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선명 평전
제1장 탄생은 깨달음을 위한 것이었다
6. 밑바닥 삶을 체험한 일본 유학시절
1941년(21세)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적국(敵国)을 바로 알아야 그들을 극복할 장래를 기약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도항증을 받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가 정주경찰서장을 만났다. 그런데 요주의 인물이라 하면서 발급을 내주지 않자 담판하다시피 하며 허가를 얻어냈다. 어머니는 궁핍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아들의 장래를 위해 논과 밭까지 팔아 유학자금을 마련해 주었다. 경부선 히카리호(光帆) 열차를 타고 부산으로 향하면서 불쌍한 민족의 장래를 염려하며 난간에서 눈물을 흘렸으며 자리에서는 외투를 뒤집어쓴 채 하염없이 통곡했다. 산천초목에서 눈물이 철철 흘러내리는 모습도 보았다. 그 산천을 향해 약속했다.
"고국산천아, 울지 말고 기다려라. 내가 반드시 조국광복을 안고 돌아오마."
4월1일 새벽 2시 부산항에서 관부연락선을 탔다. 도쿄에 도착해서 와세대학교 부속 와세다 고등학교 전기공학과에 입학했다(문선명의 최종 학력을 넣고 대학 졸업이냐, 고교 졸업이냐에 대해 논란이 있다. 와세다고등학교는 고등학교와 대학학부 중간의 전문학교 성격으로 1928년 4월 설립 되었다. 요즘으로 치면 전문대학으로 보면 된다). 그의 학적부에는 에모토 류메이(江本龍明)라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1939년 일제가 한국인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공포하고 1940년 2월 11일부터 강행함에 따라 바꾼 이름이다.
문선명은 현대 과학을 모르고는 새로운 종교이념을 세울 수 없다는 판단으로 전기과를 택했다(훗날 문선명이 사업을 일으켜 한때 30대 재벌에 들었던 바탕은 그가 인문학이나 신학을 배우지 않고 공학을 배운 것이 큰 역할을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는 특히 수학을 좋아했다.
크기가 맞는 모자를 찾기 어려워 공장에 직접 찾아가서 두 번이나 새로 맞추어 쓸 정도로 머리가 컸다. 한 가지 일에 집중하면 보통사람들이 10년 걸리는 것을 3년도 안 돼 해치울 수 있는 것도 어쩌면 머리가 큰 덕분이지 모른다. 일본 유학 시절에도 선생님들을 당황해하는 질문을 퍼부었다. 궁지에 몰아넣으려고 그런 것이 아니라 공부를 하려면 그만큼 철저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본에 건너간 그에게 첫 번째 닥친 문제는 하숙집을 구하는 것이었다.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거부당했고, 차별대우도 많이 받았다. 다행히 마음씨 좋은 사람을 만나 학업에 정진할 수 있었는데 미쓰하시 고우조(水橋孝蔵), 미쓰하시 이토(三橋伊都)부부다. 그들은 훗날 그 조선인 하숙생이 세계적인 인물로 성장하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문선명은 1965년 세계 순회 때 그 하숙집을 방문했고, 지금 그곳 (회사로 바뀌었다)은 한국과 일본인 신도들에게 성지 순례 장소의 하나가 되었다.
하숙집 책상에는 늘 영어와 일본어, 한글로 된 성경책이 있었다. 성경의 같은 문구를 세 가지 언어로 읽었는데. 특히 국어, 일어 성경은 글씨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밑줄을 그어가며 읽었다. 문선명은 목사로서 당연히 성경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으며, 그의 설교는 모두 성경에 바탕을 둔다. 교리에 대한 해석은 종파마다 다르겠지만 문선명과 통일교 역시 성경에 믿음을 둔다.
