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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엘 3장 1-8절
내 백성, 내 기업인 이스라엘을 위하여
지난 시간에 살핀 요엘서 2장 28절 이하 32절의 말씀은 말세에 회복되는 교회에 대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회복시키실 때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회복시키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내용은 결코 성령의 신비한 역사 혹은 성령의 신비한 은사를 지지하기 위한 말씀이 아닙니다.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말미암아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하고, 늙은이는 꿈을 꾸고, 젊은이는 이상을 보는 것은 다 구약 식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된 것들입니다. 때문에 교회의 회복은 성령의 부어주심과 함께 말씀 사역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더불어 교회의 회복을 위하여 성령을 부어주실 그때 하나님의 심판과도 같은 일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게 되는데, 이것이 교회에게는 환난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늘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무기로 선한 싸움을 싸워가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로마서 5장의 말씀처럼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어 내기 때문입니다(롬5:3-4).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의 심판과 같은 일들이 말세에 일어나고, 그로 인해 교회가 환난 가운데 있을 수 있지만,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다만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고 할 때 누가 주의 이름을 부르는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는 말 자체만 보면 부르는 자 쪽에 열쇠를 쥐고 있는 것처럼 여기기 쉽지만, 성경은 언제나 이 일이 하나님께 달렸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요엘서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즉 여호와의 부름을 받은 자, 그가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며 또한 그가 구원을 받게 됩니다. 여호와의 부름이 역사 안에는 나타나는 것이라면 이런 역사에 앞서 하나님은 누구는 선택하시고 누구는 유기하신 바가 있는데, 여호와의 부름을 받았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선택의 대상임을 의미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누가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가? 여호와의 부름을 받은 자인데, 영원 전부터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 그가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결국 말세에 회복되는 교회는 누구로부터 말미암는가 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결코 사람으로부터 말미암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요엘서 2장의 말씀을 사도행전 2장에서 인용한다고 할 때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과 같은 부흥이 다시금 일어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는 사람들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과 같은 일이 일어나도록 인위적으로 뭔가를 하는 사람들, 혹은 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전무후무한 사건으로 구약에서는 유대인 중심의 구원이 신약에 와서 이방인에게까지 미치는 전환점에서 단회적으로 나타난 사건입니다. 교회의 부흥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처럼 그런 방식으로 일어나야지만 되는 것이 아니라, 다시 말해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고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보여야지만 부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으로, 그리고 그 말씀을 사용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은밀한 역사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깨달아 아는 것, 그리고 깨달아 아는 말씀이 우리 안에서 헛되게 나타나지 않도록 성령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우리를 변화시켜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게 되는 것, 그리스도의 형상과 동일한 형상을 갖추는 것, 이것이 교회의 부흥입니다.
이런 부흥은 결코 사람 편에서 시작할 수 없습니다. 사람 편에서 준비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이런 말씀을 통해 주의 은혜가 주의 몸 된 교회 가운데 있도록 기도하면서 기다릴 뿐입니다. 기도하면서 기다린다고 할 때도 어떤 사람은 우리의 기도 때문에 부흥의 역사가 일어난다고 말하고자 하지만, 말씀을 통해 알게 하시는 역사가 먼저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앞서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알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앞선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말씀에 근거해서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런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는 교회의 회복을 좀 더 확증하는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심으로 교회를 회복함과 동시에 이방 나라에 대해서는 심판하신다는 사실로 그것을 나타내십니다. 