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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1
前人評書에 亦有偏徇失實하여 褒貶不公處라 至如趙文敏*書法은 雖上追二王*하여 爲有元一代書法之冠이나 然이나 風格已謝宋人이라 至詆以奴書*者는 李伯楨*之失實也이요 譽之以祥雲捧日하고 儀鳳沖霄者는 解學士*之偏徇也라
이전 사람들의 글씨를 품평함에는 또한 편견을 따라 진실성을 잃어 포폄을 공정하지 않게 처리하였다. 조맹부의 서예에 이르러서는 비록 위로 이왕을 본받아 원나라 서예에서 으뜸이 되었으나 풍격은 이미 송나라 사람을 부끄럽게 하였다. 이백정이 ‘노서’라고 비방함에 이른 것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은 것이고, 해진이 ‘상서로운 구름이 해를 받들고 의봉이 하늘로 솟아 오른다’고 기린 것은 해학사의 편견을 따른 것이다.
*趙文敏(조문민): 조맹부(趙孟頫, 1254-1322)를 이른다. 원나라의 서화가이며 문학가로, 자가 자앙(子昻), 호는 송설도인(松雪道人)ㆍ수정궁도인(水晶宮道人)이며 시호는 문민(文敏)이고 호주(湖州) 사람이다. 해서를 잘 썼으며 당나라의 구양순ㆍ안진경ㆍ유공권과 더불어 ‘해서사대가’라 일컫는다.
*二王(이왕): 왕희지ㆍ왕헌지 부자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奴書(노서): 남의 글씨를 모방한 개성이 없는 서체를 이른다.
*李伯楨(이백정): 이는 이응정(李應禎, 1431-1493)으로 여긴다. 이응정의 처음 이름은 신(甡)이고 자가 응정(應禎)이었으나 자를 고쳐 정백(貞伯)이라 하였다. 소주(蘇州) 사람으로 문징명(文徵明, 1470-1559)의 학서에 영향을 주었다.
39-2
夫右軍은 書聖也라 梁武帝*書評止云 龍跳天門虎臥鳳閣이라하니 而解之評趙는 則越右軍而上之矣라 至若張司直從申*은 於唐人書家中에 不甚顯著하고 字跡之傳亦少이나 今有延陵季子廟碑*이니 乍觀形體는 頗似趙書라
왕희지는 서성이다. 양무제는 서평(書評)에서 “용이 천문에 솟구치고 범이 봉각에 누워 있다”라고 잘라 말하였고, 해학사는 조맹부의 글씨를 평하여 왕희지를 뛰어넘어 위에 두었다. 장종신은 당나라 서예가 중에서 드러남이 많지 않고 필적이 전하는 것도 희소하나 지금의 <연릉계자묘비>가 있으니 눈에 띄는 형체는 대개 조맹부의 글씨와 비슷하다.
*梁武帝(양무제): 이는 남조 양 무제 소연(蕭衍, 464-549)을 이른다.
*張司直從申(장사직종신): 장종신(張從申, 생몰미상)은 당나라 대력 연간(766-779)에 대리사(大理司) 사직(司直)을 역임하여 장사직이라고도 불린다. 소주(蘇州) 사람으로 왕희지를 본받아 해서ㆍ행서를 잘 썼다. <현정선생이함광비(玄靖先生李含光碑)>는 그의 글씨이다.
*延陵季子廟碑(연릉계자묘비): 당 대력 14(779)년에 윤주(潤州) 자사(刺史) 소정(萧定, 708-784)은 <연릉계자묘비>를 세웠는데, 손수 지은 <개수오연릉계자묘기(改修吳延陵季子廟記)>를 비음(碑陰)에 장종신이 해서로 써서 새겼다.
39-3
然이나 筆畫沈峭하고 風格蕭疎하여 較之趙書하면 相去實殊라 何後之人은 但知有趙文敏이요 而不知有張司直인가 是以孫虔禮*之作書譜하여 深致歎於無知音也라
그러나 필획은 깊고 가파르며 풍격은 적막하여 조맹부의 글씨와 비교하면 실제와는 다르다. 어찌하여 후세 사람들은 다만 조맹부만 알고 장종신을 알지 못하는가? 그러므로 손과정은 서보에서 알아주는 이가 없음을 매우 한탄하였다.