평소에는 말이 없었으나 입학 후 열린 한인유학생회 신입생 환영회에서 일본 경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국의 노래를 힘차게 불렀다. 또 와세다대학 정경과 소속 공산주의 추종자들과 심한 격론도 벌였다. 그때 공산주의가 인류에 미칠 위험을 간파했던 것이다. 다행히 좋은 친구도 여럿 만났는데 건축공학과의 엄덕문(1919~2012)이다. 그는 귀국 후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가 되었는데 문선명과 오랜 인연을 맺었다. 엄덕문은 광복 후 한양대, 홍익대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60년대에 엄덕문건축연구소를 세워 세종문화회관, 소공동 롯데호텔, 리틀엔젤스예술회관 등 여러 건축물을 설계했다. 문선명보다 1년 먼저 태어났으나 별세는 같은 해(2012년)에 했다. 참으로 묘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당시 도쿄에는 유학생들로 구성된 지하 독립운동조직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대동아 전쟁)이 치열해질수록 일본의 탄압은 날로 심해졌다. 한국 학생들은 학도병으로 끌려갔고 그런 만큼 지하 독립운동도 활발해졌다. 그는 도감(都監) 책임자가 되어 김구 선생의 임시정부를 돕는 일을 맡았다. 와세다대학 오른편에 경찰서가 있었는데 일본 경찰이 늘 감사했다. 경찰서로 잡혀가 매를 맞고 고문을 당하고 유치장에 갇히는 일도 많았다.
"매달 한 차례는 경시청 산하 도쓰카(戸塚) 경찰서에 소환돼 취조를 받았고, 항상 행방과 일상 동태에 대해 감시당했다. 방학 때 한국을 오갈 때도 일본 경찰이 제일 먼저 알았으며, 부두나 정거장 개찰구에서는 사복형사의 마중을 맞곤 했다."
도쿄에서도 안 가본 곳 없이 구석구석 돌아다녔다. 도쿄는 겉은 번드레 했지만 가난한 사람들도 많았다. 집에서 보내주는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모두 나눠주었다. 유학생 중에도 고학생이 많았는데 한달분 식권이 나오면 고학생들에게 나눠 주었다. 그리고 자신은 노동판에 뛰어들었다. 리어카로 배달하는 일도 했다. 도쿄 27개 구역을 리어카로 누비고 다녔다. 또 노동판에서 진땀을 흘리며 일했다. 지독한 냄새를 맡으며, 이가 득실거리는 더러운 담요도 함께 덮었다. 가와사키(川崎) 철공소와 조선소에서 막노동도 했다. 세 사람씩 조를 짜서 새벽 1시까지 석탄 120톤을 싣는 일이었다. 가와사키 철공소에는 유산 탱크가 있었다. 탱크 속에 직접 들어가 일을 했는데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힘든 노동을 했기에 늘 배가 고팠지만 하루에 두 끼 이상은 먹지 않았다.
"배가 고픈 것은 그리움입니다. 나는 배고픈 그리움이 무엇인지 잘 알지만 세계를 위해서 밥 한 끼쯤은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새 옷을 입어본 적도 없었다. 아무리 추워도 방에 불을 때지 않았으며 몹시 추울 때면 신문지를 덮고 잤다. 시나가와(品川)의 빈민굴에서도 살았다. 거지들의 친구가 되었고, 사연을 들어주는 사람이 되었다. 이처럼 일본에서 공부하는 동안 별의별 일을 다 했다. 빌딩의 소사(小使)도 했고 글을 대신 써주는 필생(筆生)도 했다. 노동판에서 일하고 현장감독도 했으며 남의 사주를 봐주기도 했다. 그래도 공부하기를 게을리 하지는 않았다.
별의별 일을 다 하고 별의별 사람을 다 만났는데 그런 과정을 통해 사람에 대하여 많이 알게 되었다. 그 덕분에 사람을 척 보면 '무엇을 하는 사람이겠구나', '좋은 사람이구나' 하고 대번에 알아채는 능력을 지니게 되었다. 이러한 고생을 한 덕분에 "사람이 바로 되려면 서른 살 이전에 고생을 해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 속담에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그의 이런 밑바닥 체험은 훗날 교회를 세우고 성장시키고, 세계로 나가게 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대동아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3년 가을에 문선명은 학업을 끝마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지원군을 뽑기 위해 학생들을 조기 졸업시켜 전쟁터로 내몰았다. 문선명은 6개월 일찍 졸업하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1943년 9월 30일, 와세다고등공학교 전기공학과 제25회), 귀국선 '곤론마루호'를 타고 가려 했는데 그날 아침 이상한 예감이 들어 미적거리다가 배를 놓쳤다. 얼마간 일본에 머물기로 하고 친구들과 후지산을 오른 뒤 도쿄로 돌아와보니 곤론마루 호가 미군에 격침당해 500명 넘게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곤론마루 호는 655명을 태우고 출발했으나 미군 잠수함의 어뢰에 명중돼 침몰했고, 생존자는 겨우 72명에 불과했다. 관부연락선 사상 최초의 비극이었다. 이 사건은 「요미우리신문」 1943년 10월 8일자로 보도됐다.
