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미곶에서 조선시대 유배지의 대명사 장기현으로 이동했다
장기읍성 도착 몇 km전 유배문화체험촌이 있다
경북 포항시는 2019년 남구 장기면 서촌리 일원에 ‘장기 유배문화 체험촌’을 개관했다
장기 유배문화 체험촌은 지난 2015년부터 2018년까지 총 38억 원의 사업비를 들여 우암과 다산 적거지, 오도전의 안채 집, 죄인을 유배지로 보낼 때 사용하는 우마차, 곤장 형벌체험장, 자연치유원, 망향정, 자연형 하천정비, 민속놀이마당 등 테마가 있는 체험시설로 조성됐다.
장기면은 예부터 전남 강진, 제주도 등과 더불어 조선시대 주요 유배지였던 만큼 장기 유배문화 체험촌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토대로 유배문화에 대해 체험하기 위해 마련됐단다.
먼저 송시열의 유배 적소부터 살펴보았다
송시열은 당시 공무원에 해당하는 오도전의 집에서 유배를 했는데 거의 유배가 아닌 듯 보인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자들은 죄인이 되어도 거의 황제처럼 대접받는다
포항이 고향인 이명박 같은 경우도 다른 범죄자들과 다르게 호의호식하며 편하게 감방 생활을 하거나 병원에서 편하게 있다가 이번에 형량을 채 10분의 1정도만 살고 사면되었다 더우기 85억이란 거액의 벌금마저 탕감받았으니 쇼같은 말로만의 형량이고 감옥생활이다
마찬가지로 당시 최고의 권력을 누리던 송시열도 그렇게 이곳에서 유배 같지 않은 유배를 한 듯 하다
가시울타리는 있지만 형식적이고 고대광실같은 기와집에서 시종들 사람도 여럿 두고 했던가 보다
어쨌든 송시열은 숙종 즉위 후 왕실을 기만 농락한 죄로 유배 위리안치가 결정되었는데 처음 결정된 적소가 너무 힘든 곳이라 하여 그보다 좋은 이곳 장기현으로 유배를 오게 된다
또 다른 유명한 이가 이곳으로 유배를 왔는데 바로 다산 정약용이다
다산은 다산을 아끼던 정조가 죽자 천하를 다시 손에 쥔 서인 노론파 정순왕후를 필두로 한 정권에 의해 일어난 신유박해로 이곳에 유배 오게 된다
형인 정약종 책롱사건으로 다산도 천주교에 깊이 관여하였다 모함하여 사형을 시키려 했으나 발견된 편지글에서는 오히려 천주교와 멀어진 증거들만 나와 궁여지책으로 이곳에 유배보냈던 것이다
결국 7개월정도 유배한 후 또다시 노론 정권은 황사영백서 사건을 통해 다산을 서울로 압송 사형시키려 하였으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서 결국 전라도 강진으로 또다시 유배를 떠나게 된다
어쨌든 다산의 유배생활 모습을 재현한 이곳 모습도 보면 송시열과는 확연히 다른 적소 모습이다
집도 상당히 비좁고 누추하여 겨우 끼니를 해결할 정도 집안의 유배생활 모습이다
듬성듬성 피어있는 목화송이가 서민들의 가난과 괴로움을 대변하고 있다
체험촌에서 채 2km도 안되는 지점에 장기읍성이 있다 그곳으로 떠났다
포항시 장기면은 경주시 감포읍과 어깨를 맞댄 고장이다.
동해 바닷가 쪽에 양포항,대진해수욕장 등의 여행명소가 있으며, 그 해안도로를 따라 계속 북으로 올라가면 구룡포항과 장기곶에 닿는다. 장기면 읍내리, 동악산(252.5m) 동쪽 자락에 자리한 장기읍성(사적)은 일제강점기 때 수난을 당한다.
일제강점기 당시 이 읍성 내의 모든 관아 건물들이 일본인들에 의해 파괴되고 단지 향교만이 이 고장 주민들에 의해 복원 유지되고 있을 뿐, 잡초에 묻힌 성벽은 허물어진 곳이 대부분이다.
이 성은 일찍이 동해안을 지키는 다른 읍성과 함께 장기 지방의 지리적인 형국으로 보아 중요한 군사기지로서 그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여러 기록을 살펴보았을 때, 장기읍성은 고려시대 이전의 고성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1011년(현종 2)에 여진족이 해안으로 침입할 것을 대비하여 흙으로 쌓았다. 그 뒤 1439년(세종 21)에는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서 돌로 다시 쌓았으며, 동해안의 주요 군사기지 및 관아로 사용하였다.
이 읍성은 산 위에 위치하여 산성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 곧 읍성은 해발 252m 동악산(東岳山)에서 해안쪽인 동쪽으로 뻗은 해발 약 100m 산 정상의 평탄면에 축조되었다 성벽에서 보면 먼 발치 동해바다가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등의 문헌 기록에 의하면, 둘레는 2,980척(약 1,392m)이고, 높이는 10척인데, 성 안에는 우물 4곳과 연못 2곳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의 둘레는 약 1.3㎞이고, 성벽의 높이는 약 3.7∼4.2m이며, 동쪽·서쪽·북쪽에 문터가 남아 있고, 수구(水口) 1곳, 치성(雉城) 12곳이 있으며, 성 안에서는 우물 5곳과 연못 3곳이 확인된다.
장기읍성은 산성의 기능을 갖춘 읍성으로, 매우 희귀한 사례이며 해안 읍성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주목된다.
한편, 이곳은 벽지로 취급되어 유배지로서 우암 송시열과 다산 정약용이 이곳에서 귀양살이를 하기도 하였다.
특히 조선후기 송시열과 관련있다하여 죽림서원이 세워져 있다
정치, 경제, 사회적 특징이 있는 곳이 아닌, 오로지 국방의 일익을 담당한 군사적 거점으로서의 역할을 다했던 고장이라 할 수 있다.
현재까지 복원된 문루는 2015년에 중건한 이 북문 뿐이다
유배체험촌으로 향하는 길이라 유배객들이 소요하며 오고갔다하여 둘레길로도 만들어져 있다
산 위에 읍성이 자리한 것은 서쪽으로 연이은 산이 가로막고 있고, 남쪽과 북쪽으로는 주변 고을이 떨어져 있어, 유사시에 구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오랜 시간 동안 농성하면서 시간을 벌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