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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질그릇이 보배 담는 실제방법과 그 결과>의 줄거리:
예수님 믿는 것을 질그릇이 보배를 담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비유에 대한 이해가 늘 추상적입니다. 보배이신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구체적이고 실제로 내 몸 안에 가진다는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하는 것인가를 분명하게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야만 그 결과 또한 실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 결과는 특이하게 영원한 세계에 계신 하나님과 연결이 되면서 하늘의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질그릇이 보배 담는 실제 방법과 그 결과
(고린도후서 4:7~15)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2.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질그릇이 보배 담는 실제 방법과 그 결과>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질그릇이 보배 담는 실제 방법과 그 결과”
우리는 이미 질그릇과 보배 비유의 내용을 어렴풋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질그릇인 내가 보배를 담는 방법에 대해서는 선뜻 대답이 떠오르지 않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질그릇인 나에게 보배이신 예수님을 담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담음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해야 합니다.
우선 보배라는 표현에서 학자들 간에 의견이 다양하게 갈립니다. 다만 고린도 전후서를 함께 생각하면 복잡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 2절에서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빌립보서 3장 8절에서는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보배이심을 누누이 말해왔습니다. 또 십자가 사건과 부활과 승천과 우편에 이르는 연쇄 과정은 떼려야 뗄 수 없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이 그리스도 연쇄 과정이 보배이며 이 연쇄 과정 속의 예수님이 보배였던 것입니다.
이 보배를 질그릇에 담는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질그릇은 사도 바울 자신의 몸을 가리킵니다. 다만 몸이란 살덩어리 육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과 감정과 의지인 지정의의 작용이 합쳐진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정신작용이 일어나는 현장이 바로 사도 바울이 말하는 질그릇으로써의 몸입니다. 이 몸 안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보배로 담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나의 육체를 들여다보면 오장육부가 들어있기에 예수님이 담길 곳은 따로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어디에 담아야 한다는 것일까요? 이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는 것은 중요합니다. 막연하게만 생각하면 말씀의 효과가 나타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내 안에 예수님을 담는다는 말씀의 의미를 이해해야 합니다.
사람은 예수님과의 관계가 아니더라도 이미 다 질그릇입니다. 질그릇 아닌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담기 전이라도 모든 사람은 무엇인가를 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도대체 무엇을 담고 있는지가 문제가 됩니다. 질그릇으로써 무엇을 담고 있으며 예수님은 어떻게 담아야 할 것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스스로에게 “나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을 해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떠오르는 답이 “나는 사장님이다.”라고 하면 자아의식에서 사장님이라는 의식이 튀어 오른 것입니다. 그 사람은 사업이나 기업을 보배로 생각하여 담고 있는 질그릇입니다. “나는 엄마다.”라는 답이 떠오른다면 자식을 보배로 생각하여 담고 있는 질그릇입니다.
이렇듯 사람은 가장 귀한 보배를 담는 질그릇입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가 보배라고 생각하는 것을 담게 되어 있습니다. 그 보배를 담는 방식은 첫 번째로 떠오르는 자아의식 속에 담긴 것으로 나타납니다. 두 번째, 세 번째 자아의식도 있을 수 있습니다. 나라고 하는 의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요소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자아의식이 사업가인 사람의 두 번째 자아의식이 남편일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아내는 사업만큼의 보배는 아닌 것입니다. 한 여자가 “나는 회사의 팀장이다.”라는 자아의식을 첫 번째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뒤로 이어지는 “나는 아내이다.” 혹은 “나는 엄마다.”라는 자아의식들은 보배가 아닙니다.
이로부터 십자가의 예수님을 보배로 담는다는 말씀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보배는 자아의식의 형태로만 담을 수 있습니다. “내가 누구인가?”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봤을 때 첫 번째 자아의식이 십자가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생긴 자아의식일 때 예수님을 보배로 생각해서 담은 질그릇의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나올 수 있는 자아의식이란 “나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은 자다.”라는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자아의식이 나를 가리키는 가장 우선적 내용이라면 진정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보배로 담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자아의식이 여러분 속에서 가장 우선적인 자아의식인가를 항상 물어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자아의식이 엄마나 아빠일 수 있고 학생이나 선생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아의식으로는 예수님을 담을 수 없습니다. 하다못해 남자로서 여자로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상태에서는 예수님이 보배가 아닙니다. “내가 여자다.”라는 자아의식을 갖고 있는 동안에는 여자의 몸을 보배로 삼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보배로 담을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보배로 담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첫 번째 자아의식의 형태로 갖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편 예수님을 보배로 담을 때에 나타나는 특이한 결과가 있습니다. 대통령은 “나는 대통령이다.”라는 자아의식을 갖습니다. 이 자아의식에는 나라의 최고통치자라는 권력이 담겨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첫 번째 자아의식의 형태 속에 담게 되면 최고통치자의 권력을 가지고도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나타납니다. 대통령까지 갈 것도 없습니다. 내가 남편이라는 첫 번째 자아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아내라는 보배를 담은 질그릇의 상태입니다. 그런데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삼아 자아의식을 가질 때는 나타나지 않는 특이한 일이 예수님을 보배로 삼아 첫 번째 자아의식을 갖게 될 경우에 나타나게 됩니다.
