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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염려 생길 때 주 안에서 하는 기도>의 줄거리 :
하늘 기쁨을 유지하는 가장 획기적인 길은 바로 기도입니다. 주 안에서 하는 기도입니다. 특별히 살면서 발생하는 염려는 하늘 기쁨의 천적이지요. 먼저 우리는 이 기도의 목적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기도함으로써 지켜내려는 것이 무엇인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마음과 생각입니다. 실제로 염려가 생기게 한 삶의 문제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한 내가 따로 챙길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염려 생길 때 주 안에서 하는 기도
(빌립보서 4:1~7)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6.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기도는 하늘에 계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로 관계하면서 드리는 대화입니다. 그런데 창조주 하나님을 실제로 아버지로 만나서 대화하려면 조건이 있습니다. 우리는 주 안에서만 창조주 하나님을 직면하여 속을 털어놓을 수 있습니다. 주 밖에서 하는 모든 기도는 하나님께 들릴 수 없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주 밖에서 하는 모든 사람들의 기도도 내려다보고 계십니다. 그러나 주 밖에 있는 상태라면 하나님께 들리는 기도,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기도는 될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주 안에 있음이란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에 계시는 예수님 안으로 우리 마음이 들어감입니다. 그럴 때만 우리는 실제로 하나님을 대면하여 기도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를 마치며 하늘 기쁨을 유지하는 결정적인 방법을 이야기해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가 하늘 기쁨을 유지하는 방법인 이유는 바로 염려의 천적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염려는 하늘 기쁨의 천적입니다. 우리가 몸을 입고 살다 보면 문제로 인해 우리 마음속에는 염려가 생깁니다. 일단 마음에 염려가 생기고 나면 하늘 기쁨은 오간 데 없이 사라집니다. 염려가 하늘 기쁨을 잡아먹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염려가 하늘 기쁨의 천적이라면, 염려의 천적은 본문에서 언급되는 기도입니다. 기도는 염려를 잡아먹습니다. 다만 말씀드렸듯이 기도는 반드시 주 안에서 이루어지는 기도여야만 합니다. 우리가 기도의 의미를 잘 알고 할 때 하늘 기쁨을 잡아먹는 천적인 염려는 힘을 쓰지 못하게 됩니다.
본문 말씀들은 다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만 우리는 그 중에서도 6~7절에 집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미처 다루지 못한 1~5절에 대한 내용에 대해서는 십자가 온라인교회 모임에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말씀을 살펴보기에 앞서 예수님께서 기도에 대해 하신 말씀을 떠올려봅니다. 마태복음 6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주기도를 가르쳐주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고, 기도할 때의 마음가짐이 어때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가르쳐주십니다. 7~8절을 보면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할 때 사도 바울이 말하는 기도가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도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는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사람이라는 신분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이는 매 순간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심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내가 부자 관계로 연결돼있는 상태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은 주 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던 내용과 이어서 말씀드리자면 우리의 마음이 하늘 보좌 우편으로 흘러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영적인 신분 의식이 기도에 반영될 때 올바른 기도는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재벌 3세가 하는 기도와 노숙자의 기도는 같을 수 없습니다. 모든 소원이나 바람에는 신분 의식이 반영됩니다. 마찬가지로 창조주 하나님과 나 사이에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형성되어 있지 못하다면 올바른 기도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물론 입으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올바른 신분 의식의 상태는 아닙니다. 우리는 기도하기 전에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자 천국 시민권자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가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자 천국 시민권자라는 신분 의식이 기도 속에 나타날 때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올바른 기도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올바른 신분 의식을 가지지 못한 채 삶에서 주어지는 문제들을 끌어안고 해결을 간구한다면 결코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자 천국 시민권자라는 신분 의식이 반영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방인처럼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바로 그렇습니다. 세상 문제를 끌어안고 하는 기도는 이방인의 신분 의식으로 드려지는 잘못된 기도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언제나 주님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주님 안에서 주어진 영적인 사실들이 있습니다. 그 영적인 사실들을 기억하고, 그 의미가 활성화되는 중에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들어가면 하나님의 아들이자 천국 시민권자의 신분 의식을 갖게 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우리의 마음이 주 안에 머물 때 주어지는 사실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최고로 좋음입니다. 이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이자 천국 시민권자라는 신분 의식이 활성화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사실은 주 안에서만 믿음을 통해 나에게 의미 있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주 안에서만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로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관련된 많은 사실들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주로서 나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주관하고 계심은 사실입니다. 