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행 지 : 땅끝기맥 08차(오소재~닭골재) 전남 해남군. 산 행 일 : 2016. 04. 23.(토) 산행코스 : 오소재 ~ 노승봉 ~ 가련봉 ~ 두륜봉 ~ 대둔산 도솔봉 ~ 대둔산중개소 ~ 닭골재 (산행거리 12km) 산행참가 : 19명. <산행지도>
한반도 남쪽 끝자락의 땅끝기맥 산행에서 뚜렷하지 않고 잡목들이 많아 난해한 코스는 많았으나 이번 구간처럼 위험한 암릉이 있는 구간은 없었다. 두륜봉 내림길 높은 절벽구간이야 그나마 밧줄이 메어져 있다니 그럭저럭 지날 수 있으려니 짐작되나, 대둔산을 내려서는 구간의 암릉길은 여간 걱정스럽지가 않았다. 여러 산행기를 읽고 또 읽으며 뚜렷한 대안을 찾아보고자 하였으나,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못하여 별다른 대안이 보이지를 않았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대둔산 정상부에 자리잡고 있는 방송국 중계소를 우회하지 않고도 통과하는 방법을 찾은 정도일 뿐. 하는 수 없이 50m짜리 나일론 밧줄 두 개를 배낭에 넣고 부딪쳐 보는 수 밖에는.
양재를 출발한 버스는 쉼 없이 달리고 또 달려서 해남 오소재에 도착하였다. 오늘 산행을 일찍 마쳐야 하는 분들이 몇 분 계셔서 바로 산행 준비를 하고 어둠속으로 몸을 맡긴다.
오소재 쉼터에서 산행 준비를 하는 백두들. <오소재(烏所峙, 164m)> 해남군 삼산면과 북일면을 가로지르는 827번 지방도가 지나가며, 예전에는 오시미재라 불렀다고 하는데 산적들의 행패가 하도 심해서 50명 이상의 사람들이 떼를 지어서 넘어야 했다고 붙여진 지명이다. 또 다른 설은 주작산의 암릉들이 까마귀의 집처럼 생겼다고 해서 오소재(烏所峙)로 부른다고도 하며, 재의 우측(북쪽)으로 오소재 약수터가 있고, 좌측(남쪽)에는 소공원이 조성되어 있는 오소재 쉼터가 있다. 이곳 약수터는 주말이면 줄을 서서 물을 받을 정도로 물맛이 좋은 곳이라서 목포, 진도, 완도, 강진 등지의 사람들도 물을 받으러 온다고 한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정수기 판매가 안 되는 곳이 해남이라는 예기도 있는데 이 오소재 약수 때문이라고 한다. 오소재 소공원에 설치되어 있는 수준점.
<수준점(BM-Bench March)> 수준점이란 수준원점으로부터 표고를 정밀 측정하여 영구적인 말뚝을 설치하고, 차후 부근의 수준측량에 이용할 수 있도록 그 표고를 국토지리정보원의 수준측량 성과표에 등록해 놓은 기준점을 말한다. 현재 우리나라의 수준점은 인천만의 평균해수면을 기준으로 하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인천시 남구 용현동에 수준원점을 측설하고 그 표고를 정밀하게 결정해 놓았는데, 이 수준원점의 표고값은 26.6871m이다. 아울러 주로 국도 주변에 수준점을 설치하여 놓았는데, 1등 수준점은 약 4㎞, 2등 수준점은 약 2㎞ 간격으로 설치되어 있다. 오소재 소공원 뒤로 이어진 들머리에 선답자들의 표지기들이 나부낀다.
몇 해 전 100대 명산 산행에서 오심재를 왔었고, 또 한 번의 산행에서 오소재 옆 약수터에서 오심재로 오르는 등로를 따른 적이 있어서, 이번에는 정식 땅끝기맥 능선코스인 소공원에서 노승봉으로 바로 오르는 능선길을 타기로 한다.
노승봉을 향한 땅끝길은 밋밋한 222봉을 지나자 커다란 반석들 사이로 이어진다.
사철나무가 있는 너덜지대를 지나 산죽지대로 이어진 등로를 한참 동안 오르니, 산행기에 자주 등장하는 커다란 고인돌 모양의 바위 앞에 다다른다. 겉옷을 벗고 주위가 어슴프레 밝아옴에 따라 랜턴도 배낭에 갈무리 한다. 사진 좌측 오심재 건너편 봉우리인 고계봉 정상에는 케이블카 건물이 자리한고 있다.
선답자의 산행기에 설악산 황철봉 구간과 비교되곤 하는 너덜지대가 나타나는데, 너덜지대가 그리 길어 보이지는 않아 과장이 심했던 듯하다. 해남의 공룡능선으로 불리는 주작산 능선을 넘는 구름이 장관을 연출하고 있는데, 날씨가 조금만 더 맑았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있지만 노승봉 정상에서는 더 멋진 장관을 기대해 본다.
