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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09
요한복음 4장 24절 [2장 1항]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장은 하나님에 대한 고백으로 1항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지난 시간에 1항 전체를 언급했지만, 다시 한번 그 내용을 언급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살아계신 참 하나님은(살전1:9, 렘10:10) 오직 한 분(신6:4, 고전8:4,6) 외에 없습니다. 그는 존재와 완전에 있어서 무한하시며(욥11:7-9, 26:14), 가장 순수한 영이시며(요4:24), 볼 수 없으며(딤전1:17), [인간의] 몸이나 지체들이나(신4:15-16, 요4:24, 눅24:39) 성정들이(행14:11,15) 없으시며, 불변하시며(약1:17, 말3:6), 광대하시며(왕상8:27, 렘23:23-24), 영원하시며(시90:2, 딤전1:17), 측량할 수 없으며(시145:3), 전능하시며(창17:1, 계4:8), 가장 지혜로우시며(롬16:27), 가장 거룩하시며(사6:3, 계4:8), 가장 자유로우시며(시115:3), 가장 절대적이시며(출3:14), 그 자신의 영광을 위해(잠16:4, 롬11:36) 그 자신의 불변하며 가장 의로우신 뜻의 의논을 따라 모든 것들을 역사하시며(엡1:11), 가장 큰 사랑을 베푸시며(요일4:8,16), [가장] 은혜로우시며, [가장] 자비로우시며, [가장] 오래 참으시며, 선하심과 진실하심에 있어서 풍성하시며, 악행과 범죄와 죄악을 용서하시며(출34:6-7), 그를 부지런히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분이며(히11:6), 동시에 그의 심판에 있어서 가장 공정하시고 [가장] 두려우며(느9:32-33), 모든 죄를 미워하시며(시5:5-6), 그는 결코 죄책을 사하지 않으실 분이십니다(나1:2-3, 출34:7).
신앙고백서는 맨 먼저 살아계신 참 하나님은 오직 한 분 외에 없다고 고백합니다. 고린도전서 8장 5절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지만,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은 오직 한 분 외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지만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 외에는 다 죽은 신에 불과하고, 거짓된 신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죽은 신이요, 거짓된 신인데도 사람들이 하나님이 아닌 그것들을 섬기는 이유는 무엇인가? 본래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는 위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아래로는 다른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것이지만, 인간의 전적 타락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질서가 파괴되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장의 표현으로 하자면 인간의 타락은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꾼 것입니다(롬1:23). 그러나 참된 믿음이 주어진 신자는 하나님 외에 다른 모든 신들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은 것이요, 참된 것이 아니라 거짓된 것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살아계신 참 하나님은 오직 한 분 외에 없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신앙고백서는 하나님은 존재와 완전에 있어서 무한하시다고 고백합니다. 무한하다는 것은 모든 한계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입니다. 어디에 매여 계시지 않으며 무엇에 의해서도 매여계실 수 없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라는 존재 자체, 다시 말해 그분의 모든 속성과 그분의 모든 일하심 등 한계가 없습니다. 언제나 자유롭습니다. 완전에 있어 무한하다는 것은 완전 자체라고도 말할 수 있는데, 역으로 말하면 하나님께 부족함이란 일절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무한성을 시공을 만드신 것과 비교해 광대성, 영원성으로도 고백합니다. 광대성은 공간과 관련된 것이고, 영원성은 시간관 관련된 것입니다. 그러나 공간을 만드시되 공간에 매여 계시지 않습니다. 시간을 만드시되 시간에 매여 계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광대하신 분으로, 영원하신 분으로 불리십니다. 시공만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만드신 모든 만물에 매여 계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언제나 늘 자유로우신 분이십니다. 특히 우리 인식에 있어 하나님을 온전히 다 헤아려 아는 일은 불가능한데, 왜냐하면 피조물인 인간은 유한한 반면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무한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1장에서 욥기 11장 7절 말씀을 인용합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부분은 “가장 순수한 영이시며, 볼 수 없으며, [인간의] 몸이나 지체들이나 성정들이 없으시다.”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무한성과 함께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이 속성은 하나님 지식과 관련해 매우 중요한 내용인데,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 4장 24절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과 관련된 본문의 문맥을 조금 설명하면, 사마리아 여자는 자신과 대화 하고 있는 예수님이 선지자라고 생각하게 되었을 때 다음의 질문을 하게 됩니다. 20절을 보시면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있어 어느 장소에서 드려야지만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예배인가를 질문한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조상은 북이스라엘과 관련되어 있는데,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유다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지을 즈음 혈통적으로 선민의 순수성을 잃어버린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 산에 자신들의 성전을 세워 신앙의 본거지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조상이 말한 그리심 산에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 아니면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해야 하는가? 