또 내 몸으로 살고 있는 삶의 모든 순간에 하나님의 주권이 닿고 있음도 사실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실 정도로 나를 사랑하고 계심도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무엇보다 좋음도 사실이고, 하나님의 좋음을 충분히 느낀다면 이 세상에서는 어떤 것도 좋거나 바랄만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러한 모든 사실들은 오직 주 안에서만 나와 연관될 수 있습니다. 주 밖에 있다면 이러한 모든 사실은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 되어버리고, 지금 당면한 삶의 문제만을 사실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 문제에 휩싸이고 완전히 사로잡혀서 문제의식을 가지고 기도합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이러한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이자 간구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하나님께 들릴 수 있는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다. 주권자로서 우리의 삶을 인도해나가실 뿐 결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주님께서는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곧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로 둔 자들이라면 하나님의 아들이자 천국 시민권자의 신분 의식을 가지고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말씀을 바탕으로 본문 말씀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의 기도는 어떻게 보자면 참 허탈합니다. 6절을 보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7절 보면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라는 내용이 이어집니다. 연결이 다소 어색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우리 생각에 기도를 했으면 그에 맞는 응답을 받는 것으로 이어져야 할 것 같은데, 사도 바울은 기도의 결과가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평강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기도를 하면 하늘 기쁨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문제가 생기면 염려가 생깁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기를 바라며 기도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기도의 응답으로 주신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순서가 반대입니다. 기도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문제 앞에서 나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셔서 염려가 발생하지 않게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생각하는 기도는 삶의 문제가 생겼을 때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 염려를 잡아먹기 위한 기도입니다. 이러한 기도를 통하여 우리 마음에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과 기쁨을 유지해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염려를 주는 삶의 문제들은 애초에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 진짜 문제는 세상이 아닌 우리 내면에 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비싼 것이 있다면 바로 사람의 마음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모시고 가질 수 있는 공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다 팔아도 하나님을 살 수는 없기에 그만큼 마음은 귀중하고 값집니다. 따라서 세상의 시시콜콜한 문제들에 마음을 빼앗긴다면 엄청난 손해를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사람의 마음은 작은 일에도 빼앗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구 전체보다도 비싼 마음을 세상일에 빼앗길 때 나타나는 현상이 바로 염려입니다. 우리는 마음을 세상에 빼앗기지 않기 위해 염려의 천적인 기도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6절을 보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 둘로 나누어보자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를 하라.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문제에 대해 염려가 생길 때, 그 염려에 마음이 빨려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이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 마음과 생각이 세상 염려에 휘말려 들어가려고 할 때,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대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기도할 때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듯이 우리의 마음은 염려라는 껍질을 깨고 나올 수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부름에서 ‘우리’가 뜻하는 바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과 나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자리에서 나를 우리라고 부르시며 내게 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 아버지’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과 나의 아버지라는 고백입니다. 이렇듯 우리가 하나님을 부를 때에는 십자가를 바라봄을 통해 부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십자가를 보면서 내가 주님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하면 우리의 마음은 주 안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주 안에 들어감으로써 올바른 신분 의식을 갖게 됩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내 아버지가 되시고, 그 아버지가 유일한 좋음이심을 알게 됩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에서 좋다고 하고, 가질만하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들이 배설물로 여겨지게 됩니다. 오직 나는 만물 위에 계시는 주님께 마음을 둠으로써 천국의 시민권자임을 느끼게 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과 내가 ‘우리’가 되면서 엄연히 존재하는 사실들이 비로소 나와 관련된 일들이자 내 것으로 다가오고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의미입니다.
