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오히라 메모 :
1962 년 11 월 10 일 미국 방문을 마치고 도쿄에 도착한 김 종필 중정 부장은 배 의환 주일 대사로 부터 오히라 외상과의 정치 회담에 임하는 우리측 입장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한일회담의 가장 큰 난관을 돌파하게 만든 김 종필 - 오히라 담판에 대해서 극단적인 평가가 엇갈린다.
김 종필 부장의 기지와 뱃짱에 의해서 청구권 금액을 그정도로 올려 받을수 있었다는 점이 하나이고
김 종필의 독주에 의해서 불리한 조건으로 합의 했다는 주장도 있다. 김 종필 - 오히라 오랫동안 진행되어 오던 한일간 실무자 협상 연장선상 에서 타결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 합의가 김 종필 부장의 영웅적(또는 매국노 적) 행동의 결과 라고 보는것은 외교를 너무나 개인사 적인 입장에서 이해하는 것이 될것 같다. 배 의환 한일회담 수석 대표는 1962 년 9 월 17 일 외무 장관에게 보낸 < 입장 조정 건의서 > 에서 이미 이런 예측을 하고 있었다.
< 지금까지의 교섭 결과, 비공식 접촉을 통한 타진의 결과 그리고 미국측 및 기타의 결과를 종합하여 보면 일본 측이 정치 회담에서 취할 최종선은 많아야 2.5 억(무상) + 2.5 억(차관) = 5 억 달러 로 생각하고 있는것 으로 판단되는 바, 우리 측 으로서는 이를 용납 하지 않는 방향으로 이끌어 가야 할 것이며 따라서 예비 절충의 각 단계에서 제시되는 액수 를 우리 측이 유리 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
11 월 12 일 일본 외무성 에서 있었던 김 종필 - 오히라 회담에서 두사람은 유상(해외 경제 협력 기금)으로 2 억 달러를 10 년에 걸쳐 한국에 지불 한다. 그 조건은 7 년 거치, 20 년 분할 상환이며 이자는 연 3.5 로 한다. 일본은 또 수출입 은행을 통해서 1 억 달러 이상의 민간 차관을 한국에 제공 한다 >
두사람은 이런 요지의 각서를 작성하여 양국 수뇌에 제출하고 결심을 받기로 약속 했었다.
회담을 마친 두사람은 기자들 에게는 비밀 합의에 대한 언급을 피한 채, 1 차 회담 때 보다 진전이 있었다. 한일회담 을 내년 봄까지는 마무리 짓고 조인. 비준 하도록 하자는데 뜻을 같이 했다 는 정도로 이야기 됬다. 이번 “ 김 종필 - 오히라 ” 각서는 한일회담의 돌파구 를 마련 하기는 했으나 많은 문제점 들도 남겼다.
우선 우리가 청구권 이라 부르는 이 배상금의 명칭 부터 문제 였다. 일본 측은 “ 독립 축하금 ” 또는 “ 경제 협력 자금 ” 이라 부르자고 했고, 박 정희 의장은 김 종필 에게
“ 청구권 에 대한 변제 내지 보상으로 지불된 것이라는 점, 을 납득 시킬수 있는 표현이 되어야 할 것이다. 고 긴급 훈령 까지 보냈다. 그럼에도 김 종필 부장은 오히라 와의 회담에서 이 호칭에 대해서 분명한 대답은 이끌어 내지 못했다. 김 종필은 오히라 외상 에게
” 한일 간의 청구권 문제를 해결하고 한일 간의 경제 협력을 증진 시키기 위하여… “
한국은 이상의 조치로써 한일 양국간의 청구권 문제가 해결된.것으로 간주한다. “
란 대목을 조약문에 넣자고 하였으나 오히라 외상은 전문가 에게 검토 시키겠다고 한발을 뺏다
