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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09
고린도후서 13장 13절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다고 할 때 모든 사람은 아담 안에서 함께 죄인이 되어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었습니다(롬5:12 참조).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 가운데 일부를 구원하기로 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참 하나님임과 동시에 참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세우셨습니다. 구원은 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믿음을 통하여 받습니다. 이 사실에 대하여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20문은 참된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아 그의 모든 은택들을 받는 자들만 구원을 받는다고 설명합니다.
이때 참된 믿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21문인데, 참된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 속에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모든 것을 진리로 여기는 확실한 지식인 동시에, 하나님께서 값없이 은혜로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죄 사함과 영원한 의와 구원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다는 견고한 신뢰로 정의합니다. 즉 믿음이란 지식과 함께 신뢰가 있어야 하는데, 모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과 신뢰가 있어야 하지만 특별히 복음에 대한 지식과 신뢰가 있어야 합니다.
요리문답 22문에서는 복음에서 우리에게 약속된 모든 것에 대한 믿음을 기독교 신앙의 조목으로 요약한 것이 있다고 말하며, 그 조목들이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 요리문답 23문입니다. 여기에 대한 답변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도신경에 대한 내용을 소개하는데, 전체 12항목으로 되어 있습니다.
23문. 이 조목들은 무엇입니까?
답. 1.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내가 믿사오며, 2.그의 독생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믿사오니, 3.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고, 4.본디오 빌라도 아래에서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셨고, 지옥에 내려가셨고, 5.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고, 6.하늘로 오르사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며, 7.거기로부터 오사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8.성령을 내가 믿사오며, 9.거룩한 보편적 교회와 성도의 교제를 믿사오며, 10.죄 사함과 11.몸의 부활과 12.영생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23문부터 시작해서 58문까지가 사도신경에 대한 해설인데, 사도신경이라는 말 때문에 사도들이 내놓은 것인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한때 사도신경이 12항목으로 되어 있어서 열 두 사도가 각각 한 항목씩 고백하여 모아 만든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습니다(5세기). 심지어 8세기 중반 무렵에는 한 수도사가 열 두 사도의 저작설을 따라서 각 신앙 항목에다가 사도들의 이름을 붙여 놓은 글도 남겨 놓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전혀 신빙성이 없습니다. 박일민 교수가 쓴 「개혁교회의 신조」에 보면 서방교회에 사도신경이라는 이름, 그리고 라틴어로 된 사도신경의 본문을 최초로 소개한 인물은 루피누스(Rufinus)라고 합니다. 그는 390년에 밀라노 노회가 교황 시리키우스(?~399)에게 보낸 글에서 사도신경을 라틴어로 작성하고 거기에다 주석을 덧붙여 놓았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가 사도신경을 작성한 사람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루피누스 이전인 250년경에도 헬라어(그리스어)로 된 사도신경이 사용되고 있었다고 합니다.
분명한 것은 325년 니케아 공의회 이전의 교부들은 사도신경을 사용했다는 것이고, 그 사도신경을 ‘신앙의 규범’, ‘진리의 규범’, 사도적 전통‘ 등으로 불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본질적인 내용이나 일반적인 순서의 배열,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강조를 두는 점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었지만 각 지역의 교회들이 각각의 필요에 따라서 그 길이나 형식이나 표현 양식에서 서로 차이가 있는 신앙고백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로마가 정치 사회적인 면에서 제국의 주도적 위치에 오르게 되자, 교회도 로마의 교회가 다른 지역의 교회들보다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되면서 자신들이 사용하던 신앙고백을 기초로 다른 여러 지역의 신앙고백들을 종합하여 새로운 형태의 신앙고백을 만들게 되었는데, 이때가 5세기 말 혹은 6세기 초에 작성된 공인된 본문으로서의 사도신경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것과 동일한 형태의 사도신경은 750년경, 즉 8세기 중반에 처음으로 등장하는데(라이케나우 수도원의 창설자 프리민의 글에서), 비록 사도들의 저작은 아니지만 사도들이 전한 복음에서 유래하였다는 점에서 고대 교부들로부터 오랜 기간 동안 교회 안에서 고백되어 온 것이 바로 사도신경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는데 사도신경의 경우 보편적인 신조로 개신교만의 신조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쪽에서만 고백하는 신조가 아니라 로마 가톨릭에서도 고백하는 신조입니다. 때문에 보편신조로 신조 자체를 통해 개신교, 더 나아가 개혁주의의 독특성이라 할 수 있는 교리들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가 할 때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윌리엄 컨닝햄은 사도신경에 대한 교회의 두드러진 영향력에 대하여 유감스럽게 생각하기도 합니다(역사신학 1권 3장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교회의 신조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사도신경을 다룬다고 할 때, 또 칼빈의 제네바 요리문답에서도 이 사도신경을 다루면서 믿음의 내용을 설명한다고 할 때, 그리고 그 외 개혁자들에 의해 사도신경이 해석되고 있다고 할 때 사도신경의 항목을 성경에 일치되도록 해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보편신조이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해석함으로 구별된 내용으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고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은 12항목으로 되어있지만 크게는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24문이 여기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24문. 이 조목들은 어떻게 나누어집니까?