둘 중 하나님은 어디서 예배하는 것을 기뻐 받으시는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21절로 답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 조상이 말하고 있는 그리심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통성은 어디에 있는가? 2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사마리아인들의 조상들은 그리심 산에서 예배해야 한다고 하지만 그 예배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 지식이 전혀 없는 예배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의 예배는 비교적으로 보자면 적어도 하나님 지식이 있는 예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이 어디에서 나온다고 하는가? 유대인에게서 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지식에 따라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예배를 드리지만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잘 증거 하시는 것처럼 마당만 밟고 돌아갈 뿐입니다(사1:12). 하나님 지식으로 예배를 드리지만, 그런 점에서 정통성이 있다고 할 수 있지만, 마당만 밟고 돌아가는 형식적인 예배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역사를 통틀어 보면 북이스라엘만이 아니라 남유다의 예배도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예배가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예배가 이제 폐해진다는 것입니다. 비록 구약의 정통성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해야 하는, 그래야지만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예배라 할 수 있지만, 더 이상 그리심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게 되는데, 그때가 언제냐? 23절입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어느 장소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는데 그 때가 지금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왜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하는가? 그것이 24절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어느 특정 장소에 갇히거나 영향을 받는 그런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오히려 모든 장소를 초월하여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어디서든지 성령과 진리로 예배하면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구약의 정통성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드려야 한다고 말했지만,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난 뒤 고백한 것은 성전이 하나님을 가두어 둘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8장 27절입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 하나님이 얼마나 무한하신지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도 주를 용납할 수 없는데, 어떻게 그보다 작은, 그것도 사람이 지은 이 성전에 하나님을 용납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예루살렘 성전 예배가 정통성이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가? 이미 모세를 통해서부터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실 장소가 있다고 말씀하셨고(신12:11), 실제로 하나님은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그가 그렇게 말씀하신 것 때문에 정통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 성전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고 그가 친히 말씀하신 것처럼 자신의 육체로 성전을 허시고 다시금 세우실 때 더 이상 구약 방식의 예배는 유지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이나 신약이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예배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정통성을 가지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그것만 있다고 할 때 이사야 선지자는 마당만 밟고 나가는 것에 대하여 책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겁니다. 그럼 무엇이 있어야 하는가?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진리와 함께 성령으로 예배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내용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영으로 계시다는 것인데, 영이란 무엇인가? 사실 성경에서 영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말씀하는 내용은 없습니다. 그래서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설명할 때 부정의 방식이나 최상의 방식으로 설명한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영이라는 속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무엇은 아니라고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이 영이라고 할 때 그가 어떤 분으로 계시는지 알 수 있는데, 일단 요한복음 4장 24절 전후 맥락을 통해 하나님이 영이라고 할 때 어떤 장소에 갇혀 있을 수 없는 존재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영과 관련해 좀 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누가복음 24장 39절입니다.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여기서 예수님은 영에 대하여 살과 뼈가 없다고 말씀합니다(이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삶을 읽다 참고). 살과 뼈가 없다는 것은 몸이 없다는 것입니다. 영에게 몸이 없다는 것은 몸을 이루는 지체들도 없다는 것이고, 외부의 대상이 몸과 지체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발생하는 감정이나 반응도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외부의 객체의 영향을 받아 감정이 발생하는 감수성을 갖지 아니하신다는 겁니다.