너덜지대가 끝나는 지점쯤에서 다시한번 쉼을 하며 올려다본 좌측의 조그만 암봉이 가련봉 전위봉쯤이고 우측이 잠시 후 올라야 할 노승봉이다. 다시 한번 돌아본 주작능선을 넘고 있는 운해. 너덜지대에서 고계봉을 배경으로.
너덜지대를 지나 다시 산죽과 잡목지대를 올라서니 로프가 메어져 있는 절벽이 나오고,
로프를 잡고 암릉을 올라 오심재에서 올라오는 정규 등로에 접속하고, 노승봉으로 오르는 통천문 옆으로 몇 해 전에는 없던 나무데크 계단이 설치되어 있어서 통천문을 통과하지 않고도 하늘로 오를 수 있다. 돌아본 주자산 방향으로 지난 산행에서 힘들게 지나왔던 주작산 공룡능선의 암봉들이 구름에 가려 있다.
통천문에서 바라본 고계봉(高髻峰, 638m)과 오심재 방향. 돌아본 고계봉 정상에는 케이블카가 설치어 있고, 그 아래에 오심재가 있다. 고계봉(高髻峰, 638m)의 ‘상투 계(髻)’ 자는 상투를 뜻하는 단어로 높은 상투봉쯤으로 해석된다. 오심재는 옛날 산이 험하고 수목이 울창하여 산적들이 숨어서 지나는 과객들을 괴롭히므로, 50명의 사람이 모여서 함께 넘었다고 하여 오십치(五十峙)라고도 불렀다는데, 마치 백두대간길의 육십령과 비슷한 유래를 지니고 있다. 우측 골짜기에 가득 찬 운해 아래에는 대흥사가 새벽잠에 취해 있을 것이다.
노승봉을 오르는 만식 형님 뒤쪽으로 고계봉이 둘러져 있고,
통천문을 지나니 노승봉으로 오르는 마지막 로프 구간이 나타난다.
밧줄과 쇠사슬에 의지해 오르니 노승봉 정상에 도착한다.
<노승봉(老僧峰, 685m)> 두륜산 도립공원 안에 있는 봉우리로, 해남군 북일면과 삼산면의 경계 능선에 있다. 정상은 넓고 편편한 암반으로 되어있으며, 한켠에는 오석으로 된 자그만 정상석이 있다. 노승봉을 능허대(凌虛臺)라 부르기도 하는데, ‘하늘 높이 날른다’는 뜻으로 중국의 경승지나 건물에도 많이 등장하는 단어이다. 우리나라에서의 지명에도 많이 보이는데 황해도 해주, 강원도 고성, 경북 울진의 지명에서도 보인다. '허공을 가른다', '승천하다', '비상하다'라는 뜻의 관용화 된 표현으로 중국과 조선시대에 보편화되어 해변 절경지에 많이 등장하는 지명이라고 한다. 노승봉의 석경숙님.
주작산 공룡을 타고 넘은 백두의 여걸들.
가야 할 두륜봉과 대둔산 방향.
두륜봉 우측 뒤로 올라야 할 대둔산과 410암봉, 그 너머로 다음 구간 가게 될 달마산도 가늠된다. 고계봉과 주작산 방향.
노승봉 인증.
주작산을 배경으로 한 장 더!
남서쪽 대둔산 방향 파노라마.
서쪽 오도치 향로봉 방향 파노라마.
북동쪽 고계봉 주작산 방향 파노라마. 잠시 후에 오르게 될 두륜산의 최고봉인 가련봉의 모습. 송신탑이 있는 봉우리가 대둔산이고, 그 좌측 희미한 봉우리가 달마산이다.
몇 해 전 나무데크 계단이 설치되기 전에는 쇠사슬에 의지하여 가파른 절벽을 내려서야 했는데, 이제는 나무데크 계단을 따라 조망을 즐기며 느긋한 산행을 이어간다.
데크목 계단을 내려서니 만일암터 갈림길 이정표가 있다.
이정표의 '천년수'는 물(水)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만일암 터에 있는 천년 묵은 느티나무(樹)를 말하고, 만일암의 만일(挽日)은 '해를 잡아맨다'는 뜻으로 북미륵과 남미륵의 조성 전설과 관련하여 천년수(千年樹)에 해를 매달았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며, 만일암터에는 오층석탑이 서 있다.
가련봉을 오르다가 돌아본 노승봉과 고계봉 방향.
주작 공룡능선을 타고 넘은 자 많은 운해는 어디를 향해 가는걸까?
