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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2일 주일낮 예배 설교
설교 제목:
좋은 것을 생각하고 좋게 만들어가자!
빌립보서 4:8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읽을 본문 - 역대기하 28:1~15
설교 목적:
하나님이 구하시는 것이 정의와 인자와 신앙이라면, 우리가 이런 것을 마음에 품고 살아야 할 것이며, 이를 위하여 용감하게 일어나야 할 것이다. 구약 시대의 예언자 오뎃과 그의 말에 동조하는 지도자들이 정의와 자비와 신앙을 위하여 용기를 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통하여 구원을 베푸셨다. 성경은 그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일어난 사람들을 소개한다. 그들은 아리마대 요셉이며, 가말리엘이다. 우리들은 순국선열의 희생을 추모한다. 그 이유는 그들의 용기와 헌신 덕분에 오늘의 평화와 번영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도 우리의 후대에게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되려면 사도 바울이 권면한 바와 같이 우리가 골똘히 생각해야 할 것들이 있다. 그것은 좋은 것이며 그 좋은 것을 우리는 좋게 만들어가야 한다.
설교 개요
1. 삼일정신을 되새기며
2. 예언자 오뎃과 이스라엘의 의인들
3. 이스라엘 군대의 되살아난 양심
4. 좋은 것을 골똘히 생각하자 – ESG 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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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일정신을 되새기며
삼일절은 1919년 삼일독립만세운동을 기념하는 국가기념일입니다. 1905년에 을사늑약으로 우리나라는 일본에게 외교권을 빼앗김으로 민족의 자주권을 사실상 상실했습니다. 그 후 1910년에 일본은 우리 지도자들을 위협하여 우리나라를 일본의 속국으로 강제합병했습니다. 경술년 8월 29일 순종실록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한국의 통치권을 종전부터 친근하게 믿고 의지하던
이웃 나라 대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하여…
그 후로 10년만에 우리 조상들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일어났습니다. 기미독립선언문에는 삼일만세운동을 하는 이유가 담겨 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낡은 시대의 유물인 침략주의, 강권주의에 희생되어, 역사가 있은 지 몇천년 만에 처음으로 다른 민족의 압제에 뼈아픈 괴로움을 당한 지 이미 10년이 지났으니, 그 동안 우리의 생존권을 빼앗겨 잃은 것이 그 얼마이며, 정신상 발전에 장애를 받은 것이 그 얼마이며, 민족의 존엄과 영예에 손상을 입은 것이 그 얼마이며, 새롭고 날카로운 기운과 독창력으로 세계 문화에 이바지하고 보탤 기회를 잃은 것이 그 얼마나 될 것이냐?
슬프다! 오래 전부터의 억울을 떨쳐 펴려면, 눈앞의 고통을 헤쳐 벗어나려면, 장래의 위협을 없애려면, 눌러 오그라들고 사그라져 잦아진 민족의 장대한 마음과 국가의 체모와 도리를 떨치고 뻗치려면, 각자의 인격을 정당하게 발전시키려면, 가엾은 딸 아들에게 부끄러운 현실을 물려주지 않으려면, 자자손손에게 영구하고 완전한 경사와 행복을 끌어 대어 주려면, 가장 크고 급한 일이 민족의 독립을 확실하게 하는 것이니, 2천만의 사람마다 마음의 칼날을 품어 굳게 결심하고, 인류 공통의 옳은 성품과 이 시대의 지배하는 양심이 정의라는 군사와 인도라는 무기로써 도와주고 있는 오늘날, 우리는 나아가 취하매 어느 강자를 꺾지 못하며, 물러가서 일을 꾀함에 무슨 뜻인들 펴지 못하랴!
삼일운동은 억압받는 현실의 고통과 조국의 미래에 대한 답답하고 안타까운 마음에서 부조리를 바로잡고자 일어난 의로운 운동입니다. 그것은 사회를 바로잡고자 하는 일이라는 의미에서 삼일독립혁명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의분은 몇몇 독립지사들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거의 모든 국민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전국에서 일어난 것을 보면, 정의를 바로 세우고자 하는 마음은 모든 사람의 마음에 공통적으로 있다고 하겠습니다.
