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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마음이 돈에 꽂힌 라오디게아교회>의 줄거리 :
차갑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아서 입에서 토해내리라는 질책을 당한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는 이 세상에 있는 어느 한 가지에 마음이 꽂힌 상태입니다. 그래서 친국에서 부르시는 부름을 따라서 세상 밖으로 나가 하늘로 가는 교회를 살지 못하였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어느 한 가지에 마음이 꽂히면 나타나는 미지근함이란 대체 어떤 상태를 말씀하심인지를 알아봅니다.
마음이 돈에 꽂힌 라오디게아 교회
(요한계시록 3:14~22)
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본문은 일곱 교회 중 마지막으로 라오디게아 교회에 관한 말씀입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마음은 돈에 꽂혀 있었습니다. 다만 꼭 돈이 아니더라도 마음이 이 세상에 있는 것 중 어느 하나에 꽂힌다면 교회를 살 수 없게 됩니다.
14절을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와 관련된 예수님의 초상화가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라고 묘사됩니다. ‘아멘’의 뜻은 진실함입니다. 다만 실제 용례를 보면 주로 문장 끝에 붙어 앞서 나온 말에 대해 ‘그대로 될지어다.’라는 기원을 뜻하는 의미로 쓰입니다. 이러한 의미의 ‘아멘’이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속성을 뜻하는 표현으로 쓰였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가 생각하시고 뜻하신 모든 일을 그대로 이루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조금의 틈도 없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생각을 아멘으로 받아들이고 계시기에,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생각은 예수님을 통하여 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바꿔 말하자면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생각이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법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멘이시요’라는 말씀에는 바로 이러한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이어서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천국에 계신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 없고 귀로 들을 수 없으며 손으로 만질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천국 보좌에 계신 하나님을 경험하심으로써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만이 유일한 존재감의 대상이시고 유일한 좋음이시라는 사실에 대한 증인이셨습니다.
또 예수님을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묘사는 아멘의 뜻과 일치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피조의 세계에 대해 생각을 갖고 계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생각이 다른 곳으로 갈 여지가 없도록 아멘으로 받아들이고 계십니다. 이로부터 창조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생각은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이루어진 것이 없다는 뜻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대로 세상 만물은 나비 한 마리, 벌 한 마리, 산과 들에 있는 모든 꽃조차도 아버지의 생각을 통해 창조되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생각하시자마자 예수님께서는 그 생각을 아멘으로 받아들이셨고 모든 피조물은 예수님을 통해서 이 세상에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1장 3절에서는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한편 이러한 말씀을 통해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천국과 하나님이 계시고, 땅과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이에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와 관련된 예수님에 대한 묘사는 천국과 하나님, 땅과 사람에 대해서 올바른 태도를 유지하기 위한 방법을 알려줍니다. 그 가운데 계신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내려오셨고 우리는 예수님 안에 들어가야 천국과 하나님에 대해, 땅과 사람에 대해 올바른 태도를 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라오디게아 교회와 관련하여 예수님의 모습이 묘사된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라오디게아 도시는 지금의 튀르키예 내륙에 속한 도시로써, 에게해 연안의 항구도시였던 에베소에서 내륙 쪽으로 160km 정도 들어온 곳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이러한 라오디게아 도시는 에베소에서 출발한 물자들이 내륙으로 이동하는 길목에 위치한 무역의 요충지였습니다. 라오디게아는 사데와 마찬가지로 양모 산업의 중심지였고 무역의 요충지였던 만큼 금융업이 발달했습니다. 또 특이하게도 의학교가 있었으며 ‘브루기아 가루(Phrygian powder)’라고 불리던 안약으로 유명했습니다. 의학과 관련하여 뱀이 지팡이를 감싸고 있는 로고를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 로고가 라오디게아 의학교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한편 라오디게아는 물 사정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16km 떨어진 골로새에서 냉수를 공급받았고, 또 11km 떨어진 히에라볼리에서 온천수를 공급받았습니다. 우리는 앞서 골로새 교회와 사도 바울의 제자 에바브라디도가 세운 히에라볼리 교회에 대해서도 살펴본 바 있습니다. 골로새서 4장을 보면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와 히에라볼리 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를 사역의 한 단위로 묶었습니다.
