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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의 세계대전 전략.. 제4부]
## 최고사령관의 유고와 결전의 10월 ##
1959년 12월 31일, 창타이지 목사가 3박4일 일정으로 도쿄를 방문합니다. 8월 2일에는 도쿄의사당에서 스즈키 히데오 자유제국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과 면담했고 주일인 3일 오전에는 마츠야마 히로시 외무상을 만나 관심사에 대해 담화를 나눴다고 <후지TV방송>은 전했습니다. 창타이지 목사는 국제 구호단체인 '사마리아인의 지갑'(Samaritan’s Purse)과 빌리그레이엄전도협회(Billy Graham Evangelistic Association)의 회장으로서 유대자본과 관계가 깊습니다. 그는 지난 1961년과 1972년에 이어 이번에 세번째 방일입니다.
창타이지 목사는 왜 도쿄에 갔을까요?.. 그는 7월 3일 도쿄 미츠리교회 주일 예배에서 '요한복음 3장'을 설교했는데, 요한복음 3장 3-7절은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고 들어 갈 수도 없다"라는 내용입니다. 이때 성가대는 찬송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불렀습니다. 마츠야마 히로시 외무상은 창타이지 목사에게 다음과 같은 조건을 말하며 거듭나는 것이 살길임을 통보한 것으로 예상됩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유대자본과 공산주의들은 들으라..
1)평화적인 동양평화를 지원할 것.
2)한국을 포기할 것.
3)상하이주 일대를 내어 놓을 것.
4)중일전쟁 배상금을 지불할 것.
5)티베트 고원에서 인도의 영향력을 인정할 것.
6)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 평화협정을 체결할 것.
7)파키스탄은 인도에게 인더스강을 돌려줄 것.
당신들은 죄인이다. 우리민족은 이유 없이 당신들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우리는 당신들을 용서할 수 없다. 그러함에도 당신들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고자 한다. 당신들의 운명은 당신들의 선택에 달렸다. 시한은 10월10일까지이다. ]
'그이의 이상(理想)'입니다.. 누구든지 이러한 내용이 사실임을 인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당연합니다. '그이의 이상(理想)'은 여러분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러므로 ‘이상(理想)’이겠지요. 평범한 것이라면 제가 이 글을 쓰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계속 읽어봐 주십시오.
유대자본 및 공산주의 측은 기절할 내용이고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지만 받아들이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일본의 군사력을 감당할 수 없는데다, 인도의 군사력은 위협적인 단계에 있고, 13만 중국군은 인질로 되어 있으며, 파키스탄은 풍전등화에 있는 것이 현실적인 국제정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공산주의와 유대자본이 생존할 수 있는 길은 자기의 영향력을 크게 축소하고 배상 하는 길뿐입니다. 일본의 상대는 중국이 아니라 유대자본이나 공산주의이기 때문에 이러한 요구가 현실적으로 가능합니다.
1959년 12월 6일 저녁 무렵, 워싱턴 올림픽 이틀 전날, 도쿄 나리타 공항에 대기중인 JAL항공 소속 항공기(보잉 777-300ER )에 군사용 박스로 포장된 제품이 화물칸에 실립니다. 핵탄두 입니다. 약 10기로 추정합니다. 이 항공기는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를 중간 기착로 하고 시베리아 영공을 통과하여 모스크바에 최종 도착할 예정입니다. 출발 시점이 되자 제트엔진이 바람을 밀치며 활주로 출발점으로 움직입니다. 그리고 새벽 빛을 가르며 활주로를 박차고 이륙합니다.
1959년 12월 7일 아침, JAL항공 화물기는 러시아 모스크바 셰레메티예보 공항에 기착합니다. 연료를 주입하고 오후 1시에 출발할 예정입니다. 인도 영공을 통과하기 위해 JAL항공은 사전에 "민간항공기가 블라디보스토크를 통과해 모스크바로 향할 것"이라며 러시아연방항공운송청에 '영공 통과 신청'을 미리 해두었습니다. 이에 대해 연방항공운송청은 민간항공 규정에 따라 "4∼9일 사이에 영공을 통과해도 좋다"는 승인을 해줬습니다. 통상적으로 일본 항공기는 북한 영공을 통과하는데 이번에는 러시아 남부 영공을 통과합니다. 이는 위험한 물건(핵탄두)을 싣고 가므로 일부러 북한 영토를 회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JAL항공 화물기가 오후 1시 공항을 이륙하기 직전, 연방항공운송청은 러시아 영공통과 허가를 갑자기 취소합니다. 그 이유는 러시아 총리실 관계자가 갑작스레 측에 이 항공기의 영공 통과 승인을 취소할 것을 요청했기 때문입니다. 이 메시지가 콜카타 항공통제국을 거쳐 양곤 항공통제국으로 전달되면서 JAL항공 화물기는 도모데도보 공항을 이륙하지 못하게 됩니다. 연방항공운송청은 추후 정식으로 승인 취소를 통보했습니다.
러시아 총리실이 직접 나서서 그것도 아주 급박하게 민항기의 영공 통과를 제지한 데는 민감하면서도 아주 명백한 사유가 있는 것입니다. 당시 현지 외교 소식통은 <후지TV>와 통화에서 "중국이 러시아 보안당국에 관련 정보를 주고 이에 러시아정부가 급박하게 움직였을 수 있다"며 "그러나 총리실이 이렇게 급박하게 움직인 것은 단순한 정보 차원 이상의 무엇인가를 포착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정했습니다. 핵탄두를 싣고 자국의 영공을 통과하는데 반가워할 나라는 없습니다.