우리들 삼일절이나 현충일 같은 국가기념일에 순국선열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표하는 이유는 그분들의 희생으로 우리가 오늘의 평화와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 세상이 지속되고 유지될 수 있는 것은 불의와 부조리를 바로잡고자 일어선 사람들의 용기 있는 행동 때문이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우리 조상들이 106년 전에 우리에게 부끄러운 현실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에게 영구하고 완전한 경사와 행복을 끌어 내어 주기 위하여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쳤을 때 그분들의 마음에 있는 의로움에 대한 갈망은 오늘 우리 안에도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분명하게 세 가지라고 예언자 미가는 말했습니다. 그것은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미가 6:8). 우리가 신앙생활을 규정할 때,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결국 정의롭고 따뜻하고 겸손하게 살아가는 것을 배우고 익힌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저는 이처럼 정의롭고 따뜻한 마음을 간직하고 행동으로 옮긴 의인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를 있게 한 순국선열들의 마음에 있던 열정이며 오늘 우리들의 마음에서 다시 뜨겁게 솟아올라야 할 선한 뜻이기 때문입니다.
2. 예언자 오뎃과 이스라엘의 의인들
다윗이 이스라엘 나라를 강대하게 만든 후에 아들 솔로몬에게 물려주었습니다. 솔로몬이 죽고 나서 나라는 둘로 쪼개졌습니다. 그래서 북쪽의 이스라엘과 남쪽의 유다는 서로 적대시하면서 지냈습니다. 우리나라가 남북으로 나뉘어 서로 적대시하며 사는 것과 유사합니다. 이스라엘의 남북 왕국은 그렇게 서로를 원수로 여기면서 지냈습니다. 물론 때로는 두 왕국이 서로 화친을 한 적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서로를 향하여 창검을 겨누면서 살았습니다. 그렇게 200년이 지나고 있었습니다.
당시 유다의 왕은 히스기야의 아버지 아하스(주전 732~716년)였고 이스라엘의 왕은 베가였습니다. 유다의 왕 아하스는 자기 조상 다윗을 본받지 않고 이스라엘의 왕들처럼 바알신을 섬겼습니다. 유다의 역대 왕들에 대한 기록인 역대기하 28장에는 아하스 왕이 어떤 사람인지를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1 아하스가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이십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육 년 동안 다스렸으나 그의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지 아니하고
2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여 바알들의 우상을 부어 만들고
3 또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분향하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 그의 자녀들을 불사르고
4 또 산당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니라
이렇게 한 나라의 지도자가 우상숭배에 빠지고 자기 자녀들을 불살라 신에게 바치는 행동을 한다면 그 나라는 질서를 잃고 국력은 매우 빠르게 쇠퇴할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아하스가 다스리는 유다 나라의 운명이 급격하게 나락에 떨어지더니 급기야 외적의 침략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역대기하의 기록을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5 그러므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아람 왕의 손에 넘기시매 그들이 쳐서 심히 많은 무리를 사로잡아 다메섹으로 갔으며 또 이스라엘 왕의 손에 넘기시매 그가 쳐서 크게 살륙하였으니
6 이는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렸음이라 르말랴의 아들 베가가 유다에서 하루 동안에 용사 십이만 명을 죽였으며
7 에브라임의 용사 시그리는 왕의 아들 마아세야와 궁내대신 아스리감과 총리대신 엘가나를 죽였더라
아하스의 유다는 아람 왕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아람은 시리아입니다. 시리아의 왕은 유다를 공격하고 많은 전쟁포로를 자기 나라 수도인 다메섹으로 끌고 갔습니다. 이렇게 유다 나라는 시리아에게 짓밟혔습니다. 그런데 시리아만 유다를 공격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시리아와 함께 북쪽의 이스라엘이 함께 왔습니다. 그런데 동족인 이스라엘의 군대는 시리아 군인들보다 훨씬 더 잔인하게 행동했습니다. 그들은 하루 동안에 유다의 용사 십이만 명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왕자와 내무장관과 국무총리도 그날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잔악한 행동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 이야기를 보겠습니다:
8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의 형제 중에서 그들의 아내와 자녀를 합하여 이십만 명을 사로잡고 그들의 재물을 많이 노략하여 사마리아로 가져가니
이스라엘 군대는 유다의 용사들을 죽이고 부녀들 20만명을 사로잡아 그들의 재물과 함께 사마리아로 가져갔습니다. 이것은 유다 나라를 완전히 초토화시킨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포로와 전리품을 가지고 이스라엘의 군대는 자기들의 수도 사마리아로 돌아갑니다. 전쟁에 승리하고 많은 전리품을 가지고 가는 그 군인들은 우쭐거리며 신나게 사마리아로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승리를 거두고 돌아오는 개선군대를 맞이하러 나온 사람들 중에 예언자도 있었습니다. 그 예언자의 이름은 오뎃입니다. 역대기하는 이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들려줍니다:
9 그 곳에 여호와의 선지자가 있는데 이름은 오뎃이라 그가 사마리아로 돌아오는 군대를 영접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유다에게 진노하셨으므로 너희 손에 넘기셨거늘 너희의 노기가 충천하여 살육(殺戮)하고
10 이제 너희가 또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들을 압제하여 노예로 삼고자 생각하는도다 그러나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함이 없느냐
11 그런즉 너희는 내 말을 듣고 너희의 형제들 중에서 사로잡아 온 포로를 놓아 돌아가게 하라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임박하였느니라 한지라
12 에브라임 자손의 우두머리 몇 사람 곧 요하난의 아들 아사랴와 무실레못의 아들 베레갸와 살룸의 아들 여히스기야와 하들래의 아들 아마사가 일어나서 전장에서 돌아오는 자들을 막으며
13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이 포로를 이리로 끌어들이지 못하리라 너희가 행하는 일이 우리를 여호와께 허물이 있게 함이니 우리의 죄와 허물을 더하게 함이로다 우리의 허물이 이미 커서 진노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임박하였느니라 하매
전쟁을 마치고 돌아오는 군인들 앞에서 예언자 오뎃이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그는 그 군인들에게 사로잡아 온 포로를 놓아 돌아가게 하라고 합니다. 오뎃이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는 유다가 하나님께 범죄하여 이번 전쟁에 패했지만 너희는 필요 이상의 노기를 충천하게 하여 사람들을 살륙하고 그것도 모자라 동족인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을 노예로 삼으려고 이렇게 끌고 왔느냐는 것입니다. 너희도 하나님 앞에 죄인이면서 이렇게 하느냐고 예언자 오뎃은 책망합니다. 그러므로 포로를 놓아주어 돌아가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무장한 군인들 앞에서 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런데 예언자 오뎃의 주장에 지지의사를 밝히고 나선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에브라임 지파의 지도자들입니다. 그 이름은 아사랴, 베레기야, 여히스기야, 그리고 아마사입니다. 이 네 사람의 지도자들도 이렇게 말합니다:
“이 포로들을 데리고 들어올 수 없다.
이것은 야훼께 죄가 되는 일이다.
그렇지 않아도 죄가 많아 그의 진노가 이스라엘에 떨어질 판인데,
못할 일을 한 우리의 죄가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하느냐?”
- 이동영 박사의 번역
전쟁은 사실 목숨을 걸고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번 전쟁은 이미 시리아가 초토화한 유다를 이스라엘이 가서 12만명 살육을 하고 그것도 모자라 20만명의 부녀자를 그 노획물과 함께 끌고 온 것입니다. 그것은 도를 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언자의 지적과 지도자들의 지지 발언은 명분이 뚜렷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발언과 행동에 나서는 일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의로운 일을 위해서 일어선 예언자와 백성의 지도자들을 발견합니다.
3. 이스라엘 군대의 되살아난 양심
전쟁에서 돌아온 군인들은 자기들의 개선행렬을 환영하러 나온 인파를 보면서 의기양양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에 예언자가 잘못을 지적하고 그 도시의 지도자들이 나와서 포로들을 놓아 돌려보내라고 말합니다. 이제 군인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전쟁에서 돌아온 군인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경은 이스라엘의 군인들이 어떻게 했는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14 무장한 군인들이 이 말을 듣고, 포로와 전리품을 백성과 지도자들에게 넘겼다.