이미 고향집으로 '곤론마루 호를 타고 귀국함' 이라는 전보를 쳤기에 집에서는 한바탕 난리가 일어났는데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왔다. 다시 흑석동에서 명수대교회와 예수교회를 다녔는데 이때 성경공부를 열심히 했고 하나님에 대해 매일 연구했다. 16살에 예수님을 만난지 9년 만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참된 사랑에 눈을 떴다고 고백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해와를 창조하신 후 생육하고 번성하며 평화세계를 이루며 살라고 이 세상에 내보내셨습니다. 그렇지만 아담과 해와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불륜을 저질러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을 낳았습니다. 타락으로 얻은 아들들이 서로를 불신하여 형제간에 살인을 저지르면서 이 세상의 평화가 깨지고 죄가 세상을 덮어 하나님의 슬픔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메시아인 예수를 죽이는 큰 죄를 또 저질렀습니다. 그러니 오늘날 인류가 당하는 고통은 마땅히 겪어야 할 속죄의 과정이며 하나님의 슬픔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이 통일교의 근본 교리 중 하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때의 깨달음을 바탕으로 문선명은 통일교 교리를 발전시켜 세계적인 신흥 종교로 만들었다.
집에 돌아오자 결혼할 나이(23살)가 되었고, 정주의 이름난 기독교 집안의 딸 최선길(崔先吉)과 선을 보았다. 최선길은 정주군 관주면 관삽동에서 1925년 태어났는데 엄격한 집안에서 자란 알뜰한 처녀로 신사참배를 거부해 16살에 감옥살이를 했을 정도였다. 원래 문선명은 일본 유학을 마치면 중국의 하이라얼로 건너가 만주전업 안동현 지점에 취직해 일하면서 러시아어와 중국어, 몽고어를 배울 생각이었다. 만주에 들렀다가 고향에 돌아와 우여곡절 끝에 1944년 5월 4일, 예수교의 이호빈 목사 주례로 혼례를 올렸다. 신혼 살림은 흑석동에서 시작했으며 용산에 있는 가시마구미(鹿島組) 토목 회사의 경성지점에 취직해서 회사일과 교회 일을 함께 보았다. 그러나 단란한 신혼살림과 신앙생활은 하루 아침에 파탄이 났다.
그해 10월, 신혼집으로 느닷없이 일본 경찰이 들이 닥쳤다. "와세다 대학 경제학부에 다니던 ㅇㅇㅇ을 아느냐?" 하고 묻더니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경기도 경찰부로 끌고 갔다. 공산주의자로 잡혀간 친구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온 것이었다. 그의 생애에서 첫 번째 감옥살이였다. 심한 고문을 당했고 일기장도 검열을 당했다.
"일본 경찰은 징을 박은 군화발로 내 몸을 사정없이 짓이긴 뒤 내가 죽은 듯이 축 늘어지면 천장에 매달고 흔들었다. 나는 정육점의 고깃덩어리처럼 그들이 막대기로 미는 대로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러면 내 입에서 시뻘건 피가 울컥울컥 쏟아져 시멘트 바닥을 적셨다. 나는 몇 번이나 정신을 잃었다. 찬물을 한 양동이 뒤집어쓰고 정신이 들면 다시금 고문이 시작되었다. 코를 잡은 뒤 양은 주전자를 입 속에 넣은 채로 무한정 물을 먹인 뒤에 바닥에 쓰러뜨리고는 개구리처럼 부풀어 오른 배를 군화발로 짓이겼다. 식도를 타고 넘어온 물을 사정없이 토하고 나면 눈앞이 깜깜해지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경기도 경찰부에 잡혀 있던 4개월 동안 어머니가 찾아왔고 하숙집의 이기완 아주머니 형제들이 돌아가며 옥바라지를 해주었다. 흑석동 교우 곽노필은 사식을 가지고 면회를 다녔는데 문선명과 친하다는 이유로 구금돼 혹독한 수난을 받았지만 먼저 풀려났다. 아무런 죄가 없는 문선명은 1945년 2월 출옥 후 곽노필의 직장을 찾아가 서로 붙들고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 6개월 후에 8.15 광복이 되었다.
첫댓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