가련봉에서 바라본 좌측 위봉으로 이어진 능선이 황소의 잔등처럼 보이는데, 위봉이란 이름으로 알려진 저 봉우리의 원래 이름은 주봉(胄峰)이었다고 한다. <위봉(胃峰, 530m)> 해남군 북일면 동해리에 솟아올라 있는 주봉의 모습이 완도의 상왕봉과 어울려 신비스러움을 더하는데, 위봉으로 잘못 알려진 주봉(胄峰)은 이 지역 사람들은 투구봉((胄峰)이라 부른다. 지도에도 산꾼들의 산행기에도 대다수가 위봉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주봉은 한문으로 ‘투구 주(胄)’ 자를 ‘밥통 위(胃)’ 자로 오역하여 지도 표기에 위봉으로 해 놓은 듯하다. 1918년 지형도(일제 발행)의 한자표기가 胃(밥통 위)가 아니라 冑(투구 주) 자(字)이다.
가련봉 오르는 길도 험하지만 오래전에 설치한 발받침이 있어서 어렵사리 올라, 가련봉 정상에 도착하니 먼저 도착한 백두들이 가련봉을 뒤로하고 대둔산으로 향하고 있다.
가련봉에 오르니 대둔산 너머로 달마산이 뚜렷해지고,
아직도 여전히 운해가 주작공룡을 넘고는 있으나, 이제는 주작산 공룡능선이 많이 드러나 보인다.
가련봉 정상석 뒤쪽으로 두륜산 향로봉이 운해에 둘러싸여 있다.
<두륜산 가련봉(迦蓮峰, 703m)> 두륜산 도립공원 중의 최고봉으로 해남군 삼산면과 북일면의 경계 능선에 있다. 두륜산은 가련봉을 비롯해 두륜봉(630m), 고계봉(638m), 노승봉(682m), 도솔봉(672m), 혈망봉(379m), 향로봉(469m), 연화봉(613m)의 8개 봉우리(두륜8봉)가 능선을 이루며, 8개 암봉이 둥근 원형으로 천상(天上)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땅에서 연꽃이 솟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서산대사가 두륜산의 지세(地勢)에 대해 말하기를 “북으로는 월출산이 있어 하늘을 괴는 기둥이 되고, 남으로는 달마산이 있어 지축이 튼튼히 연결되어 있고, 동의 천관산, 서의 선은산이 홀연히 마주 솟아있다. 바다가 둘러싸 지키고, 골짜기는 깊고 그윽하니 이곳은 만세토록 불훼의 땅이다”라고 하였다 한다. 이 예언에 따라 산내의 고찰 대둔사와 산림은 임진왜란 때와 한국동란 때도 전화(戰禍)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가련봉 정상 인증은 후미로 남은 몇몇 분들만!
합성한 사진이 아님.
대흥사에서 두륜산을 바라보면 마치 부처님이 누워있는 형상(臥佛)이라는데, 이곳 두륜봉은 부처님 얼굴, 노승봉은 부처님의 왼손, 가련봉은 부처님의 오른손, 백년수는 부처님의 심장 그리고 고계봉은 부처님의 발에 해당된다고 한다. 가련봉을 내려서며 투구봉을 배경으로.
몇 해 전 한가닥 밧줄에 의지해 아슬아슬 지나던 곳을 유유히 지나간다.
혹시 아래 사진에서 거북이 한 마리 보셨는지요?
가련봉을 내려서는 데크목 계단길 위에 서면,
좌측으로 이 지역 사람들에게는 투구봉으로 불리고, 산꾼들에겐 위봉으로 잘못 알려져 있는 주봉의 멋진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해남군 북일면 용산리에 있는 두륜산 투구봉은 마치 장군의 투구처럼 생겼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매년 겨울이면 이 투구봉에 비친 햇빛에 의해 생긴 그림자가 마치 옆으로 뉘어진 우리나라 지도처럼 그려지며, 특히 투구봉에 지도가 그려지는 것은 매년 11월 말쯤에서 2월 말 정도까지만 볼 수 있는 특이한 현상이다. 시간도 아침 8시에서 9시 사이. 그중 8시 30분 정도가 가장 정확하게 지도 모양이 그려지며, 북일면 용산리 마을 입구에서 약 3백 미터 지점에서 가장 잘 보인다고 한다.
데크목 계단길을 내려서니 두륜봉이 다가서고, 우측 대흥사 방향으로 아직도 운해가 인간세상을 덮고 있다.
가련봉 내림길 능선에서 바라본 두륜봉과 만일재의 모습. 만일재로 내려서는 백두들.
만일재 도착.