물론 피조물에 대한 긍휼이나 사랑이나 안타까움이나 진노와 같은 정서가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돌과 같이 아무런 감정이 없는 분이 아니시라는 겁니다. 성경은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 안타까움, 그리고 진노와 같은 정서를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요 피조물에 의해 어떤 영향도 받지 않는 자충족적이신 분이시기 때문에 외부의 영향이 아닌 하나님 스스로의 의지와 지혜에 따라 스스로 정서를 가지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욥기 35장에서는 “그대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그대의 악행이 가득한들 하나님께 무슨 상관이 있겠으며 그대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그대의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욥35:6-7)라는 말씀도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으로 의를 기뻐하시고,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으로 죄와 악을 미워하실 수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의인의 의와 죄인이 죄에 따라 하나님이 어떤 영향을 받는 분은 아니시라는 겁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이 영이라고 할 때 불변성과도 이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하나님은 영이시고, 영이시기에 살과 뼈가 없으며, 살과 뼈가 없기에 몸도 없으며, 몸이 없다는 것은 몸을 이루는 지체도, 또한 어떤 성정들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고백서는 하나님이 영이시라고 고백하면서 이어 그분은 볼 수 없으며, 인간의 몸이나 지체들이나 성정들이 없으시다고 고백합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께서는 신명기 4장 15절과 같은 말씀도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호렙 산 불길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에 너희가 어떤 형상도 보지 못하였은즉 너희는 깊이 삼가라”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다시 말해 볼 수 없는 분으로 계시며, 인간의 몸이나 지체로 계신 분이 아니시기에 하나님을 어떤 형상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꾼 것에 대하여 언급한 바가 있지만(롬1:23), 하나님께서 영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몸이나 지체를 가지고 계셨다면 이렇게 형상화 하는 것을 책망하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이신 하나님을 형상화 하는 것은 십계명의 두 번째 계명을 통해 금지할 만큼 책망 받을 만한 일이요, 심각한 죄임을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물론 성부의 아들이신 성자 하나님은 때가 차매 인성을 취하셨습니다. 인성을 취하셨기 때문에 “영이신 하나님은 형상화 할 수 없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형상화 할 수 있지 않는가?”란 질문을 해 볼 수 있지만, 그러나 인성을 취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형상화 하는 것도 우리는 주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비록 때가 차매 인성을 취하셨지만, 빌립보서 2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지만(빌2:7), 그분은 그 상태로 머물러 계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같은 상태로 낮아지셨지만 그 상태로 머물러 계시지 않고 영광의 상태로 높아지셨습니다. 비하의 신분을 거쳐 승귀의 신분을 가지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우세비우스라는 역사가는 황후 콘스탄티누스의 누이인 콘스탄티아(리키니우스의 미망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뒤에는 땅에서 지니셨던 종의 형체를 버리셨고, 그 천상적 영광이 인간의 개념과 예술적 기교를 초월하셨다는 점을 근거로 그분의 형상을 사용하는 행위를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던 것입니다(필립 샤프 교회사2, 제06장 기독교 예술(형상) 80).