*孫虔禮(손건례): 손과정(孫過庭, 646-691)의 자는 건례(虔禮)이고 우위주조참군(右衛冑曹參軍)ㆍ율부녹사참군(率府錄事参军)을 지냈다. 왕희지의 필법을 본받아 초서에 뛰어났다. 장회관(張懷瓘)은 서단(書斷)에서 “이름은 건례(虔禮)이고 자는 과정(過庭)이며 진류(陳留)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저서는 묵적본인 서보(書譜)가 전한다.(https://baike.baid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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楷隸*八分莫辨者는 晉人書勢之未明也라 八分楷法*爲隸者는 宋人隸說之誤也라 隸始於秦篆之省筆也라 旣趨簡易하여 巧麗日生하고 流而爲眞書*이요 歧而爲楷法*하니 楷法者는 八分也라 以眞爲隸者는 六朝唐人也이요 以隸稱楷法八分者는 後世之譌也라
해예와 팔분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은 진(晉)나라 사람의 서체를 분명하게 밝히지 못한 것이다. 팔분의 모범을 예서라고 여기는 것은 송나라 사람들이 예서의 해석을 잘못한 것이다. 예서는 진(秦)나라 전서의 필획을 생략한 것에서 비롯하였다. 이미 간편한 것을 추구하여 교묘하고 화려한 것이 날로 생기고 변천하여 진서가 되었고 분기되어 모범을 삼았으니 모범이 되는 서체는 팔분이다. 진서를 예서로 여기는 것은 육조와 당나라 사람들이고, 예서를 모범이 되는 서체의 팔분이라고 한 것은 후세[송나라] 사람들의 잘못이다.
*楷隸(해예): 한한대사전(漢韓大辭典)에서는 “한ㆍ위나라 때에 예서를 해법으로 삼았기 때문에 이르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楷’는 해칙(楷則)ㆍ모해(模楷)라는 뜻으로 모범이 된다는 뜻이다. 주이정은 진(晉)나라의 정막이 만들었다는 예서를 ‘해예’로 여기고 있다. ‘해예(楷隸)’의 용례는 南史卷五十三列傳第四十三에 처음 보인다 “소학의 자는 중정이고 젊어서 날래고 용맹하였으며 글재주가 있었고 더욱 해예에 공교하여 공가의 비갈을 모두 그에게 쓰게 하였다[确字仲正, 少驍勇, 有文才, 尤工楷隸, 公家碑碣皆使書之.]”라는 기록이 있다. 소학(蕭确, ?-549)은 남조 양 무제 소연(南朝梁武帝萧衍, 464-549, 재위 502-549)의 次子이다.
*眞書(진서): 이는 해서를 이르는 말이다. 장언원은 법서요록(法書要錄)ㆍ진위부인필진도에서 “글씨 쓰는 것을 배우려면 먼저 집필법을 배워야 하는데, 진서(즉 해서)는 필두에서 2촌 1푼의 거리를 두고 행초서는 필두에서 3촌 1푼의 거리를 두어야 한다[凡學書字, 先學執筆, 若眞書, 去筆頭二寸一分, 若行草書, 去筆頭三寸一分]라고 하였다.
*楷法(해법): 이는 글씨 쓰는 법도를 이른다. 유희재의 예개(藝槪)ㆍ서개(書槪)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어 참고할 수 있다. “위항은 사체서세에서 ‘예서는 전서를 빠르게 쓴 것이다’라고 하였고 이어서 ‘상곡의 왕차중이 처음으로 법도를 만들었다’라고 하였으니, 법도는 실은 팔분서이지만 처음엔 아직 팔분서라고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다. 다만 양곡의 제자 모굉을 서술함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지금의 팔분서는 모두 모굉의 법도이다’라고 하였다. 앞에서 이는 비록 팔분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나 끝내는 글자 수가 적은 것을 싫어하였고, 가차에서 나오지 않으면 사용하기에 궁핍하기 쉬워 모굉에 이르러서야 이에 글자를 더하여 크게 갖추게 하였을 따름이다[衞恆書勢言, 隸書者, 篆之捷. 卽繼之曰, 上谷王次仲始作楷法, 楷法實卽八分, 而初未明言. 直至敘梁鵠弟子毛宏, 始云, 今八分皆宏法, 可知前此雖有分書, 終嫌字少, 非出於假借, 則易窮於用, 至宏乃益之, 使成大備耳]”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