이렇게 냉수와 온수를 따로 공급받던 지역적 특성은 16절에서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라는 말씀이 나오게 된 배경이기도 합니다. 골로새에서 출발한 시원한 암반수는 16km를 흘러오는 동안 미지근해집니다. 또 히에라볼리에서 출발한 뜨거운 온천수는 마찬가지로 11km를 흘러오는 동안 미지근해집니다.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이 미지근한 물을 무척 싫어했습니다. 토하고 싶지만 물이 없으니 할 수 없이 마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예수님의 말씀 또한 피부에 와닿게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오해를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는 말씀은 많이 오해되고 있습니다. 주석을 보면 차가움을 온전히 세상적인 상태, 뜨거움을 온전히 신앙적인 상태로 이해를 했습니다. 차가움을 예수님과 하나님에 대하여 적대적인 입장이라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해석은 너무 단편적이기에 저는 주석을 읽으며 깜짝 놀랐습니다. 이렇게 해석한다면 예수님과 하나님에 대해서 온전히 적대적인 상태를 예수님께서 시원한 물을 마시듯이 용인하시는 의미가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앙이 미지근한 자들은 토해버리시지만 오히려 세상을 가까이함으로써 예수님과 하나님에 대해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차가운 사람들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인데 말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앞서 라오디게아 교회와 관련하여 예수님의 모습이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로 묘사되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러한 묘사는 하늘과 땅 사이에 예수님이 계신 상태를 가리킵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계시던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예수님 안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20절의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라는 말씀이 이루어지는 연합의 상태를 이룰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과 연합이 필요한 이유는 예수님과 연합해야만 하나님에 대해서도 올바른 태도를 취할 수 있고, 이 세상과 사람에 대해서도 올바른 태도를 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하늘과 땅 사이에 계신 예수님을 믿는 일이 중요합니다.
본문에서 언급된 ‘차가움’이란 사람과의 관계에서 드러나야 할 태도입니다. 우리는 몸이 살아있는 동안 어쩔 수 없이 사람과 관계하게 됩니다. 이 사람과의 관계에서 차가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면 ‘뜨거움’이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드러나야 할 태도입니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라는 말씀은 문자적으로 보자면 둘 중의 하나를 택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사람에 대해서는 뜨거움으로 대하지 말고 차가움으로 대해야 하며, 하나님에 대해서는 차가움으로 대하지 말고 뜨거움으로 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과의 관계에서 차가워야 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앞서 사도 요한은 요한 서신에서 형제를 뜨겁게 사랑할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사도 요한의 서신뿐만 아니라 야고보서나 다른 서신에서도 반복하여 등장하는 요청이기도 합니다. 그랬던 사도 요한이 이제 와서 사람을 사랑하지 말라고 요청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사람과의 관계에서 차가울 수 없다면 절대로 사람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도 요한이 강조한 형제 사랑은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여 연합함으로써 마음이 하나님께 가 있는 상태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사람에 대해 차갑지 않으면 절대로 사람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사람에게 뜨거운 마음을 가졌다면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담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형제 사랑이란 우리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담아서 표현하는 것뿐입니다. 우리 마음은 언제나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본문 말씀과 유사한 예를 찾아보면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0장 34~38절에서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 사라나 독자 이삭에 대한 태도를 보면 너무 차가웠습니다. 이렇게 사람을 대하는 모든 관계에서는 차가워야 합니다. 차가움은 마음에서의 분리를 의미합니다. 내 마음이 다른 사람과 분리되어야만 하나님의 마음을 담는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뜨거움의 예도 생각해 봅니다. 요한복음 14장 8절을 보면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보여 주옵소서…”라고 하였고 예수님께서는 10절에서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뜨거움이란 예수님처럼 하나님 아버지와 온전한 연합을 이룸입니다.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이 아버지의 뜻과 생각이 될 정도로 연합을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말씀을 보면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해 천국과 하나님, 땅과 사람 사이에 계시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20절의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라는 말씀대로, 아멘이시고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며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인 예수님과 더불어 먹을 때 하나님에 대해서는 뜨겁고 사람에 대해서는 차가워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말씀을 통해 교회를 생활화는 법, 교회를 사는 법을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미지근함이란 바로 교회를 생활화하지 못함에서 드러나는 특성입니다. 17절을 보면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부자와 부요함은 라오디게아 도시의 특징이었던 금융업을 염두에 두고 등장한 비유입니다. 금융업은 돈으로 돈을 버는 영업입니다. 쉽게 말해 돈 놓고 돈 먹기를 하는 장사인 것입니다.
