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의 길
광도천 수국길을 걸으며
향기 영란
매년 3월 말과 4월 초, 나는 내가 가진 언어를 탓하게 된다. 온 산과 들은 환한 분홍으로 점을 찍다 번진 것처럼, 분홍물감을 듬뿍 찍어 여기저기 묻혀 놓은 듯, 길을 따라 길게 그어 놓은 듯한 풍경에 누가 뭐라고 한 것처럼 그저 안절부절 못한다. 그 풍경 속에 나 혼자 들어가 있을 땐 가슴이 더 크게 벌렁대고, 여러 사람이 있을 땐 아무래도 조금 눈치가 보이게 된다.
집에서 가까운 원문 고개길, 벚꽃길로 유명한 봉숫골 거리 등은 더 말할 것도 없으나, 일부러 찾아가야 한다는 점에서 봄철에 두어번 감상에서 그칠 일이다. 내가 광도초에서 근무한 시절, 큰 하천을 끼고 있어서인지, 주변보다 4~5일 정도 늦게 만개하는 벚꽃길은 출퇴근하면서 눈에 넣을 수 있었고, 또 그것으로는 모자라 교실에 있는 아이들을 들쑤셔서 데리고 나갔었다. 선생의 채근에 못 이긴 아이들도 따분한 교실보다 훨씬 남는 장사였을 터 우린 이해 관계가 척척 맞았다. 꽃으로 장식한 무대에 오른 것처럼 나도 아이들도 수줍어하면서도 이런 저런 포즈를 짓는 일이 어렵지 않았었다. 사진 찍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서 나는 아이들에게 과일칼을 준비해 오도록 해서 아이들과 함께 쑥을 캤다. 내 입장에서는 봄쑥 향기를 맡으며 내 욕심을 채울 수 있었고, 아이들도 당연히 신나는 일이었음에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처음 캐 본 쑥은 잡티끌이나 진잎을 제대로 다듬지 않아 가려서 한번 더 손질을 해야 했으나 그 이릉 오히려 즐거운 노동이었다.
2014년도에 발령을 받았을 당시에는 지금처럼 광도천이 단장되지 않은 흙길이었다. 길가에는 물론, 천으로 내려가는 비스듬한 흙 언덕 여기저기 나 있는 쑥을 캐러 내려갔다. 덜 다듬어진 그 환경이 오히려 좋았고, 그 재미난 놀이를 2~3년동안 더 했을 터인데, 벚꽃길에 대한 내 기억은 근무했던 5년 중 초반의 2년 정도만 벚꽃 길에서 환하게 포즈를 잡던 아이들의 표정과 함께 아스름하게 남아있다. 열 대여섯명이 아이들이 한 시간여동안 캔 쑥의 양은 얼마 되지도 않아 학교 앞 방앗간에서 더 넣어 쑥 백설기나 절편을 만들었다. 덕분에 온 학교에 떡 잔치를 했는데, 나처럼 촌스러운 취미를 가진 사람이 있어 학교에서는 눈으로 입으로 봄을 함께 느꼈을 것이다.
후반부의 3년은 내게는 굳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간이기도 하다. 1학년을 맡는 동안 한 명의 아이 A는 전학을 갔다. 두 형제가 함께 학교에 다녔었는데, 동생인 그 아이만 시내 학교로 갔다. 나도 그 아이도 부모도 모두 괴로운 시간이었다. 교사의 의자에 아무렇지도 않게 앉는다든지, 급식소에서 전체 학생들이 먹을 딸기를 아무런 허락도 맡지 않고 그냥 만져서 입에 넣는다든지,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당황과 혼란을 안겨주는 아이였다. 그보다 더한 아이 B도 있었는데, 다른 아이한테 모멸감을 주는 말을 함부로 하고, 떼를 쓰고, 우리 반 아이와 함께 싸움이 붙어서 심하게 상처가 나서 엄마들끼리 통화를 하다가 상대 엄마에게 받은 모욕을 내게 화풀이를 하기도 했다. 차가 없는 그 엄마와 함께 아이를 데리고 나는 거제의 정신의학과 병원을 다녔다. 그 해 나는 폐렴으로 병가를 내고 3일 동안 학교를 쉬었다. 내게 1학년이 버거웠는지, 그 아이들이 힘에 부쳤는지, 생전 가져보지 못한 감정들에 심신이 피폐한 시간이었다. 그 때의 마음은 2016년도의 글에 쓰라리게 내려 앉았을 것이다. 2017년도는 비교적 평화로웠으나 그 다음 해 역시 순탄치 않았고, 심리적 스트레스가 몸을 어떻게 망치는지를 보여준 시간이었다. 삶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아서 온통 먹구름만은 아니었을 일이다. 학부모 독서동아리를 열심히 했고, 풍물지도와 통영오광대 활동을 열심히 했고, 독서캠프와 도서관 리모델링 같은 굵직한 일들도 했다. 막바지에 접어든 교사풍물연구회 활동도 마무리 했다.
다음 해 1년을 원 없이 쉬었다.
복직하던 해 터진 코로나 상황과 새로운 학교에서 나는 내가 손을 대고 있었던 거의 대부분의 일들을 접을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작은 상처를 깊이 받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다지 거친 자극이 아닌 상황에서 깊이 상처를 받는 사람인 듯 했다. 작은 자극도 견딜 수 없어하는 맷집이 형편없는 사람이었다. 자극을 피할 수는 없을 일, 자극을 소화해 내는 갖은 수단과 방법을 배우기 위해 노력했다. 회복적 생활교육, 비폭력대화법, 그림책 공부 등. 그리고 열심히 선생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하는 일이 나의 새로운 사명이 되었다. 아들들이 독립해서 나간 상황에서 그 일에 더더욱 몰두할 수 있게 되었다.
광도천에서 두 번째 축제는 6월에 열린다. 아직은 밤 기운이 한창 시원하고 상쾌한 시절, 시원하고 청량한 수국이 탐스럽게 핀다. 수국 축제를 한다고 떠들썩한 시간에는 가지 않고, 아직 다 피지 않은 시간, 뒤늦게 피어올려 나 좀 봐 달라고 하는 수국이 없는지 살피면서 자주, 틈날 때 간다. 그 때는 또 나는 영화배우 정우성이라도 만난 것처럼 ‘아~ 어떡해!’ 하면서 괜히 안절부절하는 증상이 또 도진다. 숭어 떼가 여기저기서 물을 가르고, 어떤 녀석은 팔짝팔짝 뛰고, 쇠오리는 서너마리씩 무리지어 다니고, 백로는 한 두 마리씩 천천히 소리내지 않고 걷는다. 그 장면을 보며 나는 호기심 많은 6살 아이처럼 좋아서 깡충거리며 다닌다. 땅꼬마였던 수국이 한 아름씩 자라나는 동안 내 마음도 저만치 자랐을까? 마음이 커졌다기보다, 마음의 여백이 커지는 바람에 나는 한결 가벼워진 듯하다.
지금은 부지런한 벚나무 잎이 떨어지는 시간이다. 내 마음 한 켠에도 소리 없이 내려 앉아 토닥이며 얹어준다. 괜찮다고, 수고했다고, 그 시간이 너의 최선이었다고...... 벚꽃이나 수국이 필 때처럼 부끄럽지 않아서 편안해서 좋은 시간, 후덥지근한 시간 동네 아주머니들이 수다 겸 운동을 나와서 편안하게 걷는 공간. 이제는 수국길이라는 이름이 더 어울리게 된 그 길.(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