기도와 간구는 비슷한 표현이지만 구분될 수 있는 차이가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주 안에서 하나님을 직면하는 대화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것들을 생각해내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내 아버지라는 것, 아버지가 유일한 좋음이시라는 것, 내가 천국 시민권자라는 모든 사실들을 주 안에서만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문제를 주시하는 동안에는 이 엄염한 사실을 다 제쳐놓게 됩니다. 문제와 나와의 관계에서 생기는 염려를 가지고 기도를 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결코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해도 효과가 없다는 기도의 무효를 주장하기 이전에 하나님에 대한 반역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반역이며,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문제로 인한 염려가 생길 때 주님 안에 들어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주님과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럴 때 주 안에서 주어지는 영적인 사실들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간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감사하는 중에 전달되어 오는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우리는 주 안에서 내게 주어지는 사실들을 기억하고 생각해내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직면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내 아버지라는 사실로부터 시작해서 내게 주어지고 있는 엄연한 모든 사실들을 기억해내서 신분 의식을 되찾을 때 하나님만을 유일한 기쁨으로 고백하게 됩니다. 그러한 올바른 신분 의식에서의 고백이 이루어지는 중에 내가 세상에서 마주하는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소원이 전달됩니다. 하나님을 직면하는 동안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집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기도와 간구를 하는 이유는 이를 통해 하나님의 뜻에 동조하고 참여하고 동의함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삶의 문제는 내가 몸으로 겪는 일이지만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주권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이 몸이 죽든 살든 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최고의 선택임을 인정합니다. 세상 사람들 눈에는 실패로 보이든 성공으로 보이든 오직 하나님의 뜻만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간구입니다. 그리고 이 몸을 움직여야 할 필요가 있다면 깨닫게 해주시기를 바랄 때 하나님의 소원이 내게 전달되고 나는 그대로 움직여 가면 됩니다.
모든 기도의 핵심은 주 안에서 주어지는 신분 의식의 반영입니다. 기도를 할 때는 주 안에 들어가서 내게 주어진 엄연한 사실들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아들이자 천국의 시민권자라는 올바른 신분 의식을 반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 4절을 보면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6절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라고 이어집니다.
감사는 무엇인가 좋은 것을 받았을 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감사함으로 아뢰라고 하였습니다. 주 안에 들어갔을 때 확인되는 많은 사실들은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좋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 안에 들어갈 때 기쁨과 감사가 생겨납니다. 내 마음에서 기쁨과 감사가 살아나는 동안에 이 세상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나의 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 세상일에 대해서는 어떤 염려도 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나를 내려다보시는 하나님은 창조주이시자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나를 알고 계시고,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며, 내게 주어질 문제에 대해 태초부터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하신 하나님은 내 삶의 어떤 순간에도 손 놓고 방관하시거나, 내가 알아서 어떻게 되기를 바라보시기만 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하나님께서는 나보다 더 앞서서 주도적이고 자발적으로 나의 삶을 이끌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닿지 않는 순간이나 삶의 영역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어떠한 문제의식이나 염려도 가질 필요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주권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 없고, 하나님의 사랑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 없기에 염려나 걱정과 불안은 천국 시민권자의 사전에는 없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우리는 여전히 염려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염려가 나오는 이유는 아직도 마귀가 가르쳐준 세상의 가치관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잘 되는 법과 망하는 법, 세상에서 통용되는 좋고 나쁨에 대한 기준이 내 안에 있기 때문에 염려가 생겨납니다. 주 안에 들어가지 않으면 마귀가 심어준 기준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당장 몸이 아프면 무조건 나쁜 일로 여깁니다. 장사가 안돼서 돈이 안 벌리면 무조건 나쁜 일로 여깁니다. 이렇게 되어야 한다, 저렇게 되어야 한다는 기준이 이미 내 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염려와 걱정이 생깁니다. 주님 안에 들어갈 때만 그러한 세상의 기준은 없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나와 관계된 모든 시간과 영역이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고, 그 하나님이 바로 우리 아버지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과 내가 ‘우리’ 됨은 내가 주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었다는 것입니다.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유지되는 한 어떠한 염려와 걱정도 생겨날 수 없습니다.