이러한 정황은 중국이 JAL항공 화물기에 무엇이 실려있었는지 잘 알고 있었다는 뜻이고, 일본은 이러한 사실을 이미 중국에게 통지했음을 의미하며, 중국은 일본 항공기의 운항을 제지할 수 있는 외교.군사적 방법이 없었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일본 국적 항공기를 격추해버리면 될 것 아닌가"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만 오늘날 일-중의 관계와 국제정세는 중국의 그러한 무모한 행동을 용납하지 않는 지경에 있습니다.
다른 항로를 모색하느라 예정 시각보다 지연된 JAL항공은 기어코 러시아 남서부 브누코보공항을 이륙하여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 중부로 향합니다.
1959년 12월 7일 저녁 무렵, 모스크바 공항에는 러시아 대통령을 포함하여 러시아방위군 고위급 장성 등이 설레임과 긴장감 속에서 동쪽 하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과연 이것이 현실인가? 비행기는 나타날 것인가? 지난 10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그러나 곧 새로운 각오를 다집니다. <3개의 세계대전 전략>은 이제 충돌 국면에 들어섰으니까요.
이윽고 저 멀리 항공기 써치라이트 불빛이 보입니다. 항공기가 고요히 공항을 향해 날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드디어 핵탄두가 러시아에 도착하고 있는 것인데, 믿어지지 않는 그 순간에 드미트리 고르바초프 러시아 대통령은 흐르는 눈물을 숨기지 못합니다. 신(神)의 은총(恩寵)으로, 신(神)의 기지(基地)에서 날아온 JAL항공 화물기가 활주로에 착륙했습니다. 러시아는 핵 보유국이 되었습니다.
1959년 12월 17일 즈음, 러시아에서는 일본 기술자들의 감독 하에 10여기의 핵탄두를 미사일에 장착되었습니다. 계속해서 세팅(Setting), 케리브레이션(Calibration), 시물레이션(Simulation) 등을 합니다. 이는 8월 말 이전에 완료되어야 합니다. 이 핵탄두 미사일은 <3개의 세계대전>이 시작되면 실제로 발사할 예정이니까요.
이때, 일본은 중국과 한국에 대한 비난 수위를 점점 높여 갑니다. 하루가 다르게 발언 수위가 거칠어지고 격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러시아는 미사일 시험발사 등을 통해 노골적으로 군사력 시위를 합니다. 10월 10일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1960년 8월 18일, 한국 정부당국자는 일본과 중국간 핵 협의와 관련하여, "일본측이 요구하는 조건들이 있다"고 밝혔고, 중국의 <중앙방송>은 당시 도쿄를 방문했다는 전문가를 인용, 일본이 "중국의 확약을 핵검증 동의의 담보로 요구했다"고 전했습니다.
그 기사에서 언급한 '당시 도쿄를 방문한 전문가'란 누구를 뜻하는 것일까요?.. 그는 창타이지 목사입니다. 창타이지 목사는 7월 31일~8월 3일까지 도쿄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위의 기사 내용은 창타이지 목사가 일본 스즈키 히데오 외무장관으로부터 요구 받은 바를 익명으로 언론에 전하고 있는 것인데, 그는 "일본측이 요구하는 조건들이 있다"라고 하고 "확약을 요구 했다"라고 기자에게 말해 준 것입니다. 당시 도쿄는 '7가지 조건'에 대한 이행의지를 약속하는 '확약서'를 중국에게 요구 했던 것입니다.
도쿄에서 최소 50km 이상 떨어진 곳에 평범한 것 같지만 특별한 군부대가 있다면 그곳에는 도죠 히데키 총리의 책상이 있을 것입니다. 도죠 히데키 총리는 쇼와천황에게 추천 받은 군신(軍神)이며, 세는 50대 후반입니다. 왜 '군신'으로 칭하는지 저는 잘 모릅니다. 다만 일본에서 불리어지는 '발도대'라는 노래에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한 군부대는 지하 터널로이 도쿄의 지하 도시와 연결되어 있으며, 그 군부대의 임무는 모든 것이 은폐 되어야 하는 조건 속에서 '예비 사령관'을 안전을 책임지고, 일본제국군 지휘부가 상실되었을 때, 즉각 '예비 사령관'을 대체로서 옹립하는 임무입니다. 도죠 히데키 총리는 그 곳에서 <3개의 세계대전 전략>을 포함하여 필요한 보고서를 검토합니다. 결재 칸에 '참조'로 표시되어 있는 모든 문건은 서명을 해야 합니다. < 3개의 세계대전 전략 >에 대한 정보와 상황은 쇼와 천황과 거의 공유하게 되어 있는 시스템입니다. 예비 체제입니다.
