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카라
'사람이 시대를 만드는가, 시대가 사람을 만드는가'하는 명제가 있다. 毛澤東 같은 사람이 있어 대장정이 가능했고 中國은 통일됐다. 中國 공산당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이 대국이 된 中國에서 毛澤東 같은 혁명가가 나타날 수 없고, 나타난들 일개 필부로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비슷한 추론을 할 수 있다. 淸나라의 수도 北京에서 멀리 떨어진 上海 같은 대도시가 있어 반란을 도모할 수 있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같은 노동자, 학생이 많은 산업도시가 있어 레닌은 러시아 혁명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필리핀의 민다나오 섬에 회교반군이 저항할 수 있고, 胡志明이 프랑스와 美國을 상대로 현대 전쟁에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베트남의 지형 때문이다. 한편 작은 어촌이었던 蔚山이나 작은 농촌이었던 龜尾가 거대도시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朴正熙 대통령의 개발정책 때문이다.
1920년대 인구 2만명에 불과했던 앙카라(Ankara)가 인구 500만 명의 거대도시로, 이스탄불 다음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케말 파샤(Kemal Pasha)가 이곳을 터키 공화국의 수도로 정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도시를 만든 것이다. 제2의 도시, 아나톨리아 고원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내륙도시이다. 그러나 앙카라는 '世宗市'와 같이 신생도시가 아니라 오래전부터 인간이 거주해 온 역사적인 곳이다. 히타이트 제국(BC 2000)→알렉산더 대왕(BC 333)→로마 제국(BC 189)→비잔티움 제국(330~1453)의 지배를 받았다. 그 중간에 셀주크 터키, 몽골 침략, 페르시아, 아랍의 침략, 무굴 제국의 침략을 받았다. 그리고 오스만 제국의 지배(1360~1923)를 받았다. 앙카라의 구도심 우루스(Ulus)에는 히타이트 제국부터 로마 제국, 비잔티움 제국, 오스만 제국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어 지역 전체가 박물관이다. 그리고 신시가지인 예니셰히르는 터키 공화국의 수도의 관공서, 대사관 등의 현대식 건물이 있는 계획된 도시이다.
앙카라는 평균고도가 1천m가 되는 고원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대륙성 기후이다. 육상교통의 중심지로 발전해 왔다. 지금은 도로, 철도, 항공로가 연결되어 있는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 도시이다. 이스탄불과 쌍벽을 이루는 아나톨리아 고원의 도시이다. 중앙아시아와 교류가 많다. 고원지대이므로 포도와 올리브가 자라고 과일이 풍성하다. 고원지대의 건조한 기후에 잘 적응한 앙고라염소, 앙고라고양이, 앙고라토끼가 유명하다. 여기 '앙고라(앙골라)'는 앙카라의 말이 와전된 것이다. 앙고라염소에서 추출되는 모헤어(mohair)는 고급섬유로 세계적인 명성이 높고, 세계에서 가장 많이 생산된다. 앙카라의 전통 시장에는 포도, 말린 견과류가 유명하다.
어느 나라건 민족의 영웅은 있다. 그러나 터키의 초대 대통령 아타튀르크(Ataturk)만큼 사후에 국민의 사랑을 받는 지도자는 보지 못했다. 케말 파샤 아타튀르크는 '터키의 아버지'란 뜻이다. 터키 공화국의 국부라고 부른다. 그는 그리스의 마케도니아에서 태어났다. 당시 발칸 반도 전체가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다. 제1차 세계대전에 오스만 제국이 참여했고, 전쟁에 졌다. 그러나 케말 파샤가 지휘하는 부대는 승리했다. 갈리폴리 해전의 승리는 유명하다. 1915년 2월 제1차 세계대전 때 英國과 프랑스 연합군이 오스만 제국의 다르다넬레스 해협의 갈리폴리에서 상륙작전을 펼쳤다. 케말 파샤 이끄는 군대가 반격해 英國의 해군을 격파했다. 패전의 책임을 물어 英國의 해밀턴 사령관이 해임되고, 처칠 해군장관이 실각하는 사태까지 이르렀다. 갈리폴리 전쟁으로 케말 파샤는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른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만 제국은 패배했다. 英國,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스가 전략적인 요충인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분할 점령했다. 케말은 독립운동의 거점을 앙카라로 잡고 3년에 걸친 독립전쟁을 했다. 특히 앙카라 근교 사카르야 전투에서 승리해 1922년 8월 30일 외세를 몰아내는데 성공하고 터키 공화국으로 독립했다. 케말 파샤는 초대 대통령이 된 이후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그는 이슬람의 종교국가로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세속주의를 택했다. 여성 교육권의 인정, 일부일처제, 여성복장의 자유화, 이슬람 曆을 폐지하고 西洋曆(그레고리 曆)으로 대체했다. 아랍문자를 로마자 표기로 바꿨다. 1930년에는 여성에게 투표권을 주었다. 개혁의 내용을 보면 서양화이고 근대화이다. 그는 오스만 제국이 붕괴하는 것은 그 시대에 적응하지 못했던 탓이라 생각했다. 중동의 아랍국가 중 유일하게 산업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던 계기를 만들었다. 문명의 중심이 서유럽이었고, 서유럽과 소통을 위해 서양의 기준에 맞춘 개혁이었다. 그 중심도시가 수도인 앙카라이다.
2015년 5월 14일 목요일 大邱내일신문 朴贊石(전 慶北大 총장·국회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