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에서 강경으로 들어서기 전 나바위 성당을 들렀다
나바위 성당은 조선 헌종 11년(1845년) 김대건 신부가 중국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페레올 주교 다불뤼 신부와 함께 황산 나루터에 상륙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김대건은 1831년 조선교구 설정에 이어 1836년 파리 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의 방침에 따라 조선인 성직자 양성을 목적으로 적합한 소년을 물색하던 모방(Pierre P. Maubant) 신부에 의해 최양업(崔良業)·최방제(崔方濟)에 이어 선택되었다.
이 과정에서 모방 신부는 가장 늦게 선정된 그의 마음을 잘 몰라 처음에는 주저했으나 김대건이 "앞으로 조선성교회를 위하여 몸을 바치겠다"고 굳게 맹세하여 함께 보냈다고 한다.
이들은 만주·내몽골·중국을 거쳐 8개월 만에 마카오에 도착하여 파리 외방전교회 동양경리부(東洋經理部)에서 정식 교육을 받게 되었다. 먼저 중등과정을 마친 후 철학과 신학 과정을 이수했으며, 이들 중 최방제는 1838년 병사했다.
1841년 9월 김대건은 아편전쟁을 틈타 중국과 조선에서의 이권을 위해 파견된 프랑스 군함 2척 중 1척에 동승하여 1842년 양쯔강(揚子江)에 이르렀으나 난징조약(南京條約)의 체결로 군함이 되돌아가자 중국인 교우들의 도움을 받아 만주로 향했다.
이어 1842년 12월에는 압록강을 넘어 평안도에 진입했으나 여러 어려움을 겪다가 결국 다음해 1월 만주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또 1844년에는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인 페레올(Ferréo) 주교의 명으로 외국인 신부들의 조선입국을 위해 두만강을 넘어 조선으로 잠입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여전한 탄압의 분위기와 악화된 건강 때문에 천주교회의 수습에는 큰 역할을 하지 못한 채 1845년 4월 배편으로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다.
여기서 김대건은 페레올 주교로부터 8월 17일에 신품성사(神品聖事)를 받았다. 이로써 한국인 최초의 신부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10월에는 배편으로 페레올 주교를 모시고 조선으로 향하여 천신만고 끝에 강경 황산포(黃山浦) 부근의 나바위에 상륙했다.
이어 그는 페레올 주교를 모시고 한양으로 잠입하여 활발한 전교활동을 펼쳤다.
1846년에는 아직 만주에 머물고 있는 메스트르 신부 등의 입국을 위해 서해안 길을 개척하다가 6월에 순위도(巡威島)에서 체포되었다.
그리고 그후 기해박해 때 프랑스인 신부 3명이 처형된 것에 항의하기 위해 1846년 프랑스 함대가 충청도 홍주 앞바다에 기항하고 조선국 정대감 앞으로 된 문책서를 전달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크게 놀란 조선정부는 그의 처형을 결정했고, 마침내 김대건은 같은 해 9월 16일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그 김대건 신부가 여러번의 시도 중 마지막으로 한반도 땅에 들어선 장소가 이 나바위 성지인 곳이다
이곳은 초대주임이었던 베르모넬(장약슬, 요셉) 신부가 중심으로 1906년 건물을 시공하여 1907년 완공하였다.
성당설계는 명동성당 포아넬 신부가 도왔고 공사는 중국인들이 맡았다. 나바위 성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성인이 처음으로 전도하던 곳이어서 한국 천주교회에서 성지로 지정한 곳이며, 이 건물은 천주교의 한국 유입과 그 발전과정을 볼 때 서구식 성당 건축양식과 우리나라 건축양식을 잘 절충시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초기 성당 건물이다.
1916~1917년까지 흙벽을 벽돌조로 바꾸고 고딕식 벽돌조 종각을 증축하였다. 한국문화의 특성에 맞게 한옥목조건물에 기와를 얹은 나바위 성당건물은 특히 회랑이 있어서 한국적인 미를 맛볼 수 있는 곳이다.
채광을 위한 팔각형 창문은 밤이면 더할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소나무와 어울려 조화를 이룬다.
원래 이름은 화산 천주교회이었지만 현재 ‘나바위 성당’으로 개명하였다.
나바위 성당은 국내 천주교의 성지답게 그에 따른 볼거리를 갖추고 있다. 첫 번째 볼거리로는 김대건 신부 순교비를 들 수 있다.
김대건 신부 순교비는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에 세워졌다.
두 번째 볼거리로는 망금정을 들 수 있다. 망금정이란 ‘아름다움을 바란다’라는 뜻으로 1915년 베로모렐 신부가 초대 대구교구장이신 드망즈 주교의 피정을 돕기 위해서 지은 정자이다.
이 정자는 화산의 끝자락에 있는 넓은 바위인 나바위에 위치하고 있는 데 주변의 경관과 어우러져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그리고 망금정이 있는 너럭바위 아래 바위벽면에 마애삼존불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바위 본당은 1897년에 설정되었고, 초대주임으로 베르모렐(Vermorel, J.)신부가 부임하였다. 베르모렐 신부는 처음에 용안군 안대동 공소에 거처하다가, 1897년 7월에 화산 아래에 있는 김여산의 집과 부속 건물 매입하고 나바위에 정착하였다.
이후 성당을 세울 계획을 세우고, 1906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907년에 완공하였다.
한양절충식(韓洋折衷式)의 이 성당은 당초에는 순수한 목조건축이었는데, 정면 5칸, 측면 13칸의 크기에, 정면과 양측면의 툇간이 마루로 되었고, 정면 중앙에 목조종탑(木造鐘塔)과 십자가가 있었다.
1917년에 증축하면서 목조종탑을 없애고 고딕식 벽돌조 종각(鐘閣)을 툇간에 덧붙여 증축하였으며, 이 때 목조로 된 벽을 헐고 벽돌로 쌓았고, 양 측면 툇간의 마루를 없애고 회랑(回廊)으로 만들었다.
나바위 이야기에서 이곳에 있던 암자의 스님이 신부에게 이 나바위 장소를 물려주는 과정의 이야기가 흥미있다
그 뒤 두 차례의 개수를 거쳐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었는데, 얼핏 보아 19세기 중엽부터 보이기 시작한 한양절충식의 2층 상가건물과 비슷하고, 정면 종각의 입면은 순수한 고딕식은 아니다.
그러나 전혀 상이한 양식의 한식 건물의 합각머리에 붙여 지은 것이 본건물과 조화를 이루어 서양식 성당의 장중함이나 이질감보다는 인간적인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
이 성당에는 1954년에 건립된 베르모렐 신부의 공훈기념비와 1955년에 건립된 김대건신부의 순교기념비가 있어 전라도지방의 천주교사적지로 많은 신자들이 찾는 곳이다.
조그마한 손풍금 및 초대 여러 성물들이 앙증맞고 친근하다
1987년에 사적 제318호로 지정되었다.
성당을 중심으로 웅포 곰개나루 둘레길도 있어 다음 찾을 땐 이런 둘레길 탐사도 계획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