그 특이한 일이란 바로 영원한 4차원 세계와의 연결입니다. 우리는 3차원 세계에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보배로 삼을 때 영원한 4차원 세계와 연결될 수 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모든 사람은 질그릇입니다. 그리고 누구나 보배가 되는 대상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어떤 보배를 담아도 내 마음을 영원의 세계와 연결시켜주는 보배는 없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상대로 “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가지면 예수님이 나라는 질그릇에 보배로 담기게 됩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우리의 마음은 4차원 세계인 천국과 연결이 이루어집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 관련하여 7절에서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라는 보배를 첫 번째 자아의식의 형태로 담은 질그릇은 영원의 세계와 연결된 질그릇입니다. 그럴 때 영원의 세계에 계시는 하나님의 큰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큰 능력이 우리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느냐에 대해 가르쳐줍니다. 8~9절을 보면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라고 하였습니다. 다만 이 말씀에서 많은 오해가 발생합니다. 우겨쌈이나 답답한 일을 환경적 문제로만 생각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큰 능력이 임해서 환경적 위기를 잘 빠져나올 수 있다, 박해를 받아도 완전히 끝장나게 하지 않으신다,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도록 솟아날 구멍을 만들어주신다는 식으로 해석합니다. 이런 식으로 환경적이고 물리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능력을 말하자면 고작 우겨쌈을 당하지 않는 정도가 아닐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죽은 자도 살리고 병자도 고치고 귀신도 쫓아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러한 일들을 하나님의 큰 능력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고,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는 것은 마음의 상태를 말합니다.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않고,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는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마음의 상태를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앞서 고린도후서 1장 8~9절에서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목숨을 끊으시려나 보다.”라고 느낄 정도로 혹독한 환난과 고통을 당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고통을 주신 이유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우겨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고, 박해를 당하고, 거꾸러뜨림을 당함도 근원적으로는 믿지 않는 사람들을 섭리하시고 주권적으로 이끌어 가시는 가운데 일어나는 일입니다. 마치 병 주고 약 주시는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하나님의 큰 능력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몸이 우겨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거꾸러뜨림을 당하는 환경적 일을 당할 때 마음이 편할 수는 없습니다. 몸이 괴로울 때 마음도 불안하고 두렵고 고통을 느낍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첫 번째 자아의식의 형태로 예수님을 보배로 담고 있으면 내 마음은 하늘과 연결이 됩니다. 내 몸이 세상을 만나서 당하게 되는 어떤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결코 마음은 몸이 당한 상황 속으로 빨려 들어가거나 끌려 들어가지 않습니다. 마음은 불안과 두려움과 불평과 원망 같은 상황에 빠지지 않고 벗어나게 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돌에 맞아 순교하셨습니다. 주석가들의 말대로 하나님의 큰 능력을 이해하자면 스데반 집사님에게는 큰 능력이 임한 것이 아닙니다. 돌에 맞아 죽었기 때문입니다. 우겨쌈을 당해도 당하지 않고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않아야 하는데 우겨쌈을 당했고 박해를 받아 죽었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에게도 해당되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 또한 로마 네로 황제의 박해에 죽임을 당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큰 능력이 끊어졌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돌에 맞아 죽는 순간에 얼굴이 천사와 같이 빛이 났습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스데반 집사님이 돌에 맞아 순교하는 순간에 보통 인간에게는 일어날 수 없는 절대적 평강의 상태에 진입해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큰 능력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에서 죽기 직전까지 얻어맞고 피를 철철 흘리는 가운데 차꼬에 채워져 지하 감옥에 던져졌습니다. 그때 기도와 찬송을 했더니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지진이 일어난 것이 하나님의 큰 능력이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몸이 괴로운 상태에서도 기도와 찬송과 감사를 할 수 있는 마음이 될 수 있었던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큰 능력의 나타남이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순교 때 누렸던 마음의 평강이나 사도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 갇혔을 때 나타난 기도와 찬양과 감사가 나타내는 하나님의 큰 능력이란 세상을 얻거나 이룸이 아닌 세상을 이김입니다. 우리는 몸에 갇혀서 일생을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배로 담았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기대할 수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는 세상을 이기는 일이 일어납니다. 세상이 몸에 어떤 압박을 가해와도 마음은 몸이 당한 환경 속에 정복되고 굴복하지 않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서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였던 말씀처럼 기쁨과 기도와 감사의 역사를 해나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큰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큰 능력은 첫 번째 자아의식의 형태 안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담을 때 나타나게 됩니다. 즉, 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가짐으로써 십자가 예수님을 첫 번째 보배로 담게 되었을 때 하늘과 연결이 되면서 하나님의 큰 능력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능력은 몸이 어떤 상황을 만나더라도 하늘의 평강을 유지하며 세상을 이김으로 나타납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도 하늘과 연결된 상태에서 기뻐할 수 있고 세상을 이기는 승리가 하나님의 큰 능력으로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믿어서 하나님과 연결되었다면 하나님의 큰 능력이 이 세상에서 물리적으로 나타나기를 바랄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아예 없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큰 능력은 내 마음에서 세상 것이 없어도 아무 문제가 없을 정도로 세상을 이기게 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배로 담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만날 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일까요? 