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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할을 넘어,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 - 오늘의 일상
사람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사랑해서 그분을 찾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을 찾게 되는 이유는 저마다 다르다.
어린 시절, 부모를 통해 교회가 익숙해져서일 수도 있고 살다 보니 삶이 무엇인지 묻게 되는 순간이 찾아와서일 수도 있다.
때로는 버티기 어려운 죽음과도 같은 육체적·정신적 고통 속에서, 누군가는 마지막처럼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찾기도 한다.
사람마다 이유는 다르지만, 대부분은 하나님보다 먼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들을 통해 하나님을 배우고 교회 안에서 예배를 경험하며 하나님이라는 분을 알아 가지만, 정작 하나님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는 알지 못한 채 그 자리에 머무는 경우도 많다.
그러다 어느 순간 하나님은 관계의 대상이 아니라 더 나은 삶을 주시는 분으로 기대하게 되면, 사람은 그 기대만큼 자신의 열심으로 교회 활동에 마음과 에너지를 쏟아붓게 된다.
돌이켜 보면, 그렇게 시작된 신앙은 사랑이 아니라 필요에서 비롯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나 또한 그랬다.
하나님이 필요해서 그분을 찾았던 것 같다.
누군가를 통해 하나님을 듣고, 그분을 알아 가는 시간은 분명 필요한 것 같다.
하지만 끝내 남아야 할 것은 누군가에게서 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직접 만난 하나님이다.
인생도 다르지 않다.
아이도 처음에는 부모의 도움이 필요하여 기대어 살아가지만, 그 시간을 지나면 독립하여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한 사람이 된다.
그때가 되면 자녀는 부모를 더 이상 역할로만 바라보지 않고, 서로를 한 사람으로 다시 마주해야 한다.
관계는 그렇게 역할에서 벗어나, 한 사람으로 살아온 삶의 이야기 안에 감추어진 가장 깊은 소리를 서로 들을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어린 시절에는 부모가 아이의 오늘을 깊이 들어 줄 수 있는 관계가 필요하고, 자녀가 독립한 뒤에는 반대로 부모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관계의 시간이 필요하다.
이런 관계의 연습이 있어야 자신의 이야기를 힘들지 않게 나누고, 상대의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시간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부모가 자녀의 필요를 채워 주며, 그 아이가 어떤 사람인지 잊지 않도록 함께 발견해 가는 시간은 참으로 소중하다.
그리고 독립 이후에는 부모가 자녀의 필요를 채워 주며 품어 왔던 마음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 시간을 지나며 사람은 자신의 가치에서 출발한 나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 나를 함께 바라보게 되고, 그 둘이 가장 깊이 연결될 때 하나님 안에서 나를 아는 삶이 시작된다.
관계는 그렇게 역할을 넘어, 한 사람으로 살아온 삶의 이야기를 다시 말하고 들을 수 있는 여행의 시간으로 이어져야 한다.
몇년 전,
《엄마, 단둘이 여행 갈래?》라는 프로그램을 보았다.
이효리는 엄마와 단둘이 여행을 떠났고, 그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보는 시간이 아니라 서로의 시간을 다시 말하고 듣는 여정처럼 보였다.
부모와 자녀라는 관계는 변하지 않지만, 그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멈추게 되는 순간들을 보게 되었다.
곁에 있었지만 묻지 않았던 질문들과 들으려 하지 않았던 이야기들 속에서, 관계는 멀어져서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 묻지 않아서 멈추었다.
그 여행은 멈춰 있던 시간을 좁혀 가는 여정처럼 보이며, 처음으로 자신을 꺼내 놓은 일탈이었다.
엄마는 ‘엄마’가 아니라 한 사람으로 살아온 시간을 말했고, 이효리는 ‘딸’이 아니라 그 이야기를 처음 듣는 한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
나는 그 장면을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부모를 오래 보았지만,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은 없었을지도 모르겠구나.
관계는 더 가까워지려는 노력보다 역할 너머의 이야기를 다시 듣게 되는 순간 깊어지겠구나.
상처와 아픔이 생길까 쉽게 꺼내지 못했던 미안함과 고마움을, 각자의 마음의 속도로 조심스럽게 꺼내는 그 과정이 오랜 여운으로 남았다.
그렇게 둘만의 여행이 이어질 때, 감정은 오해를 지나 이해로 남는다.
나는 사람이 더 이상 자신의 필요를 상대에게서 채우려 하지 않는 독립의 순간부터, 관계는 새롭게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건강하게 독립하여 자기 자신과 먼저 하나가 된 사람이 사랑을 만나 둘이 하나를 이루어 가는 삶, 그것이야말로 내가 생각하는 진짜 관계의 모습이며 가장 매력적인 삶이다.
