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손에 잡고 읽기 시작해서 한번에 다 읽어 내려갔다. 귀동냥과 학습된 앝은 지식으로만 알고 있던 내용을 묻어버리고 숨죽이고 단번에 읽기를 마쳤다. 필이 꽂힌 소설을 읽는 재미이기도하다
다 읽고 책장을 덮으면서 왜 내가 이 작품을 진작에 제대로 읽지 못했을까하는 후회와 더불어 지금이라도 읽게 되어 다행이라는 마음과 오히려 지금에 읽어서 내용에 더 몰입할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도 해본다
이 책은 3대에 걸친 한집안의 몰락을 그리고 있다. 전체적인 것은 김성수가 어떠한 부모를 두고 이 세상에 태어나는지, 그 부모를 잃고 어떻게 성장하는지, 성장하여 어떤 배우자를 만나고 어떤 자식들을 두게 되고, 그의 삶과 그 자식들의 비극적인 삶들이 한바탕 어우러지고, 그는 병들어 죽음을 맞게 된다. 그 죽음이 이집안 비극의 끝이라는 단정은 없지만 남은 자들의 새로운 날들에 대한 계획과 기대로 마무리 된다.
주 내용은 격동의 혼란기를 살아가는 김성수의 다섯딸에 대한 내용이다.
첫째딸 용숙은 이른 나이에 결혼해 아들하나를 두고 청상과부가 된다.
둘째딸 용빈은 영특하여 서울 전문학교까지 다니고 졸업하여 교원이 되지만 정혼자의 배신과 정혼자 집안의 외면으로 파혼을 당한다.
셋째딸 용란은 뛰어난 미모를 가지긴 했지만 집안머슴과 정분난게 발각되어 난폭하고 아편쟁이인데다 성불구자인 남자를 남편으로 맞아 살게 된다. 결국 용란은 미치광이가 된다.
넷째딸 용옥은 묵묵히 집안 살림을 살뜰히 보살피지만 자신의 언니를 마음에 두었던 남자와 결혼하게 되고 궁극엔 늙은 짐승에게 그 치욕을 당하고 남편을 찾아 나섰던 길에 배가 침몰하여 차가운 바닷물 속에서 아이를 끌어안은 채 생을 마감한다.
다섯째 용해는 어린 나이에 가세가 기울고, 어머니의 비참한 죽음과 아버지의 병 든 죽음을 겪고 언니들의 불행한 삶을 보고 자라는 안타까운 성장을 하게 된다.
이 시대 여인들의 삶은 당당하게 자신의 선택이나 주관으로 이루는 삶이 아니라 주위의 관습에 이끌려 아무 말 못하고 무조건 따라야하는 수동적이기만한 삶을 살아내야 되지 않았을까? 부모가 일방적으로 시키는 결혼, 아들을 낳지 못해 집안의 대를 잇지 못한 죄로 남편에게 바깥에서 자식을 낳아오기를 권하기도 하고 남편이 첩을 두어도 못보고 못들은척 해야 하고 남편의 이유없는 구타와 무시에도 침묵해야하는 삶을 강요받으며 살아내야 했을것이다. 왜 여자 아내 딸이라는 이유로 이런 관습의 굴레를 씌워 살게했을까? 억울하고 안타까운 삶들이다.
용숙의 돈에 대한 집착이 조금은 이해되기도 한다. 타고난 이기심도 한 몫 하긴 하지만 그 시대에 아들 하나를 데리고 그 젊은 나이에 청상을 겪어 살다보니 믿을 건 돈밖에 없었을 것이다. 용숙을 욕심 많다고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을것이다. 그녀가 자신과 아들을 지키며 살아내는 방법이었을것이다.
용빈은 굉장히 자존심 강하고 이성적이다. 정혼자 홍섭과의 파혼은 어쩌면 옳은 결정일지도 모른다. 홍섭의 그릇은 용빈의 그릇과 맞추기 어려워 보이니까. 그시절 파혼녀라는 꼬리표는 힘든 시간과 아픔을 주겠지만 맞지 않는 사람과 어렵게 어렵게 살아가는 것보단 낫지 않을까. 용빈은 훌륭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나갈것이다.
용란은 한돌과 정분난게 발각 되었을 때 차라리 신분의 벽이나 주위 시선들에 눈감고 둘이 도망이라도 갔었으면, 아니면 나중에 다시 찾아와 만났을 때 고개에 피신집을 구하지 말고 아예 먼곳으로 도망했더라면....
용옥은 착하기만한 답답한 사람이다. 남편 기두에게 섭섭한 마음을 한 번 표현이라도 해보지. 악마같은 시아버지를 피해 부산으로 향하는 뱃길에 오르지 말고 차라리 친정으로 갔었으면.... 부산을 가서 남편을 만났더라도 남편에게 시아버지의 만행을 제대로 얘기도 못했을것 같은데.
김약국이 마지막 임종을 앞두고 용혜를 눈에 넣어 오래오래 보고 있었다. 나이 어린 막내딸을 두고 가는 걱정이었으리라. 부모는 저승에 가서도 막내 울음 소리는 알아챈다(?)는 얘기를 들은것 같기도 하다. 그만큼 부모로서 막내와의 시간이 짧아서 일거다.
김약국의 장례를 마치고 용빈은 용혜를 데리고 윤선에 몸을 실어 멀지 않은 봄에 살을 에이는 바람을 맞으며 소리없는 통곡으로 통영항을 떠난다.
소설은 이렇게 끝이 난다. 중간 중간 각 인물들에 빠져들어 안따까운 맘으로 이런 저런 생각들을 덧붙였다
한없이 무덤덤하고 맡겨진 현실에 무감각하며 타인에 대한 한없는 무관심으로 스스로의 고독을 자초한 김약국이 다섯딸을 바라보는 속내는 어땠을까? 궁금해진다. 분명 겉으로 보여지는 무덤덤 무감각 무관심이 다는 아녔을 것이다. 부모가 떠나고 흉가가 되어버린 집을 자주 찾아 앉았고, 뒤에 그 집에 자신의 살림을 앉히고, 비록 남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부모였지만 그는 그 부모가 그리웠을 것이다.
부모의 정을 그리워만하다 부모가 됐으니 부모 노릇이 서툴렀을 것이다. 자식들을 아끼고 사랑하고 안타까워 하는 마음을 표현함이 서툴러 오히려 방관자 같은 역할에 머물렀는지도 모르겠다. 그 속은 오죽 했을까? 잠시 그를 향한 변명을 해본다.
(201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