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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유대교의 예배 활동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그의 백성이 되도록 부르셨고, 율법을 인도하는 길과 안내자로 주셨다는 것을 믿었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해 주신 일에 대해 감사하였으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율법에 순종하는 종교였다.
그러면 이 율법은 예배생활에 대하여 어떻게 지시하고 있는가 ?
가. 성전 예배
성전은 솔로몬 시대 이래로 이스라엘의 삶과 사상에 있어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예수님 시대에 이 성전은 헤롯에 의해 복구되었으며, 성전 안에서 무수한 희생이 드려졌다.
성전은 하나님께서 거하시기를 원하시는 장소였다. 하나님께서 임재 하시는 것으로 알려진 지성소에는 율법의 규례를 따라
정결케 한 대제사장만이 정해진 예복을 입고 들어갈 수 있었다. 이방인들은 단지 "이방인의 뜰"로 불리는 곳에만
들어갈 수 있었다. 성전에서는 제사장들이 백성들의 죄를 속하고 하나님과 화해시키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규례를 따라 제사를 드렸다. 이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드리는 사람이나 드리는 제사장이 모두 순수한 동기를 가져야 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드려야 했다. 그리고 이 희생 제사에는 기도와 고백이 동반되었으며,
잘못하거나 남에게 해를 입힌 사람은 그것에 합당한 보상을 해야 했다.
일년에 한번 있는 대속죄일은 하나님께서 백성의 일년간의 죄를 속하고 화해하기 위해 주신 규례이며,
이 예식은 대제사장이 집례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통하여 1년에 3번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절기룰 지키도록 명령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사건을 기념하고 회상시키기 위해 유월절을 지키게 하셨고, 시내산에서 율법이 주어진 날을
기념하기 위해 오순절을 지키게 하셨으며, 광야 생활과 민족의 형성을 회상시켜 주시기 위해 장막절을 지키게 하셨다
(물론 이 절기들은 농경적인 의미들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이뿐 아니라 에피파네스 4세로부터 주전 165년에 성전을 회복하고 청결케 한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수전절을 지켰으며(하누카-빚의 절기), 하만에 대한 에스더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부림절을 지켰다.
신년 축제일은 하나님의 창조를 회상시켜 주었다. 이 날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심판하시는 날이었다.
이스라엘을 이 날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비로 대해주시도록 기도하였다.
속죄일은 금식과 죄의 고백과 희생 제사가 드려졌다. 이러한 신년 축제일과 속죄일은 모두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용서의 필요성을 일깨우기 위해 시작되었다.
나. 회당 활동
포로 이후 율법의 중요성 및 연구에 대한 필요성으로 인해 회당이 생겼으며, 예수님 당시에는 이미 모든 마을에 회당이
서 있었다. 그들은 이 회당에서 기도와 예배와 율법을 연구하는 일을 하였다.
예배는 기도와 율법 낭독과 설교로 이루어졌으며, 집회는 안식일과 주중 다른 두 날에 모였다.
회당 예배는 성전 예배와는 달리 제사장이 참여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평신도적인 성격을 띠었다.
이러한 회당은 유대인들을 종교적이고 율법을 연구하는 사람들로 만들어 주었다.
경건한 유대인은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기도로 하루를 끝냈다. 그들은 일어나고, 잠자리에 들며, 출타하였다가
귀가하거나 손을 닦고 음식을 먹을 때, 또는 출생과 할례, 약혼, 결혼, 질병, 죽음, 장례와 같은 때에도 이에 수반되는
기도를 하였다. 그들은 세상을 죄악된 것으로 생각하여 자신을 세상과 단절시키고, 세상과 사회에 대하여 등을 돌리는
금욕주의적인 일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 모든 세상은 하나님의 작품이며 따라서 이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들은 언약 백성의 표시로서 할례를 받았으며 이를 위해서는 생명까지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혼합된 옷감으로 된 옷을 입지 않았으며, 겉 옷 단에는 옷술을 달았고, 집 문기둥에는 메주자
(성구가 기록된 양피지를 담은 용기)를 달았다. 이것들은 하나님의 보호와 율법을 준수할 필요를 깨닫게 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준수했다. 그들은 안식일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창조에 대하여 증거하였고,
창조주 하나님의 거룩함에 참여하였다. 이 날에는 노동이라고 생각되는 모든 일들이 금지되었으며,
특별한 음식을 먹고 좋은 옷을 입었으며,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는 축제의 분위기로 지냈다.
