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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천국은 3차원 커튼 바로 뒤에 있다>의 줄거리 :
예수님이 아가로 오신 초림은 우리가 사는 3차원의 세상으로 인간이 되셔서 오신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심판의 주로 오시는 재림의 때에는 아무래도 우리가 사는 3차원의 세상으로 오시는 것이 아닌 모양입니다. 3차원의 세상이 불에 녹아 없어지는 가운데 그동안 가려져 있는 천국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예수님이 나타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천국 심판대 앞으로 가는 셈입니다.
천국은 3차원 커튼 바로 뒤에 있다
(데살로니가후서 1:6~12)
6. 너희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7.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
8.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9.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10. 그 날에 그가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 놀랍게 여김을 얻으시리니 이는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
예수님의 재림이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우리의 실제 삶에 의미가 있으려면, 가능한 성경에 근거해서 재림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재림에 대한 지식이 완전히 정확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이란 시간과 공간과 물질과 육체로 이루어진 3차원 세상에서 살고 있는 우리의 언어로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근거하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의 생활 현장에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의미는 살아있게 됩니다.
재림에 대한 이해가 정확하지 않으면 우리는 큰 손해를 보게 됩니다. 재림의 상황이 가려져 있고 숨겨져 있는 비밀을 아는 것은 현재 우리의 삶에 아주 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너무나 비밀스러운 사실들을 알려줍니다.
먼저 7절 하 반절에 주목해봅니다.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하늘’이란 새가 날아다니고 비행기가 날아다니는 물리적 3차원에 속한 공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우주선이나 행성 탐사선이 대기권 바깥으로 나가서 마주하게 되는 우주를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본문 속의 하늘이란 하나님 보좌가 있는 천국을 가리킵니다. 재림 때 예수님께서 4차원의 천국으로부터 나타나신다는 뜻입니다.
4차원 세계는 시간과 공간과 물질과 육체로 이루어진 3차원 세계와는 구분됩니다. 쉽게 말해 영의 세계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4차원 세계에서 하늘이란 3차원의 세계에 갇혀 살 때는 상상하기조차 힘들 정도의 안락함과 기쁨이 있는 천국입니다. 우리 영인 마음이 육체를 벗게 되면 천국에 들어가 지금으로써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안락함과 기쁨을 영원히 얻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을 흔히 4차원 천국에 계시던 예수님이 3차원 세상으로 내려오시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본문의 표현을 보자면 예수님의 재림의 모습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사뭇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아기로 오셨을 때는 우리가 사는 세상으로 오신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재림하실 때는 초림 때처럼 4차원 천국의 아버지 곁을 떠나셔서 우리가 사는 3차원의 세상으로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각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염두에 둘 곳은 ‘나타나실 때에’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나타나실 때에’라고 번역된 부분은 본래 명사입니다. 직역해보자면 ‘나타나심 안에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나타나심’으로 번역된 아포칼뤼프시스(ἀποκάλυψις)는 ‘드러나다’라는 뜻의 접두사 아포(ἀπο)와 ‘숨겨지다’라는 뜻의 동사 칼립토(καλυπτω)의 합성어입니다. 즉, 숨겨졌던 것이 드러나는 상황을 ‘나타나심’으로 번역한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님의 재림을 천국에 계시던 예수님께서 이 세상으로 다시 오시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재림이라는 단어 자체가 ‘다시’를 뜻하는 두 재(再)에 임할 림(臨)자를 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나타나심은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다가 우리에게 가까이 접근해 오신다는 개념이 아니라 가려져 있음이 없어진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은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 아닌 우리에게 가려져 있는 곳입니다. 천국은 결코 우리와 멀리 떨어진 곳에 존재하는 세계가 아닙니다. 천국은 우리와 가까이 있으나 단지 가려져 있을 뿐입니다. 재림의 때가 이르면 그렇게 가까이 있으되 가려져 있던 천국이 드러나면서 예수님을 마주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쉽게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고 표현하지만 정확하게 말하자면 지금도 예수님은 이미 와계시고 보좌에 계신 하나님도 이미 와계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을 기준으로 볼 때 바로 곁에 와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말씀하시며 전도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천국과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영인 마음을 기준으로 볼 때 더 이상 가까울 수 없을 만큼 가까운 곳에 와계십니다. 다만 천국은 우리에게 가려져 있습니다. 가려져 있다가 예수님의 재림 때가 되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예수님께서는 멀리 떨어진 어딘가에서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와계셨으나 가려져 있던 상태에서 가려짐이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한편 마가복음 13장 2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늘이란 땅과는 구분된 세계였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사는 3차원의 세상과 4차원의 천국이 구분된 세계임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구름이라는 대상을 상징적으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구름을 경계선으로 생각한다면 구름 위는 천국이고 구름 아래는 사람이 사는 세상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다만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이것은 공간적인 의미에서의 구분이 아닙니다.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것은 세상과는 구분된 천국에 계시는 상태에서 나타나시게 되리라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전래동화를 보면 홍길동이 구름을 타고 다니는데, 인자가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실제로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또 영화에서 외계인들이 UFO를 타고 지구를 방문하듯이 예수님께서 구름을 타고 이 땅에 방문하시리라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구름 위는 천국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나실 때는 예수님 뒤로 이제까지 보이지 않았던 천국이 펼쳐져있음을 보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한편 주목해야 할 표현이 하나 더 있습니다. 다시 7절을 보면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불꽃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기 위하여 베드로후서 3장 10절을 참고해봅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도 하늘이 언급되는데 여기서 하늘은 3차원이 속한 우주 전체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간다는 것은 공간의 개념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진다고 하였는데 이 부분이 본문에서 언급된 불꽃과 연관성을 갖습니다.
