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다음 자료를 읽고 <작성 방법>에 따라 서술하시오. [4점]
(가) ( ㉠ )이/가 위독해지자 세자 고징(高澄)이 조서를 꾸며 ( ㉡ )을/를 소환하였다. ( ㉡ )이/가 조서가 거짓임을 알고 화를 입을까 두려워 정화(丁和)를 시켜 양무제(梁武帝)에게 투항을 청하였다. 양무제는 군신을 소집하여 이에 대해 논의하였다. 상서복야(尙書僕射) 사거(謝擧) 등은 모두 그의 무리를 받아들이는 것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으나 양무제는 그 의견을 따르지 않았다. - 南史 -
(나) ( ㉡ )이/가 13주를 들어 투항하기를 청하였다. 그를 대장군으로 삼고 하남왕(河南王)에 봉하였다. 사주자사(司州刺史) 양아인(羊鴉仁)으로 하여금 그를 맞이하도록 하였는데, 양아인의 군대가 도달하기 전에 ㉢동위(東魏)는 군대를 보내 공격하였고, 다급해진 ( ㉡ )은/는 자신의 땅을 나누어 주겠다며 서위(西魏)에 구원을 요청하였고, 이에 포위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 南史 -
(다) 태청(太淸) 3년 겨울 12월. 이달에 백제의 사신이 도착하였다. …(중략)… ㉣건강(建康)이 폐허가 된 것을 보고 단문(端門) 밖에서 소리 내어 울었다. 길을 지나가다가 본 자 중에 눈물을 뿌리지 않은 이가 없었다. ( ㉡ )이/가 듣고 크게 노하여 소장엄사(小莊嚴寺)에 백제의 사신을 보내 감금해 두고 출입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 梁書 - |
<작성 방법> ◦괄호 안의 ㉠, ㉡에 해당하는 인명을 순서대로 쓸 것. ◦밑줄 친 ㉢을 잇는 왕조의 명칭을 쓸 것. ◦밑줄 친 ㉣을 통해 알 수 있는 사건이 시대 변화에 끼친 역사적 의의를 서술할 것. |
[해설]
∙ ㉠고환, ㉡후경
∙ ㉢북제
∙ ㉣문벌귀족체제 붕괴
[세상의 모든 역사 동양사 p.81]
[세상의 모든 역사 동양사 p.83] 후경
2) 양(梁)에서 진(陳)으로의 정권교체
① 양
㉮ 무제: 백가보(百家譜) 작성, 천감개혁, 귀족 지위 보장, 유학 장려, 불교 발전, 문무관리 수 증가, 국가재정 문란, 조세 증가, 가혹한 형법 제정
㉯ 후경의 난 발생 → 전란 중 문벌귀족 큰 피해, 문벌귀족체제 붕괴
㉰ 원제: 강릉 천도
② 진(陳): 진패선(무제)이 진 건국(557)
‣후경의 난
후경은 동위의 창업공신으로서 하남의 병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고환이 죽고, 자신이 중앙으로부터 경계를 당하자 서위로 도망갔다가 남조 양나라로 갔다(547). 양무제는 후경을 받아들여 동위를 견제하려 하였는데, 동위는 양과 후경의 군대를 격파하고 화평을 제의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후경은 양의 수도 건강을 포위하였다(548). 그리고 양무제를 생포한 후 굶어 죽게 하고 자신이 황제가 되었다(549). 이후 양무제의 황자였던 소역(蕭繹, 원제)이 진패선과 협력하여 후경을 토벌토록 하였지만(552) 실패하였다. 하지만 후경은 북으로 달아나던 중 부하에게 살해당하였고(552), 강남의 혼란을 틈타 서위가 강릉을 공격하여 소역은 살해되었으며, 이후 강릉에서는 서위의 괴뢰정권인 후량이 세워지고, 건강에서는 진패선이 진을 건립하였다(557).
[동양사개론 p.257∼258]
제나라 종실인 소연은 무력으로 양(梁)(502-557)을 건국하니 이가 무제이다. 무제는 정치개혁을 단행하여 먼저 화북에서 이주한 귀족을 중심으로 백가보를 정하고 그들의 정치적 지위와 사회적 지위를 보장해 주었다. 또 유학을 장려하고 예악을 정비하였으며, 불교를 일으켜 수많은 사원을 짓고 승려를 이용하여 백성의 정신을 불교로 순화시키려 하였다. …
이즈음 후경의 난이 일어났다. 후경은 원래 북조 동위의 장군이었으나 동위의 통치자 고징과의 불화로 그가 통치하고 있던 하남지역 13주를 가지고 양에 항복하였다(547). 양의 무제는 후경을 환대하여 하남왕으로 봉하였다. 그러나 교활한 후경은 양나라의 국정이 문란함을 알고 난을 일으켜 수도 건강을 함락시킨 후 양무제를 생포하여 굶어죽게 하고 스스로 황제위에 올랐다. 그러나 강릉을 방어하고 있던 상동왕 소역은 대장 진패선을 파견하여 후경을 물리치고 건강을 수복하였다. 후경은 북으로 달아나던 중에 부하에게 살해되고, 소역은 자립하여 양의 원제(552∼554)가 되었다. 양나라는 ( 후경 )의 난으로 국토는 황폐하고 인구가 격감하여 성읍이 텅 비는 상태가 되었다. 또 일부 문벌귀족들도 전란에 큰 피해를 입게 되면서 문벌 귀족 체제가 무너지게 되었다. 원제는 민심수습을 위해 수도를 서쪽의 강릉으로 천도하였다(552). <257쪽>
그런데 원제의 등극에 불만을 품고 있던 종실이며 옹주자사인 소찰은 서위에 항복한 후 서위의 병력을 이끌고 강릉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원제를 살해하였다(554). 소찰은 황제위에 올랐으나 실제로 서위의 조종을 받는 괴뢰황제에 불과하였다. 강릉이 함락된 후 양의 장군 진패선과 왕승변은 소역의 아들 소방지를 황제에 옹립하니 이가 경제이다.
그러나 진패선이 정변을 일으켜 왕승변을 살해하고(555) 정권을 독점한 후 다시 경제를 폐위시키고 진나라를 열어 황제위에 오르니 이가 진(陳)(557∼589)의 무제이다.
진을 세운 진패선도 한문출신으로 그 조상이 북으로부터 피난 온 북래인이다. 그는 군공으로 점차 세력을 키워 나갔으며, 특히 후경토벌에 큰 공을 세워 마침내 진을 건국하기에 이르렀다. … <25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