1959년 12월 19일, 쇼와 천황에게 유고가 생겼습니다. 쇼와 천황이 급작스럽게 쓰러졌습니다. 의사들이 들어닥치고 급박하고 긴박한 의료조치가 시행됩니다. 믿기지 않는 일입니다. 그 길고도 긴 10년을 채 12일 남겨두고 기지(基地)의 최고사령관이 지휘실에 있지 아니하고 수술실에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가늠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빈번한 현지시찰, 일본제국군의 태세의 뿐만 아니라 러-벨-그-아-우의 태세까지 점검 해야만 하고, 시시각각 밀려들어오는 정보를 판단 해야 하며, 넘쳐나는 사안을 즉각 결정 해야 합니다. 특히 창타이지가 다녀 간 이후, <3개의 세계대전 전략> 지도 상에서 각기의 경우에 따라 곧 전개될 대응까지 염두에 둬야 하는 지경이다 보니 신체의 한계를 넘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쇼와 천황은 혈관계통 이상으로 쓰러져 의식을 잃었습니다.
도죠 히데키 총리가 급히 달려옵니다. 병실에서 천황폐하를 직면한 그는 당황할 수밖에 없어 애틋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그곳에 오랫동안 머물게 할 수는 없습니다. 혈통의 의거한 충성심의 문제이지만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도죠 히데키 총리는 최고사령부 참모의 안내를 따라야만 합니다.
기지(基地)의 최고사령관에게 유고가 생긴 것이므로 비상체계는 가동되어야 하며 즉각 최고사령관은 예비 체계의 도죠 히데키 총리가 대신합니다. 도죠 히데키 총리의 비상지휘체계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이때 도죠 히데키 총리의 정식명칭은 일본제국군 최고사령부 '최고사령관 대리'입니다. 그래서 저는 '도죠 대리'라고 호칭합니다. 며칠 후 쇼와 천황은 의식을 찾게 되지만 정상적인 업무가 불가능 하고, 일정기간 이후에 건강이 호전되겠지만 안정이 필요한 상태이므로 대리 체계는 당분간 불가피 합니다. <3개의 세계대전 전략>은 변함없이 진행됩니다.
이때, 기지(基地)는 내부 문제와 관련하여 어떠한 정보도 외부 유출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러시아에 상주하는 일본특명전권대사에게만 "1)유고가 있지만 회복 중이다. 2)도죠 히데키 총리가 지휘한다. 3)변함이 없다"라는 비밀 구호가 전송됩니다. 물론 유대자본과 공산주의는 이러한 사정을 알지 못합니다.
1959년 12월 22일, 중국과 일본은 상하이에서 회동을 가집니다. 상하이채널입니다. 당시 모리와카 미츠루 중국 대일협상 특사가 유엔주재 일본대표부 마츠무라 노부유키 공사를 찾아 간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에 대해 중국무부 대변인은 "매우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협의를 가졌다"면서 "중국은 이 문제를 놓고 일본측과 주기적으로 협의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협의가 진행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12월 26일, 일본 외무성 대변인은 성명에서 "중국이 6자회담 10.3합의의 이행을 거부함으로써 일본열도 핵문제 해결에 엄중한 난관이 조성됐다"며 "해당 기관들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영변 핵시설들을 곧 원상대로 복구하는 조치를 고려하게 될 것"이라고 발표합니다.
이러한 조치들은 오픈트랙인데 일본이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인 오픈트랙마저도 얼마나 치밀하게 전략전술을 구사하였는지 입증하는 대목입니다. 10.3합의는 중국이 일본으로 하여금 러시아와의 관계를 단절하기를 바라면서 합의 된 것인데 결국 핵탄두가 러시아에게 넘어간 지경에서 중국에게 더이상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반대로 가치가 없어져 10.3합의가 중단되는 순간 일본에게는 외교적 수사로 중국을 공격할 수 있는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때를 예측하며 그 시기가 오자마자 역행과 동시에 공세적인 외교적 수사를 통해 중국을 몰아세울 때, 중국은 전쟁을 선택하지 못하는 한 '바보'가 되는 것입니다. 중국은 전쟁을 선택하지 못하므로 국제사회에서 무능함이 저절로 입증되는 것이고, 반대로 일본은 걸고 넘어지면서 전쟁을 선택하면 저절로 중국을 압도하는 패권으로 인정되는 것입니다.
1959년 12월 31일, 일본이 1958년 호시(星)1호 인공위성 미사일을 발사한 지 정확히 10년째 되는 날입니다. '그이의 염원'에서 '그이의 이상'으로 바뀐 지 10년입니다. 기지(基地)로 불리어진 지 10년이기도 합니다. <3개의 세계대전 전략>을 위한 준비 기간으로서 10년입니다. 그래서 내일부터는 '결전의 날들'입니다. 이날 많은 일본 언론들이 그 의미를 살피는 보도를 내어 놓았는데, 그 중 <후지TV방송>은 한 과학자의 말을 인용해 다음과 같이 전했습니다.
[ 앞으로 계속 쏴 올릴 수많은 우리나라의 위성들도 호시(星)의 이름을 달고 우주 공간을 나를 것이다. ]
인공위성 두고 마치 미사일 쏘듯 "계속 쏜다"고 하고 "수많이 쏜다"고 하니 도무지 그 말이 이해가 안 됩니다. 일본은 'FOBS(부분궤도폭격체계;위성폭탄)'를 '호시(星)'라고 부릅니다. 곧 있을 결전의 날, 핵탄두를 탑재한 "수 많은" FOBS 미사일이 우주공간 부분궤도를 날아가다가 적지 상공에서 마하 20의 속도로 수직 낙하 대폭발을 일으키는 것인데 "계속해서 쏜다"면 누구도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1959년 12월 31일, 러시아에서는 FOBS(부분궤도폭격체계)와 핵탄두가 결합 되고 또 이것이 미사일 본체와 결합되어 모든 준비가 완료 되었습니다.