사람의 육체로부터 시작해서 세상의 모든 것들은 물질입니다. 이 세상은 시간과 공간과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3차원의 세계가 우리 마음에 가장 가까이 와있는 4차원의 천국을 가리고 있는 커튼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재림 때가 되면 커튼이 불에 타버리듯 3차원 세계가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내 마음에서 내 몸보다도 가까이 와있던 천국이 드러나게 될 텐데, 그 천국을 배경으로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나시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 때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제까지 지구에 태어나서 살다 죽은 모든 사람들은 잠을 자다 다 일어날 것이고, 살아있던 사람들도 홀연히 변화하여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 심판대의 모습을 비유적으로 묘사하자면 천국을 배경으로 예수님이 계시고 그 앞에 놓인 공터와도 같은 곳입니다.
본문 8~9절을 보면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심판에 의해서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을 자와 예수님 뒤로 펼쳐질 천국에 들어갈 자들이 나뉘게 될 것입니다. 그 심판의 기준에 대해 우리는 지난 시간에 ‘믿음1, 인내, 믿음2’라는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본문에서는 믿음1, 인내, 믿음2로 산다는 것의 의미가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됩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생활 현장은 커튼과도 같습니다. 우리 마음 가장 가까이에 천국은 이미 와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삶에서 드러나는 믿음1, 인내, 믿음2는 천국 앞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마음에 가장 가까이 와계시지만 3차원의 세상이라는 커튼으로 가려져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가정, 직장, 시장, 학교를 비롯한 각자의 생활 현장에서 살아갈 것입니다. 심지어 식당에서 밥을 먹든지, 카페에서 차를 마시는 상황조차도 시간과 공간과 물질로 만들어진 3차원의 커튼에 가려져 있을 뿐, 실제로는 우리 마음 가장 가까이에 계시는 하나님과 주님과 천국 앞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이렇듯 천국이 3차원의 커튼에 가려져 있는 상태에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렇게 똑같은 조건에서 천국으로 들어갈 사람이 있고 지옥으로 들어갈 사람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물질로 만들어진 3차원 세계는 커튼입니다. 이 커튼에 가려져 있으나 바로 가까이 와계시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커튼에 가려져 계시지만 하나님의 좋음을 믿고 삶에 적용하는 사람들입니다.
예를 들어 아침에 일어나 배우자를 마주하는 상황을 가정해봅니다. 눈으로 배우자를 보고 귀로 배우자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그러나 눈으로 볼 수 없고 귀로 들을 수 없지만 하나님은 배우자보다도 나에게 가까이 계십니다. 이것이 3차원 세계에 가려진 상태입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본다고 이야기할 때는 그것이 반드시 물질로 이루어져 있는 대상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물질로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님을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이 커튼 뒤에 실제로 계신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믿음이란 바로 커튼 뒤에 계시는 하나님을 유일한 좋음으로 믿는 것이고, 커튼 앞쪽에서 이루어지는 3차원 세계의 삶에 하나님의 좋음을 적용하는 것입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이 가장 좋은 분이심을 안다면 돈을 좋아해서 바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좋은 분이심을 안다면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을 좋아해서 바랄 수도 없습니다.