그들은 인간의 시체를 만지는 일이나, 문둥병자들이나 부정한 짐승들과의 접촉과 같이 율법에서 부정한 것으로
규정된 일들은 자신들을 부정하게 만드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들이 이러한 일들을 했을 때에는 율법에 따라
정결 예식을 행했다. 그들은 정결을 유지하기 위해 식사법이 준수되었고, 짐승들을 도살하는 데에도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했으며, 피는 식용이 금지되었다.
또한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접촉하는 것을 부정한 일로 생각하였으며, 따라서 이방에 사는 것보다 이스라엘에
사는 것을 더 좋게 여겼다. 그들은 훌륭한 유대인이 되기 위해서 율법을 알아야 했고 이를 위해 율법을 연구해야
했기 때문에 그들은 율법을 연구하는 것을 이상적인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들은 율법에 무지한 자는 깊은 신앙심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땅에 속한 백성"이나,
"율법이 없는 열등한 종족들"이라는 경멸적인 용어들까지 나오게 되었다.
4) 디아스포라의 유대교
가. 헬라주의적 세계 안에 있는 유대인 디아스포라
신약 성경 시대의 유대 백성들은 매우 넓은 지역에 분산되어 있었다. 이 시기에 로마 제국 150개 이상의 도시에 회당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몇 세기 동안 많은 유대인들이 애굽에서 살았는데, 그들은 거기에서 그 지역의 언어인
헬라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나. 70인역 성경
주전 3-2세기에 알렉산드리아에서 살았던 유대인들은 대부분의 경우 히브리어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조상들의 거룩한 책들이 담고 있는 메시지를 알기 원했다. 이로 말미암아 70인경이 제작되게 되었는데,
한 유대인이 약 170년경에 쓴 "아리스테아스의 편지"-애굽 관리인 아리스테아스가 그 형제인 필로크라테스에게 보낸
편지에 이 책을 기록하게 된 배경이 나타난다. 애굽 왕은 히브리 율법의 번역을 원했다.
그리하여 자기 신하인 아리스테아스를 예루살렘으로 파견하여 뛰어난 학자들을 데려오게 하였다.
그는 72인의 학자들을 데리고 애굽으로 돌아왔으며 파로스 섬에서 72일간 번역 작업을 한 끝에 마침내 헬라어 역본을
만들게 되었다. 이 책은 학자들의 숫자를 따라 70인경이라고 명명되었다.
이 전설은 3세기 중엽 애굽왕 프톨레미 2세 치하 때에 헬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을 위해 율법책이
헬라어로 번역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율법책이 번역된 후에 예언서와 성문서가 번역되었고,
그 후에 외경들도 번역되었다. 70인경은 신약 성경 시대 이전과 그 동안의 유대 신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 나아가서 그것은 초대 교회의 성경이었으며, 또한 하나님의 구원이 어떻게 "성경대로"
이루어지게 되었는지 유대와 헬라 세계에 선포하는 기독교 선교의 주요한 도구가 되었다.
다. 요세푸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37-38년경 팔레스타인의 제사장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유대인이었다.
그는 바리새파를 최고의 종파로 생각하였으며 이에 가입하였다. 그는 66-70년의 유대 전쟁 기간 동안 로마로부터
돌아온 후 갈릴리에서 유대 저항 운동을 지도하였다. 그는 체포된 제사증들을 구하기 위해 로마로 갔으며,
갈릴리에서는 군대 사령관으로서 투쟁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베스파시안에게 끌려갔으며, 로마에 협조한 후에
다시 풀려나게 되었다. 그는 감사의 표시로서 베스파시안의 가문 이름인 "플라비우스"라는 이름을 받았다.
그는 유대 전쟁의 마지막 비극적인 장면을 눈으로 직접 목격하였다. 그는 로마의 시민권을 부여받았으며,
말년에 글쓰는 일에 전념하였다.
그의 대표적인 저작으로는 66-70년의 로마와 유대 사이의 전쟁을 그린 "유대 전쟁사"와, 93년경에 출판된
"유대 백성들의 옛 풍습"과, 자신에 대한 비난에 답변하는 "삶"과, 그리고 유대인들에 대한 온갖 억측과 모함에 대하여
답변하기 위해 쓴 "아피온 반박문"이 있다. 그는 이러한 책들을 민족과 유대교, 그리고 자신을 위한 변증과 선전을 위해
기록하였다. 따라서 많은 사실들이 과장되고 편집되었으나 그의 작품들은 매우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
라. 알렉산드라의 필로
필로는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을 대표하는 로마 사절로 선출된(39년) 부유한 유대인이었다.
그는 성경을 연구할 때에 풍유적으로 해석함으로서 "풍유적인 해석법"의 기초를 열었다.
