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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봄 3부 - 너무 먼 당신
1. 우리는 무엇이었기에
우리는 서로에게 무엇이었을까
무엇이었기에 후미진 생의 한 골목에서 마주쳤다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멀어져 가는 것일까
먹먹한 길을 천 개의 손으로 더듬으며
눈빛을 끄고 비켜 가는 슬픈 한 때
가슴 저린 말 한마디 건넨 적 없이
꽃 지는 그늘에서
이별의 슬픔조차 누리지 못하면서
뼛속까지 사랑을 앓고
체기 든 얼굴로 소진해가는
그런 덧없는 인연이었다면
우리 무엇으로 만나
이 서러운 때로 왔는가
땅거미 어두운 제집에서 나와
저녁을 몰고 간다
명치 끝으로 무너져
땅거미 몰고 간 노을로
붉게 스러지는 저녁의 전이(轉移)
2. 고독
고독은 빗물과도 같은 것
저녁에 바다에서 올라와
어두운 도시 위로 떨어진다
모든 거리가 새볔으로 향할때
그 무엇도 찾지 못한 육신들이
좌절하며 슬프게 헤어져 갈 때
서로 증오하는 사람들이
한 침대에 몸을 뉘일때
그럴 때
고독은 강물처럼 흐른다
3. 개
개 같은 놈이라고
빗대지 마라
밥 먹이던 주인이
복날 오랏줄 목에 조여
뒤꼍 오동나무에 걸고
귀엽다 쓰다듬던 손으로
사정없이 몽둥이질할 때
개는 배신감과 고통으로
가슴 터질 듯 울었다
공포와 슬픔으로 치 떨며
줄행랑 칠 때도
누렁아! 부르는 소리
차마 외면 못 하고
살 떨며 주인한테 가는 길
탯속 까막똥 쏟았다
세상 어느 인간이
한 번 섬긴 사랑이라 하여
목숨 버려가며
믿음을 지킨단 말인가
그러니 개 같단 말 하지 마라
개가 웃는다
4. 꿀렁꿀렁
기차역 여자 화장실
젊고 아름다운 임산부가 울고 있는데
여자들 틈에서 울고 있는데
울 데가 없어 화장실로 왔는데
남몰래 변기에 앉아 울려 했는데
줄 서서 차례를 기다리다가
눈물이 먼저 터졌는데
길고 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우는데
왜 이런 소리가 날까
여자들은 숨을 죽이고 일시에 젖어 버렸는데
젊고 아름다운 임산부 울음소리 점점 작아지고
흐느낌은 깊어졌는데
볼일을 보고 나온 여자들도
일을 봐야 할 여자들도 얼어붙어 버렸는데
기차역 여자 화장실
여자들 심장에서 피 역류하는 소리
꿀렁꿀렁, 꿀렁꿀렁, 꿀렁꿀렁
5. 오월을 보내며
오월은
산모롱이에 핀 난쟁이붓꽃이었다가
개울가에 핀 금낭화였다가
들에 핀 노루귀였습니다
피를 토하며 피었다가
투명한 눈물로 견디고
처절하게 지는 꽃잎이었습니다
꽃이었다가
꽃이었다가
꽃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을 다 보여 주었습니다
오월이여 안녕!