답.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첫째는 성부 하나님과 우리의 창조에 관한 것이요, 둘째는 성자 하나님과 우리의 구속에 관한 것이요, 셋째는 성령 하나님과 우리의 성화에 관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는데, 사도신경은 분명 성부와 관련해 창조를, 성자와 관련해 구속을, 성령과 관련해 성화와 관련된 내용을 말합니다. 그러나 창조는 오직 성부만의 일로 있는가? 성자와 성령은 창조와 관련해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가? 구속의 경우 오직 성자만의 일이고, 또 성화에 있어서도 오직 성령만의 일인가? 구속에 있어서 성부와 성령은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시는가? 성화에 대해서도 성부와 성자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시는가? 여기에 대한 답변은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부 성자 성령은 한 분 하나님으로서 분리되지 않으시고 분리되지 않은 채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창조든 구속이든 성화든 분리할 수 없는 성부 성자 성령의 일하심으로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부께 창조를 돌리고 있지만 성경은 성부께 구속도, 성화도 돌립니다. 구속과 관련해서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며(롬8:32),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혹은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이렇게 표현하기도 합니다(요3:16,17). 성화와 관련해서도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라고 표현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거룩하게 하신다고 말씀하기도 합니다(살전5:23).
성자와 성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일일이 증거 구절을 들어 설명하지는 않겠지만, 성자 하나님도 창조주시요 성령 하나님도 창조주이십니다. 창조만이 아니라 구속에 있어서도 성부와 성령이, 성화에 있어서도 성부와 성자가 함께 일하십니다. 성부만 창조하시고, 성자만 구속하시고, 성령만 성화의 일을 담당하시는 게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정리를 해야 합니다. 사도신경에서 창조의 사역은 성부께 돌리는데, 전적으로 그에게 돌릴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돌리는 이유는 그분이야말로 신성의 근원이시요 또한 모든 신적인 이들의 근원이시며, 따라서 창조 사역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구속은 성자께 돌리는데, 전적으로 그에게 돌릴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돌리는 이유는 성자께서 직접 구속의 사역을 행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요, 오직 성자만이 우리 죄를 위하여 속량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값 주고 사신 것은 성부나 성령이 아니라 성자이셨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화는 성령께 돌리는데, 전적으로 그에게 돌릴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돌리는 이유는 성령께서 우리를 직접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시요, 우리가 거룩하게 되는 일이 직접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그분을 통해서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혹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습니다. 성부께서는 자신으로부터 성자와 성령을 통하여 스스로 모든 일을 행하시고, 성자께서는 성부로부터 성령을 통하여 모든 일을 행하시며,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로부터 모든 일들을 자기 자신을 통해서 행하신다. 이런 식으로 삼위의 모든 위들이 다 창조하시고 구속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사도신경이 삼위 하나님의 구조로 설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 있는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25문입니다.
25문. 신적인 분은 오직 한 분이신데(신6:4, 엡4:6, 사44:6, 45:5, 고전8:4,6), 어째서 그대는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를 말합니까?
답. 이 구별된 삼위께서 한 분이시며 참되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말씀 속에 계시하셨기 때문입니다(사6:1,3, 48:16, 61:1, 눅4:18, 창1:2-3, 시33:6, 110:1, 마3:16-17, 28:19, 요일5:7, 요14:26, 15:26, 고후13:13, 갈4:6, 엡2:18, 딛3:5-6).