사도 바울은 본문 10절에서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의 죽음을 짊어지고 다닌다는 말씀의 내용은 자아의식을 통해 설명드렸습니다만 다시 한번 강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보배를 담은 질그릇이 되는 것이 바로 예수의 죽음을 짊어지고 다니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죽음이 바로 보배입니다. 이것을 몸에 짊어지고 다닌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몸의 일부처럼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의 구조를 보면 목 위에 얼굴이 얹혀있습니다. 몸에는 양쪽에 팔이 달려있습니다. 몸 아래쪽에는 다리가 달려있습니다. 뱃속에는 심장이 있고 폐가 있고 위가 있고 장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의 죽음을 짊어지고 다닌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내 몸에 달려있는 오장육부의 장기나 지체라도 된 것처럼 달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첫 번째 자아의식을 달리 풀어서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만나든지 심장을 떼어놓고 만날 수는 없습니다. 대통령을 만나든 동사무소 직원을 만나든 택배원을 마주하든 심장을 떼어놓을 수는 없습니다. 혹은 불이 났다고 하더라도 심장을 떼어놓을 수는 없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죽음을 짊어진다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를 만나든 내 심장이 작동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가 내게 붙어있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예수님의 죽음에 나를 오버랩 시킴으로써 나는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이 활성화되도록 유지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내 안에서는 죽음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본문 12절을 보면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께 나를 오버랩 시키며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풀가동해야 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 되는 죽음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사람 앞에서 현장에서 나는 영원하신 하나님과 연결이 되고 그 사람과 현장에서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나게 됩니다. 내 안에서는 죽음의 역사가 진행되고 있고 예수님을 보배로 삼는 자아의식이 활성화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는 중에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과 일과 과제에는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살아계시던 공생애 때의 생명력과 기운이 나를 통해서 내가 만나는 사람과 일에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살게 하셨던 기운은 바로 아버지 뜻의 복사판 영이신 성령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은 예수님이 살아 계신 기운이었고 그 기운은 성령이셨습니다.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붙잡을 때 내 안에서는 죽음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죽은 자의 자아의식이 활성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에 예수님을 이 세상에서 살게 하셨던 생명의 기운이신 성령님이 나를 통해서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서 역사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확인함을 통하여 거짓 사도를 가려내라고 합니다. 거짓 사도는 첫 번째 자아의식이 무엇인가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상대로 하여 갖게 된 죽은 자의 자아의식이 아니라면 거짓 사도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에 “나는 사도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과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 사람의 첫 번째 자아의식이 집안의 가장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족을 보배로 여기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사도의 직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첫 번째 자아의식을 보면 그 사람이 질그릇으로써 무엇을 보배로 삼고 있으며 담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목사님이 자꾸 예배당을 짓자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그분의 첫 번째 자아의식을 갖게 해주는 보배는 예배당 건물입니다. “나는 큰 건물인 예배당에서 목회하는 목사”라는 첫 번째 자아의식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거짓 목사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보배로 갖지 않는 모든 사람들은 다 마귀에 의해서 거짓된 속임에 빠져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주로서 유일한 있음이시고 유일한 좋음이시고 유일한 주권자시라는 사실 앞에서 거짓됨이 없으려면 방법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나는 십자가에서 죽은 자다.”라는 자아의식을 가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24시간 이 자아의식의 형태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보배로 담고 있어야만 유일한 있음이시고 유일한 좋음이시며 유일한 주권자 되시는 하나님 앞에서 가장 정직하고 올바르게 처신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다른 자아의식을 갖고 예수님 아닌 다른 것을 보배로 담고 있는 질그릇들은 모두가 다 거짓입니다.
십자가 예수님을 보배로 담은 질그릇의 특징은 영원과의 연결입니다. 몸이 세상에서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마음이 몸을 통해 만나는 세상에 지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우겨쌈을 당하면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근심합니다. 이것은 세상에 지는 것이고 먹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예수님을 보배로 삼은 사람은 똑같은 우겨쌈을 당해도 마음의 평안이 유지됩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마음이 부서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거짓 아닌 참의 세계 속에 들어와 사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여러분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보배로 담는 질그릇입니다. 영원과 연결되어 몸이 마주하는 세상의 환경을 매순간 마음으로 이기는 승리자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첫 번째 자아의식 안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담는 질그릇들이 될 수 있도록 은총에 은총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