<만일재(挽日峙, 549m)> 두륜산 내에 있는 해남군 북일면과 삼산면을 잇는 고개다. 가련봉과 두륜봉 사이에 있으며, 고개 정상에는 넓은 헬기장과 이정표가 있다. 지명의 유래는 만일암지(挽日庵址)에서 따온 듯하며, ‘해를 당겨 놓았다’라는 의미라고 한다. 가을이면 억새가 지천으로 피어 억새천국을 이루는 곳이다. 만일재(挽日峙)는 천년수 설화와도 관계가 있다고 한다. 옛날 천동(天童)과 천녀(天女)가 옥황상제의 노여움을 사 지상으로 내려가 불상을 조각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한다. 낮동안 불상을 조성하지 못하면 다시는 천상으로 갈 수 없게 된 두 사람은 꾀를 내어 천년수에 해를 묶어 해가 지지 못하게 하고, 천동(天童)은 남암에서 천녀(天女)는 북암에서 각각 불상을 조각했다. 그러나 천동보다 일찍 조각을 끝낸 천녀가 빨리 천상으로 올라가고 싶은 마음에, 해를 묶어 놓은 줄을 끊어버려서 천동은 영원히 하늘로 올라가지 못했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실제로 북암과 남암을 가보면 이 전설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하는데, 북암에서는 마애여래좌상이 남암에서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미륵불입상이 있다고 한다. 두륜봉 오름길에 돌아본 가련봉 모습.
두륜봉 갈림길 도착.
두륜봉 정상은 기맥길에서 우측으로 약간 벗어나 있다. 직진의 녹색 화살표 방향이 땅끝길이지만 두륜봉의 멋진 선경(仙景)을 감상하기 위해서 우측 급경사 계단길로 들어선다. 두륜봉을 오르는 데크목 계단길.
나무데크 계단을 오르며 돌아본 투구봉(위봉) 능선.
등로는 두륜봉 구름다리 아래로 이어지고,
구름다리 아래를 통과하여 오르면 진불암 갈림길이 나오는데, 몇 해 전 100대 명산 산행으로 이곳을 찾았을 때는 이곳에서 진불암을 거쳐 대흥사로 하산했었던 곳이다.
두륜봉 정상 인증.
<두륜봉(頭輪峰, 630m)> 두륜산 도립공원 봉우리 중 네번째로 높은 봉우리이지만, 두륜산의 주산으로 대접을 받고 있는 봉우리다. 원래는 커다란 바위 덩어리란 뜻으로 “한듬산”으로 불리다가, 그 이후 한듬, 대듬, 대둔으로 변하여 대둔산(大芚山)으로 불리다가 백두산의 ‘두(頭)’ 자와 중국 곤륜산의 ‘륜(輪)’ 자를 따 두륜산(頭輪山)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정상석 아래를 받치고 있는 오석(烏石)에 해남 청년 사랑회에서 “산은 오르되 이름은 없고, 천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젊은 피땀으로 세웠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아침밥 먹으러 갑시다!
두륜봉 옆 너럭바위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아침식사를 한다.
아직은 바람이 차서 그런지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두륜봉을 뒤로한다.
왔던 길을 되짚어 구름다리 아래를 통과하여,
두륜봉 갈림길을 향해 계단길을 내려서고,
두륜봉 갈림길로 돌아나와 나무 가드레일을 넘어 땅끝길로 들어서면,
두륜봉 갈림길 이후로는 정식 등산로가 아니라서 그런지, 등산로 정비가 되어있지 않아서 진행에 무척 힘이 든다.
돌아본 두륜봉과 가련봉.
산죽길을 지나니 100여 미터에 가까운 낭떠러지를 한가닥 로프에 의지한 채 내려서야 한다.
한 사람씩 내려가야 해서 한참을 기다리게 되는데,
로프 타고 내려가서는 바로 앞쪽 봉우리로 로프를 타고 다시 올라야 하고,
앞쪽 암봉만 지나면 어려운 암봉이 없어 무난하게 도솔봉과 대둔산에 오르게 된다.
직벽을 타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홍갑순님.
보기는 스릴이 넘칠 듯하지만, 직접 하면 무서울듯!
다시 암봉 위에 올라섯다가는,
오를 때 밧줄을 탔다고, 내릴 때도 밧줄 신세다.
순서를 기다리는 백두의 소장파들.
그나마 이런 곳은 발 디딜 틈이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위봉(주봉) 갈림길을 지나는데, 땅끝길은 직진 방향이고, 위봉(투구봉, 주봉)은 좌측 청색 화살표 방향이다.
지나온 암봉을 돌아보니 어디로 내려왔는지 길이 보이지 않는다. 금방 내려왔는데..ㅉㅉ
이곳부터 앞에 보이는 대둔산을 거처 오늘의 종착지인 닭목재까지는 잡목과의 전쟁을 치러야 하는 구간으로, 여름철에는 절대 오지 말아야 할 곳이다. 엄청난 잡목과 위험한 암릉이 도사리고 있고 희미한 족적만이 이어진 등로를 찾아 헤맬 생각을 하니 아득하기만 하다.