15 사람들이 위의 네 지도자들에게, 포로를 돌보아 주도록 임무를 맡기니, 그 네 사람이 전리품을 풀어서, 헐벗은 이들을 입히고, 맨발로 걸어온 이들에게 신을 신기고,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가져다주고, 상처를 입은 이들에게는 기름을 발라 치료하여 주고, 환자들은 나귀에 태워 모두 종려나무 성 여리고로 데리고 가서, 그들의 친척에게 넘겨주고, 사마리아로 되돌아왔다.
역대기하 28:14~15, 표준새번역성경
무장한 군인들이 예언자와 지도자들의 말을 듣고 자기들의 행동을 뉘우쳤습니다. 그 군인들은 포로와 전리품을 백성과 지도자들에게 넘겼습니다. 그 후에 일어난 일은 정말 감동적입니다. 전쟁에서 패하고 끌려온 사람들 중에는 다친 사람도 있고 헐벗은 사람도 있고, 맨발로 걸어온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끌려오는 내내 물이나 양식을 먹지 못해서 기진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예언자들과 지도자들의 마음에 의분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 의분은 가엾은 동포에 대한 긍휼의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의를 위하여 용기를 내서 일어난 사람들이 결국 무장한 군인들의 잘못된 행동을 바로잡게 했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유다에서 끌고 온 사람들을 돌려보내고 환자들은 여리고의 친척들에게 넘겨주어 돌보게 했습니다. 이것은 옛적에 이스라엘에 있었던 기적이라고 하겠습니다.
지난 해 12월 3일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했을 때 국회에 몰려든 시민들은 서울에서만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전국에서 시민들이 국회로 모였습니다. 국회의원들도 체포될 것을 각오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국회의사당으로 집결했습니다. 그날 국회로 향한 시민들과 국회의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들은 모두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함께 계엄을 막아야 한다는 당위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실 국회로 출동한 군인들도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은 시민들을 향하여 총을 쏠 수는 없었나 봅니다. 무장한 군인들은 시민들의 말을 듣고 폭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이리 저리 밀리다가 결국 국회의 계엄령 해제 의결의 소식을 듣고 철수했습니다. 그렇게 2024년 12월 3일 밤에 일어났던 계엄은 몇 시간 만에 해제되었습니다. 만약에 그날 밤에 계엄령이 해제되지 않았다면 아마 많은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40년 전에 광주에서 그런 참혹한 일이 일어난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대통령의 계엄령 발동에 대한 국회의 대통령 탄핵소추는 지금 헌법재판소에서 평의(評議) 중에 있습니다. 현재 우리 국민들의 초미의 관심사인 이 문제에 대해서 헌법재판관들이 결론을 낼 것입니다. 하지만 2,700년 전 이스라엘에서 있었던 의인들의 용기 있는 행동과 그 의인들의 촉구를 받아들이고 자신들의 행동을 수정한 무장군인들의 이야기는 오늘 여의도에서 재현되었습니다. 그 덕분에 우리들은 안심하고 평온한 일상을 누리고 있습니다.
계엄이 있기 두 달 전, 지난 해 10월 10일에 우리나라의 작가 한강 씨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할 것이라는 발표가 있었습니다. 세계의 문학계는 1980년에 대한민국 광주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로 담아낸 한국 작가의 이야기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스웨덴 한림원 노벨상위원회는 한강 작가를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한 이유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생의 연약함을 드러낸 강력한 시적 산문
한강 작가의 글은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는 것이며 동시에 인간 생의 연약함을 드러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국민들과 지도자들은 비록 연약한 시민들이지만 무력으로 사회의 질서를 깨뜨리려는 군대의 출동에 맞섰습니다. 그분들 덕분에 지금 전국의 관공서에는 군대가 주둔하지 않으며 서울의 거리에는 탱크나 장갑차가 다니지 않고 하늘에는 헬기가 날지 않습니다. 대신에 우리의 바쁜 일상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는 야간투시경을 쓰고 국회로 출동한 특전사 요원들과 수방사 군인들, 그리고 707특임대 같은 막강한 군인들이 연약한 시민들의 질책을 받아 고분고분 물러섰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 사회는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는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4. 좋은 것을 골똘히 생각하자 – ESG 경영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들이나 관공서의 지도자들은 지속가능성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지속가능성이란 기업이나 우리 공동체가 앞으로 계속 유지되고 발전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최근에 지도자들은 공동체가 지속가능하기 위하여 환경과 사회와 지배구조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것을 ESG경영이라고 합니다.