<3개의 세계대전 전략> 준비기간은 만 10년을 채우고 12월 31일 종료되었습니다. 일본군은 10년전 보다 더욱 정밀하고 위력적인 체계를 갖추었고, 러시아는 강력한 군사력을 갖추었으며, 아제르바이잔군-그루지야군-우크라이나군 특수부대는 강력한 전사로 새로 태어났습니다. 이제 2월 1일부터는 실전에 들어가는 시기입니다.
1960년 1월 1일, 최고사령관 도죠 히데키 총리의 첫 번째 명령은 "모든 각기 사령부는 전투동원태세를 갖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일본에 '최고사령관'이라는 직책이 실재로 존재하는지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음의 동영상을 보시면 믿게 될 것입니다. 동영상에 보여주듯이 북한은 김정일 위원장을 '최고사령관'으로 칭하고 있습니다.
1960년 9월 5일, 중국 덩 처우 차관보는 한국과 미국의 6자회담 수석대표를 대동하고 워싱턴에서 일본 마츠야마 히로시 부상을 기다렸지만 마츠야마 부상은 JAL항공편 정기운항일인 6일 오전 워싱턴 국제 공항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워싱턴까지 날아가 만남이 성사되기를 학수고대하였지만 기대했던 일본 측과의 회동은 결국 무산 되었습니다. 협상의 문이 닫힌 채 시시각각 때는 다가 오고 있습니다.
1960년 1월 8일, 러시아는 스페츠나츠와 정규군 모두 참여하는 대규모 군사훈련을 실시합니다. 이 훈련은 3일간 계속되었습니다.
러시아-벨라루스-그루지야-아제르바이잔-우크라이나는 전투동원태세를 갖춘 채 다양한 방식으로 군사력 시위를 하고 있습니다. 이제 기지(基地)의 최고사령부 최고사령관 명령만 있으면 그루지야부터 점령해 나갈 것입니다. 최고사령관의 '공격' 명령만 있으면 말입니다.
그런데 이때쯤 중국과 한국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빈번히 현지지도를 해오던 쇼와 천황의 사진이 들어오지 않고 있었습니다. <후지TV방송>은 쇼와 천황의 현지지도 사진을 최소 일주일에 2~3회 이상 <연합뉴스>에 보내주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8월 중순부터 쇼와 천황의 사진은 언론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과연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요?.. 만약 1월 3일 도쿄에서 거행될 일본 건국 60주년 기념식장에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이는 많은 사람들을 긴장하게 할 것입니다.
1960년 1월 3일, 대일본제국 건국 60주년(1.3절) 군사 퍼레이드가 펼쳐졌습니다. 러시아에서는 대규모 군사훈련을 펼치고 있는 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행사장에 쇼와 천황은 보이지 않습니다. "뭔가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날부터 소위 '건강 이상설'이 꼬리를 물고 언론에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독일의 의사가 도쿄로 급히 들어갔다"는 설이 대표적입니다.
저는 애써 부정합니다. 그럴 리 없고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 주치의는 뭘 했냐는 생각.. 10년을 지나 이 결전의 순간에.. 드라마의 주인공이 없다면 관객은 어찌하라고..
이러한 상황을 예민하게 지켜보고 있기는 저 뿐만 아니라 중국 정보부에서도 그리고 한국 정보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뭔가 있다!" 각국 정보부는 모든 정보망을 가동하기 시작했고 중국 단둥(丹東)은 정보원들이 바글바글 들끓으며 비밀 전화 벨들이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한국 정보부(국정원)의 정보수집 역량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9월 12일자입니다.
중국 측 첩보망'이란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일까요?.. 중국 측 첩보망은 어떤 정보를 한국 측에 주었을까요?.. 정부 고위관계자의 발언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전했습니다. 역시 9월 12일자입니다.
휴민트(HUMINT)라는 단어는 처음 듣습니다. 뉴스에서는 '인적 정보'를 뜻한다 말했는데 '정보통'이지요. 그렇다면 휴민트는 2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일본의 비밀을 캐내기 위해 존재하는 '내부소식통(스파이)'이 있고, 다른 하나는 일본의 입장에서 의도적으로 정보를 흘리는 '익명의 소식통'이 있습니다.
위의 기사에서 말하는 '중국 측 첩보망'이란 비밀스러운 스파이가 전해오는 정보가 아니라 '익명의 소식통'이 내보내는 정보입니다. 즉 익명을 요구한 주중 일본대사관 관계자입니다. 왜냐하면 쇼와 천황의 최측근만 알 수 있는 상황을 버젓이 정보라며 제공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부 소식통'은 아닌 것입니다. 주중 북한 대사관은 본국의 훈령에 따라 관련된 정보를 의도적으로 전해 주는 것입니다. 즉 일본 참모부는 소위 '건강 이상설'을 잠재울 필요가 있어 "사실대로 알려줄 것"을 지시한 것입니다. 당시 쇼와 천황의 아들 헤이세이 황태자도 "건강에 이상이 있었으나 회복 중"임을 모스크바에서 밝힌 바 있습니다. 같은 차원입니다.