6. 시를 먹고 사는 일
시를 먹고 사는 일은
헛헛한 삶을 일으켜 숟가락으로 눈물을 떠내는 것
혼자 앉은 식탁에 빈자리 하나쯤 마련해 두고
그릇 가득 별빛을 담아 놓는 일이다
누군가는 밥을 먹으라고 했지만
뜨끈한 양푼에 꽂는 서툰 숟가락질은
덜그럭 소리를 내고
밥을 삼킨 목울대에서는
울컥 눈물이 솟는 것이다
시를 먹고 밤하늘에 나 앉으면
별빛이 눈동자에 와 스며들고
눈물은 꽃송이 되어
가장 낮은 곳으로 흐른다
사람들은 소리 없이 걸어와
함께 시를 나누어 먹고
가난해진 마음으로
떠나간 사랑을 축복하며 머물다 간다
7. 편지
앞집 붉은 벽돌에 스민 햇살이
다정한 이웃을 연상케 하는 기분 좋은 아침입니다
이런 날에는 그대에게 편지를 쓰고 싶습니다
아침에 눈을 떠 잠들 때까지 나의 하루는 그대를 향한 편지이지만
글은 마음의 거울이라서 당신을 그리워하며
주체하지 못하는 슬픔으로 침상을 적시는 못난 모습 들킬까 봐
부치지 못한 편지는 쌓여만 갑니다
그대여
혹여 나를 잊었다면 그대로 행복하십시오
당신이 사는 같은 하늘 아래 축복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으므로
설령 나를 잊지 못하여도 행복하십시오
이 그리움조차 그대에게 해가 된다면 마음을 멈추고
세월이 흘러도 바래지 않는 편지들을 태우겠습니다
단 한 가지
목숨 같은 그대를 보내고 수없이 흘린 눈물도 고마워서 행복해하던
한 여인이 있었다는 것 그것만 기억해 주십시오
8. 저문다
안을 홀딱 까뒤집어
바닥까지 싹싹 끄집어내
허를 찌르며
쓰디쓰게
살점을 씹는 이빨에
피를 번져가며
저문다
날이
꽃이
사람이
9. 봄날은 간다
익어 무른 봄 꼭지가 야하다
가시 난 혀로 태양이 입술을 핥고
바람은 턱을 괴고 물끄러미 바라본다
다시 봄은 오고
다시 봄은 가고
"나는 당신의 요염한 애인이에요"
미혹에 빠진 시절을 두고
사랑이 간다
봄이 간다
절대 오지 않을 것 같았던 동화童話를 찢고
마지막인 듯
지독하게 봄날은 간다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다시는 너를 사랑하지 않기로 한다
10. 기다림이 있는 저녁
등불을 켜기엔
이른 시간이에요
희석된 밤이
느리게 점화되는
저녁에는요
당신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
찬 손 가슴에 얹고
몸살을 앓는 내 사랑이
저녁이 흩어내는
고요를 견디며
사랑한다 사랑한다
들풀처럼 깨어나지요
그러니 지금은
등불을 켜지 마세요
11. 패턴에 따른 시에 대한 두 가지 인식
성향 | 관점 | 인식비중 | |
A | 이상적 | 관념 | 10% 이하 |
B | 행동적 | 현실 | 100%+ ∞ |
위의 도표는 A와 B의 아래 대화를 통해 추론한 결과이다.
A와 B의 대화
A 시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 해서 무가치하다고 단정 지을 수 없잖아
B 실제의 삶을 통해서 깨닫고 얻어야 한다고 봐, 그렇지 않다면 이상주의자에 불과해
A 이것도 하나의 길이 될 수 있어. 문자로만 실제해도 분명한 역할이 있고 누군가는
삶 속 깊이 끌어안고 가기도 하니까
B 자신의 삶조차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면서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논한다는 건
감정의 유희에 빠진 거짓이야
A 이분법적 메타언어는 시대로 보나 다양성으로 보나 오류이지 않을까
B 그럴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내가 여러모로 검토해 본 결과 타인의 삶을 실질적으로
끌어 올리기에는 관념적 부분이 너무 많아
A 편견이지 않을까 아니면 그것에 대한 인식의 차이일 수도 있고
B 행동이 수반되지 않는 모든 인식은 실체 없는 허위에 불과해
A 나에겐 이길이 기필코 가야 할 삶 전부인데 긍정적이진 않더라도
혐오에 가까운 반응을 보일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아주 많이......
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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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중 기록에 빠진 내용이 있어서 아래 문장을 첨부한다.
B "내 목숨보다 더 사랑했어.
단 일 초도 머뭇거림 없이 내가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내주었어.
그것이 내게 있는 단 하나의 희망이었을 때도 기꺼이.