독립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사랑하는 존재의 마음을 알아 자신의 기준을 내려놓을 수 있는 선택은, 결국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대의 진짜 마음을 몰라 선택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 진짜 마음이 무엇인지
묻고,
듣고,
기다리는 관계.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진짜 관계다.
신앙도 다르지 않다.
누군가를 통해 하나님을 아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직접 하나님을 만나 한 인격으로 마주하는 관계로 나아가는 일.
그 관계 안에서 자신에게 주신 의미를 묻고, 듣고, 행동하는 그 과정이 있어야만 신뢰를 가지게 되고 그 신뢰가 깊어질수록 사랑하게 된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렇게 자라 간다.
보이지 않는 존재와 종교적 행위 너머의 관계를 맺는 일은 낯설고 어렵다.
어쩌면 우리는 먼저 눈에 보이는 부모와의 관계 안에서 묻고, 듣고, 이해하는 법을 배우게 되는지도 모른다.
그 시간을 지나 건강하게 독립하게 되면, 하나님도 더 이상 '신'이라는 역할로만 머물지 않는다.
한 인격으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그때 사람은 하나님께 이해되지 않는 것들에 대해 왜 그렇게 하셨는지를 묻기 시작해야 한다.
그 물음에 머무르다 보면 때로는 들려오는 응답으로, 때로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하신 일들과 말들이 다시 이해하게 된다.
그제야 다시 만난다는 것이 같은 존재를 이전과는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는 일임을 알게 된다.
하나님과 내가 다시 마주하듯, 부모와 자녀의 관계도 서로를 다시 마주해야 한다.
부모는 오랜 시간 책임과 희생, 헌신이라는 옷을 입고 살아왔다.
하지만 어느 순간 부모 역시 오랫동안 입고 있던 그 옷을 내려놓을 시간이 온다.
'누구의 엄마, 누구의 아빠'가 아니라 한 사람으로 서는 시간.
나는 그 시간을 본연의 나로 돌아가는 회복이라고 생각한다.
자녀는 부모를 닮았지만 부모와는 다른 존재다.
닮았지만 다른 그 존재는, 내가 나 자신을 다시 비추어 보고 회복할 수 있도록 돕는 관계인지도 모른다.
《엄마를 부탁해》를 읽으며 나는 엄마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서울역에서 엄마를 잃어버린 뒤에야 비로소 엄마를 알게 되는 이야기처럼, 나 역시 엄마를 사랑했다고 믿었지만 사실 한 번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것을 그 책을 통해 깨닫게 되었다.
항상 자녀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자녀가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자신의 것을 아끼지 않았던 엄마에게 더 묻지 못했고, 더 함께 있어 달라고도 말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것이 부모 시대가 가진 아픔인지도 모른다.
엄마도 그런 삶을 살아 본 적이 없었기에, 무엇을 받고 어떻게 누려야 하는지조차 잘 모른 채 견디며 살아왔을 것이다.
엄마의 고단한 삶을 보면 자녀로서 해 드리고 싶은 것은 참 많다.
그러나 내가 주고 싶은 것보다, 엄마가 진짜 원하는 것을 드리고 싶은데 엄마는 좀처럼 자신의 마음을 말하지 않으신다.
사랑에 대한 오해일까.
무언가를 원한다고 말하는 것이 자녀에게 짐이 될까 봐, 끝내 자신의 마음을 접어 두는 그 삶이 나는 아프다.
그래서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는 진짜 마음을 나눌 수 있어야 하고, 서로의 진짜 마음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고 자꾸 말하게 되는 것 같다.
나는 아이를 보며 아이를 이해하기보다 그 안에 비친 나를 마주하게 되는 순간들을 여러 번 지나왔다.
그 시선은 나에게만 머물지 않는다.
나를 닮았지만 내가 아닌 존재, 또한 아내를 닮았지만 아내와도 다른 존재가 우리 앞에 서 있을 때, 우리는 그 아이를 통해 미처 알지 못했던 나의 모습과 쉽게 보지 못했던 아내의 모습을 함께 발견하게 된다.
다른 두 사람이 만나 전혀 새로운 한 사람이 태어나듯, 그 아이는 우리를 닮아 있으면서도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모습을 비추어 준다.
그래서 자녀는 단지 돌보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우리를 다시 이해하게 만드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비추며 살아간다.
그리고 어느 순간 가족이라는 이름 안에서 한 사람의 삶을 다시 읽기 시작한다.
자녀가 독립된 존재로 서게 되면, 부모를 더 이상 역할로 보지 않게 된다.
한 사람으로 보게 된다.
그때 관계는 다시 시작된다.
부모가 살아온 시간을 한 사람의 삶으로 이해해 가는 동안, 자녀는 그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함께 발견한다.
사랑하기에 자신을 앞세우지 않고 살아온 시간안에 담긴 사랑의 마음 앞에 존경과 존중의 태도를 갖춘다.