3차원의 세상을 커튼에 비유해서 말씀드리고 있지만 좀 더 정확하게 말씀드리자면 반 투과 유리와도 같습니다. 자동차 선팅을 보면 안쪽에서는 바깥이 훤히 보이지만, 바깥쪽에서는 안쪽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3차원의 세상이라는 커튼 뒤에 계시는 하나님과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훤히 들여다보고 계십니다. 우리 쪽에서 분명히 사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확인할 수 없을 뿐입니다.
예를 들어 선팅이 진하게 된 차가 있는데 운전자가 탑승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면 더는 안에 사람이 보이지 않게 되더라도 운전자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4차원 세계와 우리의 관계가 마찬가지입니다. 시간과 공간과 물질로 이루어진 3차원 커튼은 반 투과 유리와도 같습니다. 우리 쪽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반대편에서는 훤히 들여다보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에서 하나님의 있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선팅이 진하게 된 차가 있는데 안에 아무도 없는 줄 알고 유리창을 거울삼아 그 앞에 얼굴을 들이대는 경험을 해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 갑자기 창문이 내려가면서 안에 사람이 보이면 굉장히 민망한 상황이 됩니다. 4차원 세계와 우리의 관계가 이와 같습니다. 바로 가까이에 하나님이 계시지만 3차원이라는 시간과 공간과 물질이라는 커튼에 의해 가려져 계실 뿐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예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커튼 뒤에서 온갖 짓을 하며 살아갑니다. 이러한 자들은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보이고 들리는 3차원 세상의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십니다. 당연히 나의 삶 또한 하나님의 주관 아래에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마치 하나님이 없다고 여기며 스스로 주체가 되어 살아가고자 합니다. 내 생활과 나와 관계된 일들에 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되고 안 되고를 판단하며 살아갑니다. 이러한 모습은 유일한 주체성의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서 벌어지는 꼴불견이고 경거망동일 뿐입니다.
제가 서재에 있을 때 거실에 있는 아내와는 벽을 사이에 두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저는 아내와 무관한 상태일 수 없습니다. 거실에 있는 아내의 있음을 느끼며 행동하게 됩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 가장 가까운 곳에 계십니다. 3차원이라는 커튼에 가려져 계실 뿐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4차원 천국은 내 몸보다도 더 가까운 곳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체성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살아가기에 할 수 없어서라도 하나님께서는 커튼 뒤에 계시다는 인기척을 내셔야만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태어나신 초림은 커튼 밖으로 나오신 사건이었습니다. 커튼 바깥으로 나오신 예수님께서는 마음에서 가장 가까운 천국이 바로 곁에 와 있음을 알리셨습니다. 몸의 감각이 커튼이 되어 하나님을 가려서 유일한 있음이시고 유일한 좋음이시며 유일한 주체성이심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세상에 대해 죽는 길을 제시해주셨습니다. 3차원의 세상이라는 커튼을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가르고 있는 3차원 커튼이 없다면 당연히 하나님과 직면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좋으심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유일한 주체성을 인정하면서 3차원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우리 마음이 세상에 대해 죽은 사건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대한 죽음이란 곧 내 마음을 가리고 있는 3차원의 커튼을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눈앞에 배우자가 보이면 마음에서도 배우자를 의식하게 됩니다. 그러나 배우자를 없는 것처럼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에서 배우자의 있음을 느끼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있음을 놓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비단 인간관계에서만 해당되는 일이 아닙니다. 돈 문제의 있음을 느끼는 동안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있음을 놓치게 됩니다.
그렇기에 성경은 보이는 것을 바라서는 안 됨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을 강조합니다. 로마서 8장 24~25절에서는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고 하였고, 고린도후서 4장 18절에서는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 하였으며, 히브리서 11장 1절에서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하였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 바로 앞에 계시지만 보이는 것들의 커튼에 가려져 계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실로써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체성을 인정하지 않는 채로 사는 것이 문제입니다.