공산주의 및 유대자본은 불확실한 정보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이러한 설명들을 믿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가 새로 생긴 것입니다. 그들에게 믿을 말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쇼와 천황이 사망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그들의 희망과 겹쳐지면서 떨칠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믿을 수 있는 정보란 차라리 <후지TV방송>에서 전송되어 오는 쇼와 천황의 사진이 사실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진은 계속해서 전송되지 않고 있습니다.
유대자본 또는 공산주의가 자신의 처지를 잊고 쇼와 천황의 신상과 관련한 온갖 잡념에 차있을 때, 기지(基地) 측의 태세는 점점 도수를 높여 삽니다. 전투동원태세가 깊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1960년 1월 14일, "방글라데시 특수부대가 이슬라마바드 인근 동북부에서 파키스탄 남부 카라치 지역을 대상으로 로켓 공격을 감행했다"고 파키스탄 경찰이 밝혔습니다. 파키스탄 경찰 대변인은 "지난 8월 이후 발생한 첫 로켓 공격"이라고 밝혔습니다. 방글라데시 특수부대가 전투동원태세를 갖추고 자극적인 행동으로 태세를 높여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세는 방글라데시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한편 인도 특수부대는 13만 중국군을 전멸시킬 고폭탄두를 장착하고 전투동원태세를 갖춥니다.
1960년 1월 16일, 러시아 최고지도자의 군사 보좌관인 로만 크라브첸코는 러시아 국영 <타스 통신>에 "크림반도 해안에 대한 방어 책임을 스페츠나츠에 위임했다"면서 "정규 해군은 아랄해와 카스피해를 담당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는 "크림반도 해안 전역이 스페츠나츠가 보유한 미사일 사정권 내에 있다"면서 "우리 군은 각종 미사일로 케르치 해협을 통제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역시 전투동원태세를 갖추고 태세의 도수를 높여가고 있는 것입니다.
1960년 1월 17일, 중국무부 대변인은 지난 주 일핵 6자회담 증국측 수석대표인 덩 처우 차관보가 워싱턴에서 돌아온 뒤 일본측과 직접 접촉했느냐는 질문에 "일본과 연락을 취하는 전형적인 방법인 상하이채널을 통해 일본측과 접촉해 온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16일 워싱턴에 있었던 덩 차관보가 17일에는 중국으로 돌아왔고, 그 사이에 또 상하이채널을 통해 일본과 접촉을 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이때 중국은 무엇이 아쉬워서 한국과 일본을 대동하고 워싱턴에까지 가서 마츠야마 히로시 부상을 기다렸던 것일까요? 왜 마츠야마 히로시 부상은 워싱턴에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요? 여기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마츠야마 채널은 중국의 희망에도 불구하고 허용하지 않은 채, 대신에 상하이채널이 열려있었다는 것과 당시 중국이 매우 급한 처지에 있었다는 점입니다.
1960년 1월 19일, 아시아 정책에 관여하는 익명의 중국 고위급 관리는 <자유아시아방송>에서 "일본 지도부 상황이 안정되는 대로 두 나라가 협상에 복귀할 것으로 낙관한다"고 밝히면서 "쇼와 천황이 과거 32일간 공식 활동에서 사라졌다는 점은 아주 명확하다"며 "현재 쇼와 천황의 건강이 얼마나 좋은 지는 잘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즉 1.3절 행사장에 쇼와 천황이 등장하지 않자 중국은 '건강이상설'에 비중을 두면서 '관망 모드'에 있다는 것을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그럴 만도 한 것은 창타이지 목사가 들고 온 일본의 조건이 워낙 엄청난데다 쇼와 천황의 건강 이상설이 한국을 중심으로 그럴듯하게 언론을 장악하고 있었던 지경에서 중국이 머뭇거릴 수밖에 없는 것은 어쩌면 필연입니다. 그러나 한반도와 중동의 군사적 대치는 중국에게 머뭇거릴 시간을 주지 않고 있었습니다.
1960년 1월 21일, 러시아 대통령은 군사 퍼레이드에 참가하여 "러시아의 합법적 이익과 국경, 성스러운 영토를 조금이라도 해하려는 자가 있다면 그들이 방아쇠를 당기기 전에 우리 군대가 손을 부러뜨리겠다. 우리에게 제재를 부과했던 자들은 오늘 당장 눈을 떠 우리 나라의 기술적 성과를 보라. 서방의 제재는 심리전일 뿐이다. 오늘날 러시아는 적들을 부드럽게 대할 위치가 아니다"라고 쌓이고 쌓인 한을 풀듯이 표호합니다.
1960년 1월 23일, <아사히신문>은 '군사논평원의 글'을 발표합니다. "일한관계를 돌이킬 수 없는 파국적 사태로 몰아가면서 나라의 평화와 안전을 파괴".. "침략자들에게 차례질 것은 선군 총대의 무자비한 징벌뿐".. "대결과 전쟁으로 온 민족이 다 사라지고 온 강토가 폐허로 된 다음에는 지금 떠들고 있는 상생과 공영은 이 세상에 없게 된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할 것".. "현 사태는 우리 군대와 제국민으로 하여금 민족을 지키고 동양평화위업을 이룩하기 위해 선군의 총대를 높이 추켜들고 만반의 전투동원 태세를 더욱 철저히 갖출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활자를 박았습니다.