먼저 1절을 보시면 “보라 그 날 곧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 가운데에서 사로잡힌 자를 돌아오게 할 그 때에” 1절 자체만 보면 바벨론 포로와 관련해서 생각하기 쉽고, 그런 점에서 바벨론 포로와 관련된 시기에 기록된 말씀으로 여기기 쉽지만, 처음부터 말씀드린 것처럼 요엘서가 언제 기록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본문에 앞서 성령을 부어 주신다는 말씀이 신약에서 성취된다고 할 때 단순히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는 그런 의미로만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후 내용이 이스라엘 주변국들에 대한 심판의 내용이라고 할 때 최후 심판까지 내다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단순히 어느 시점만 생각하도록 하는 말씀이 아니라 자기 백성의 구속과 관련된 것으로, 그것은 순간적인 혜택으로 끝나지 않고 자기 교회의 모든 원수들을 처벌하러 오실 때까지 지속될 내용으로 이해를 합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어 다시금 돌아오는 역사도 여기에 포함되지만, 결국 최후 심판의 자리에까지 이르러 교회가 완성이 되고 나머지 이방인들은 심판을 받게 되는 그 자리까지 내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사로잡힌 자들을 돌아오게 하신다는 것은 그들이 사로잡혀 있었던 자들이었음을 의미합니다. 왜 사로잡히게 되었습니까? 그들의 죄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의 죄로 인하여 이방 나라를 일으키시고 징계하실 때 마치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나타난 것처럼 유다까지도 멸망한 것처럼 보이는 일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약속의 땅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방 나라의 포로로 잡혀 가기도 하는 그런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로잡힌 자를 돌아오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멸망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멸망한 것이 아니라 잠시 하나님의 징계 가운데 내버려두시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회복하십니다. 때가 되면 사로잡혔던 곳에서 돌아오게 하시는 때가 있습니다. 이때가 교회가 회복하는 때요, 이때가 교회가 완성으로 나아갈 때입니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께서 무엇을 행하시는가? 2절과 3절을 보시면 “내가 만국을 모아 데리고 여호사밧 골짜기에 내려가서 내 백성 곧 내 기업인 이스라엘을 위하여 거기에서 그들을 심문하리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을 나라들 가운데에 흩어 버리고 나의 땅을 나누었음이며 또 제비 뽑아 내 백성을 끌어 가서 소년을 기생과 바꾸며 소녀를 술과 바꾸어 마셨음이니라” 여기서 만국은 이스라엘 백성 외의 모든 나라입니다. 오늘 본문 4절만 하더라도 두로와 시돈, 그리고 블레셋을 언급합니다. 또 19절로 넘어가면 애굽과 에돔에 대해서도 언급하는데, 이 모든 나라들은 이스라엘 주변에 있는 나라들입니다. 직접적으로는 이스라엘 주변에 있는 나라를 언급하지만, 최후 심판과 관련해서는 이스라엘 외에 모든 나라, 그러나 이때 이스라엘은 육적 이스라엘이 아니라 영적 이스라엘이요 여기에는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까지를 포함합니다. 영적 이스라엘 외에 모든 나라, 이스라엘 밖에 있는 나라가 지금 만국으로 표현되고 있는 겁니다.
그들을 모아 어디로 데리고 가시는가? 여호사밧 골짜기입니다. 일단 역사적 사실로 보자면 역대하 20장에 기록된 사건을 배경으로 하는데, 모압 자손과 암몬 자손들이 마온 사람들과 함께 여호사밧을 치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 여호사밧을 도우심으로 이들 연합군을 물리친 사건입니다. 역대하 20장 26절에 보면 “넷째 날에 무리가 브라가 골짜기에 모여서 거기서 여호와를 송축한지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골짜기를 지금 여호사밧 골짜기로 칭하고 있는 듯 합니다. 그럼 왜 이 골짜기를 언급하고 있는가? 유대인들이 얼마나 경이적으로 구원받았는지를 상기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사밧을 도와 세 연합군을 이기게 하심으로 브라가 골짜기에서 여호와를 송축한 것처럼 너희의 구원도 동일한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여호사밧이라는 히브리 단어의 뜻을 주목합니다. ‘fp;v;/hy_’[예호솨파트], 즉 여호와께서 판단하신다, 심판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여호사밧 골짜기는 하나님의 판단 혹은 심판의 골짜기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해를 가지고 다시 본문을 보시면 1절에서 하나님께서 사로잡힌 하나님의 백성을 돌아오게 하십니다. 그리고 2절에서 모든 만국, 즉 이방 나라들을 모아 데리고 여호사밧 골짜기에 내려가시는데, 거기서 무엇을 하시는가? 내 백성 곧 내 기업인 이스라엘을 위하여 거기에서 그들을 심문하신다고 말씀합니다. 단순히 심문하는 정도가 아니라 심판하신다, 판결하여 선고하신다는 뜻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지금 여호사밧 골짜기라는 표현은 한편으로는 역사적 사실의 내용도 담아서 유대인들이 얼마나 경이적으로 구원받았는지를 알리는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그런 구원이 결국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함축하여 드러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의 구원의 완성은 하나님께서 모든 나라를 심판하실 때인데, 지금도 우리는 구원의 은혜를 누리고 있지만 여전히 죄와의 싸움이 있다는 점에서는 완성이 아니라 완성을 향해 가는 자들로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때 하나님께서 모든 나라를 심판하실 때는 죄와의 싸움을 멈추고 완성된 자로서 주님 앞에 서게 됩니다. 그때는 여호사밧과 그의 백성들이 브라가 골짜기에서 여호와를 송축한 것처럼 우리 역시 하나님만을 송축하게 될 것인데, 본문은 이러한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쨌든 이 모든 것을 통해 지금 하나님께서 드러내고자 하시는 바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너희의 구원자요 하나님이 너희를 지키고 보호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너희를 지키고 보호하는 자는 너희를 사로잡아 간 자가 아니라, 그들을 심판할 수 있는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저들을 심판하실 때 이방 나라를 일으키신다는 것과 함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심판은 징계의 성격으로 있지 멸망의 성격으로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징계하시는가? 요엘서를 통해서도 말씀하신 것처럼 돌이키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이방 나라를 심판하시는 것은 단순히 징계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저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은 멸망입니다. 