7절을 보면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염려가 생길 때 기도함으로써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은 마음과 생각의 평강입니다. 마귀가 가르쳐준 기준대로 마음에서 좋고 나쁨을 판단하고, 생각이 움직인다면 염려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장사하는 사람이 손님이 적으면 ‘큰일 났다’라는 생각이 들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주 밖에 있는 상태의 특징입니다. 주 안에 있다면 생각의 움직임도 전혀 달라집니다. ‘내가 장사하는 현장을 아버지께서 빤히 보고 계신다. 손님이 적다면 아버지께서 손님을 막으신 것이다.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아버지께서 그렇게 하셨을 때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내게 주어진 영적인 사실들을 기억할 때에 삶에 대한 생각도 완전히 달라집니다. 이것이 우리에게서 이루어져야 할 기도의 모습입니다. 문제만 생기면 사로잡혀서 ‘이래서는 안 된다, 이러면 큰일 난다.’라고 염려와 불안에 쫓기며 해결해 달라고 외치는 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는 주 안에 들어가서 주님과 내가 ‘우리’가 되고, 내게 주어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하나님 앞에서 기억해냄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주 안에서 아버지를 부르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저의 아버지가 되어주셨습니다. 제가 저를 사랑하는 것보다 아버지가 저를 더 사랑하심을 믿습니다. 저의 능력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전지전능하심으로 저를 사랑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지금 이 문제가 생긴 것도 아버지께서는 이미 알고 계셨으며, 이 문제 이후에 제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도 아버지께서는 계획하고 계심을 믿습니다.’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우리’가 되었음을 생각하고, 내게 주어지는 것들이 무엇인가를 고백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주 안에서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셨고, 아버지만이 나의 유일한 좋음이심을 믿는 것이 기도입니다. 이렇게 주 안에서 주어지는 신분 의식, 주 안에서 주어지는 은혜, 주 안에서 주어지는 놀라운 기적 같은 엄연한 사실들을 생각해냄으로써 지금 내게 염려를 발생시키는 문제는 아무것도 아닌 상태가 됩니다. 설령 암에 걸렸더라도, 당장 부도가 나더라도, 마음은 주 안에 있어야 합니다. 마음을 암에 빼앗기고, 부도에 빼앗긴다면 지구보다 더 비싼 마음을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우리 기도의 목적은 지구보다 더 비싼 마음을 지키는 것이지, 눈앞에 보이고 몸으로 만나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주 안에 들어가서 내게 주어지는 엄연한 영적 사실들을 생각해내고, 아버지 앞에서 고백하는 기도를 하다 보면 문제 또한 염려할 거리가 아니었음을 알게 됩니다. 문제라고 생각한 일은 애초에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관여할 일도 아니고, 불안해하거나 염려할 일도 아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마음을 지켜내는 것이 기도입니다.
주 밖으로 나가 있으면 내 생각은 세상을 향하게 됩니다. ‘지금 이 일이 안 돼면 앞으로 더 힘들어질 수 있고, 더 무서운 일이 벌어질 수도 있고, 나는 죽을 수도 있다.’라는 식으로 생각을 전개해서는 결코 평안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나의 아버지이심을 기억할 때, 내게 주어진 문제들이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직 하나님께 뜻이 있고 필요가 있어서 이렇게 하고 계심을 생각할 수 있을 때까지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기도가 이루어지는 동안 간구도 할 수 있습니다. 주 안에서 이미 내게 주어진 사실에 대한 감사가 넘쳐나고, 더 이상 내게 필요한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알게 된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구할 것을 아룁니다. ‘하나님! 너무 감사합니다. 이 문제도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나와 관련된 일에 있어서 아버지께서 내 몸을 통해 이루실 일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깨우쳐주시고, 그것을 행하여 아버지께 기쁨을 드릴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간구할 수 있습니다.
천국 시민권자의 사전에는 염려, 걱정, 불안은 없는 단어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사전에 없는 단어들이 생겨나지 않기 위해서 염려, 걱정, 불안을 잡아먹는 천적인 기도를 항상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 안에서 내게 주어지고 있는 사실들을 망각하지 않게 하여주시옵소서. 십자가 바라봄을 통하여 이방인이나 고아처럼 중언부언하는 못된 체질이 근절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