그러니까 성경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란 사실입니다. 일단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친히 계시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한 분이십니다. 신명기 6장 4절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유일하다는 것은 하나님 외에 참 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44장 6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원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이사야 45장 5절에서도 동일하게 말씀합니다.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
이런 점에서 힌두교처럼 신이 여럿이 있다고 믿는 다신론과 불교처럼 윤회를 가르치면서 자신도 신이 될 수 있다고 가르치는, 달리 말하면 신이 곧 우주라고 믿는 범신론은 기독교가 볼 때 거짓된 종교요, 결코 함께 할 수 없는 종교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한 분 하나님만을 가르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을 통해 가르치고 있는 하나님은 한 분 안에 삼위로 계신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지금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통해서도 설명하고 있듯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계시다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구약보다는 신약에서 더욱 판명하게 보여주는데, 오늘 본문으로 읽은 고린도후서 13장 13절이 대표적인 구절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교회의 공예배를 마칠 때 축복기도를 여기에 근거로 해서 하는데, 구약에도 보면 축복기도의 내용이 있습니다. 민수기 6장 24절에서 26절입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구약의 이 기도를 축복기도로 사용하지 않는 것은 동일한 내용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믿는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형태가 신약을 통해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도 삼위 하나님에 대한 흔적들이 있지만, 그런 흔적을 더욱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이 신약이고 그런 점에서 삼위 하나님의 축복으로 모든 예배를 마치게 되는 겁니다.
한 분 하나님이 삼위로 계신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도 분명하게 나타나는데, 마태복음 3장 16절과 17절입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본래 하나님이시지만 인성을 취하심으로 사람이 되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세례를 받으십니다. 이때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예수 그리스도 위에 임하셨고, 또 하늘에서는 소리가 있게 되는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이 들려졌습니다. 성부의 음성, 성자의 몸, 그리고 성령의 비둘기 형체로 나타내 보이심으로 한 분 하나님이 삼위로 계시다는 것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말씀하신 마태복음 28장 19절도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또 중요하게 봐야 할 구절이 있는데, 요한일서 5장 7절입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이렇게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8절에서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니라”고 말씀하는데,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강설 때도 말씀을 드렸지만 우리말 성경에 빠진 부분이 있습니다. 7절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이 부분은 “하늘에서 증거 하는 이가 셋이니 성부와 말씀과 성령이라 이 셋은 하나이니라”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8절은 “성령과 물과 피라...” 이렇게 되어 있지만 그 앞에 “땅에서 증거 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하나이니라”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요일일서 5장 7절 “하늘에서 증거 하는 이가 셋이니 성부와 말씀과 성령이라 이 셋은 하나이니라”라는 이 말씀이 삼위일체에 대한 부정할 수 없는 구절로 개혁자들은 말한다는 것입니다.
앞서 다신론와 범신론에 대하여 언급했지만 한 분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다고 믿는 종교로는 기독교 외에도 유대교, 이슬람교가 있습니다. 그러나 저들과 우리의 차이는 어디 있는가?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삼위일체에 대하여 믿지 않습니다. 기독교만 삼위일체에 대하여 믿습니다(김병훈,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Ⅰ 참조). 특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우리는 참 하나님임과 동시에 참 사람이라는 고백을 하지만, 유대교나 이슬람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사람일 뿐이고, 사람으로서 위대한 선지자 중 한 사람 정도로 여길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이시되 한 분 안에 삼위로 계신다는 이 사실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결코 인간의 상상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과 자신의 뜻을 계시하시면서 그렇게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살펴보면 하나님은 누구시며 어떤 분이신가 할 때 하나님을 정의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광대무변(廣大無邊) 하신 분, 다시 말해 한없이 넓고 커서 한계가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무지 때문에도 하나님을 정의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무한은 유한을 받을 수 없다는 말이 있는데,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우리는 유한하기 때문에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신 하나님을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 내용 안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4장 24절에서 ‘하나님은 영이시니’라고 말씀하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같은 육체를 가지신 분이 아니라 영으로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3장 14절에서는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는 말씀을 하심으로 하나님은 우리처럼 피조 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개혁주의 신앙고백서를 보면 하나님에 대한 고백을 할 때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고백을 하는데,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속성을 알게 되고 그 속성에 따라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알게 됩니다.
