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 마라, 아침 묵고 치우는데 불이 난 기라. 판공장 아아들이 불 질렀다 안 카나, 조방 다니는 애기들이 많이 죽었다 아이가."
1955년 3월 1일 아침 8시 매축지 마을에 큰불이 났다. 김태식 할머니가 25살, 신영자 할머니는 15살이었을 때였고, 너무 끔찍한 사건이어서 지금도 엊그제 일같이 기억하고 있었다. 마을 남쪽 길 건너에 쌓아둔 미군용 휘발유 드럼통에서 새어 나와 땅에 밴 기름띠에 자개 공장 직공들이 확인한다고 갖다댄 성냥불이 마을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야간작업 마치고 돌아와 곤히 자던 조방 여공들의 희생이 컸다. 한 집에서 9명이 떼죽음으로 발견되기도 했다.
日 귀환 동포 주거지 매축지마을
미군 드럼통 기름띠 성냥불에 발화
여공 떼죽음당하고 터전은 잿더미
도리 없이 얼기설기 새집 지어
골목끼고 12집씩 24집 한 블록
젊은이 떠나고 노인과 빈집만 남아부산 동구 범일5동 6통(옛 주소 좌천3동 68번지) 일대는 1926년 7월 이후 바다를 매축한 지역 중 1932년에 매축을 완료한 제2차 공사 구역이다. 매축 후의 공사정리와 관리 등이 제대로 되지 않은 듯 군데군데 물웅덩이가 패었으며 매축 때 쌓아 놓은 축대 등이 부실하여 허물어져 있었다. 많은 돈과 인력을 들여 매축했던 이곳이 상당시간 방치되었음을 증언하는 자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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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축지마을에선 집 앞에 턱을 만들어 큰 통을 놓아두고 그 안에 물과 연탄을 보관한다. |
이곳 동편(주한미군 제55 보급창고)은 일본 군마(軍馬) 관리 지역이었고, 일제강점기 말기 일본은 이곳 매축지마을에는 각 처에서 징병해 온 군인들을 일시 수용하기 위한 임시시설을 짓고 있었는데, 시설이 완성되기 전에 해방이 된다. 그리고 해방 후 일본 등지에서 귀환해 온 동포들의 임시수용시설로 제공되면서 지금과 같이 특이한 집단주거지 형태로 조성되었다. 한 지붕 밑에 가운데 벽을 중심으로 앞뒤로 부엌과 방 한 칸의 5평 칸막이 집들이 겹으로 길게 늘어섰다. 대오리로 발을 엮어 안팎으로 진흙(매축한 곳에서 가져온 듯)을 발라 초벽을 쳤다. 더러는 짓다가 중단되어 문도 없이 뼈대만 남은 집을 후에 들어온 귀환동포들이 완성하여 살았다. 좁은 골목 좌우로 집들이 줄을 지어선 이곳으로 6·25 피란민들이 들어와 구석구석에서 피란촌을 이루었다. 남새밭을 잠깐 빌리자며 그 터에 판잣집을 짓고 붙박여 살았다. 이렇듯 판자촌 일색인 이곳에 불이 나서 개울 서쪽과 남쪽의 매축지 마을이 모두 불탔다.
미군용으로 적재해 둔 기름 드럼통이 화재의 원인임을 안 미 고문단에서 진상조사를 나왔다. 카메라로 불탄 현장을 담아 보상자료로 삼으려 했지만 잠깐 한눈판 사이에 카메라와 필름이 든 가방을 도난당하고 만다. 화재현장 증빙자료를 분실했으므로 피해보상금 청구는 휴지 조각이 되고 말았다. 별 수 없이 집 지을 능력이 있는 사람부터 집을 짓기 시작했다. 옛 구획대로 지었다. 집짓는 방식은 제 나름대로였다. 그래서 집 모양이 일정하지 않다. 흙벽을 친 것이나 지붕을 올린 소재, 지붕높이들이 일정하지 않다. 그러나 부엌이 골목을 마주하고 있다든지 대문 없이 4짝의 유리문으로 현관을 대신하는 것은 모두가 동일하다. 근래에 현관 앞에 50㎝ 너비로 시멘트 턱을 만들어 검붉은 플라스틱 고무통을 놓고 연탄을 보관하거나 물통으로 쓴다. 그리고 장독, 세탁기들도 놓았다. 비좁은 집안의 살림살이를 골목에 내다 놓았다. 골목을 끼고 12집씩 겹으로 모두 24집이 한 블록을 이룬다. 더러 이웃을 사들여 평수를 넓히거나 2층으로 개조도 하고, 타일이나 스텐인리스로 벽이나 창문을 치장하지만 화장실은 공동체계이다. 골목길은 혼자만 걸을 수 있는 좁은 길이며 비가 오면 진창이다.
여기서 자란 자녀들은 제 갈 길 찾아 모두 떠나 노인들만 남았고 그나마 빈집도 자꾸 늘어난다. 어둡고 궁색하게만 살아온 이 마을에 꿈을 나누어 줄 수 있는 특별 묘안은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