돈은 본래 삶에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돈이 없던 시절에는 물물교환으로 필요한 물자를 얻었습니다. 예를 들어 빵을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만든 기계와 빵을 바꾸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사람에게서 빵을 얻으려고 하다 보니 물물교환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필요 없는 물건을 계속 받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돈이 등장합니다. 이처럼 돈은 본래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얻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한편 금융업이란 교환 수단이었던 돈을 목적으로 삼는 것입니다. 현재에 이르러서는 금융업뿐만 아니라 투자와 관련된 모든 일이 돈을 목적으로 삼고 있습니다. 돈은 삶에 필요한 수단이 아닌 사람의 마음이 꽂히는 대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로부터 미지근함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무엇인가에 꽂히게 되면 다른 대상에 대해서는 건성이 됩니다. 돈에 꽂힌 사람은 돈과 관계없는 사람을 건성으로 상대하듯이 하나님에 대해서도 건성으로 상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친구와 만나고 있는데 애인에게서 전화가 옵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헤어지자고 합니다. 이 순간 옆에 있는 친구와의 대화는 건성으로 대하게 됩니다. 모든 신경이 전화 너머의 애인을 향하게 됩니다. 이것이 본문에서 언급된 미지근함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어딘가에 꽂혀서 몰입할 때는 다른 대상에 대한 미지근함이 나타납니다. 이 미지근함은 차가움과는 다릅니다. 내가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사람에 대해서는 분명한 차가움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정작 마음은 돈에 꽂혀있기에 사람을 건성으로 대하다 보니 미지근함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돈에 꽂혀있는 상태이기에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서도 분명한 뜨거움이 나타나지 않고 건성으로 대하는 미지근함이 나타납니다.
마음이 돈에 꽂힌 사람들을 보면 돈을 삶에 필요한 물건을 사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고 돈 자체를 추구합니다. 그리고 돈 이외의 다른 대상들에 대한 관계는 건성이 되어버립니다. 그러한 대상은 돈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어떤 대상에 마음이 꽂히면 나머지에 대한 관계는 건성이 되어버립니다. 분명하고 또렷한 입장을 취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렇게 마음이 돈에 꽂혀버린 라오디게아 교인들에 대해 17절에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책망하십니다. 곤고함으로 번역된 헬라어 탈라이포로스(ταλαίπωρος)는 전쟁 후에 초토화된 상황을 가리킵니다. 마치 6.25 전쟁 이후에 남한 전체가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어서 가련함은 그런 곤고한 상태에 빠져있음에도 헤어날 구멍이 없는 상태이며, 가난함이란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조달할 여력이 없는 상태입니다.
마음이 돈에 꽂힌 사람은 다른 일을 건성으로 대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주식 투자에 온 마음을 다 쓰고 있는 사람은 직장 일도 건성으로 하게 됩니다. 마음이 돈에 꽂혀있기에 오늘 주식이 얼마나 오르고 내리느냐에 모든 관심이 향하고 있습니다. 금융업이 발달했던 라오디게아 교회의 상태도 이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상황을 전쟁이 휩쓸고 간 상황과 같다고 보셨던 것입니다.