그럼 하나님은 어떤 속성들을 가지고 계시는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1563년에 작성되었는데, 그보다 2년 앞선 1561년에 벨직 신앙고백이 작성되었습니다. 거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의 속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우리 모두는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만이 계시다는 것을(신6:4, 고전8:4,6, 딤전2:5)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합니다(롬10:10). 그분은 단순하시고 영적인 존재입니다(요4:24). 그분은 영원하시며(시90:2), 완전히 이해될 수 없으시고(롬11:33), 보이지 않으시며(골1:15, 딤전6:16), 변하지 않으시고(약1:17), 제한이 없으시고(왕상8:27, 렘23:24), 전능하시고(창17:1, 마19:26, 계1:8), 완전히 지혜로우시며(롬16:27), 공의로우시고(롬3:25-26, 9:14, 계16:5,7), 선하시고(마19:7), 모든 선이 흘러나오는 근원이십니다(약1:17).”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장 1항도 하나님의 속성에 대하여 고백합니다. “살아계신 참 하나님은(살전1:9, 렘10:10) 오직 한 분(신6:4, 고전8:4,6) 외에 없습니다. 그는 존재와 완전에 있어서 무한하시며(욥11:7-9, 26:14), 가장 순수한 영이시며(요4:24), 볼 수 없으며(딤전1:17), [인간의] 몸이나 지체들이나(신4:15-16, 요4:24, 눅24:39) 성정들이(행14:11,15) 없으시며, 불변하시며(약1:17, 말3:6), 광대하시며(왕상8:27, 렘23:23-24), 영원하시며(시90:2, 딤전1:17), 측량할 수 없으며(시145:3), 전능하시며(창17:1, 계4:8), 가장 지혜로우시며(롬16:27), 가장 거룩하시며(사6:3, 계4:8), 가장 자유로우시며(시115:3), 가장 절대적이시며(출3:14), 그 자신의 영광을 위해(잠16:4, 롬11:36) 그 자신의 불변하며 가장 의로우신 뜻의 의논을 따라 모든 것들을 역사하시며(엡1:11), 가장 큰 사랑을 베푸시며(요일4:8,16), [가장] 은혜로우시며, [가장] 자비로우시며, [가장] 오래 참으시며, 선하심과 진실하심에 있어서 풍성하시며, 악행과 범죄와 죄악을 용서하시며(출34:6-7), 그를 부지런히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분이며(히11:6), 동시에 그의 심판에 있어서 가장 공정하시고 [가장] 두려우며(느9:32-33), 모든 죄를 미워하시며(시5:5-6), 그는 결코 죄책을 사하지 않으실 분이십니다(나1:2-3, 출34:7).”
이때 하나님의 모든 속성은 어떤 위격에만 돌려질 수 있는 내용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 모두에게 돌려질 수 있는 내용들입니다. 즉 성부가 영이신 것처럼 성자도 영이시며 성령도 영이시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속성으로 무한하시고 영원하시고 불변하시다고 할 때 성부만이 무한하시고 영원하시고 불변하신가? 그렇지 않습니다. 성자도, 성령도 무한하시고 영원하시고 불변하십니다. 이 모든 것은 무엇을 나타내는가? 세 위격은 본질상 동일하시며 권능과 영광도 동등하신 한 하나님이란 사실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한 하나님이실지라도 성부가 성자이며, 성자가 성령이며, 성령이 성부인 것은 아닙니다. 혹은 성부가 성자가 되거나, 성자가 성령이 되거나, 성령이 성부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성부는 오직 성부이시고, 성자는 오직 성자이시고, 성령은 오직 성령이실 뿐입니다. 그리고 이때 성부는 성부요, 성자는 성자요, 성령은 성령이라고 해서 세 분 하나님이라고 이해하면 안 됩니다. 한 분 안에 세 위격이 계실 뿐입니다.