땅끝길은 빼곡한 조릿대 사이로도 이어지고,
폐헬기장을 만나서는 우측으로 살짝 휘어지며 이어진다.
508봉 직전 암릉에서 잠시 쉼을 하고,
도솔봉을 향해 땅끝길을 이어가는데, 띠밭재가 가까워지는지 일부 등로가 정비되어 있다.
띠밭재(498m) 도착.
산죽밭에 푹 쌓여 있는 띠밭재에는 인명구조용 무인 감시카메라가 있고, 우측으로 ‘하산하는길 도로까지 0.4km’라 쓰인 표지판이 놓여 있는데 대둔산 집단시설지구로 내려서는 길이다. 당일 산행을 하는 기맥꾼들은 이곳에서 한 구간을 끊는 곳이다. 가야 할 대둔산 도솔봉이 오히려 우측 멀리로 도망친 듯 보인다.
잡목지대 보다 이런 암반지대가 편한데, 이내 다시 잡목지대로 들어서야 하고,
대둔산 오름길은 잡목과의 전쟁을 치러야 한다.
돌아본 두륜산 방향.
암봉 옆 너덜지대를 오르는데,
우측 암봉의 바위들이 쏟아져 내릴 듯하다.
가야 할 대둔산 도솔봉이 가까이 다가오고,
두륜산은 점점 멀어져 간다.
쌍좃대바위에서.
도솔봉 좌측으로 잠시 후에 가야 할 대둔산 정상이 자리하고 있다. 돌아본 두륜산 모습.
이윽고 도솔봉 정상에 올라서니 도솔봉 위에는 컨테이너 시설물이 있고, 그 우측 뒤쪽에 자리한 도솔봉 정상석 앞에서 백두들이 쉼을 하고 있다. 동남쪽 두륜산과 완도 방향.
남서쪽 대둔산과 진도 방향.
서북쪽 화산면 방향.
가야 할 대둔산 위에는 방송국 중계소 시설이 자리하고 있다.
당겨본 완도 모습.
두륜산 방향.
북쪽 오도치 방향. 가운데 능선 중앙의 봉우리가 두륜산 8봉 중의 하나인 연화봉이다. 북동쪽 방향 파노라마.
대흥사 방향.
당겨본 대흥사의 모습. <대흥사(大興寺)> 대흥사는 대한 불교 조계종 제22교구의 본사다. 언제 누가 지은 사찰인지에 관해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으나 확실한 것은 알 수 없고, 신라 눌지왕 10년(426) 정관(淨觀)스님이 창건했다는 만일암 기원설을 비롯, 신라 진흥왕 5년(544) 아도화상이 지었다는 설과, 신라 무열왕 8년(508) 무명의 비구승이 중창했다는 설 등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력한 설은 신라 진흥왕의 어머니 소지부인(昭只夫人)을 위하여 아도화상(阿道和尙)으로 하여금 창건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가 이끈 승군의 총본영이었던 곳이고, 서산대사가 “전쟁을 비롯한 삼재가 미치지 못할 곳(三災不入之處)으로 만년 동안 흐트러지지 않을 땅(萬年不毁之基)”이라 하여 그의 의발(衣鉢)을 이곳에 보관토록 한 도량이기도 하다. 17~18세기 서산종의 종찰로 선·교 양종의 대도량 역할을 한 사찰이며, 풍담스님에서 초의스님에 이르는 13인의 총사와 만화스님에서 범해스님까지 13인의 강사(불교 경론을 강의하는 승려)를 배출한 유서 깊은 사찰이다. 대흥사는 한국의 다성(茶聖)으로 추앙받는 초의선사(草衣禪師)가 40년 동안 수행한 일지암(一枝庵)이 있는데, 이 때문에 예로부터 이 일대는 한국 고유의 차와 다도로 유명하고 유자 산지로도 널리 알려진 곳이다. 경내에는 서산대사 의발을 비롯, 국보 제308호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을 비롯하여, 천불전, 천불상, 표충사 등 국가지정문화재 7점과 시도지정문화재 6점, 그리고 13대 종사와 13대 강사 등의 부도와 비석들이 소재한 역사적·학술적으로 중요한 유적지이다. 오소재 방향.
두륜산 도립공원 내에서 이곳 도솔봉에서의 경치가 가장 빼어난 듯하다.
두륜산을 배경으로.
도솔봉 정상에서도!