마음이 꽂히는 대상은 꼭 돈이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이 이 세상 무엇인가에 꽂혔다면 다른 일들은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해지기 마련입니다. 골프에 빠진 사람은 비거리를 늘리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그래서 책을 읽고, 개인교습을 받고, 부지런히 연습합니다. 스스로는 골프를 즐기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모든 일들에 대해서는 건성이 됩니다. 골프 외의 다른 일에는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한 처지가 되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상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명확한 뜨거움이 나타나야 하고, 사람에 대해서는 또렷하게 차가워야 하는데 마음이 돈으로 대표되는 세상일에 꽂혀있기에 명확한 태도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라오디게아 교회가 처한 영적인 문제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상태를 전쟁 후의 상황에 비유하시며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꼴이 말이 아님을 의미입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돈을 대상으로 우상 아닌 우상 숭배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무엇이든 이 세상일에 마음이 꽂힌다는 것은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다른 신을 섬기는 우상 숭배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께 올인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할 때 나에게 주어진 모든 일은 건성이 됩니다. 다만 내 입장에서 건성이 되는 것이지 나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건성으로 하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올인하는 마음을 이 세상일에 올인할 때 정말로 가져야 할 것은 갖지 못하는 거지 같은 상태가 됩니다. 가져야 할 것을 못 갖고 갖지 말아야 할 것을 가졌다면 부요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나사로처럼 세상 것은 갖지 못했으나 하나님을 가졌다면 가져야 할 것을 가진 부요한 상태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앞서 서머나 교회에 대한 말씀에서는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마음이 정말로 가져야 할 것에 대해 올인할 수 있어야 하고, 정말로 가져야 할 것에 대해 부요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갖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한다면 그 사람의 모든 생각과 판단은 잘못이고 오류이며 눈먼 자의 암중모색일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마음이 무엇인가에 꽂히면 눈이 머는 것과 같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돈에 눈이 멀었다’라고 한다면 돈만 보이고 나머지 모든 일에는 건성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일을 하든 제대로 보고 하는 것이 아니기에 다 거짓이고 잘못일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라면 자녀에게 마음이 꽂히기 쉽습니다. 그럴 때 라오디게아 교회와 똑같은 현상이 일어나게 됩니다.
사람의 마음은 무엇인가에 꽂혔을 때 극빈자가 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18절에서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분명한 입장 정리가 가능한 상태를 상징합니다. 예수님 안에 들어와서 세상과 세상 사람들에 대해서는 차갑고, 천국과 하나님에 대해서는 뜨거울 수 있는 분명한 입장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뜨거워야 하나님을 볼 수 있고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 비로소 이 세상 모든 가치나 대상이나 사건이나 문제에 대한 올바름의 진리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 들어가야만 영적으로 벌거숭이가 되지 않습니다. 영적인 가난함은 곧 영적인 헐벗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상태에서 흰 옷을 사서 입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곧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아들다운 신분을 지킴을 의미합니다. ‘안약을 사서 눈에 바르라’는 것은 이 세상에서 접하고 만나는 모든 관계에 대한 진실을 보라는 뜻입니다. 자꾸 이 세상 것들이 좋아 보인다면 눈이 먼 것입니다. 이 세상 것들이 갖고 싶어서 침을 흘리는 것은 눈 먼 자들의 행위입니다.
마음이 이 세상의 대상에 꽂혀서 그것을 가짐으로 부요한 자라고 여기고 부족함이 없다고 여긴다면 눈이 먼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로미오와 줄리엣의 경우를 말씀드렸습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반대 없이 결혼했다면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기쁨과 만족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쁨과 만족은 가짜이기에 결코 오래 지속될 수 없습니다. 세상에 꽂힌 마음이 이와 같습니다. 골프에 빠진 사람이 여러모로 노력해서 비거리를 30m 늘리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면 그 순간에는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즐거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짜 즐거움이기에 가난뱅이 중의 가난뱅이가 된 상태입니다. 마음이 골프에 다 쏠려 있기에 진짜 기쁨과 만족이라는 측면에서는 마음을 채울 수 있는 내용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이 잘 벌린다고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만족감을 느끼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가난하기 짝이 없는 바보천치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럴 때 세상과 사람에 대해서는 차가운 마음이 되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과 더불어 하늘로 올라간 마음은 하나님과 뜨겁게 하나가 됩니다. 그때 이 세상을 향해서도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셨던 예수님과 같은 일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하늘과 땅 사이에서 아버지의 마음을 전달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아버지의 마음을 세상에 전달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과 내가 더불어 먹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예수님과 연합함으로써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꽂히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에 대해서는 뜨거움이 생기고 세상에 대해서는 차가워지는 분리가 일어납니다. 그럼으로써 이 세상을 향해서도 아버지의 시각을 가지고 아버지의 뜨거운 사랑을 매개할 수 있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차갑든지 뜨겁든지 오늘도 하늘과 땅 사이에 계시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계신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뜨겁게 받아들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