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지는 저 멀리 흘려버려라
내면의 나침반을 분명하게 볼 수 있도록 도와 주는 기법이 있다. 그 첫째가 목적지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탤리스와 나는 프랑스령 리비에라의 해변, 지중해의 짙푸른 바다, 거리에 늘어선 카페, 파도를 타며 우리에게 손짓하는 브리지트 바르도 등 마음속에 분명한 그림이 있었다. 처음에 우리에게는 목적지가 있었고, 그곳은 지도에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갑자기 모든 것이 진공 상태로 변해 버렸다. 아무런 목표도, 목적지도, 지도도, 길도 보이지 않았다. 구체적인 목적지가 사라지자 우리는 나침반이 남쪽을 가리키고 있음을 알았다.
목표는 방향 감각의 값싼 대체물이 될 수 있다. 인생이나 변화의 사막을 건너는 데 길잡이가 되어 줄 심오하고 의미 있는 방향을 찾는 것보다 목표를 세우는 것이 훨씬 쉽다. 우리는 목표만 달성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에 빠져서 살아 왔다. 에베레스트 산을 오르는 산악인들이 정상에서 보내는 시간은 기껏해야 5분이나 10분 정도다. 정상에 도달한 사람들은 너무나 피곤하고 지쳐서 그 순간을 만끽하지 못하며, 또 괜히 꾸물거리다가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정상에 오르자마자 또 다른 목표가 생긴다. 날씨가 사나워져 눈보라에 휩싸이기 전에 가장 가까운 캠프까지 내려가야 하는 것이다.
중년의 사막에 있는 사람에게는 멋진 오토바이를 산다거나 자기 나이의 반밖에 되지 않는 젊은 여자를 사귄다거나 하는 것이 상실감이나 외로움을 치유해 주는 일시적인 위안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신선한 생동감은 일시적으로 스쳐 지나가고, 등반할 또 다른 산이 필요해질 것이다.
살다 보면 목표가 없어서는 안 되는 그런 때도 있다. 만약 암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았다면 암과의 전쟁에서 싸워 이기는 것이 목표가 될 것이다. 주치의가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계획표까지 세워 줄 수도 있다. 이 경우에는 건강을 회복하는 것이 바로 목표,목적지가 되며 그리고 그것을 달성할 때까지 길잡이가 되어 줄 지도도 확보하게 된다. 그리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목적을 향해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이러한 목표 달성 자체가 불가능해지면 이제는 암에 걸린 상태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문제가 최대 과제로 떠오르다.
그때 바로 내 안의 나침반이 남아 있는 시간 동안 더 큰 의미를 찾을수 있도록 길잡이 역할을 해준다.
인생의 사막에서도 목표는 존재한다. 사막에도 산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산은 우리가 올바른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이정표나 길잡이가 되어 주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방향 감각이다. 먼저 자신을 안내해 줄 내부의 나침반부터 찾아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나아가야 할 방향이 분명하게 보일 때까지는 목표나 도착지는 염두에 두지 않아야 할 것이다.
탤리스와 나는 남쪽으로 갈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기차표를 살 돈도 없었고, 프랑스에서 남의 차를 공짜로 얻어 타는 것은 긴 다리와 짧은 치마 없이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다가 우리는 대학 캠퍼스 게시판에서 프랑스인 두 명이 붙여 놓은 쪽지를 보게 되었다. 한 사람은 이십 후반의 엔지니어링인 장뤽,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드라이클리닝 사업을 하다가 이제 거의 손을 놓다시피 한 오십 대 남자 앙드레였다. 이 두 사람은 각기 차가 있었는데, 서부 아프리카까지 가는 자동차 여행에 비용을 분담하고 동승할 사람을 구하고 있었다.
