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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계 선생,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오다! 2017년12월5일 11시30분, 난계 선생이 제기차고 장치며 먹 갈아 글공부하던 옛 고향마을 깃골로 돌아오는 의식이 열렸다. 난계 선생이 태어나고 자란 깃골에서 선생의 생거지비준공식生居地碑竣工式이 있었던 것이다. 실로 선생이 돌아가신지 10주갑周甲을 훌쩍 넘긴655년 만의 일이다. 이를 자축하는 마을 풍물패거리들의 농악과 축하화환들로 분위기를 한층 돋웠다. 이날 자축에 나선 마을풍물패거리와 화환들. 난계선생의 문생 정몽주종약원에서 보낸 화환도있군요. 영하7도의 차가운 날씨와 옷깃을 파고드는 삭풍에도 불구하고 문경시장을 비롯한 마을유지 등 200여 참석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난계 김득배 선생의 생거지비生居地碑 준공식이 거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2017.12.5일 난계선생문경생거지비 준공식. 좌측 1번째 필자,6번째 문경시장 고윤환, 7번째 비건립추진장이창근, 그 다음 상산김씨대종회장 김기식, 그 다음이 김영호 문충공후손. 매일 매일 똑같은 시간이 반복되지만 오늘같이 보람 있고 뜻 깊은 때는 없었던 듯싶다. 필자가 쓴 전기물이 모태가 되어 선생의 생거지비가 태어나게 됐기 때문이다. 문중에서 큰 힘을 보태지도 못했는데도 선생의 기념비가 이곳에 자생적으로 태어나게 되었으니 거금을 들인 어는 문중의 비석보다도 값지고 뜻 깊지 않을 수 없다 하겠다. 지난 날 난계선생의 행적을 찾아 국립중앙도사관을 뒤져가며 집필에든지 어언 7년여, 그리고 5차례에 걸쳐 상주의 가장동 오갈미마을과 병성동의 군명교, 문경의 윤필암과 점촌의 깃골, 말응의 원호동과 강생포, 용궁의 청원정 그리고 회룡포의 원산성, 풍양의 흥국사터와 삼강서원, 안동의 삼태사묘와 안동대학교내의 역동서원에다 예안, 그리고 풍산의 솔밤다리와 하회마을, 봉화의 청량산과 오마도산성, 여주 신륵사, 김천의 여남과 김해의 분산성, 연천의 숭의전 등등 선생의 발자취와 흔적 따라 한 번 간 곳 두 번 가고 확인한곳 더 확인하러 나섰던 깊고도 느낌표가득하고 묵직했던 3년여의 탐방여행이 보람으로 승화되는 순간이었다.
난계 선생 유적지 답사 윤필암 사불전 앞의 필자(왼쪽)와 신륵사 난계 선생 부인 서흥김씨의 이름이 올라있는 나옹선사 부도비 앞의 동행자 김상돈(오른 쪽). 그러나 그간 이 과정에서 역경과 에피소드도 많았다. 현장답사엔 두 동생 상돈이와 상일이가 동행하거나 필자 홀로 나선적도 있는데, 동행 길에 나섰던 상돈이가 하필이면 병원도 찾을 수 없는 공휴일 날 식체알음알이로 길바닥에 드러눕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고, 내가 운전 중에 갯가동네 군명교軍鳴郊(상주 병성마을)에서 승용차를 개골창에 꼴아 박는 바람에 견인차를 불러야하는 일도 있었으며, 야간 시골길을 주행 중 승용차타이어가 펑크 나는 바람에 다음 카센터까지 덜그렁 덜그렁 칠흑 같은 낫선 길을 헤집고 10km가 넘는 거리를 끌고 가야했던 일도 잊을 수가 없다. 물론 허름한 객촌 잠을 청하기도 다반사 였다. 제막식장 앞에 내걸린 난계선생 생거지비 준공경축 현수막
고윤환 문경시장이 식사를 하고있다
어이, 추워! 영하7도의 추운날씨에도 식장을 가득메운 하객들.
이날 식장의 이모저모 허나, 이 말고도 기념비가 탄생하기까지 숨은 공로자 두 분이 더 있었으니 점촌의 호계虎溪마을 출신 문충공파 후손 김영호金永鎬씨와 문경문화해설사로 있던 깃골사람 이창근李昌根씨다. 필자가 ‘충혼장백은 시대를 넘어’라는 제호題號에 ‘김득배 선생의 삶과 학맥’이라는 부제副題를 달아 난계 선생의 평전을 완성하긴 했지만 문충공문중의 동의가 녹녹치가 않았다. 역사공부를 하거나 글을 쓰는 사람도 아니니 그랬나 보다. 수소문 끝에 물어물어 상산김씨서울종친회 부회장을 맡고 있는 김영호씨를 찾자, 물문곡직하고 맹수가 먹이를 낙아 채듯 내 원고를 단숨에 덥석 채택해 준분이다. 그렇지만 책자발간역시 만만치가 않았다. 지루하도록 서울에서 4년여의 문충공문중회의를 거쳐, 대종손 집성촌격인 김천의 여남으로 출행해 마을 원로들을 마을회관에 모아놓고 밤늦도록 토론을 거친 후에야 선생의 전기물 600부가 2010년 어렵사리 태어날 수 있었다. 이 때 내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난계선생의 전기물 방문객수가 4만 여를 넘고 있었으니 오래도 걸린 셈이다. 그해 11월 문충공시제 때 역사적인 고유제告由祭가 여남의 문충공 제단에서 거행되었다. 누가 관심하나 쏟아주지 않던 내 글에 김영호 대부의 열정이 없었다면 전기물은 태어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내겐 천군만마나 다름없는 분이다. 이렇게 해서 발간 된 난계선생의 전기물이 국립중앙도서관과 국회도서관을 비롯한 전국주요 도서관, 그리고 방송국은 물론 전국 주요 대학도서관에 배포되기에 이르렀고, 상주와 점촌문화원에도 돌렸다.