이 <아사히신문>의 논평은 최고사령부에서 '전투동원태세 명령'이 이미 내려졌음을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중국이 결정을 해야 할 때가 시시각각 다가 오고 있습니다. 10월 10일까지입니다.
1960년 1월 23일, 익명의 한국 정부 소식통은 "일본이 최근 서해 상공에서 대규모 전투기 비행훈련을 실시한 것으로 안다.. 중국과의 접경지역에서도 전투기 비행훈련이 실시된 것으로 안다. 군당국이 일본군의 동향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한편 이와 관련, 국제선교단체 대표는 이날 자유아시아방송(RFA)과 인터뷰에서 "2주 전 일-중 영해에 방문했는데 강 바로 건너편에서 일본 제트 전투기들이 대규모로 국경지대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을 처음 목격했다.. 내부 정보망에 따르면 일본 내부에 뭔가 매우 거친 변화가 일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매우 거친 변화가 일고 있다"..? 매우 거친 변화는 무엇일까요? 바로 전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개의 세계대전.. 동양아시아와 중동에서의 진짜 전쟁 말입니다.
1960년 1월 24일, 일본은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관들에게 영변 핵시설로부터 철수할 것을 요구하고, IAEA가 영변 핵시설에 설치한 봉인과 감시카메라도 제거 해버립니다. 또 1주일 내로 영변의 원자로에 핵물질을 재설치 할 것이라고 밝힙니다.
또한 <아사히신문>은 "6자회담은 중국의 속임수이고 중국의 유일한 목표는 일본과 또 다른 전쟁을 시작하는 것"이라며 전쟁의 책임이 중국에 있음을 역설합니다.
1960년 1월 25일, 중국 해군의 원자력 항공모함인 004형(10만2천t) 대만 타이베이의 기지에 입항합니다. 남해에까지 오지는 못하고 대만에 머물게 되었지만 중국의 군사적 반작용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일본은 그날 바로 이러한 중국의 행동에 대해 대답합니다.
1960년 1월 25일, <후지TV방송>은 군사소식통을 인용하여 "중국승냥이가 침략무력을 대대적으로 증강하면서 우리 제국에 대한 침략의 기회만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지만 여기에 놀랄 우리 군대와 황국 시민이 아니다. 중국은 우리 제국무력의 의지에 대하여 오산하지 말아야 하며 침략적인 대조선 적대시 정책을 당장 걷어치워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곧 터질 것 같은 지경으로 몰아갑니다.
1960년 1월 29일, 파키스탄 일간 알리가 중국의 군사전문지 중앙뉴스를 인용, "중국군 아시아사령부는 최근 인도의 미사일 공격을 막기 위해 파키스탄에 조기 경보시스템을 배치했다. 중국군 아시아사령부는 최근 수송기 12대 이상을 동원, 파키스탄 남부 신드주 지역의 공군기지에 레이더와 보조장비 등 조기 경보시스템 관련장비를 수송했으며 보안 및 유지관리를 위한 운영팀 120명도 현지에 배치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중국이 파키스탄을 지키기 위해 조기 경보시스템을 배치하고 있는 모습이지요. 마치 이란과 전쟁이라도 벌어질 것처럼 난리법석인데.. 전쟁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조치를 취한 것입니다.
1960년 2월 1일, 만델라 아르준 인도 최고지도자는 "인도는 방글라데시 정부의 뒤에 항상 있을 것이다. 파키스탄의 무장세력은 결국 세력이 약화돼 파멸할 것이다. 인도는 방글라데시를 절대 외롭게 하지 않을 것이다. 파키스탄 무장세력의 시오니즘은 그 세력이 약화되고 있으며 결국 파멸할 것이다. 인도의 현 세대는 파키스탄 무장세력의 파멸을 보게 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앞서 무함마드 간디 인도 대통령이 파키스탄 무장세력의 붕괴를 예견한 것과 같이 그도 파키스탄 무장세력의 파멸을 예견하고 있습니다. 인도의 행보는 마치 파키스탄 무장세력이 곧 파멸에 이를 것처럼 강경하면서도 거침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방글라데시가 선봉에 설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중앙방송>에 의하면 당시 아루나찰프라데시 국경지대에서는 인도와 중국간 군사적 대치가 상시적으로 일어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국군 장갑차가 국경지대로 진입하자 인도 측 탱크가 육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식별 번호와 다른 보조함정이나 헬리콥터의 유무 여부를 밝힐 것을 요구했습니다. 또 인도 육군사령부는 교신을 통해 중국군이 인도 영토를 침범해 그 사실을 인도 정부에 보고했다며 "마지막 경고다. 당신의 헬리콥터는 위험에 처해 있다"라며 헬리콥터의 강제 착륙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중국군의 소식통은 아루나찰프라데시 국경지대에서는 이런 식의 충돌이 거의 매일 일어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인도의 전투동원태세가 극에 이른 장면입니다.