성경은 이 세 위격에 대하여 말할 때 성부에 대해서는 누구로부터 나시었다, 누구로부터 나오셨다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부에 대하여 전 신성의 근원 혹은 제1위격으로 칭합니다. 성자에 대해서는 성부로부터 나시었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그런 의미에서 성부와 성자, 다시 말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설명합니다. 성령에 대해서는 나시었다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셨다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성자의 경우는 성부를 근원으로 한다면 성령은 성부와 성자를 근원으로 합니다. 그래서 성자는 제2위격, 성령은 제3위격으로 칭합니다. 1위격, 2위격, 3위격이라고 표현한다고 해서 시간적으로 먼저 존재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전반적인 내용이 아다나시우스 신조로 알려져 있는 내용을 통해 간략하게 그러나 성경에 합당하게 고백하고 있는데, 앞에서 설명한 내용을 다시 한번 정리한다는 차원에서 살펴보면 우선 1항에서 “누구든지 구원을 받으려는 사람은 모든 것에 앞서 정통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3항에서부터 정통신앙이란 어떤 내용이인가를 소개하는데, 삼위일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그리고 그의 사역에 대한 내용이 고백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삼위일체와 관련된 내용만 대략적으로 살펴보면, 3항 이하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우리는 한 분 하나님을 경배하니 삼위일체이시고 일체로서 삼위이시며 위격의 혼합이나 본체의 분리가 없으신 분이시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한 위격과 아들의 다른 위격과 성령의 또 다른 위격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부 성자 성령은 다 한 하나님이시며 그 영광도 동일하고 그 위엄도 동일하게 영원하시다.”(3-6항) 그리고는 “성부가 존재하는 것과 같은 식으로 성자가 존재하며 그런 식으로 성령이 존재하신다.”(7항)고 고백하는데, 영광도 위엄도 동일하게 영원하시기 때문에 존재에 있어서도 성부, 성자, 성령은 동일하게 존재한다고 고백합니다. 이런 고백이 무한성, 영원성 등 하나님의 모든 속성에 대입할 수 있는데, 이때 성부가 무한 영원하시고 성자 역시 무한 영원하시고 성령 역시 무한 영원하시다고 해서 세 무한 영원하신 분이 계시다고 할 수 있는가? 그렇게 고백하지는 않습니다. 세 무한 영원하신 분이 계시는 게 아니라, 한 무한 영원하신 분이 계실 뿐입니다.
21항 이하에서는 위격 상호 간의 관계에 대하여 고백하는데, 성부에 대해서는 무에서부터 만들어지거나, 창조되거나, 태어나지 않으셨다고 고백합니다(21항). 성자에 대해서는 성부에게서만 왔으나, 만들어지거나, 창조된 것이 아니라, 나시었다고 고백합니다(22항). 성령에 대해서는 성부와 성자에게서 왔으나, 만들어지거나, 창조되거나, 나신 것이 아니라, 나오셨다고 고백합니다(23항).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피조물이 아니란 사실에서 동일하게 고백하지만, 성경은 위격 상호 간의 관계를 표현하는데 성부가 전 신성의 근원이고 성자는 성부로부터 나시었고(발생)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셨다(발출)는 것이 우리에게 계시된 바임을 고백합니다.
이 신조가 대략 5세기경에 작정된 것임을 감안한다면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는 이렇게 일찍부터 교회의 공적 고백으로 정리가 되어 있었던 겁니다. 물론 이렇게 고백으로 나오기까지 삼위일체와 관련하여 성경과 다르게 고백하는 자들이 있었는데, 앞서 언급한 다신론과 범신론, 그리고 유대교와 이슬람 외에도 아리우스주의와 사벨리우스주의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 정교회가 있는데, 정교회의 경우 성령이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신다고 고백하지 않고 오직 성부로부터만 나오신다고 고백하기에 이 또한 반드시 주의를 해야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살필 때 삼위일체와 관련된 이단에 대하여 정리한 바가 있어 다시 한번 그 내용을 여기서 소개하고자 합니다. 우선 단일신론(Monarchianism)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고 할 때 이 단일신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세 위격이 아니라 하나의 위격만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합니다. 앞에서 유대교와 이슬람교도 여기에 속합니다. 때문에 저들에게 있어 삼위일체 하나님을 고백하는 우리는 하나 이상의 신을 믿는다고 생각합니다.