그것이야말로 다시 만나는 관계일 것이다.
다시 만나는 관계는 삶에서 참 소중하다.
하지만 그 소중함을 무디게 만드는 것은 어쩌면 익숙함인지도 모른다.
익숙함은 다 안다는 뜻이 아니라, 진짜를 알아 가기 위한 시작일 뿐, 끝은 아니다.
결혼한 지 20년이 지났지만, 나는 아직도 어제와 같은 한나를 만난 적이 없다.
같은 사람을 만나고 비슷한 하루를 살아가는 것 같지만, 어제의 마음과 오늘의 마음이 다르고, 어제의 행동과 오늘의 행동 또한 같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아침마다 다시 인사를 건네고, 웃는 얼굴로 마주하며, 따뜻한 포옹으로 서로의 온기를 나눈다.
그 소박한 반복 속에서 관계는 살아 있고, 깊어져 간다.
어쩌면 관계란, 특별한 순간이 아니라 이렇게 다시 만나는 순간들 속에서 조금씩 완성되어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 2014년 9월 흐르지 않는 곳 우다이푸르에서 떠나다 - 과거의 스토리
우다이뿌르를 떠나는 일은 내게 가장 어려운 선택이었다.
어쩌면 지금까지 내가 내려온 선택들 가운데 가장 오래 마음에 머물렀던 일이었을 것이다.
참 좋아했던 곳이었지만, 결국 떠나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중 하나는 졸업의 계절마다 필라델피아 신학교 학생들이 라자스탄 반스와라로 이동해 열던 집회 때문이었다.
그 집회는 하루로 끝나는 모임이 아니었다.
나흘 밤과 다섯 날을 함께 보내는 시간 동안, 지역마다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모여들어 어느새 2~3만 명이 한 자리에 모였다.
처음 그 장면을 마주했을 때,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싶어 나는 진심으로 놀랐다.
수십 년 전, 시골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열두 사람이 모여 시작된 이야기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삶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곳을 섬기는 학생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저마다의 역할을 맡고 있었다.
누군가는 밥을 짓고, 누군가는 커리를 끊이고, 또 누군가는 음식을 나르는 일을 맡고 있었다.
열두 개의 큰 가마솥에서 끓인 음식이 경운기에 실려 오고, 사람들은 바나나 잎 위에 음식을 받아 손으로 식사를 했다.
아침이 되면 사람들은 한 방향으로 이동했고, 그 흐름을 따라가 보니 작은 호수가 있었다.
그곳에서 물을 길어 얼굴을 씻으며 하루를 시작했다.
처음 보는 그 광경은 낯설다는 말만으로는 다 담기지 않을 만큼 생경했다.
그곳에 있던 유일한 한국인이었던 우리는 그 장면 앞에서, 마치 다른 세계에 들어온 사람처럼 스스로에게 묻게 되었다.
나는 누구이고, 여긴 어디인가.
그 질문이 마음에 남아 있는 상태에서, 모든 집회가 끝난 뒤 마을에 살던 한 청년이 다가와 자신은 외국인을 처음 본다며 자기 집에서 짜이 한 잔만 마시고 가라고 간청했다.
한 시간 뒤에는 우다이푸르로 돌아가야 했기에, 우리는 잠시 머물겠다고 말하고 그의 집으로 들어갔다.
집에 들어서자 그는 예수님을 만난 뒤 자신이 정말 많은 복을 받았다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자신의 방으로 우리를 데려가 여러 신들의 사진을 보여 주었는데, 그 가운데 예수님의 사진도 함께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는 뜻밖의 말을 했다.
전에는 예수님이 자기에게 열 번째로 중요한 신이었는데, 이제는 세 번째로 중요한 신이 되었다는 말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서야 뒤통수를 큰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수만 명이 모였던 집회의 시간보다, 떠나기 전 잠시 들렀던 그 집에서의 짧은 12분이 오히려 더 크게 마음을 흔들었다.
보이는 화려함 속에 묻혀 있던 문제의 본질을, 그 짧은 시간 안에서 만난 것만 같았다.
우다이푸르로 돌아가는 덜컹거리는 버스 안에는 집회를 마친 사람들의 가벼운 안도와 밝은 기운이 흘렀지만, 나는 그 흐름에 섞이지 못한 채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일까.
나는 지금, 무엇을 위해 이곳에 와 있는 걸까.
그 질문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지금의 방향으로는 더 이상 갈 수 없겠다는 생각이 또렷해졌다.
우다이푸르를 떠나기로 마음먹게 된 첫 번째 이유는, 집회의 크기 때문이 아니라 그 모든 시간이 끝난 뒤 가장 작은 공동체와 이어지지 못하는 어떤 불균형이 남아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 역시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였다는 사실만으로도 벅찬 감정을 느꼈다.