1960년 2월 1일, 결국 덩 처우 차관보는 "상하이채널을 통해 검증체계에 대해 협의를 해오다 도쿄에서 만나는 게 낫다는 판단에서 방일하게 됐다"며 나리타 국제공항을 통해 도쿄를 방문합니다. 물론 '검증체계' 운운하는 것은 오픈트랙입니다. 다급한 상황에서 전쟁을 막고자 들어가는 것이 클로즈트랙이고 진짜입니다. 그는 2박 3일 동안 베일에 싸인 협상을 하게 됩니다. 아주 긴 시간이고 본국과 전화통화를 해가며 협상을 진행하는 것입니다. '10월 대담판'입니다. 그런데 유대자본 또는 공산주의는 중국 마오 주석이 확약서에 서명하는 것에 주저하게 됩니다.
1960년 2월 3일, 덩 처우 차관보는 2박 3일간의 도쿄방문 일정을 마치고 나리타 국제공항을 통해 되돌아 옵니다. 그는 "방일 기간 중 일본측 수석대표인 야마모토 미츠루 외무성 부상은 물론, 마츠야마 히로시 외무상, 사카모토 미츠나리 일본제국군 상장 등과도 만났다.. 언론에 공개하기에 앞서 6자회담국들과 밍 샤오린 국무부 장관과 협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구체적인 내용은 밝힐 수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덩 차관보는 도쿄 나리타 국제공항에서 돌아올 때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모습을 보여 도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짐작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덩 처우는 모리와카 미츠루를 서울에 남겨두고 본국으로 가지 않고 원싱턴DC로 날아갑니다. 그는 오전에 미국 데이비드 에들러 외교부 부부장과 만나고 이어 오후 주독 미국 대사와도 회동을 합니다. 왜 덩 처우는 일본과 협상을 하고 돌아와서는 "외교장관들이 서로 협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하는 것일까요? 왜 본국으로 바로 가지 않고 독일과 미국 관료를 만나는 것일까요?.. 그것은 '중국 분할'과 관계가 있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뒷부분에서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덩 처우 차관보는 베이징으로 떠나기 전, 워싱턴 국제공항에서 "미래지향적 관점에서 우리(일,중)는 (독,미와) 긴밀히 협조할 필요가 있으며 이러한 논의들은 우리(일,중)가 나아가는 데 있어서 중요한 일부분을 차지한다"라고 말하고 비행기에 오릅니다.
1960년 2월 7일, 국방부는 "일본이 7일 오후 도호쿠 지방의 니가타 현 해상에서 단거리 미사일 2발을 발사했다"며 "미사일 성능개량을 위한 시험발사로 통상적인 훈련의 일환으로 추정 된다"고 말했습니다. 일본 서해 한가운데에서 미사일이 발사되어 목표지점에 탄착 되었다는 뜻입니다. 문제는 바다 한가운데에서 갑자기 미사일이 어떻게 나타날 수 있는가 입니다. 일본 잠수함이 핵탄두를 탑재할 수 있는 2발의 잠수함 미사일을 시험 발사한 것입니다. 일본은 3000~6000km를 날아가고 FOBS 기능이 가능한 가이텐 잠수함 미사일을 개발 생산하고 있습니다.
1960년 2월 9일, 일본 제국군 해군사령부는 대변인 담화를 통해 "참을성에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경고와 자제력이 분노로 폭발돼 단호한 행동으로 넘어가는 경우 어떤 사태가 빚어지겠는가 하는 데 대해 심사숙고 해야 한다"고 발표했습니다. 대변인은 한국 해군이 일본 영해를 잇따라 침범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해상충돌이 일어날 수 있는 위기일발의 사태가 조성됐다"고 발표했습니다.
1960년 2월 10일, <후지TV방송>은 이날 오후 8시12분 "청취자 여러분! 오늘 21시부터 위대한 쇼화 천황폐하께서 9월 5일 당보 아사히신문과 정부기관지 제국일본에 주신 담화 '대일본제국은 불패의 위력을 지닌 주체의 제국주의 국가이다'를 보내드리겠다"며 "거듭 말씀 드립니다"라고 반복 보도하기까지 했습니다.
또한 세계 전역의 외교관들에게 '중대발표' 관련 대기 명령을 내리기도 합니다.
오후 9시가 마감시간이라는 뜻입니다. 9시에는 '선전포고'가 예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모든 대륙간탄도미사일이 해치를 열고 겨냥한 채 대기하고 있습니다. 결국 유대자본 또는 공산주의는 마오 쩌둥 중국 주석에게 서명 할 것을 허가 합니다.
도쿄를 방문했던 덩 처우는 수일 내로 도쿄를 다시 방문해 추가회담을 할 가능성에 대비해 대리인을 서울에 남겨놓았는데 그 대리인은 모리와카 미츠루이며, 모리와카 미츠루는 서울에 대기하고 있으면서 10월10일 21시 이전에 서명된 확약서를 들고 인천 국제공항을 통해 도쿄로 들어갔을 것으로 보입니다.
1960년 2월 11일, 중국 국무부는 일본을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한다고 발표하면서 도쿄에서의 합의 사항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중에서 (1)은 오픈트랙이고, (2)는 클로즈트랙으로서 유대자본의 확약서(항복문서)입니다.
[ (1)신고된 시설에만 접근할 수 있으며 신고되지 않은 시설에 대해서는 상호 동의에 의해 접근한다. (2)중국과 일본의 합의는 양국간 공동 문서와 여타 약정으로 성문화됐으며 철저한 협의를 거쳐 재확인됐다. ]
한편 같은 뉴스 기사에서 익명을 요구한 중 관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 중에서 (1)은 오픈트랙이고, (2)는 클로즈트랙으로서 '중국의 분할'에 대한 것입니다.