더 이상 저들이 힘을 발휘할 수 없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위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징계하기도 하시지만, 그것은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징계 가운데서도 긍휼을 잊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회복케 하십니다. 회복케 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이스라엘 편에서 볼 때 원수라고 할 수 있는 자들을 심판하심으로 더 이상 이스라엘이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결국 구원하시는 분으로서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이것보다 더 큰 위로가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 왕들의 역사를 보면 간혹 어려움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이 아니라 이방 나라를 찾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악한 왕만이 아니라 선한 왕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선한 왕으로 선한 정치를 했는데, 이후 교만하여 어려움이 찾아왔을 때 하나님이 아니라 이방 나라를 찾는 일이 있더란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항상 이것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시는 것이 하나님 자신만이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구원하시는 분이라고 하십니다.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눈을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주목하지 않도록 늘 조심해야 합니다. 어떤 문제든지 하나님께로 가져가도록 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실은 그 문제를 출제하신 분이 하나님이시요, 그 문제의 해답 역시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문제를 출제하시는 모든 일은 하나님을 늘 의뢰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것을 의뢰하면서 찾는다면 이미 하나님께서 출제하신 의도와 다른 방향이요, 그 답도 틀린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틀린 쪽에 답을 구하지 않도록 우리는 늘 하나님만을 의뢰해야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잠언 3장 6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다시 2절로 와서 내가 만국을 모아 데리고 여호사밧 골짜기로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을 심문한다 혹은 심판한다고 할 때 무엇 때문에 그들을 심문하고 심판하신다고 하시는가? 2절 하반부에서는 그들이 이스라엘을 나라들 가운데에 흩어 버리고 나의 땅을 나누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3절에서는 제비 뽑아 내 백성을 끌어 가서 소년을 기생과 바꾸며 소녀를 술과 바꾸어 마셨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물론 저들이 이스라엘 나라를 친 것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즉 저들은 이스라엘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의 도구인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이 하나님의 도구라고 할 때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는, 하나님의 목적과 일치되는 것으로 그 일을 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목적은 저들을 도구로 하여 징계하시고 심판하심으로 자기 백성이 돌이키도록 하는 데 있다면, 저들은 하나님의 도구라는 인식보다는 그들 스스로 자국의 이익을 위하여 다른 나라를 무너뜨리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었지만 그들이 내놓았던 것은 죄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저들을 심문하시고 심판하시는 이유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동일한 그 일에 대하여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으로 계시지만, 행한 일이 악하다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때가 되면 그들의 악에 대하여 심문하시고 심판하시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2절에서 이스라엘을 나라들 가운데에 흩어 버리고 이스라엘 땅을 나누었다고 할 때 이스라엘 땅을 ‘나의 땅’으로 말씀하시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사실 하나님은 모든 만물의 주인이십니다. 그러나 모든 만물 가운데, 특히 모든 나라들 가운데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을 택하여 먼저 부르셨습니다. 바로 그들을 내 백성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2절에서도 ‘내 백성 곧 내 기업인 이스라엘’이라는 표현이 나오지만, 모든 것 가운데 특별히 내 것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땅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모든 땅 가운데 특별히 이스라엘에게 주신 땅이 있습니다. 거기에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짓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성전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과 만나십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런 땅을 짓밟았다는 것입니다. 그런 땅을 나누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주신 땅이요, 이스라엘이 내 백성이라고 할 때 내 백성의 땅 정도가 아니라 내 땅이라고 칭하실 만큼 지금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하나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땅을 너희 마음대로 나누어 가진 것, 하나님의 것을 너희 마음대로 나누어 가진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주신 것이 아닌데, 마치 너희가 도둑질 하여 나누어 가진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저들을 심문하시고 심판하고자 하시는 이유입니다.