당신은 죽는 그 순간까지 모를 거야, 아니 죽어서도 모를 거야
이런 내 마음조차 모르면서 어떻게 시를 쓴다고 하지
뭐로 시를 쓸 거지"
12. 사랑 비례치
아이는 짧은 생애를 시간 밖으로 던져 길게 잇고 있다
잠재된 능력을 총동원해 기억을 매만지며 과거를 투사중이다
버려진 때로, 캄캄한 나락으로, 한 쌍의 달콤한 욕망 속으로, 혼돈으로
A는 아이의 의식이 현실을 인지하도록 차원의 문을 받치고 있다
아무도 주지 않은 아이 본래의 사랑을 주기로 다짐하면서
한 무리의 방문자가 수녀의 검고 긴 치맛자락을 붙잡고 병실로 들어온다
기우뚱거리고 절룩거리고 철커덕 쇳소리를 내며 들어오는 UFO
이들 각 기체는 타임머신을 탄 아이가 독차지한 그녀의 시간을 분할하면서
채워지지 않는 그들의 결핍을 집요하게 수유한다
순간 A의 시간과 공간이 흡착되며 오므라든다
A는 뜨거운 이상과 차가운 현실을 재빠르게 명명하여야 할 추락의 위기를 감지한다
바로 그때,
우주 끝까지 순회한 아이가 활활 타는 미행성을 타고 와 그녀에게 충돌한다
A는 지금 진화하는 일로 바쁘다
13. 벽
벽은
넘을 수 없는 벽만 있는 것이 아니다
깨부술 수 없는 벽만 있는 것도 아니다
만길 높이의 벼랑 끝에서
우리가 닿고 싶은 푸른 숲길을
서로 막막하게 바라보다가 돌아서는
당신이라는 벽도 있다
14. 삼월에 내리는 눈
거리에 쇼팽의 녹턴이 내린다
기쁨도 슬픔처럼 슬픔도 기쁨처럼
절정으로 치닫던 사랑의 기억이
여음으로 남았다
슬픈 그대여
세상에 저녁이 찾아오고
사랑이 밤을 향해 달려가면
함박눈 펑펑 쏟아지는 길에 서서
소리 없이 흐느껴 보라
언 땅을 찢고 나온 봄이
생을 불끈 쥐고
홀로선 그대처럼
삼월에 내리는 눈을
맨발로 견디나니
녹턴이 흐르고
맹아萌芽는 어김없이
발밑에 금을 낸다
15. 달맞이
그럴 줄 누가 알았나요
풀벌레 쓰륵대는 밤
달빛이 하도 고와서
우물마루 끝에 동그마니 앉았다가
저도 모르게 달아올라 정신을 놓았던 거지요
아슬한 속적삼에
달빛 그림자로 내려와
외로 품은 도련님도 까마득히
수줍은 순결을 분탕질하고
멀겋게 살 오른 허벅지에 가래톳 돋도록
저 멀리서 홰 치며 희뜩희뜩 눈짓하다
달 그물 걷어 가는 별들의 앙큼함이야 그렇다 쳐도
매무시도 못 차리고 까무러치듯 밤이 희게
새벽녘 스러져 가는 달빛
저 달빛
16. 눈 내린 다음
백지다
색도 경계도 허물어
티 없이 써낸 자백이다
나 그대 위해
나를 허문 적 있던가
알량한 자존심 내세워
죽대 사이
바람 소리로 머물렀을 뿐
그대가 삼킨 울음소리
하얗게 받아 적은 적 있던가
그대 사뿐 걸음으로 길을 내게 한 적 있던가
그대가 꼭꼭 눌러 베푼 사랑
따스한 햇볕 한 줌 돌려보낸 적 있던가
서성이다가 거기 선 그대여
뜬금없이 시린 가슴 보듬고
서로의 등을 토닥여도 좋을
지금은 눈 내린 다음
17. 장마2
시래기 된장국 끓이고
껍질 벗긴 감자 간장에 졸여
스무 살 딸과 함께 밥상 앞에 앉았다
낮 한 시다
잘게 다진 이야기가
밥상 위로 흐른다
집 앞 골목엔 빗물이
어지럼증을 일으키며
질주하고 있다
詩를 쉬는 나와
무모한 물의 속성이
교감 없이 막 손을 잡았을 때
장대비를 타고 승천한 아무개가
텔레비전을 달구었다
방년 20세
계곡에서 불어난 물에 휩쓸려 사망.