<대둔산 도솔봉(兜率峰, 672m)> 해남군 삼산면과 현산면, 북평면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도솔봉 정상은 여기서 조금 더 가서 통신탑이 있는 곳인데, 그곳은 갈 수 없으니 이곳에다가 정상석을 세워 놓았다. 우측으로는 연화봉, 혈망봉, 향로봉으로 이어지고 기맥길은 통신탑이 있는 직진으로 이어진다. 도솔이란 도솔천을 말하며 수미산(須彌山) 꼭대기에서 12만 유순(由旬:인 이수의 단위, 40리에 해당함)이 되는 곳에 있는 천계(天界). 여기에는 칠보(七寶)로 된 궁전이 있고 수많은 하늘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다음 구간인 달마산 구간에도 도솔봉이 있는데, 그곳 정상에도 공군부대가 자리잡고 있다. 도솔봉에서 장엄한 조망을 간직한 채,
일부 백두들은 대흥사로 하산하고 주력 백두들은 도솔봉을 뒤로하고 닭골재로 향한다. 가야 할 대둔산(大屯山, 673.2m) 정상부는 KBS, MBC, KT 등 여러 기관 시설들이 점령하고 있다. 서북쪽 우수영 방향 조망.
진달래와 잡목이 빼곡한 능선 등로는 희미하지만 땅끝기맥 선답자들의 족적은 뚜렷이 이어지고,
군데군데 암릉을 지나면서는 희미한 족적을 더듬어 진행하는데,
지나온 도솔봉과 두륜산이 한 장면에 담긴다.
송신소 펜스 담장을 끼고 좌측으로 진행하고, 산꾼들 못 다니게 하려고 일부러 철망을 절벽 끝까지 연장해 놓았지만, 끝에서 철망을 잡고 우회하면 된다.
본디 목적은 산꾼들이 아니었겠지만 어렵게 지나는 산꾼의 기분은 더럽다. 송신소 철망 옆으로 진행하고 있는 백두들.
KBS송신소와 MBC송신소 경계지점쯤에 있는 바위에 올라서면,
직진의 청색 화살표 방향으로 내려서기가 좀 켕기는 곳이라, 우측으로 우회하여 진행하면 되고, KBS건물과 MBC건물로 사이로 내려서다가, 녹색 화살표 방향의 MBC건물 뒤편으로 좌틀하여 진행한다. (우회길은 파란색 화살표 방향으로 내려서야 하는데 20여분 이상 돌아서 가게 된다)
중계소 뒷담을 따라 가면,
다시 앞쪽으로 KT 중계탑이 보이고, 그쪽 방향으로 더듬어 가면 된다.
겹겹이 둘러진 낡은 철망을 이리저리 피하며 진행하면,
아마도 앞쪽에 KT 중계탑이 있는 곳이 대둔산 정상쯤으로 짐작되고,
그곳 까지만 가면 시설물들의 훼방은 모두 뿌리치게 된다. 돌아본 도솔봉 방향으로 두륜산과 일직선 능선처럼 보인다.
마지막으로 낡은 전기 울타리가 설치된 철망을 통과하면,
대둔산 정상부에 자리한 중계시설을 모두 통과하게 되고 앞쪽으로 완도가 내려다 보인다.
녹색 화살표는 우리가 걸어온 길이고, 우측의 청색 화살표는 중계소 사이의 시멘트 도로로 내려서서 우회하는 우회길로 왔을 경우 이곳에서 다시 합쳐지게 된다. 돌아본 대둔산 정상부의 중계시설. 앞쪽부터 KT, MBC, KBS 시설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돌아본 대둔산 정상부 모습.
녹색의 화살표가 우리가 걸어온 땅끝능선 길이고, 파란색 화살표는 우회길인데, 이곳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앞쪽으로 바다 건너 완도가 해무에 어슴프레 보이고,
전망바위에 올라서니, 가야 할 땅끝능선과 다음 구간 가게 될 달마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두륜산, 투구봉, 완도, 달마산 방향 파노라마.
잠시 후에 가야 할 560봉의 모습이 산꾼을 겁박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위압감이 느껴진다
620봉에서 내려서는데 다행히 가느다란 로프가 메어져 있어서 챙겨 온 로프는 배당에서 꺼낼 기회를 잃었다. 이곳에서 410봉을 지날 때까지의 구간은 일반 등산객들이 다니지 않아서 로프 같은 안전시설이 전혀 없는 땅끝기맥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구간이라 산악사고가 가장 빈번한 곳이라고 한다. 돌아본 대둔산.
어디로 가야 할지 난감한 느낌에 이곳저곳을 살피니, 바위 한켠에 표지기가 몇 장 나부끼고 있는 곳이 보인다.
내려서는 데는 어렵지 않으나, 순간 길을 놓쳤다는 생각에 당황스러울 수 있는 곳이다.
두륜산 방향.
돌아본 대둔산.