3절에서는 저들의 정욕을 위하여 비인격적인 일도 서슴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하나님의 백성 된 자를 제비뽑아 노예로 데려갈 뿐 아니라 소년은 기생과 바꾸고 소녀는 술과 바꾸어 마셨다고 할 정도입니다. 사람의 가치를 기생과 바꾸고 술과 바꿀 정도로 하찮게 여겼다는 것이고, 무엇보다 기생과 술을 위한다는 것은 자신의 쾌락을 위하여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노예로 잡은 유대인들을 인간 취급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들을 팔아 자신의 정욕을 위하여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일로 인하여 하나님은 저들을 심문하시고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4절 이하 6절을 보시면 “두로와 시돈과 블레셋 사방아 너희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희가 내게 보복하겠느냐 만일 내게 보복하면 너희가 보복하는 것을 내가 신속히 너희 머리에 돌리리니 곧 너희가 내 은과 금을 빼앗고 나의 진기한 보물을 너희 신전으로 가져갔으며 또 유다 자손과 예루살렘 자손들을 헬라 족속에게 팔아서 그들의 영토에서 멀리 떠나게 하였음이니라” 앞에서도 말했지만 만국을 심문하시고 심판하신다고 할 때 구체적인 대상이 언급되고 있는데, 4절은 두로와 시돈과 블레셋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지도로 생각하면 두로와 시돈은 북이스라엘 위쪽, 지중해에 붙어 있는 나라입니다. 블레셋은 남유다의 왼쪽에 붙어 있는 나라인데, 이스라엘 주변국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저들에게 “너희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희가 내게 보복하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즉 지금 저들이 행한 일은 나와는 무관한 일이요, 특별히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은 곧 내게 행한 일과 같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역사의 모든 주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역사의 주관자라고 해서 죄에 대해서조차 하나님이 주체인 것처럼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선하신 분으로서 죄를 내놓을 수 없습니다. 섭리 속에서 죄를 다스리긴 하지만 죄를 창조하거나 조성하는 분은 아니십니다. 죄는 누구로부터 나오느냐? 사람으로부터 나옵니다. 지금 저들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대하여 악을 행했다고 할 때 징계와 심판의 도구로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았다고 할 수 있지만, 죄와 악 자체에 대해서는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너희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으냐고 말씀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너희가 내게 보복하겠느냐고 말씀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당한 모든 일이 곧 내게 행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 된 우리의 가치가 얼마나 높여지고 있는지를 확인하셔야 합니다. 저들은 사람의 가치를 기생과 바꾸고 술과 바꿀 정도로 하찮게 여겼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이런 인간의 본성은 기본적으로 양육강식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처음부터 사람을 하나님 자신의 형상으로 만드셨습니다. 다른 모든 만물보다 귀하게, 가치 있게 창조하셨다는 겁니다. 하지만 사람의 교만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하는 욕심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 가운데 일부를 먼저 불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지만, 죄인으로 결과 되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일부를 불러주셔서 회복시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아닙니다. 모두를 회복시켜 주셨다면 그 가치가 희석될 수 있습니다. 모두이기 때문에 그 가치가 더욱 빛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두가 아니라 일부를 회복시키심으로 회복된 자의 가치가 얼마나 높은지를 우리에게 알리십니다.