마침표가 찍힌 그의 끈끈한 시간이
속절도 없이 슬프고 찰지게 밥상 앞에
둘러앉는다
18. 방문 [訪問]
시집간 언니가
포도를 딴다
복덩이라 소문난
등 굽은 민며느리
언니는
까마득히 열린
단꿈을 꾸나 보다
포도가 익는 사이
마른 비는 내리고
또다시 마루에
날 빛이 달다
19. 新상사화
- 獨身의 辯
뼛속 깊은 우울과 불안과 적요는
눈먼 시대를 살아가는 내 생애에요
잔혹한 현실과 불안한 미래는
차가운 이성을 유지하는 힘이 되지요
그렇다고 獨也靑靑 푸른 날들이
기쁘기만 한 건 아니에요
곁과 곁이 만들어내는 따듯한 기적을
외면해야 했으니까요
당신 없이 살아보겠다고
오롯한 마음 하나로 혼자 꽃을 피운 건 어떻고요
그것이 사랑이었어도 사랑이 아니었어도 괜찮아요
바람이 들려주는 고운 숨소리는
피었다 지는 꽃자리에 당신이 있음을 알게 하지요
서로의 체온을 이해하는 행운은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토록 애타게 바라는 세상에서
당신과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나는 花 葉 不 相 見
20. 유산
내가 장사 못 하게 되면 에미 니가 해라
양전자방출 단층촬영실로 들어가시다 말고 어머니는 목숨줄을 내게
맡기셨다 우주다방 마담한테 반해서 재래시장 요지 2평 3홉 점포를
몰래 팔아치우려던 아버지의 오금을 저리게 만든 서슬퍼런 어머니
노동에 부린 몸을 두 번이나 점령했던 암도 눈 깜짝 않고 도려낸 분
가장 무서운 건 목구멍이다 이 자리만 지키고 있으면 두려울 거 없다
평생 움켜쥐고 살아온 말
76세가 되어서야 어머니는 그 말을 큰딸에게 내놓으며 안도하신다
어머니한테 죽음은 밥과의 단절이 아니라 밥이 오는 통로 폐쇄다
40년 동안 단 하루도 닫힌 적이 없는 밥길
딱딱한 의자 위에 엉덩이를 붙인 채 꼬리뼈를 슬인 내 젊은 어머니
그 어머니가 두려움 없이 물려주는 숨통을 건네받으면서 들킬세라
눈을 질끈 감았다
아직도 허영이 남아
21. 위로주
빈 술병에서 나는 소리와
찬 술병에서 나는 소리가 무엇 다를까
소주를 벌컥벌컥 삼키는 그의 목젖이
채울수록 낮아지는 실의失意의 공명共鳴이
얼키설키 한 음으로
바람의 몸 어느 귀퉁이를 잘라 불을 지르고
잔 가득 건네오는 화염
"글쎄 그 웬수 같은 인간을 땅에 꽝꽝 묻고 돌아오는디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더란 말이여
언나 하나 못 얻고 이십 년 동안 똥오줌 치워가며
좋은 시절 다 보낸 거 생각하면야
그쪽으로 고개도 돌리고 싶지 않더니만
나가 미쳤지
싫탄놈 패대기치고 차를 돌리지 않았는가
암시랑 않았어도 속이 싸해 터덜터덜 내려오는디
공갈맹키로 하늘이 맑게 개더란 말이시"
그가 따른 공명共鳴은 대낮도 까마득히 깊어
철천지원수라며 외줄 하나 걸어 놓고
마주하여 술잔을 부딪쳐도
아득아득 홀로 걸어가는 독배毒杯
22. 편지2
살아있는 완벽한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요
언니와 함께 술을 마시던 때를 지녀온 지금
이 시간의 연속에서 우리가 놓쳤던 것들을 찾을 수 있을까요
그 강을 건넌 언니에 적응하려다 햇빛 한 줌에
울컥 삶이 빛으로 변하는 이 비밀도 찾을 수 있을까요
굳이 찾을 필요는 없겠어요
우리는 매일 지금 이 순간
절박한 시를 건져내고 있었으니까요
더는 시를 쓸 수 없게 되자 몸으로 시를 써야 했던,
급기야 몸이 시가 된,
앙상한 시간의 굴레에서
가시 같은 시를 웅크리고
비상을 꿈꾸던
시.