결국 하나님은 영이라고 할 때 신앙고백서가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볼 수 없다는 것, 인간의 몸이나 지체들이나 성정들이 없다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조금 더 덧붙이자면 야고보서 1장 17절에서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불변성에 대한 내용인데,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이 불변성이 영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하나님의 속성으로 무한성을 설명하면서 공간과 관련해서는 광대성, 시간과 관련해서는 영원성이라고 설명했지만, 하나님이 영이시라고 할 때 영은 인간의 몸, 육체가 아닙니다. 그런데 육체는 변화가 있습니다. 키가 자라기도 하고 몸집이 커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영은 이런 육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변합니다. 뿐만 아니라 영은 우리의 몸처럼 만질 수 없습니다. 볼 수 없는 데 어떻게 만지겠습니까? 당연히 묘사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형상을 그에게 비기겠느냐”(사40:18) 세상 어디에도 하나님을 묘사할 수 있는 형상은 없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사람이 하나님을 형상화한다는 것은 그것 자체가 거짓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아덴 지역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행17:29) 출애굽기 32장에서 하나님을 금송아지로 형상화 한 것에 대하여 노하셨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금 모세의 권면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호렙 산 불길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에 너희가 어떤 형상도 보지 못하였은즉 너희는 깊이 삼가라”(신4:15)
다시 신앙고백서를 보면 하나님을 영이라고 할 때 수식하는 말이 있습니다. ‘가장 순수한’이라는 말인데, ‘순수’(pure)하다는 것은 깨끗하다 혹은 죄가 전혀 없다는 뜻으로 이해하기 쉽지만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단순성’(simplicity) 혹은 ‘순일성’을 표현하는 단어라고 하는데(이성호, 비록에서 아멘까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자체가 하나님의 속성으로서 단순성을 직접적으로 고백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라고 할 때 영을 수식하는 말로 순수하다, 그것도 가장 순수하다고 설명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단순성 혹은 순일성은 매우 중요한 속성입니다.
일단 단순성 자체를 고백하는 것은 벨직 신앙고백서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경우 순서가 제1장 성경에 대한 고백과 제2장이 하나님에 대한 고백으로 되어 있다면, 벨직 신앙고백서는 제1장이 하나님에 대한 고백인데, 여기서 삼위일체를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의 속성과 관련해서 1장에서 설명하고, 그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성경을 통해서라고 하면서 2장부터 7장까지 성경과 관련된 고백을 합니다. 그리고 8장과 9장에서 삼위일체에 대한 고백으로 이어지는데, 벨직 신앙고백서는 1장 시작부터 단순성과 영에 대해 고백합니다. “우리 모두는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만이 계시다는 것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합니다. 그분은 단순하시고 영적인 존재입니다...”
여러분, 단순하다는 것은 복잡하지 않다, 복합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피조물의 경우는 다양한 부분과 다양한 본질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분으로 계시지 않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속성을 살피면서 이런 저런 속성을 말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은 무한하시다, 또 하나님은 영이시다, 하나님은 불변하시다, 하나님은 광대하시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다, 하나님은 측량할 수 없으시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등 여러 속성들을 열거합니다. 그러나 단순성이란 하나님의 다른 모든 속성들이 부분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라는 속성이 있다고 할 때 우리 눈에는 하나님의 어떤 행동은 공의를 나타내는 것이고 하나님의 어떤 행동은 자비를 나타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모든 행동에 있어 언제나 공의와 자비를 나타내 보이신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공의를 나타내 보이시는 거기에 하나님의 자비와 상충되도록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자비를 나타내 보이는 거기에 하나님의 공의와 상충되도록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이 어떤 죄인을 용서하여 자신의 자비를 나타내려고 할 때 자신의 공의에 손상을 주면서 나타내는 법은 없습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어떤 죄인을 벌하여 자신의 공의를 나타내려고 할 때 자신의 자비에 손상을 주면서 나타내는 법은 없습니다. 우리는 자비를 말하면 공의가 사라지고 공의를 말하면 자비가 사라지는 것처럼 이해하지만, 하나님은 어떤 속성도 상충되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단순성은 하나님이 영이시라고 할 때 영이라는 속성으로부터 도출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앙고백서가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영은 볼 수 없고, 인간의 몸이나 지체들이나 성정들이 없다고 할 때 피조물 자체는 복합성을 가지고 있는 반면 영은 그와 대조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서 신앙고백서가 단순성 자체를 고백하지는 않지만 ‘가장 순수한 영’이라고 할 때 영이라는 말 자체 안에 하나님은 결코 복합적인 존재가 아님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장 순수하고 가장 단순하신 분, 결코 피조물처럼 복합적인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요, 그렇기 때문에 볼 수 없지만, 성경에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내용도 있습니다.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33:20) 하나님은 영이신데 얼굴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앞서 고백한 것은 거짓된 고백이 되고 맙니다. 실제로 신인동형동성론자(神人同形同性論者)들은 성경에서 종종 하나님을 입, 귀, 눈, 손 그리고 발을 가진 분으로 묘사한다는 사실을 들어 하나님이 실제 인간의 모습을 가졌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영이시라고 할 때, 그리고 영은 살과 뼈가 없다고 할 때 저들의 주장이 설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그럼 방금 읽은 출애굽기 33장의 말씀, 내 얼굴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하나님께 얼굴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얼굴로 표현된 하나님의 본질, 하나님의 실체를 보고 살 수 있는 자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때도 하나님의 본질, 하나님의 실체를 볼 수 있지만 보고서 살 수 있는 자가 없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출애굽기 33장 18절에서 모세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라고 말한 데 대하여 그 영광을 얼굴로 표현하고 있을 뿐입니다.