선택과 유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선택된 자로 있다면 선택의 가치가 얼마나 귀한지를 알 수 없습니다. 유기가 있음으로 인해 선택이 얼마나 가치가 있고 복된 것인지 확인하게 하십니다. 여러분이 교회로 부름 받았다는 것, 주의 백성이 되고, 신자가 되고, 성도가 되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높이셨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세상적인 것으로 자신을 하찮게 여기지 마셔야 합니다. 세상의 판단을 따라 하찮게 여기지 마셔야 합니다. 저 사람은 이런 능력도 있고 저런 능력도 있더라. 그런데 나는 이게 뭔가? 그러나 이런 능력 저런 능력을 주시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여러분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높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까지 아끼지 않고 내어주실 정도로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키실 만큼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불평합니다. 그래도 저들만큼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 자신을 가장 큰 선물로 주셨다는 것으로 인내하십시오. 하나님 자신을 가장 큰 선물로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것아 가장 큰 선물임을 확인하도록 하기 위하여 다른 것을 안 주실 수 있다는 것도 생각하셔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많이 받은 자가 있는가 하면, 많이 받지 않은 자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많이 받은 자가 많이 받지 않는 자를 위하여 나누도록 하는 사랑의 정신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채워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 자신을 가장 큰 선물로 받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자족과 만족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이 그것 아니겠습니까!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3:17-18) 육체를 가진 자로서 육체적인 것을 채울 수 있는 게 없다는 것 자체가 어려움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면서 만족하고 자족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말씀하시기를 만일 내게 보복하면 너희가 보복하는 것을 내가 신속히 너희 머리에 돌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게 보복하겠느냐? 그렇다면 네가 보복한 그대로 네 머리에 돌려주겠다. 신속히 돌려주겠다는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을 5절과 6절에서 소개합니다. 너희가 내 은과 금을 빼앗고 나의 진기한 보물을 너희 신전으로 가져갔으며, 또 유다 자손과 예루살렘 자손들을 헬라 족속에게 팔아서 그들의 영토에서 멀리 떠나게 하였음이라. 여기서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내 은과 금이라는 표현을 보게 됩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이 당한 모든 일은 마치 하나님께서 당한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런 은과 금, 또한 진기한 보물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물론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진기한 보물을 너희 신전으로 가져갔다고 할 때 하나님의 성전의 은과 금, 그리고 진기한 보물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 성별하여 드린 물건을 지금 어디로 가져갔느냐 하면 자기들의 신전에 가지고 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도 하나님은 내 은과 금, 나의 진기한 보물이라고 말씀하기도 하시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께 구별하여 드린 것이 거짓 신을 위해 드리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비록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죄로 나타나고 있으며 마땅히 하나님께서 보복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래 자기 것이 아닌데 하나님께 바쳐진 것을 강탈하여 간 것도 죄요, 그것을 자기들이 섬기는, 그러나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다고 할 때 거짓 신일 수밖에 없는데, 그런 신에게 바친 것이 더욱 심각한 죄로 드러나고 있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유다 자손과 예루살렘 자손들을 헬라 족속에게 팔아서 그들의 영토에서 멀리 떠나게 하였다는 사실도 말씀하시는데, 하나님께 대하여 죄를 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잔인하게 대했다는 것도 죄로 말씀하십니다.
이런 모든 내용은 결국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것으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율법의 요약이 무엇입니까? 첫 번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 두 번째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의 영토로 들어와 그들을 헬라 족속에게 판 것, 그리고 성전의 모든 성물을 자기들의 신전으로 옮긴 것은 이런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것과 같습니다.
물론 저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1장 20절 그리고 로마서 2장 14절과 15절은 무엇을 말씀합니까?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즉 누구도 하나님을 부정할 수 없도록 하셨습니다. 또한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즉 하나님의 율법이 이미 그들의 마음, 그들의 양심에 새겨져 누구도 핑계할 수 없습니다.