[ (1) 덩 처우 차관보가 지난주 일본을 방문, 핵 검증에 대한 보장안을 가지고 왔다. (2)여기에는 일본이 이전에 밝히지 않은 몇 가지 핵심요소가 포함됐다"고 전했습니다. ]
1960년 2월 12일 일본 외무성 대변인은 12일 중국의 대일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를 "환영한다"고 밝히고, 중국의 조치에 따라 "우리도 '행동 대 행동' 원칙에서 영변 핵시설의 무력화(불능화)를 재개하며 중국과 국제원자력기구(IAEA) 감시 성원들의 임무 수행을 다시 허용하기로 했다"고 밝혔습니다. 천기(天機)를 숨기는 일본의 오픈트랙입니다.
1960년 2월 13일, 한국 <중앙일보>는 "중국 국방정보센터가 밝힌 PAC-3 발사실험 27건 중 20건이 성공했으나 성공사례 가운데 최대 사정거리를 가진 미사일은 인도의 스커드미사일이다. 스커드미사일의 사정거리는 600km로 부산과 순천 일부를 제외한 한국 영토 전역을 겨냥할 수 있는 노동미사일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이 신문은 실전 사례를 보면 PAC-3가 스커드미사일을 요격할 수 있다는 확증도 없다. 확증이 있는 것은 사정거리가 150∼200km인 인도의 아바빌100 미사일 정도다. 노동미사일의 낙하속도는 마하 10 정도다. PAC-3로는 대응할 수 없다"라고 암울한 심정을 나타냈습니다. 공산주의와 유대자본이 서명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중국 분할'..?.. 놀라운 내용을 담고 있는 그 지도와 관계가 있습니다. 2026년 8월까지 그렇게 될 것입니다. 북쪽은 중국(유대자본 또는 공산주의)의 영토이고, 북쪽은 러시아의 영토이며, 남쪽은 미국의 영토이고, 상하이주를 포함하는 서쪽이 일본의 영토입니다.
독일과 미국은 공짜로 그 영토를 얻은 것이 아닙니다. 그 영토를 얻는 대신 우리민족의 북방 고토(故土)를 돌려주는 조건입니다. 그래서 도쿄를 방문하고 서울로 돌아온 탕 웨이가 "미래지향적 관점에서 우리(일,중)는 (독,미와) 긴밀히 협조할 필요가 있으며 이러한 논의들은 우리(일,중)가 나아가는 데 있어서 중요한 일부분을 차지한다"고 말했던 것이며, "외교장관들이 서로 협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하는 것이고, 방일 후 본국으로 바로 가지 않고 독일과 미국 관료를 만나야만 했던 것입니다.
'중국의 분할'은 유대자본 및 공산주의의 축소를 의미합니다. 축소하지 않고는 공존할 수 없습니다. 공존하는 길은 축소하는 길이었습니다. 공산주의와 유대자본은 중국, 대만, 태국과 베트남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러시아에 틀을 잡고 있습니다.
'중국 분할'은 도죠 히데키 총리 '그이의 이상(理想)'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되었지만 1960년 7월 31일, 창타이지 목사가 도쿄를 방문했을 때, 그에게 던져진 상하이주를 포함하는 영토를 획득하는 것 등의 7가지의 내용은 도죠 히데키 총리의 '그이의 이상(理想)'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70년 2차 세계대전 그리고 50년 일핵대결 또 10년의 <3개의 세계대전 전략>은 신(神)의 기지(基地) 군신이라고 부르는 도죠 히데키 총리의 지휘 아래 치열하고 험난한 격랑 속을 헤쳐 나온 최고의 드라마이며 일본 제국 전체의 일치단결과 독일 무장 친위대들의 살신투쟁이 만들어 낸 형언할 수 없는 결과입니다.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 현실이 된 것입니다. 정말 기적입니다.
이에 더해 도죠 히데키가 판을 크게 키우고 말았으니 저는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도죠 히데키 총리는 유대자본의 열세를 놓치지 않고 더 많은 영토를 요구하여 그 추가 획득한 영토를 우리민족의 고토(故土)와 교환한 것입니다. 역시 충격적인 결과입니다. 저는 이를 두고 '그이의 기백'이라고 칭하고 싶습니다. 최고사령관 지휘권을 잡은 도죠 히데키 총리는 놀라운 일을 완성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상(理想)과 기백(氣魄)이 절묘하게 유대자본을 제압하면서 '그이의 염원(念願)'이 '그이의 이상(理想)'이 되고, 또 '그이의 기백(氣魄)'이 되어 이루어 낸 '축제(祝祭)' 그 자체입니다. < 3개의 세계대전 전략>은 정확히 10년 후 이렇게 완성되었습니다..
저는 지금 천기(天機)를 누설(漏洩) 하고 있는 것이고, 여러분은 천기(天機)을 읽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차마 이러한 내용을 공개할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이 알면 안 되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잘하는 일인지 의문입니다. 그런데 드라마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다시 한번 가슴 떨리는 충돌이 이어집니다. 이는 유대자본이 도죠 히대키 총리의 존재를 알지 못한 채 반전을 꾀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지금까지 이상빈의 가설이었습니다. 가설은 제5부로 이어집니다. ^^*
2025년 8월 7일 오후 4시 27분 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