그는 풍유적인 해석 방법을 통하여 모세의 율법 속에 헬라인들의 지혜가 예기되어 있음을 보이려고 하였다.
또한 그는 구약의 신앙의 위인들의 전기를 통하여 도덕적 가치들을 표현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작품들은 유대인들이
헬라 문화 속에서 그들의 전통을 지키는 데 타협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필로의 영향으로 클레멘트와 오리겐에 의해 주도된 기독교인 "알렉산드리아 학파"가 성경의 신비적 의미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으며, 이러한 영향은 중세 교회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다.
5) 정경, 외경, 위경, 묵시문학
가. 정경(Canon)
* 헬라어 '칸나'('갈대, 또는 '줄기')라는 말에서 유래되어, '자', '재는 막대기', '측량 기구'라는 의 미로 사용되었다.
* A .D. 4세기 중엽에는 '거룩한 기록물'인 성경을 정경으로 불렀으며, 후에 이 단어는 신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는
신구약 66권(구약 39, 신약 27)의 명칭이 되었다.
* 정경이란 성령의 영감을 받아 기록된 책으로 표준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인류 의 신앙과 생활(무엇을 믿고, 어떻게 행할 것인가?)에 대한 규범서를 말한다.
* 39권의 구약 성경 외에도 많은 책들이 B.C 200년-A.D.100년경 사이에 기록되어 널리 보 급되었는 데,
이러한 책들을 '외경(Apocrypha)'과 '위경(Pseudepigrapha)'이라고 부른다.
나. 외경(Apocrypha)
* '외경(Apocrypha)'이라는 말은 '감추어진'이라는 헬라어에서 유래되었다.
일부 사람들은 이 말이 원래 '찬양하는' 이라는 형용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으며, 당시 일반 대중들에게 최고의 가치를
인정받았던 "성문서"를 가리키는 말이었다고 한다. 후에 이 말은 '그 정통성이 의문시 되는 책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 외경은 개별적으로는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으며, 훌륭한 교훈적인 내용들도 많이 포함하고 있으나,
구약 39권과 같이 성령의 영감을 받아 기록된 것은 아니며, 따라서 공 예배에서 사 용되지 못하는 문서들을 말한다.
* 그러나 카톨릭에서는 이러한 '외경'들 중에서 12권을 선택하여 이것을 '정경'으로 인정하고,
이들을 '제2의 정경'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혼란이 가중되었다. 그러나 카톨릭은 제 1, 2 에스드라서와
므낫세의 기도문은 '제2의 정경'에서 제외시켰다.
* 외경의 목록
1-2) 제 1, 2 에스드라서
3) 토빗서
4) 유닛서
5) 다니엘서의 증보판
6) 에스더서의 증보판
7) 므낫세의 기도문
8) 예레미야의 편지
9) 바룩서
10) 벤시락(시락의 아들)의 지혜서
11) 솔로몬의 지혜서
12) 제 1, 제2 마카베오서
다. 위경(Pseudepigrapha)
* 위경은 익명의 저자가 마치 그 책을 에녹이나 바룩과 같이 유명한 고대의 인물들이 기록한 것처럼 거짓으로
꾸미고 있는 데서 생겨난 이름이다.
* 위경은 구약이나 외경에서 제외된 제 3의 책들을 가리키며, 이들은 정경으로 채택되지는 않았지만
중간 시대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특히 신약 성경의 유대교 배경을 잘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 위경의 내용
1) 메시야-메시야 왕국의 도래-메시야 시대에 나타날 징조들
이스라엘이 전 세계를 주관하는 메시야 시대가 도래할 것이며, 이 때에는 여러 가지 우주적인 징조들이 수반될 것이며,
이방 압제자들은 멸망당하게 될 것이다.
2) 죄의 기원
3) 천사들과 귀신들
4) 우상 숭배자들의 멸망
5) 성경을 연구하여 지혜를 얻을 것을 권면.
6) 사후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스올의 역할, 죽은 후의 사람의 본질 등)
* 위경의 책들
1) 에녹서
2) 희년의 책
3) 열 두 족장의 유언서
4) 제3, 제4 마카베오서
5) 아리스테아스가 필로크라테스에게 보내는 편지
6) 바룩의 글
7) 솔로몬의 시편
8) 여 선지의 예언서
9) 모세의 승천기
라. 묵시문학
신, 구약 중간기에 유행했던 또 하나의 장르는 묵시문학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계시(Revelation), 또는 '묵시?Apocalypse)라는 말은 '감취었던 것이 드러난 것(unveiling)을 의미한다.