결국 저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은 저들의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범죄, 나아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범죄로 인하여 저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제외한 모든 나라와 모든 사람이 결국 동일한 이유에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런 심판은 하나님을 모른다는 이유가 핑계꺼리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말씀을 모른다는 것이 핑계꺼리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들어 본 적도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본 적도 없는 자조차 핑계 댈 수 없다면 복음을 들은 자들은 어떠하겠습니까? 오늘날 복음을 들으면서도 유대인들처럼 복음을 거절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복음을 들으면서도 복음에 합당한 열매에 대하여 소망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택자라면 결코 그럴 수 없다는 측면에서 이들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심판 외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말씀이 우리에게 교훈이 되기도 합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자들이요, 하나님의 뜻도 아는 자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마땅한 바는 무엇인가? 하나님 사랑으로 나타나야 하고, 또한 이웃 사랑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이것이 나타나지 않음으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방 나라를 통해 치기도 한 것입니다.
이제 7절과 8절을 보시면 “보라 내가 그들을 너희가 팔아 이르게 한 곳에서 일으켜 나오게 하고 너희가 행한 것을 너희 머리에 돌려서 너희 자녀를 유다 자손의 손에 팔리니 그들은 다시 먼 나라 스바 사람에게 팔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6절에서 저들이 유다 자손과 예루살렘 자손들을 헬라 족속에게 팔았다고 말씀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팔았던 곳에서부터 자기 백성을 일으켜 나오게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1절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또한 너희가 행한 것을 너희 머리에 돌려서 너희 자녀를 유다 자손의 손에 팔린다는 것은 4절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은 맥락인데, 4절에서는 하나님이 친히 그렇게 하겠다고 말씀하셨다면 지금 7절과 8절은 바로 그 일을 하나님의 백성이 하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즉 하나님의 고유한 심판권을 누가 시행하도록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시행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주의 몸 된 교회를, 성도를 얼마나 높여주시는지를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 된 자가 죄를 지을 때는 결국 심판 받아 멸망하게 될 자들로부터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친히 회복하시면 저들과 우리의 입장이 완전히 반대가 됩니다. 저들은 심판을 받게 될 자로 있는가 하면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심판하는 자로 있게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처럼 심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높여주신다는 겁니다.
여러분, 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실 때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라,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같이 거룩하라는 등의 말씀을 하십니까? 이미 이 말씀 안에 우리를 높여주고자 하시는 그분의 뜻이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명령은 우리를 억누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우리의 자유의지를 제한하도록 하기 위한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에베소서 1장 23절은 어떻게까지 말씀하시느냐?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우리를 교회로 삼았다는 것은 우리를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머리되신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분이신가?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런 분이 교회를 자신의 몸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런 교회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느냐?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이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는 이미 그 자신만으로도 충만합니다. 충만하기 때문에 만물을 충만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 분이 교회 없이는 충만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교회가 있어야지만 충만하다고 말씀하실 수 있는 것처럼 말씀하신다는 겁니다. 우리가 무엇이기에 이렇게까지 말씀하십니까? 우리는 피조물일 뿐입니다. 흙으로 지음 받은 자일뿐입니다. 티끌로 만들어진 자일뿐입니다. 그러나 그런 자를 마치 하나님과 같이 높여주셨다는 겁니다.
교회는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로 부름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았다고 할 때 그것이 가지는 위상이 어떠한지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위상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6:8-10) 어떻게 해서 이런 자일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 있는 표현으로 하자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내 백성 곧 내 기업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일한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이기 때문에 권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것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고후6:13) 또한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고후6:17)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만 들어야 할 말씀이 아니라 우리 역시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좁은 마음이 아니라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하고, 믿지 않는 자와 함께 멍에를 메고 그들이 하는 모든 것을 하는 자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부정한 것이라면 그 일을 하지 않고, 오히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합당한 것을 열매로 나타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를 하나님과 같이 높여주고자 하신 하나님이 그런 분으로 계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