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평소에 외우(畏友)가 있었는데 남백첨(南伯瞻)이 바로 그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늙어서까지 서로 만나면 공경하고 사랑하였으되, 일찍이 무례할 정도로 허물없이 대한 적은 없었으니, 막역한 침개(針芥)의 교분이었다. 애석하게 40년 남짓 독서 궁행하다가 마침내 곤궁하게 죽고 말았으니, 천도가 이같이 공정하기 어렵다.
그 아들 윤협(允協)과 윤성(允性)이 군의 행적을 적어 가지고 나에게 찾아와 말하기를, “선친을 아는 이로 어른만한 분이 없으니 마땅히 글을 지어주셔야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문장에 능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사양했으나, 문득 생각해보건대 이 일은 사실을 기록하는 데 달려 있을 뿐이니 또한 어찌 문장으로써 하랴 하고, 드디어 행적을 적은 글을 받아서 읽어보고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군의 휘는 혁(赫)이고 백첨(伯瞻)은 그 자이다. 선계는 의령(宜寧)에서 나왔는데, 고려 밀직부사 군보(君甫)에서 비롯한다. 4대를 지나 휘 재(在)가 있으니 우리 태조를 보좌하여 개국공신에 책훈(策勳)되고 영의정 자리에 올랐고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이 분의 손자 휘 지(智)는 좌의정이고 시호는 충간(忠簡)이니 덕업이 국사에 실려 드러났다. 또 4대를 내려와 휘 응운(應雲)이 있는데 이조 참판이고 호는 국창(菊窓)으로 군에게 7대조가 된다. 대대로 벼슬이 이어져 동방의 이름난 문벌로는 반드시 의령남씨를 일컫는다. 증조는 대흥 군수인데 휘는 중유(重維)이다. 조부는 생원으로 휘는 수교(壽喬)이다. 부친의 휘는 하영(夏永)인데 문행(文行)이 있었으나 불행하게 일찍 세상을 마쳤다. 모친은 전주이씨(全州李氏)인데 정규(鼎揆)의 따님이고 계파가 태종의 별자 효령대군 보(補)에서 나왔고 선조조의 명신 이조 참판 손암(損菴) 식(拭)의 5대손이다.
군은 명릉 신묘년(1711, 숙종 37) 2월 18일에 공주의 갈산(葛山) 우사(寓舍)에서 태어났고, 영조 을해년(1755) 7월 1일에 45세로 세상을 마쳤다.
군은 6세에 부친을 여의고는 슬퍼하고 사모하여 곡읍하는 것이 어른과 같았으니 사람들이 모두 ‘옛날의 효자’라고 칭송하였다. 모친 이 부인이 현숙하여 부도가 있고 겸하여 서사(書史)에 통했는데, 사는 고을의 풍습이 무지하여 자녀를 가르칠 곳이 아니라고 하여 가족을 데리고 진위(振威)의 동천(桐泉) 옛집으로 돌아와 《소학》을 일과로 하여 가르치니, 군은 번거로이 꾸짖고 책망하지 않아도 외우고 읽기를 그치지 않았고 가언(嘉言)ㆍ선행(善行) 두 편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고무하여 장차 행할 듯이 하였다. 백부 동소공(桐巢公)이 기특하게 여기고 사랑하여 말하기를, “과연 현숙한 어머니에게 아름다운 아들이 있구나.”라고 하였다.
겨우 15, 6세가 되어서 문리가 빨리 증진되었고, 장성하여서는 경사(經史)에 침잠하고 자집(子集)에 출입하여 문장을 지음에 국량이 넉넉하고 조리가 통창하여 문사와 이치가 빛났다.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편지나 제문을 지을 때 경중과 친소가 각기 마땅함을 얻어서 그 사람이 말하고자 하나 능하지 못한 바를 말하되 바르게 하고 지나치게 하지 않았다. 군의 재능이 이와 같았으나 마침내 과거에는 떨어지고 말았으니, 바로 나은(羅隱)이 급제하지 못하고 임춘(林椿)이 곤궁했던 경우로서, 예로부터 군자가 명(命)이라고 하는 것이다.
