 생존율은 다른 암에 비해 상당히 높습니다. 암세포가 자궁경부의 상피 안에 존재하는 상피내암 등 0기의 경우 95%가 넘고, 1기 80~95%, 2기가 60~80%, 3기도 30~40%나 됩니다. 자궁경부암 치료에는 원추절제술이나 자궁적출술 같은 수술 요법, 방사선 요법, 화학 요법 등이 있습니다. 레이저나 고주파를 쓰거나 암세포를 얼려 죽이는 방법을 쓰기도 합니다.
병원에서는 전이 가능성을 우려해 수술 대신 방사선과 항암치료를 권했습니다. 방사선 치료 42회, 항암치료 6회의 처방이 내려졌습니다. 담당의사는 입원 치료를 권했으나 그는 통원치료를 선택했습니다. “입원하면 진짜 암환자가 되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일주일에 5차례 받은 방사선 치료는 그리 힘들지 않았습니다. 반면 항암치료는 무척 힘이 들었습니다. 구토 증상이 생겼고 어지러웠습니다. 항암치료를 시작한 뒤 백혈구 수치가 너무 낮아 4회 치료를 받은 뒤 중단했습니다. 백혈구 수치가 ㎖당 2000개 이하로 정상인의 4000~1만에 비해 크게 낮았습니다. 장씨는 그럼에도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았습니다.
식성도 자연스레 바뀌어…고단했던 삶 되돌아 봐
“제가 치료를 받기 시작한 뒤 집에 오면 남편은 물론 아이들도 제 눈치만 보더라고요. 하지만, 제 속을 깊이 들여다봐도 제가 암 환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거예요. 정말 이상하죠? 치료 뒤에도 의사 선생님 지시만 따랐어요.”
자신감은 있었지만 장씨는 생활습관을 고치기로 했습니다. 먼저,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전에는 골프가 주된 운동이었지만 지금은 거의 날마다 집 뒤 용뫼산을 두 시간가량 걷고 등산로에 있는 운동기구을 이용해 운동을 합니다. 비가 오면 집 앞 배드민턴 코트 둘레를 1시간 30분가량 천천히 걷습니다. 오전에 산에 가는 것 말고는 일상생활에 큰 변화는 없습니다. 대신 친구들과 놀러다니는 시간을 늘렸습니다. 근처의 산이나 들에 가서 쑥을 캐고, 돈나물과 민들레를 캐다가 된장에 무쳐 먹고, 식당을 찾아 외식을 하고, 차를 마시며 수다도 떱니다.
운동을 많이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식성이 바뀌었습니다. 장씨는 어려서부터 고기를 많이 먹은 터라 결혼 뒤에도 고기를 즐겼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채식이 입에 당긴다고 하네요. 현미에 콩과 잡곡을 많이 섞어서 밥을 짓고 야채도 많이 먹습니다. 아침에는 콩, 깨, 인삼, 견과류 등을 함께 갈아 마시기도 합니다.
장씨는 암 투병을 계기로 자신의 고단했던 삶을 돌아보게 됐습니다. 지난날을 돌이켜보니 고전무용을 전공한 둘째 아이 뒷바라지가 특히 힘들었습니다. 둘째가 초등학교 4학년인 88년쯤부터 장씨의 고생은 시작됐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학원에서 합숙하는 아이들을 위해 밥, 반찬, 간식을 만들어 날랐습니다. 승용차가 없던 장씨는 다른 집 승용차를 빌리지 못하면 대중교통으로 쌍문동 집에서 의정부까지 음식을 들고 가야했습니다. 당번이 있는 날은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일어나지 못할까 걱정해 전날은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10년 넘게 숨겨둔 빚 털어놓자 통곡 다행히 둘째 딸은 공부를 잘해 남들이 부러워하는 예원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이제 장거리 음식 ‘배달’은 안 해도 됐습니다. 하지만 뒷바라지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콩쿠르 참가를 위해 전국을 다녀야 했습니다. 자신의 건강을 챙길 시간도 정신적 여유도 없었습니다. 자신은 늘 뒷전이었습니다.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장씨는 집에 있는 날이면 지금까지 한 번도 남편에게 아침 밥상을 차려주는 일을 걸러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스트레스는 금전 문제였습니다. 장씨는 같은 초등학교에 다니던 다른 아이의 어머니가 돈이 급히 필요하다고 해 주위 사람들로부터 꿔다 당시 아파트 한 채 값이나 되는 큰돈을 빌려줬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어느 날 잠적했고 장씨는 남편이 주는 생활비를 쪼개 이자를 갚아야 했습니다. 10년 이상 그 빚 걱정 때문에 밤잠을 설친 날이 수없이 많았습니다. 암에 걸린 뒤에야 그는 그 사실을 남편에게 털어놓았습니다. 남편은 사업에 몰두하느라 아내의 아픔을 눈치채지 못했다고 통곡하며 빚을 말끔히 갚아 줬습니다.
장씨는 투병 기간 동안 가족들의 사랑이 큰 힘이 됐다고 합니다. 병원을 오가며 방사선 치료를 받는 동안 남편은 물론 딸, 친정오빠, 올케, 외숙모 등이 돌아가며 그를 차에 싣고 병원을 오갔습니다. 장씨는 “암에 걸리고 나니 참 좋다는 생각이 그때 처음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돈을 떼먹고 간 사람에게도 “병이 나은 것으로 다 용서하려고 한다”고 했습니다. 얼마 전에는 교회에서 그 사람을 위해 기도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긍정적인 마음이 병을 이겨내는 데 크게 도움이 됐던 것 같아요.”
글 권복기 기자
bokkie@hani.co.kr, 사진 곽윤섭 기자
kwak1027@hani.co.kr
첫댓글 하나님의 은혜가 놀랍네요
혼자 가슴앓이하면 안 좋다는 걸 다시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