두륜산 쪽으로 카메라가 자주 돌아가는데, 뭔가 아쉬움이 남은 듯하다.
해남군 북일면 흥촌리와 바다 건너 완도 조망.
만흥 부락과 신촌 부락이 합쳐서 흥촌리(興村里)라 부른다고 한다.
선답자의 족적이 능선을 벗아나 좌측으로 이어지는 듯하더니,
또다시 험한 암릉을 만나 개구멍만큼이나 좁은 공간을 힘들게 내려서야 한다. 오늘 가야 할 땅끝기맥의 마지막 난코스인 410봉 암릉이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다가온다.
나무와 바위 사이의 공간이 좁아서 몸집이 큰 편인 나 같은 사람은 통과가 좀 거시기하다.
대둔산 정상에서부터, 절벽을 내려서면 잠깐 잡목지대가 펼쳐지는 상황이 몇 차례 연속된다.
앞서가던 백두들이 앞쪽 바위벼랑 끝에서 쉼을 하고 있다.
이곳의 해풍도 만만치 않은 듯, 뒤쪽의 소나무들이 우측으로 휘어져 있다. 달마산과 송지면 방향.
통신시설이 자리한 대둔산과 조금 전 내려선 620봉 모습이 돌아다 보인다.
두륜산 방향.
백두들이 쉬고 있는 곳에 도착하였는데,
손 총무님이 잃어버린 스틱 한 조각을 찾아 다시 대둔산으로 가는 바람에 한참을 더 쉬게 된다. 휘유~~, 그냥 잃어버린 스틱을 새로 사는 게 낮지! 저곳을 우찌 또 올라!
주변의 커다란 바위들의 생김새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신라 무덤에서 나오는 곡옥은 이 바위를 보고 만든 것인지도..ㅋㅋ 손 총무님이 어디까지 가고 있는지 살피며, 내는 못한다!!
벌써 저 610봉을 다시 올라 대둔산 정상부로 가고 있다는데... 카메라에 잡히지는 않는다.
위봉(투구봉) 능선을 배경으로 회장님도 같은 포즈~!
손 총무님 걸음이 빠르니, 백두들을 먼저 출발시키고는 만식형과 둘이서만 기다리기로 한다.
이제 땅끝기맥 중에서도 가장 악명 높고 난해한 구간인 410봉 암릉구간이 기다리고 있다.
손 총무님을 기다리며 이곳저곳을 기웃거린다.
널찍한 마당바위에서 완도를 바라보며 쉼을 하면 좋겠지~~!
저 바위들은 언제쯤 편안한 위치에 자리하게 될까?
답. 좌측 끝의 바위가 굴러 내릴 때.
손 총무님을 기다리는 배낭의 '무사 귀환' 기도를 들었는지..,
잃어버린 스틱 찾아 길 떠났던 분이 돌아와, 헤맨 곳을 배경으로!
얼마나 긴~ 세월의 흔적일까!
이 험한 바위 암릉의 빨간 열매는 누구를 위해 붉은색일까! 별의별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덤불 숲을 헤쳐가다 보면,
308봉 우회길을 지난 갈림길에 걸려있는 준.희 님의 표지기가 반갑다.
근데 어떤 곳은 '준.희'이고, 어떤 곳은 '희.준'이다. 세력다툼의 결과물 인지?
308봉을 조금 지나니 너럭바위가 나오고,
우측 아래로 현산면 조산리에 채석장처럼 보이는 곳도 내려다 보인다.
잠시 후 지나야 할 316봉과 410봉 암릉이 성큼 다가서고,
316봉 우측으로 날카로운 선바위가 진도 쪽 우수영을 경계하고 있다.
410봉 암릉을 오르며 대둔산을 배경으로.
410봉 암릉 정상부에 먼저 갔던 백두들이 쉼을 하고 있다.
410봉 정상 직전 암릉에서 앞서 갔던 백두들과 합류하여 잠시 쉼을 한다.
지나온 땅끝기맥 능선을 배경으로.
한참의 쉼을 뒤로하고 410봉 오름길을 이어간다.
410봉이 지척이라 느꼈는데, 갈길이 멀어 보이지만...,
긴~ 쉼을 한 이후에 암릉을 앞에 둔 정 여사님의 표정은 밝기만 하다. 역시 암릉의 대가 다운 모습.
불쑥불쑥 튀어나온 암봉을 우회하기도 하며,
튀어나온 암릉에 오를 때면 지나온 대둔산과 두륜산을 어김없이 돌아본다.
410봉이 오름길의 마지막 피치를 올리는 백두들!
선답자들의 작품일까, 아니면 자연의 작품일까? 이곳의 바위들은 하나같이 칼날처럼 날카롭다. 부딪치면 신체손상이 불가피하므로 천천히 살피며 걸음을 옮긴다.
