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게 그리운 건
목을 길게 빼고
생각없이 뒤를 본다
분명 두고 온 물건이 있는데
도무지 그게 그건지 알 수가 없다
심각하게 호주머니를 뒤적인다
손만 넣으면 만져지는 그게 있을턴데
빈손 부스럭 소리만 손에 잡힌다
분명 없어진 건 없는데
손가락 사이로 새 나가 버렸나
잊혀진 게 있다
낡은 기억들이
시간을 핑계로 하나 둘 스러진다
기다림도 넋을 놓았는가
저녁 노을 속에서 뒷모습만 보인다
그게 있을턴데
모두가 날 떠나도
돌아보면 보이고
손 넣으면 잡히는
그게 어딘간 있을턴데
2.
녹보수 너구나
머릴 쓰다듬길래 누군가 했지
너였구나 녹보수
오며가며 가끔 머릴 스치는 손길
내 곁에 항상 서있는 너
녹색 보석이라 부르지들
어느 여름날 가지 마르고 잎 떨구며
삶에 지쳐 머릴 숙이고 돌아서길래
황망히 안고 뛰어나가 마당에 옮겨 심었더니
다시 물오르고 잎 푸르게 방긋 웃었지
맘이 통했나 언제나 늘 항상 내 편이다
선의가 악의로 둔갑해야 세련되었다고
은혜를 원수로 돌려줘야 부와 명예가 따르는 세월 속에
초연한 척 산골 생활 좋다 말하지만
어찌 남누한 몸에 두려운 맘 없을소냐만
천정에 닿을만큼 큰 가슴을 하고
언제라도 날 안아주고 있는 그대
야, 녹보수~
너야말로 진정 천고에 보석이로세
3.
동남교 다리 아래 갯골천은 흐르고
비에 젖은 날개 팔락이며
불빛을 쫓아 날아드는
너는 불나비고
우산으로 대신 비를 맞고
갯골천 물을 다리 위에서 걷는
나는 인간인가?
벌레 운명이 부끄러운 너는
어둠을 너울너울 춤추다 맘껏
찬란한 주검을 선택하고
인간 운명이 부끄러운 나는
빗물에 내 슬펐던 시간들을 지워가니
비가 퍼붓는 밤 너와 나 둘만 죽는다
밤이 흠뻑 비에 젖어 그렁일 때
너는 죽고 나는 잊혀지고
번갯불에 놀라 천둥도 산 너머로 숨어버릴 땐
우산이 나를 잡아끌고
가지 큰 나무 밑에 숨어들며 묻는다
오색 찬란한 날개 자랑하다
벼락 맞아 죽은 나방을 보았소?
4.
빈 의자
세월은 어디로 가고
빈 의자만 남았느뇨
친구들은 어디로 가고
의자 위엔 마른 낙엽들만 앉았는가
이름조차 지워진 희미한 얼굴들
잘근잘근 기억을 곱씹어 본다
서로 먼저 시집 온다던 은희 춘옥 옥란을 빼고는
더 이상은 시간 속에 숨은 듯 찾을 수가 없다
의자 위에 앉았다
마른 낙엽 하나 들고 물었다
너 이름 뭐였지?
5.
시골 버스
우산도 없이 어쩌려고 저 빗속을
시골 버스 하나 찰찰 길을 떠난다
인사도 필요없는 매일의 이별에
준비도 필요없이 매일의 일상인데
하느님도 가끔 깜빡하시나보다
엄마 등에 업힌 아가 얼굴 비친 창가엔
빗방물 바람 비껴 사납다
이 비 그칠 때까지 버스야 멈추지마라
6.
또 이별
또 이별인가
길지도 않은 인생 길에
이별은 어찌 이리도 많은가
크지도 않은 가방이 오늘도 무겁다
주말이면 다시 볼 아이들이지만
이 짧은 이별에도
돌아서는 발길은 또 무겁다
가족은 옆에 두고 멀리 봐야 하거늘
이제는 잊을 법도 한 이별인데
벼락을 맞은 듯 놀랜 가슴은
고장난 시계처럼 멈춰버렸다
뒷 모습도 못 보고 보낸 누님 생각에
돌덩이를 안은 가슴 십수 년 이지만
귀퉁이 조금 내어 다시 아이들을 품어본다
7.
버스는 간다
이별만큼이나 기다림도 많았구나
열 개도 스무 개도 넘는 버스가
이별을 위해 차례를 기다린다
저기 일곱 번째 버스에는 누가 타고 떠나려나
그 사람 또 어떤 사연을 안고 버스에 오르려나
사람들이 줄을 선다
버스가 그랬듯이 사람들도 차례를 기다린다
오랜 기다림으로 버티던 긴 침묵을 깨고
줄을 서며 급조된 순서도 내동댕이 친 채
버스는 길을 떠났다
떠나고 남은 공간에 바람이 불어온다
나 혼자만 남은 것도 아닌데
세상이 이리 넓었구나
빈 승강장은 다시 기다림으로 채워지고
운명처럼 순서를 또 만들겠지만
버림받은 듯 나 혼자만의 기다림은
기울어가는 오후 햇살에 그림자만 또 길다
8.
고향 밤
밤인데 바다가 보인다
고향 바다니까
또 밤인데 하늘이 보인다
내 고향의 그 하늘이니까
파도 소리가 가슴에서 부서진다
밤 하늘엔 언제부터 저렇게 별이 많았던가
별 하나에 친구들 이름 부르던 어느 시인 덕분에
고향의 밤하늘엔 친구들 얼굴이 있다
친구들과 함께 부르던 노래 소리 들릴까
밤 바다 파도 소리에 귀 기울인다
9.
터미널 의자
이별을 기다리다가
마침내 이별한 사람들
남기고 간 의자들은
사람들의 이별 사유를 쌓아 놓고는
또 다른 이별을 만난다
사람들은 앉고
다시 이별을 기다린다
남은 의자들의 숙명이었다
10.
사랑 그 뒤엔
남는 게 없어라
가슴에 깊이 사랑을 담고서도
많은 날을 외로움에 죽어 보내도
눈감고 손 내밀어
잡을 게 없어라
슬픈 사랑 한바탕 치룬 후
장마에 산비탈 골 패이 듯
가슴골 눈물 자국이라도 남을 법인데
둘러 봐도 남은 게 없어라
붙잡아 껴안고 소리라도 쳐댈
사랑 흔적 하나 쯤 어디 있겠지
돌아보며 추억이라도 할
사랑 조각 하나쯤 어디 있겠지
주저앉은 어두운 방바닥엔
검은 그림자 딸랑 하나 뿐이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