다른 표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서 입을 말한다고 입이 있고, 귀를 말한다고 귀가 있고, 눈을 말한다고 눈이 있고, 손과 발을 말한다고 해서 손과 발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와 같은 몸을 가지고 계신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몸을 빗대어 나타내고자 하는 뜻을 전하고자 할 때 그렇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손 혹은 팔을 말할 때 하나님은 그 표현을 통해 자신의 전능하심을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의 눈 혹은 하나님께서 보신다는 것은 그분의 전지하심을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의 입은 그분의 말씀, 그분의 교훈과 진리를 나타내는 것이고, 하나님의 귀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나타내십니다. 이런 내용은 해당 본문의 문맥을 따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후회하셨다는 표현도 나오는데, 이런 표현이 하나님께 돌릴 수 있는 표현인가? 결코 돌릴 수 없는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다음 주에 보게 될 하나님의 불변성은 후회라는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하나님께서 후회하셨다는 말씀도 하십니다. 후회하셨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변할 수 있는 분이신가? 혹은 실수라도 할 수 있는 분이신가? 그렇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후회하실 수 없는 분이시지만 우리처럼 표현하심으로 나타내고자 하시는 뜻을 거기에 담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인동형론적 표현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신인동형론적 표현은 인정하지만, 신인동형동성론자(神人同形同性論者)는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적으로 표현하신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모습을 가졌다고 말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신앙고백서가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가장 순수한 영이시며, 볼 수 없으며, 인간의 몸이나 지체들이나 성정들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금 실천적인 의미로서 십계명의 두 번째 계명을 기억해야 하는데, 제2계명은 형상에 대한 금지입니다. 살아계신 참 하나님은 오직 한 분 외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20:3)고 하셨다면, 하나님은 존재와 완전에 있어 무한하시고 또한 가장 순수한 영이시기 때문에, 그래서 볼 수 없으며 인간의 몸이나 지체들이나 성정들이 없으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어떠한 형상으로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당연히 형상으로 만들어 섬기는 일은 더더욱 피해야 합니다. 앞에서 말했지만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조차 형상화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정리해 두셔야 합니다.
우리가 예배하고 섬겨야 할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가장 순수한, 가장 단순한 영이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고 말씀하셨다면 성령과 진리로만 예배해야 합니다. 어느 장소에 모일 필요가 없다, 어느 시간에 모일 필요가 없다는 게 아닙니다. 제4계명은 안식일에 대하여 말씀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안식일, 오늘날 주일을 지켜야 합니다. 그 가운데 공적 예배로 모이는 시간과 장소도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교회요 성도에게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모일지라도 성령과 진리가 아니면 이사야 선지자의 말처럼 마당만 밟고 돌아갈 뿐입니다. 이러한 예배가 되지 않도록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다시금 새겨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