죽음보다 차갑고 냉혹한 것이 있다면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똥을 싸고 돈을 세고 비굴한 웃음을 짓고
빈 공간을 울리는 개의 등을 쓰다듬으며 살아가는 일
그러다 어느 하루쯤은 이유 없이 생기가 돌고 세상이 기뻐서
두부 장사의 종소리가 희망처럼 불끈 발기하는 오류
이 슬픈 오류가 진실이라고 쓰지 않고
사랑이 진실이라고 쓸 때 나는 얼마나 부끄러웠는지요
언니가 시를 마치던 그 순간까지 믿고 있던 사랑과
그칠 줄 모르는 인간에 대한 호기심과
중력을 희석하던 술과 유머
부끄럽지 않고 그것이 진실이라고 쓸 수 있을 때
저는 시를 완성할 수 있을까요
23. 시, 가을 앓이
나무 그늘에 앉아 시를 쓰다가
낙엽을 유심히 쳐다본다
붉고 선명한 글귀
데깔코마니 처럼 새긴 원시 언어
구멍 나 창백한 상형문자
죽은 심장에 뿌리 뻗은 내 시가
퀴퀴한 지하에서 빼꼼
나무의 생 몸을 본다
아물지 않은 상처를 뜯어내
눈물로만 만든 내시가 가엾어
나무언어를 접종하였다
한참이나 날 냄새 진동하겠다
24. 인어
바다가 그리워지면
꼬리가 아프다
마녀에게 얻은 반라[半裸]의 환상통
물속과 물밖에서 바라보는 빛의 굴절을 두고
인어들은 배신이라 불렀다
나는 그 말을 사랑이라 부른다
물거품으로 사라질 것 같은
깊은 슬픔이 잡은 단도에
은비늘 사이마다 스며드는 뜨거운 연민
우리는 다정히 서서 바다를 바라보았지만
해가 뜨고 해가 질 때
사람은 하늘을 보고
인어는 바닷속 거울을 본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사랑만으로는 끝도 없이 밀려오는 파도의 노래뿐
목소리를 주고 다리를 얻은 나는
인어의 노래를 부르지 못한다
25. 너무 먼 당신
내 맘속에서
뼈를 세우고 살을 붙이고
숨을 불어넣어 당신을 만들었지
내가 꿈꾸는 사랑
형형색색 고운 옷 입혀
그리워 사뭇 치게 그리워
불면의 밤을 보내고
달콤한 입술로
사랑한다 말하기도 전에
이미 눈물을 알아버려
당신을 사랑하고
나보다 더 사랑하고
피도 흐르지 못할 당신을 만들어
죽도록 사랑하고
26. 離 別 後 愛
지병이 있어 마흔여덟 되도록 장가 못 간 오빠에게 집이 생겼다.
방이 두 개나 되는 열 두 평짜리 임대 아파트로 전망이 좋고
단지를 나서면 탄천이 흐른다. 그 나이 먹도록 부모 곁에서
어리광이나 부리고 핀잔이라도 주면 배시시 웃는 맘 좋은 오빠가
청소를 하다 말고 머뭇머뭇 심각한 얼굴로 묻는다.
"여기서 여자랑 사는 거 어떻게 생각해?
그 사람 아직 혼자야"
잠깐, 아주 잠깐 불빛을 보았다
안간힘을 써도 닿을 수 없는 약속에 희망을 걸고
거짓말처럼 진실처럼 사랑이 가는 막다른 골목
어느 봄밤 황홀한 꿈에서나 피어나던 키 작은 꽃밭
"그 사람 아직 혼자야"
메아리처럼 깊게 울리다 돌아가는 언어
베란다 밖으로 바라보는 하늘은 청명한데
들릴 듯 말 듯 오빠의 가느다란 한숨 소리
육중한 체념은 갓 비린내 나는 내 눈물만큼 짜디짜고
사랑이 저 혼자 얼마큼 피었나 가슴 졸이며 들여다보는
슬픈 어느 가을날
27. 너의 발자취를 따라서
나는 살아서
네가 꿈꾸던 세상을 살겠다
이른 봄 언 땅을 녹이는 햇살이 되고
달동네 가파른 계단 틈새
민들레로 피겠다
창백한 얼굴로 헉헉거리며
네가 걷던 골목길
다 쓴 성냥갑처럼
때 낀 슬레이트 지붕들끼리
끌어안고 얽혀 살던 집
찬바람이 황소처럼 들이치는데
목련의 잎만 한 창문을 열고
나직이 부르던 이름들
내일은 오늘보다 나을 거야
나는 너의 내일을 산다
캠퍼스 잔디밭에서
슬픈 얼굴로 바라보던
목숨 같던 오빠에게서
너의 까만 눈동자를 만나고
정개에서 뛰어나오는
너의 파리한 손등을 만나러 간다
부지깽이를 들고
울듯 웃을 듯 서 있는 그 꼬맹이가
밭일 나간 어머니 대신
밥을 짓는단다
국을 끓인단다
너는 무척이나 초조하게 기다렸지
그 때문이었을거야
양처럼 순한 눈에
분노와 절망이 쐐기처럼 박힌 것은
가녀린 코스모스 꽃대가 꺾이고
검은 먹물을 뒤집어쓴 듯
푸르딩딩한 문어의 다리
신음소리도 낼 수 없었던 어제는
마치 진부한 이야기인 양 지루해진 오늘
네가 흘린 피로 밥을 말아 먹고
나는 오늘의 이야기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