이것은 마치 연극을 시작할 때에 막이 올려지면 그 뒤에 있는 것이 드러나게 되는 것과 같다.
'묵시'란 말은 주전 2세기-주후 1세기 사이에 씌여진 유대 종교 서적들을 말한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책들을 '묵시문서' 또는 단순히 '묵시'라고 불렀다. 이러한 묵시문학 속에는 강력한 이방민족들
사이에서 신음하던 이스라엘이 느껴야 했던 민족적인 위기의식이 짙게 깔려 있다.
그러므로 묵시문학에는 소수 민족으로 당해야하는 핍박과 착취에 대한 내용이 크게 고조되고 있다.
따라서 이 문헌에는 그들을 현재의 고통으로부터 구원하고 영원한 나라를 세울 메시야에 대한 희망이 강조되어 나타난다.
이러한 묵시 사상은 모두 다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권자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현재에는 악이 득세하고 의인들이 고난을 받으며 도무지 개선될 것같이 보이지 않지만,
결국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천재지변을 통해 역사에 개입하실 것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악을 제거하실 것이며,
궁극적으로 선이 승리할 것이라는 내용이다. 이러한 묵시 문헌은 이스라엘이 고난을 받고 이방 민족들의 통치를
받을 때마다 항상 주어졌으며, 이러한 사상은 계속되는 이방 세력 밑에서 고난을 당하는 유대인들에게 적절한 피난처를
제공해 주었다.
'다니엘서'나 '요한계시록'이 바로 이러한 묵시 문헌의 예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책들을 통해서 이방 민족들에게 박해를 받고 있는 자신의 백성이나 교회들에게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주셨다. 다니엘서나 요한 계시록은 일시적으로 성도들과 교회가 악한 세력들에 의해 고난을 받지만,
결국에는 메시야를 통해 악한 세력들이 심판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악의 세력이 멸망하고 영원한 평화의 세계가 임할 것이라는 소망을 제시해 주고 있다.
묵시 문학의 특징 중의 하나는 다양한 상징을 통해서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에 있는 다니엘이나 밧모섬에 있는 요한에게 다양한 상징들을 통해서 계시를 전해 주셨다.
다니엘이나 계시록에는 행동과 직접적인 말씀 뿐 아니라, 극적인 형태나 여러 가지 상징과 그림들을 통해서 전달된
계시들로 가득 차 있다. 현대에 와서 사람들은 그림이나 드라마, 그리고 영상 등을 통해 자신의 의도를 전달하는 데에
익숙해졌다. 이러한 그림이나 드라마, 또는 영상을 통한 상징들은 저자의 의도를 전달하는데 보다 더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는 다니엘이나 계시록에서 바로 이러한 형상과 상징들을 통해서 자신의 뜻을
전달해 주셨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다니엘이나 계시록의 언어는 현대인들에게 더 익숙한 언어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형상과 상징들을 통해 표현된 하나님의 메시지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을 때에 계시록을
보다 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될 것이다.
예를 들면 요한계시록에서는 교회를 대적하는 세력들을 짐승이나 뿔 등과 같은 상징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짐승들은 그 당시 통치자들을 상징하고 있다. 요한이 이러한 상징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박해로 인해
그 당시의 통치자들의 멸망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초기의 계시록 독자들은 계시록에서
사용된 어휘나 상징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계시록의 메시지를 이해하는 데 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계시록의 저자는 이 책에 언급된 내용들에 대하여 애써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그 당시의 독자가 아닌 그 이후의 세대에 태어나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이 책에 사용된 상징에 익숙하지 못해서
계시록을 대할 때에 당황할 수 있다.
그러나 다니엘이나 요한계시록은 묵시문학과 분명한 차이들이 있다. 묵시 문학은 주로 저자들의 이름을 숨기고
과거의 유명한 사람들(에녹이나 에스라와 같은)이 이름을 빌려서 기록하였다. 그러나 다니엘이나 요한계시록은 분명하게
자신의 이름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묵시 문학은 사변적인데 관심이 있으며, 세상의 종말의 때와 징조, 그리고 최후에
대해서 밝히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다니엘이나 요한계시록은 이러한 문제들에 관한 호기심을 채워주기보다는, 당시의 대 박해 속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기 위해서 기록되었다. 다니엘이나 요한은 메시야께서 오셔서 이 세상을
바로 잡으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다니엘이나 요한계시록은 묵시문헌들과는 달리 사변적인 관심이 없으며,
오히려 독자들이 이 책을 읽거나 듣고, 이 예언에 순종해야 윤리적인 요청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요한계시록을 묵시문헌과 동일시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