또다시 지나온 암릉길을 돌아보니 어려운 코스를 많이도 왔다는 뿌듯함도 느껴진다.
410봉 정상에는 '준.희'님의 표지목이 걸려 있는데, 전혀 정상 같은 느낌이 없어서 그냥 지나친다. 시실 대둔산에서 그렇게 힘든 암릉구간을 거쳐며 올랐는데.., 뭔가 특별한 것을 기대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 좌전방으로 완도의 모습이 해무를 뚫고 형체를 드러내고 있다.
몇 해 전 걸었던 완도 능선 종주길에서 올랐던 상왕봉이 아련해지려는 옛 기억을 들춰낸다.
빼곡한 잡목 숲을 헤치는데, 조망이 트인 빠꼼한 공터도 지난다.
410봉 다음 봉우리 좌측으로 암봉들이 아담한 군무를 펼치고 있다.
당겨본 암벽 위의 작품들.
뿌연 연무를 뚫고 완도대교가 어슴프레 모습을 드러내고, 완도를 잇는 13번 국도도 보인다.
410봉 이후에는 암릉이 없을 줄 알았는데, 닭골재 가는 능선에 또다른 암릉이 보인다.
닭골재로 향하는 땅끝능선 봉우리 너머로 다음 구간 가야 할 달마산이 날카로운 위용을 서서히 드러 낸다.
다행히도 암릉을 우회하여 지나가게 된다.
지나온 암릉 우회길.
암릉을 우회하여 다시 능선 위로 올라서고,
완도와 해남을 연결하는 13번 국도가 달도로 이어지는 모습이 내려다 보인다.
돌아본 410봉과 우회한 암릉 모습.
가야 할 닭골재 방향으로 #125 송전탑이 자리하고 있다.
송전탑을 지나서 돌아본 대둔산 방향.
희미한 등로를 따르다 보니 성곽의 흔적 같은 석축도 보이고,
커다란 바위를 우회하여 오르면,
대둔산 방향으로 지나온 봉우리들이 훤히 조망되고,
잠시 후 235봉에 도착하여, 발길을 멈추고 쉼을 한다. 가야 할 닭골재 방향.
닭골재를 향하는 백두들.
좌전방으로 북평면에서 달도로 이어지는 도로의 시원스런 모습이 내려다 보이고,
잡목 그득한 능선길에서 돌무더기도 지난다.
우틀하는 조그만 봉우리에서 마지막 배낭털이를 한다.
닭골재 직전 봉우리에서 돌아본 235봉(가장 뒤쪽 봉우리) 방향.
남양홍씨(南陽洪公) 묘지를 지나고,
잠시 후 김해김씨 가족묘지에서는 닭골재를 지나는 13번 국도가 내려다 보인다.
닭골재로 내려서는 김보성님.
묘지 우측의 절개지 관리용 계단을 따라서 닭골재로 내려서며,
다음 구간의 들머리도 확인해 두고,
땅끝기맥의 최대 난코스를 모두 지나 닭골재에 도착한다.
<닭골재/저동치(楮洞峙, 58m)> 해남군 현산면 구산리와 북평면 남창리를 잇는 고개다. 새로 생긴 4차선의 도로가 시원스레 뚫려있고, 그 옆에는 잊혀가는 구 13번 국도가 있다. 다음 구간 달마산 방향 들머리는 구 13번 국도 변에 있다. 남해지지(海南地志)에 기록된 닭골재의 유래는 고개 아래에 있는 ‘딱골’이란 지명에서 비롯된 듯하며, 딱골은 닥나무가 많은 동네라는 뜻으로 ‘저동(楮洞)’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고개의 원 지명은 저동치(楮洞峙), 즉 딱골재인데 변음되어 닭골재로 된 듯하다. 닭골재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백두들.
해남읍으로 이동하여 뜨듯한 물로 긴장한 근육들을 풀어 주고,
나름 맛집으로 소문난 '장수통닭'이라는 식당으로 이동하여,
대흥사 쪽으로 하산한 백두들이 채취해 온 두릅나물과 각종 닭요리 코스로,
산행의 피로를 말끔히 날려 버린다.
닭의 이모저모.
먹다 남은 술은 내 몸이라는 쓰레기통 속으로!
맛난 닭요리와 두릅나물로 서울로의 기~인 여행을 대비하고,
남은 술로 채워진 몸은 달리는 버스에서 곤한 잠에 취한다. 우려했던 땅끝기맥 최고의 난코스를 별다른 사고 없이 무사히 마쳤다. 늘 그렇듯이 지나온 길은 그냥 그저그런 과거의 여느 길과 같다. 앞에 남은 길이 걱정스러운 것은 그 길을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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