군은 가정에서 효우를 행하고 고을에서는 충신을 드러냈다. 모친을 섬기기에 날마다 그 곁에서 모셔 기쁜 음성과 부드러운 용모로 좌우에서 받듦에 조금이라도 억지로 하는 뜻이 없었고, 만약 가르침을 받든 것이 있으면 종신토록 명심하여 행하였다. 모친상을 당해서는 슬픔으로 몸을 예제에 지나칠 정도로 훼상했으며, 3년 동안 상복을 벗지 않고 여막을 떠나지 않았으며, 모친의 언행을 찬술하여 백부 동소공에게 묘지명을 받아 간직하였다. 아우 철(喆)과는 우애가 매우 지극하여 일찍이 잠시라도 서로 떨어지지 않았고, 의복 음식의 절도에 있어서 차마 먼저하지 못하였다. 이에 자기 자제에게 효성과 우애를 경계하는 이들은 반드시 “아무를 법으로 삼도록 하라.”고 하였다.
규문 안에서는 예도(禮度)가 엄정하여 처음 결혼했을 때로부터 서로 공경하기를 마치 손님처럼 하여 오래 될수록 더욱 정성스럽게 하니, 계부 잠옹공(潛翁公)이 “우리 집안의 기결(冀缺)이다.”라고 하였다.
기일을 당해서는 한 달 전부터 이미 슬픈 안색을 보여서 망녕되게 말하거나 웃지 않았고, 재계하는 날이 되어서는 추모하는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제수는 비록 집안 형편의 유무에 맞게 했으나 반드시 먼저 주선하여 그 마음과 힘을 다하여, 항상 집안 사람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신도(神道)는 정결하니 정성이 있는 곳에 신이 곧 이른다. 비록 두 접시의 제물을 바칠지라도 마땅히 정성과 정결을 다해야만 하니 반드시 품목을 많이 갖출 것이 없다. 품목을 많이 갖추다 보면 정결함이 부족할까 두렵다.”
하였다. 제수로 마련하고 남은 음식물은 제사를 드리기 전에는 감히 입에 가까이하지 않고, 무지한 철부지 어린 아이들조차 먼저 맛보지 못하게 하였다. 집 밖에 있으면서 아직 천신(薦新)하지 않은 신물을 만나면 차마 먼저 맛보지 못하고, 친구의 집을 지나다가 묵으면서 마침 그 집의 기제사가 있으면 군은 새벽까지 단정히 앉아 제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이렇게 신을 섬기는 공경과 정성이 내외로 사이를 두지 않았다.
백숙부를 섬기고 여러 종형제들과 지냄에 진정이 넘치고 성의가 흡족하니, 보는 사람들이 누가 친부자인지 누가 친형제인지 알지 못하였다. 자질들을 가르침에 있어서 권면하고 인도함에 방도가 많아 한번 군의 가르침 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한 달이 되기 전에 절로 법도에 맞게 되었다. 고을 사람들과 처함에 온화하고 경건함으로써 서로 이루어 주고 받는 정분이 정성스럽고 흡족하여 각기 그 환심을 얻었다. 그러나 만일 옳지 않음이 있으면 반드시 의를 이끌어 깨우치고 비유하기를 온화한 말로 곡진히 하니, 듣는 사람들이 감동하고 기뻐하였다.
군은 당론이 일어난 이후로 선비들의 추향이 정도(正道)를 잃었는데도 성품이 본디 강직하고 간이하여 공부하는 사이에 교제를 반드시 조심스럽게 하고, 언론을 발함에 있어서 친구라는 이유로 붙좇아 동조하지도 권세나 지위에 위축되어 꺾이지도 않은 채, 의리에 따라 절충하여 스스로 하나의 견해를 세우니, 사람들이 모두 사랑하고 경탄하였다. 만년에는 사는 집에 존와(存窩)라는 편액을 달았는데, ‘마음을 보존한다.[存心]’는 뜻이었다. 군은 비록 학문을 한다고 자처하지는 않았으나 말과 행동이 일치하고 많은 선이 다 모였으니, 이는 진실로 마음을 보존한 가운데서 말미암아 나온 것이다.