장뤽을 처음 보았을 때 까만 피부, 검은색 머리카락, 검은 눈동자를 보고 나는 그가 스페인 사람 아니면 북아프리카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는 알제리에서 태어났고 그의 부모는 '검은 발' 프랑스인이었다. 이 '검은 발'이라는 용어는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일어난 잔인한 알제리 독립 전쟁 기간 동안에 알제리에서 도망쳐 나와 프랑스 시민권을 획득한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대개 프랑스 남부에 정착한 이들은 조상의 땅에 정착한 이민자 신세가 되어 버렸다. 이들 가족 다수는 알제리에서 수백 년을 살아 왔었다.
알제리와 사막에 대한 장뤽의 애정은 겨울에 대한 탤리스의 혐오감만큼이나 뼈에 사무쳐 있었고 전염성이 강했다. 장뤽이 사하라 사막의 고요와 그 광대한 모래 바다를 묘사할 때면 나는<아라비아의 로렌스>의 낭만적인 이미지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뤽은 사하라 사막 중앙에 위치한 아하가르산맥의 으스스한 달빛 정경과 아직도 사하라 사막에서 살고 있는 수수께끼 같은 투아레그족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는 사막의 고원 지대에 아직까지도 완벽한 상태로 보존되어 내려오는 1만5,000점의 암벽화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주었는데,그 그림들은 8,000년 전부터 전해져 오는 것으로 사하라 사막이 프릇프릇한 사바나 초원이었던 때를 그리고 있다고 했다.
이제 더 이상 사하라 사막은 해변으로 가는 길에 가로질러야 하는 황무지가 아니었다. 나는 사막에 점점 더 빠져들기 시작했다. 장뤽의 말에 따르면 남쪽으로 가면 갈수록 여행은 더욱더 신비스럽고 경탄을 자아낼 것이라고 했다.
여행 자체가 목적지보다 더 흥미로워지는 것은 좋은 징후이다. 그것은 또한 사하라 사막에서의 생존 문제이기도 하다. 길도 없는 막막한 사막에서 운전을하다 보면 차 앞의 전방 4,5미터 밖에 안 보이는 경우도 있다. 숨어 있던 바위가 차축을 들이받을 수도 있고, 바로 그 위에 다다르는 순간까지 위험 할 정도로 부드러운 모래를 감지할 수 없다. 하지만 아래를 내려다보면 사막 그 자체가, 모래의 색깔과 조직, 단단한 정도가 변하고 있음을 알아챌 수 있다.
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위쪽을 바라보는 시간이 많다. 우리의 경우에는 해변이 목적지이기 때문에 위를 쳐다보거나 저 멀리 앞을 응시하게 된다. 눈을 가늘게 뜨고 어른거리는 사막의 지평선을 계속 바라보다 보면 사하라 사막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만다. 산의 정상에 너무 중점을 두다 보면 산 자체를 놓칠 수도 있다. 인생의 사막에서도 놓칠 수 있는 부분들이 많다. 여행 그 자체처럼.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내 친구 알론조의 아버지가 암으로 죽어가고 있다. 암은 느닷없이 찾아왔고, 진전도 빨랐다. 매주 금요일 저녁 가족이 모여서 식사를 같이 할 때마다 모두들 이렇게 같이 있을 수 있는 순간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고 한다. 말기 암은 정말 가혹한 병이지만, 우리에게 순간 순간을 충실하게 살아가라고 가르쳐주는 훌륭한 선생님이기도 하다. 그 덕분에 우리는 바로 발밑에 깔려 있는 모래를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지금을 충실하게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기 위해 누군가 죽는 그런 일이 닥칠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다.
첫댓글 여행 자체가 목적지보다 더 흥미로워지는 것은 좋은 징후이다.....순간 순간을 충실하게 산다면 여행 자체가 흥미로워질 것 같아요. 그런데 이런 저런 걱정등으로 그렇게 살지 못해서 행복하지 못한 것 같네요. 레아님 수고많으십니다^^
그렇지요,..모나리자님^^ 삶은 늘 걱정투성이 입니다.^^그래도 삶이 아름다운 이유를 이제 조금 알것같아요.^^
하나의 걱정이 끝나면 안도의 시간을 가지기도 전에 또 다른 걱정거리가 고개를 쑤욱 내밀어요. 참 신기하죠?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