저는 그 중에서 S 즉, 사회 문제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어떤 기업들은 자기 기업이 사회에 기여함으로써 공동체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것이 그 기업의 성공에 중요한 요인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기업의 이미지는 매출과 성장에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사회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 사회가 지속가능하려면 사회 구성원들의 생각이 건전하고 정의로워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 세 가지에 대하여 예언자 미가가 말했는데, 그것은 정의와 인자와 겸손한 신앙입니다. 이 세 가지는 공동체를 든든하게 하기 위하여 그 공동체 구성원들이 갖추어야 할 자질입니다. 백성들이 정의로워서 진실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면, 그리고 백성들의 마음이 따뜻하여 약한 사람을 귀하게 여긴다면, 더 나아가서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바르고 정직하고 베푸는 사람에게 반드시 보상해 주실 것을 확신한다면, 그 사회는 매우 건강하고 견고하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백성들이 진실을 찾기 어렵고 거짓과 가짜뉴스가 난무한다면, 그리고 그 나라에 헐벗고 연약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데도 백성들과 정부가 이에 무관심한다면, 더 나아가서 옳은 일을 하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없이 백성들이 일확천금이나 눈앞의 이익을 좇아 양심을 저버린다면, 그런 나라는 내외의 악한 세력에게 금방 전복되고 말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나라의 현실을 볼 때, 옛날 이스라엘의 예언자 오뎃과 그 지도자들처럼 불의한 일에 항거하는 전통이 살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삼일독립혁명의 정신과 4.19혁명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우리나라 헌법 전문에 새겨졌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나라 시민들의 마음에 자유와 정의를 바라는 갈망이 살아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2천 년 전에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준 권면을 마음에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무엇을 골똘히 생각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빌립보서 4:8
이 권면을 하기 전에 사도 바울은 몇 가지 권면을 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모든 일에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기도드려라! 그러면 하나님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실 것이다.” 그렇게 말한 후에 사도께서는 이런 것들을 생각하라고 권면합니다. 그것은 참된 것, 경건한 것, 옳은 것, 정결한 것, 사랑 받을 만한 것, 칭찬 받을 만한 것, 덕을 세울 수 있는 것, 기릴 만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좋은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좋은 것을 생각하고 좋은 상태로 만들어 가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살아갈 때 우리는 좋지 않은 모습이 나타나면 그것을 바로잡아 좋은 상태로 만들기 위해서 말하고 행동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언자 오뎃은 자기 나라 군인들이 동족을 죽이고 부녀자를 포로로 끌고 오는 모습을 보고 저것은 좋은 모습이 아님을 확신하고 일어서서 그들의 길을 막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도 그 모습을 보고 예언자 오뎃의 말과 행동을 지지했습니다. 그런 의로운 행동이 모여 이스라엘의 군대를 바로잡았습니다.
성경 이야기를 주의깊게 읽어보면, 소돔 성의 멸망은 의인 열 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언자 예레미야에게 예루살렘에 의인이 있는지 찾아보라고 탄식하셨습니다 (예레미야 5:1) . 나라가 망할 때는 의인들이 사라집니다. 그러나 언제나 좋은 것을 생각하고 좋은 상태를 만들기 위해서 서로 협력하고 노력하는 의인들이 있다면 우리 공동체는 지속가능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번영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충만하라는 복을 주셨는데 그 복은 언제 우리에게 임하겠습니까? 우리가 용감한 의인들처럼 하나님 앞에서 좋은 것을 골똘히 생각하고 기도하고 그것을 위해서 일어서서 노력하고 협력할 때 우리에게 임할 것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