그 감정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
건강하게 자라게 하는 소통이 없고, 이해가 깊어져 사랑으로 넘어가는 선택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면, 이런 집회는 결국 쉽게 무너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방향이 달라지기 시작한 기준은 결국 하나였다.
아빠로서 시애에게 주고 싶은 것과, 하나님이 다음 세대에게 진짜 주고 싶어 하시는 단 하나는 무엇일까.
나는 'The One', 단 하나만 중심에 연결되어 있다면 동서남북 어느 방향으로 가도 상관없다고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 하나가 무엇일까.
그 기준이 될 하나를 마음에 품고 싶어, 내가 머물고 있던 우다이푸르를 바라보는 깊이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언어와 문화가 조금씩 가까워질수록,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현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곳도 한때는 농사를 짓고 가축을 키우는 것만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일자리 하나를 얻는 일조차, 누군가의 자리가 비어야 가능할 만큼 쉽지 않은 일이 되어 있었다.
변화는 전통과 뒤섞여 지금의 문화를 만들었고, 이제는 일자리 하나를 얻는 일조차 누군가의 자리가 비어야 가능할 만큼 어려운 일이 되어 있었다.
그런 외부적인 요인과 우다이푸르에서 자란 젊은 친구들의 마음은 전통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도시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다른 종류의 삶을 암시하고 있었다.
새로운 것을 배우고, 더 많은 것을 얻으며, 다른 기회를 만날 수 있다는 가능성처럼 그들을 유혹하는 흐름을 만들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기보다, 전통보다는 새로운 길을 시도해 보고 싶었던 친구들은 결국 우다이푸르를 떠났고, 익숙함을 선택한 친구들은 그곳에 남았다.
선택은 달랐지만, 그들은 모두 우다이푸르를 좋아하고 있었다.
떠나는 일은 간단하지 않았다.
떠나기 싫어 몇 번이고 멈추고 또 멈추다가, 끝내 현실 앞에서 발걸음을 옮겨야 했던 그들의 선택은 관계한 모든 이의 마음에 깊은 아쉬움을 남겼다.
가족들과 함께 떠나고 싶어도, 어른들은 지금까지 살아 온 삶의 터전을 두고 나아가는 일을 두려워했다.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어른들은 그저 "너희는 젊으니 좋은 기회를 잡아 성공하라." 라고 말했다.
그 말은 분명 응원이었지만, 동시에 함께할 수 없다는 방식의 이별이기도 했다.
가장 가까이 지냈던 빈디샤마저 델리로 떠나는 모습을 보며, 나는 그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전통에 머무는 삶이 아니라 새로운 흐름을 만날 기회를 향해 애쓰는 일임을 보게 되었다.
나 또한 새로운 흐름을 모른 채 살아간다면, 언젠가 세상을 살아갈 시애에게 끝내 해 줄 수 있는 말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마음이 들었다.
어른들은 자녀들에게 응원의 말을 건네지만, 정작 새로운 것을 줄 수 없어 떠나보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며 당장 무언가를 줄 수는 없어도, 새로운 세대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함께 고민하고 함께 싸워 줄 어른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누구를 찿기보다 먼저 나 자신부터 돌아보게 되었다.
자녀가 건강하게 독립할 수 있도록 함께 시간을 살아 내고, 앞으로의 세상을 나만의 방식으로 가르치려 하기보다 그 시대의 문화를 함께 배워 가야 한다는 생각은 늦게 자녀를 얻은 우리에게 더 크게 다가왔다.
나는 다짐했다.
나조차 살아 보지 못한 삶을 자녀에게만 살아 보라고 말하지는 말자고.
우리는 우다이푸르를 참 좋아했다.
전통이 주는 익숙함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힘이 있었지만, 그 익숙함은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흐르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람들은 여전히 모여들었지만, 그 안에서 새로운 물결은 만들어지지 않고 있었다.
흐르지 않는 물은 결국 고이게 된다.
고인 물은 한동안은 바라볼 수 있어도, 마시고 싶은 물은 되지 못한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알게 되었다.
사람을 모으는 것과,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은 다른데 이곳이 왜 여전히 사랑받으면서도, 동시에 젊은이들을 떠나보내고 있는지.
우리는 한 반짝 물러서서 우다이푸르를 다시 바라본 뒤, 시애와 다음 세대를 위해 결국 떠나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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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야다랑 한나는 많이 다르다. 그런데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면 끝없이 배우고 싶어하는 마음이다. 배우는 영역이 쫌 달라서이지 살짝 삔또가 안맞을때도 있지만 우린 영과 육을 다스리시는 주님안에서 성장하며 오늘도 중간에서 만난다~^^
뭐야 마지막 예언의 글인데 왜 중간에서 만나자는 댓글이지? ㅎㅎㅎ 참 다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