이 단일신론은 크게 둘로 나눠지는데, 하나는 양자론적 단일신론 혹은 양자론이고, 다른 하나는 양태론적 단일신론 혹은 양태론입니다. 양자론의 경우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는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능력을 부여받은 한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아들로 양자가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한 인간으로 보면서 다른 인간들보다는 나은, 즉 성인으로 보는 입장들, 여기에는 이슬람교 역시 예외가 아닌데, 이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양태론의 경우 삼위을 한 하나님의 다른 모양으로 이해하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자신을 다른 시대에 다른 양식으로 계시하신다고 하면서 창조 시에는 성부로, 율법을 주실 때는 성자로,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에는 성령으로 나타나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것이 양태론입니다. 혹은 한 하나님이지만 성부, 성자, 성령과 같은 다른 이름으로 자신을 계시하실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 양태론입니다. 예전에 보면 삼위일체를 설명할 때 ‘나’라는 인물에 대하여 교회에서는 목사로, 집에서는 아내의 남편 그리고 아이들의 아버지로 불린다는 식으로 설명할 때가 있었는데, 이런 설명이 다 양태론입니다. 그러니까 성부 성자 성령이라고 할 때 성부는 곧 성자인 것입니다. 성자는 곧 성령인 것입니다. 성령 또한 성부인 것입니다. 우리는 위격 상호 간에 관계를 따라 성부 성자 성령을 말하고, 이때 성부는 성자가 아니며 성자는 성령이 아니며 성령은 성부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저들은 같다고 보는 겁니다. 같지만 다른 모양으로 계시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양자론이나 양태론이나 무엇을 부인하느냐?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부인합니다. 성부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모두가 인정합니다. 그러나 교회 역사는 끊임없이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부인하려고 했습니다. 특히 단일신론 이후 4세기에 아리우스라는 이단이 등장했는데, 그는 성자가 비록 탁월함과 시간적 순서상 다른 피조물들보다 월등히 앞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작이 있는 피조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1:14)라고 했을 때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말씀이 없었던 때가 있었다는 의미로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피조물로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간 정도 되는 그런 영적 존재로 보았던 겁니다.
6세기 말에 등장에 소키누스주의 혹은 소시누스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아리우스주의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성자는 동정녀의 몸에 잉태되기 전에는 존재한 적이 없고, 성부가 거룩한 진리를 전하는 사명을 주셨고, 죽음으로써 그 진리를 확증했으며, 부활 후에 그를 높여 우주를 다스리게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게 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내용을 따르는 자들 가운데는 그리스도가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인 한갓 사람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숭배의 대상이 될 자격이 없고, 단지 하나님의 선지자들 가운데 가장 뛰어나고 인간들 가운데 가장 탁월한 인격을 지닌 존재일 뿐이라고 주장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아리우스주의 이후 아리우스주의를 반대하는 반아리우스주의가 있었는데, 그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려다가 그리스도의 인간적 본성을 축소시켜 버리고 말았습니다. 특히 당시 헬라철학에서 말하는 삼분법을 이용하여 그리스도에게는 육체와 혼은 있지만, 인간의 영 대신 신의 영이 깃들여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으로 인해 그들은 예수님께서 신성을 가졌다는 점에서는 완전한 하나님이시지만, 인간의 지성과 이성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완전한 인간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한편은 성자의 신성을 반대한 것이고(아리우스), 그에 반대한 자는 성자의 인성을 반대한 것입니다(아폴리나리우스).
성자만이 아니라 성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을 마치 인격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신적 능력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소위 성령기계론자들이 생겨났습니다. 마케도니우스가 주장했다고 해서 마케도니안주의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조금 전에 언급한 소키누스주의자들 역시 성령의 신성도 아울러 부인했는데, 몇몇 이단만 말했을 뿐이지만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거나 성령의 신성을 부인하는 일들이 계속해서 있어왔던 겁니다.
이런 점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매우 중요한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핵심은 성부, 성자, 성령은 한 분 하나님이시라는 것, 그러면서도 성부는 성자와 성령이 아니시고, 성자도 성부와 성령이 아니시고, 성령도 성부와 성자가 아니시라는 것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