2010.11.6.일 여남 문충공 시향에 고유제거행. 상석에 발간된 필자의 전기집이 올라와 있다.
그런데 이 책이 배포 된지 4년 여 만에 점촌문화원의 소장본을 난계 선생 출생지 인 깃골 출신 이창근씨가 접하곤 심장이 뛰는 감동을 느꼈다고 한다. 비석을 세울 결심을 굳히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는 문경에서 내 노라 하는 문화해설사 노릇을 십 수 년 해오면서도 정작 자기가 평생을 살고 있는 자그마한 마을이 김득배같은 큰 인물을 탄생시킨 곳인지를 몰랐다고 한다. 깃골 사람 문화재해설사 이창근 씨가 결성한 난계선생 생거지비 건립추진위원회위원들.
그러나 이창근씨가 아무리 비석건립 결심을 한들 낫선 땅에 남의 비석을 세운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인가. 내 앞마당에는 안 된다는 마을주민들의 속내를 달래는 일은 물론, 그간 난계선생이 상주사람으로 굳혀져온 사학계와 관계官界등 지역유지들의 기존 고정관념을 문경사람으로 재인식 시켜주는 일에 나서기도 했고, 그리고 대역죄인의 누명을 쓰고 희생된 선생의 억울한 죽음을 바로 잡아주는 일에도 어지간히 애를 먹었단다. 그 밖에 이 일을 사전 지역매스컴에 인식시키기도 하고, 문경시청 학예사와 시장을 설득하는 일에 나서기도 했단다. 그런지 어언 3년여를 훌쩍 흘려보내고서야 빗돌을 탄생시키는 결실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간 서울을 들락거리며 필자를 비롯한 문충공 문중사람들로부터 자문을 받아가며 비문을 다듬기도 했었는데, 필자의 제안에 따라 선생이 태어나고 살아오신 곳이라는 의미로 생거지生居地비라는 비명을 빗돌에 넣게 되었다. 이렇게 숫한 구비를 넘고 넘어 오늘의 문충공의 기념비가 탄생하기에 이른 것이다. 문경시 점촌동 깃골공원에 세워진 난계선생 생거지비. 비 오른쪽이 선생이 태어나고 살아오신 깃골마을이다.
아! 이건 난계 선생이 돌아가신지 7세기 만의 기적이 아닌가! 아래 동영상1·2부는 난계 김득배 선행 생거지비 제막식 장면입니다. 화면을 클릭하면 제막식 동영상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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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실로 좋은 발자취를 남기셧습니다.
난계 선생님은 이제 나랏님으로 재탄생 하신 겁니다. 이건 난계 선생의 부활입니다!
금방이라도 선생께서 이 나라 이 백성에게 무언가 가야할 길을 활화산 처럼 한말씀 토해내실 것 만 같습니다.
https://blog.naver.com/kshh3249로 들어가시면 김득배 선생의 삶과 학맥이 잘 정리되어 있어요. 선생이 살아 돌아온듯 생생한 숨결이 느껴집니다.
고려공신 16공신 난계 김득배션생 생거지 비가 문경시 점촌동 깃공공원 세원짐을 축하드립니다.
수차레 현장 답사와 수년에 걸쳐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연구하며 쓴 "충혼장백은 시대를 넘어" 책 출판이 모태가 되어 난계 김득배 생거지 비 건립에 공헌하신 클마님 께 감사드립니다.
김상흠 종친님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문충공파 후손으로서 감개무량 합니다.
종친님의 열정과 정성이 모아저서 시냇물을 만들고 큰강을 이룬후에 바다가 되었습니다.
그날의 감격은 제인생의 최고의기쁨이 였습니다.
행사 말미에 제가. 문충공파의 직계후손으로서 인사말씀을 할때 파조님의 영혼이 함께함을 느꼈습니다.
지난 5월12일에는 장규 전대종회회장님 현대종회 회장님릉 비롯해서 3원수파대표 각 두사람과 서울 종친회 회장님
고윤환 문경시장님 이창근 추진위원장님과 같이 그간 노고에 대한위로의 모임을 하고 왔습니다.
그랬군요! 큰일 하셨네요. 난계 선생께서 크게 웃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