11 월 22 일 열린 한일 실무자 회담에서 일본 측은 한국 측의 제안을 거부 했다. 한국에 지불하는 돈을 청구권 이라고 명시하면 국회에서 금액이 과다 하다는 시비가 일어나고 (재)한국 일본 재산은 어떻게 할거냐, 이북에 관한 부분은 또 어떻게 할거냐 ? 등 씨끄럽게 된다는 것이 일본 측의 반론 요지 였다. 일본 측은 “ 한일 양국의 국교가 정상화 되였고 청구권 문제가 해결 되었다 ” 는 식으로 하자는 제안을 했다. 이번엔 한국 측이 거부 했다. 이밖에도 양국간의 이견 차이는 서로 너무 컸다. 한국 측은 과거의 양국 간 부당한 조약과 협정의 폐기를 명문화 해야 한다고 주장 했고, 일본 측은 이미 무효화 된 사실을 우호 조약을 체결하는 마당에 굳이 명시할 필요가 있느냐고 반대 했다. 한국 측은 또 “ 대한민국 정부가 한반도 의 유일한 합법 정부 ” 라는 유엔 결의문 의 정신을 따라줄 것을 요구 하였으나 일본 측은 한국을 휴전선 이남 만을 관할하는 정부, 로 이해 하려고 했다. 재일 한국인의 법적 지위와 대우 문제를 놓고도 지루한 협상이 계속 된다. 1963 년에 들어서 김 종필 부장이 “ 자의반 타의반 ” 의 외유를 떠나고 박 정희 의장이 정치적 도전을 받게 되자 일본 측은 협상에 열의를 보이지 않게 된다.
김 - 오히라 담판 이 있던 날 김 부장은 도쿄를 방문 중이던 인도네시아 의 수카르노 대통령을 제국 호텔로 찾아가 50 분간 요담 했다. 이자리에서 김 부장은 수카르노 대통령의 방한을 요청 했고 수카르노 는 다음해 10 월 이전에 한국을 방문할 뜻을 밝혔다. 수카르노 도 김 부장을 초청 했다. 당시 제 3 세계 비동맹 국가 그룹의 중심 인물 이던 수카르노 는 다음해 반둥에서 열리는 아시아 - 아프리카 블록 회의에 한국을 초청해 달라는 김 부장의 요청을 쾌히 승낙 했다. 수카르노 는 자원 개발에 한국이 참여해 줄것과 경제 개발에 필요한 자재를 인도 네시아 에서 사달라고 당부도 했다.
이 회담을 주선한 분은 최 계월(코데코 그룹 총회장) 이었다.
최 계월 회장은 전후 일본에서 한 일본 노인을 만나 친해 졌는데 그가 바로 명치유신의 막후 조정자 인 사카모토 료마의 양자 사카모토 나오미치(원래는 친조카) 였다.
최는 이 노인의 소개로 일본 자민당의 실력자 들과 인간적으로 깊은 교분을 갖게 된다. 오노. 사토. 후쿠다. 후나다. 등 자민당 본류의(친한) 인맥과 친하게 된 그는 인도 네시아 와도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
최 계월은 일본을 자주 오가던 네델란드 령인 이리안자야 의 민족 지도자 들과도 친했다. 이 지도자 들이 이리안자야 를 네델란드 로 부터 독립 시켜 국가를 만들것인가, 인도 네시아 와 합칠것인가 로 갑론을박 하고 있을때 최 계월은 인도 네시아 와 합병 하도록 설득 해준적이 있었다. 최 계월 덕분에 일본은 인도 네시아에 대한 전쟁 보상금의 부담을 대폭 줄일수 있었고, 최는 수카르노와의 친분을 아주 존독하게 갖게 되었으며 김 종필 과의 파격적인 요담도 최 계월 덕분에 즉석에서 성사 시킬수 있었다. 나중에 최 계월은 한일회담과 한일 국교 정상화 에도 막후에서 아주 중요한 역활을 담당하게 되고 인도네시아 산림 개발과 석유 개발에 투자하여 큰 사업을 벌인다.
한 분의 재일 교포가 우연히 일본 노인과 친분을 쌓은 노력이
“ 한국에 큰 도움을 준 역사적 배경엔 일본에 뿌리 내린 동족 이라는 ” 핏줄 “ 이 크게 작용하여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한일회담의 쾌거를 이룩할수 있었던 것이다.
첫댓글 자료제공: 이기홍 장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