7절의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라는 말은 베드로후서 3장 10절의 말씀대로 3차원 세상의 커튼은 예수님의 재림 때 녹아 없어질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와 동시에 우리는 마음에서 가장 가까이 계셨던 하나님을 실제로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이렇게 가까이 계셨고 나를 들여다보고 계시는 중에 살아온 삶의 내용들을 떠올리면 기절초풍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다면 후회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3차원의 세상이라는 커튼이 사라지고 모든 사람이 천국 앞에 펼쳐진 공터와 같은 심판대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곳에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유일한 좋음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좋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하나님의 좋음에 비교하자면 배설물로 여기게 될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좋아하고 살았던 사람들은 후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일부러 4차원 세계를 가리신 이유는 하나님의 피조물 중에서 사람만이 영적인 존재로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존재라면 최소한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에 만져지는 것들을 초월하여 있음과 좋음과 주체성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바람이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육체의 감각으로는 느낄 수 없도록 4차원 영적 세계를 가리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영적인 존재에서 육적인 존재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육체로 만나는 것들에 영인 마음이 귀속되고 종속되게 된 것입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만 있다고 느끼고 좋음을 추구하면서, 마음에서 있음을 의식하고 좋음을 욕구하는 작용이 모두 육체로 쏠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창세기 6장 3절의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는 말씀에 담긴 의미입니다. 그러나 3차원의 커튼은 예수님의 재림 때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때 사람들의 눈앞에 하나님의 좋으심과 천국의 좋음이 드러날 것이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4차원 세계는 단지 커튼에 가려져 있을 뿐입니다. 실제로 계신 하나님을 몰라라 하고 살았고, 그 좋으심에 비하면 개똥만도 못한 것들에 침 흘리며 평생을 소모했다면 돌이킬 수 없습니다.
다시 9절을 보면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신학을 하면서 많은 동료들에게 질문과 논쟁을 주고받았던 주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고 자비와 긍휼이 무한하시다면 어떻게 사람이 이 세상에서 70~80년 사는 동안에 잘못 살았다는 이유로 영원한 멸망에 처하실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는 마가복음 9장 48~49절에서 그 영원한 멸망을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고 비유하셨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물리적인 고통이 있으리라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재림 때가 되면 3차원 세상이라는 커튼은 불타 없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동안 마음에서 가장 가까이 있던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이 계신 천국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사는 동안 마음에 십자가를 붙잡았던 사람들은 유일한 하나님을 담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마주함이 너무나 좋게 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한편 사는 동안 마음으로 돈을 추구하던 사람이라면 어떨까요? 이 사람들은 절대로 하나님께 갈 수 없음을 스스로 깨닫게 될 것입니다. 유일한 좋음이신 하나님을 실제로 마주하는 가운데 지금까지 그토록 좋다고 여긴 돈은 똥만도 못하게 여겨질 것입니다. 그 좋은 하나님 앞에서 똥을 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용납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너무나 좋으심 앞에 서게 되면 모든 사람이 이러한 입장이 될 것입니다. 그 좋으신 하나님이 커튼 뒤에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좋으심을 한 번도 인정하지 못했습니다. 그 하나님의 좋으심을 얻고자 세상으로 끌려가는 죄적인 나를 죽이기 위해 십자가를 붙잡지 못했습니다. 이것을 원통하고 분하고 후회하고 고통스럽게 여기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가장 좋으신 하나님을 놓친 자신을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좋으심에 비교하자면 이 세상이 좋아서 아까워하고 바랐던 모든 가치들은 똥만도 못하게 여겨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대신 똥만도 못한 세상의 가치를 마음에 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될 때는 하나님이 그러한 사람들을 지옥에 내던지는 모습이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 대신에 개똥만도 못한 세상 가치를 품은 마음이 마땅히 지옥으로 가야 한다고 여기며 제 발로 걸어가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영원한 멸망의 형벌은 어느 사상가가 만들어낸 말이 아님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마음에서 가장 가까이 계십니다. 다만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3차원의 세상이라는 커튼에 가려져 계실 뿐입니다. 이 커튼은 반 투과 유리와도 같습니다. 내가 보지 못할 뿐이지 하나님께서는 나를 계속 보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유일한 있음이시고 유일한 좋음이시고 유일한 주체이십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을 먹고 마시고 충만히 가지기 위해서, 오늘도 나를 3차원의 세상으로 끌어들이려는 죄성에 맞서기 위해서, 주님의 십자가를 한 시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천국은 3차원 커튼 바로 뒤에 있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말씀은 한편으로는 무섭고 한편으로는 너무나 기쁩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과 성령님이 계신 천국이 나의 집입니다. 이 천국이 나에게서 가장 가까이 있으며 다만 커튼에 가려져 있을 뿐이라는 말씀을 기억하게 해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이미 천국에 들어간 자처럼 3차원의 세상을 살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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