세상을 마치게 되어서는 종당과 향리에서 비통하게 애도하지 않음이 없었는데, 계부 잠와공이 애통하게 곡하면서 말하기를,
“이로부터 우리 집안의 예악이 붕괴되고 말았으니, 내가 장차 누구에게 의지하겠는가.”
하였다. 동소공은 문장이 있고 기절을 숭상했으며 잠와공은 효제를 돈독히 행하고 학문에 힘써 마지않고 성호 이 선생을 사사했으니, 군이 군 될 수 있었던 것은 비록 그 타고난 바탕이 아름답기도 했으나 대개 가정에서 얻은 것이 많았다고 한다.
군의 전배는 남양홍씨(南陽洪氏)이며 부친은 필원(弼源)이고, 조부는 서공(敍功)이고, 증조는 찰방 익형(益亨)이고, 당양위(唐陽尉) 우경(友敬)의 후예인데, 나에게는 종모자(從母姊)가 된다. 군보다는 3세가 많고 유순하여 부도가 있었는데, 마침내 영조 병진년(1736) 3월 14일에 후사도 없이 세상을 마쳤다. 용인(龍仁) 영장곡(英臧谷) 해좌(亥坐) 언덕에 안장했다가 군이 세상을 마친 해 10월에 합장하였다. 후배는 청송심씨(靑松沈氏)며 부친은 해조(海朝)이고, 조부는 진사 일관(一貫)이고, 증조는 문과에 급제하여 좌랑이 된 한필(漢弼)이고, 안효공(安孝公) 온(溫)의 후예이다. 세 아들 윤협(允協), 윤성(允性), 윤학(允學)을 낳았는데 윤협과 윤성은 문학으로 이름을 떨치니, 보답을 누리는 이치가 아마 여기에 있음인가.
내가 노쇠하여 버려진 처지로 문사가 거칠고 졸렬하여 그윽하게 가려진 광채의 만분의 일도 드러내 밝힐 수 없으니, 오늘과 지난날을 두루 돌이켜 보면 존몰(存歿)의 감회를 감당할 수 없다. 삼가 다음과 같이 명을 붙인다.
옥은 정결하여 흠이 없고 / 玉之潔兮無瑕
금은 단련하여 더욱 강하네 / 金之鍊兮益剛
어찌 뜻은 있고 명은 없어 / 胡有志而無命
천도가 상리에 어긋나게 했던가 / 使天道而反常耶
슬프다 / 噫
[주-D001] 나은(羅隱) : 당(唐) 나라 말기의 여항(餘杭) 사람. 자는 소간(昭諫). 시에 재능이 있었는데 특히 영사(詠史)에 능하였음. 성격이 오연(傲然)하고 풍간(諷諫)함이 많았기 때문에 누차 과거에 응시했으나 급제하지 못하였음. 《五代史 卷二十四》[주-D002] 임춘(林椿) : 고려조의 문인. 자는 기지(耆之). 이인로 등과 함께 강좌 칠현(江左七賢)의 한 사람. 시문에 뛰어났으나 과거에는 여러 번 떨어져 곤궁하게 지냈음.[주-D003] 기결(冀缺) : 춘추시대 진 문공(晉文公) 때 기읍(冀邑)에 살았던 극결(郤缺). 처음 기읍에서 농사를 짓고 살면서 부부간에 서로 공경하기를 서로 손님을 대하듯이 했는데, 대부 구계(臼季)의 천거를 받아 문공에게 쓰여서 하군대부(下軍大夫)가 됨. 《小學 稽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