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안강평야 끝자락에 조선 시대 양반들이 살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통마을이 있다. 양동마을이다. 조선 중기 이후 사대부들이 살던 고택과 초가집 130여 채가 원형 그대로 보존됐다.
양동마을은 월성 손 씨와 여강 이 씨가 모여 사는 집성촌이다. 특이하게 두 성씨가 모여 산다. 양동마을 주민들은 이에 대해 두 가문이 한편으로는 경쟁하면서도 배려를 아끼지 않은 결과라고 말한다. 서당이 두 개나 있을 정도로 교육열이 높은 마을이라는 자랑도 잊지 않는다.
양동마을은 본래 350여 가호에 달했다,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절반 넘게 손상됐지만 폐허가 된 자리에 건축허가가 나지 않는 바람에 옛 모습이 그대로 남았다. 그런 양동마을은 보물 4점과 중요민속 문화자료 12점 등 문화재 27점을 보유하고 있다.
그 덕분에 지난 2010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영광을 누렸다. 유명세를 타고 1993년에는 영국의 찰스 왕세자가 방문한 곳이기도 하다.
양동마을의 아름다움은 자연에서 나왔다. 설창산을 주봉으로 하여 분통골, 안골, 장태골 등 네 갈래 구릉과 골짜기를 따라 가옥이 자리를 잡았다.
마을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언덕에 오르면 기와집의 대표격인 관가정(觀稼亭)이 보인다. 월성 손 씨 종갓집이다. "곡식이 자라는 모습을 바라보듯 자식이 자라는 모습을 본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집과 정자를 겸한 독특한 양식의 건축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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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성 손 씨 종손이 살고 있는 관가정. 집과 정자를 겸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
안채에 들어가면 마루 시렁 위에 수십 개의 상이 놓여있다. 그만큼 드나드는 사람이 많았다는 뜻이다. 뒤뜰에는 수령 500년이 넘은 향나무가 있다. 이 집을 지을 때 함께 심었다는 나무다. 대문을 열고 집을 나오면 잘 다듬어진 향나무 가지가 대문짝을 누른다. 향나무가 대문짝에 닿도록 집을 설계한 멋스러움이 돋보인다.
언덕길을 걷다 보면 서백당(書百堂)이 보인다. 우재 손중돈과 회재 이언적이 태어난 집이다. 손중돈은 요즘으로 치면 청와대 비서실장쯤 되는 도승지를 지낸 세조 때 인물이다. 이언적에겐 외삼촌이자 스승이었던 사람이다, 이언적은 명종 때 이조· 예조· 형조 판서 등을 지냈다. 동방 5현 중 한 사람으로 꼽힐 만큼 학식이 빼어났다. 서백당은 이렇게 두 명의 현인을 탄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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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인 3명이 태어난다는 '서백당'. 손중돈과 이언적을 이어 탄생한다는 인물은 과연 누구일까. |
그런데도 풍수지리 전문가들은 서백당의 지기(地氣)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현인 3명이 태어날 명당인데 세 번째 인물이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손 씨 집안에서는 시집간 딸이 몸을 풀러 친정에 와도 받아주지 않는 관습이 생겼다. 큰 인물이 태어날 지기를 남의 성씨에 넘겨 줄 수는 없다는 뜻이 담겨있다.
"양동 처녀는 선도 안 보고 데려간다"는 말이 나온 것도 비슷한 배경에서 나왔을 것이라는 게 문화재 해설사 이수원 씨의 설명이다.
여기에는 마을 형성기 외손의 가세가 더 번창했던 내력도 한 몫을 했을 것이라는 말도 덧붙인다. 연애결혼이 대세인 요즘 세태에선 전혀 먹혀들 말이 아니지만 가문과 문벌을 중시하던 시대를 기준으로 본다면 "양동마을 처녀들은 절반은 점수를 따고 시작했다"는 표현이 가능할는지도 모르겠다.
월성 손 씨 종택에서 동네 입구 쪽으로 나오면 이언적이 살았다는 무첨당(無첨堂)이 보인다. 시경에 나오는 말로 "낳아준 부모를 욕되게 하지 않겠다"는 뜻이라고 한다. 무첨당은 특이하게 둥근 기둥을 사용했다. 궁궐이나 사찰, 관청과 같은 공공기관에만 사용하는 둥근 기둥을 개인 저택용으로 썼다는 점이 연구대상이라고 한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팔도를 유람하던 시절 30일간 식객으로 머물면서 "영남의 선비가 모두 무첨당에 있는 것 같다"고 극찬한 일화가 있다. 실제로 불과 30년 전까지만 해도 손님들이 끊이지 않았을 정도로 무첨당에는 사람이 들끓었다고 한다.
양동마을에 얽힌 옛이야기를 들으면서 걷다 보면 멀리 수백 년 전 세계로 시간 여행을 떠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과거와 현재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 같다. 전통마을이라는 공간이 시간의 틈새를 메워준다.
그렇게 1시간 남짓 마을 길을 산책하니 편안함이 느껴진다. 유난히도 낮은 양동마을 토담 너머로 햇살이 비칠 때는 사람 냄새가 물씬 풍겨 나온다. 세계적인 관광단지로 부상한 경주 보문단지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소박하고 정갈함이 넘쳐나는 양동마을. 그런 아름다움이 알음알음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이유일 것이다.
글·사진=정순형 선임기자 junsh@busan.com
여행 팁
■교통편
자가운전을 하면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경주IC로 들어가 7번 국도를 이용하면 양동민속마을이 나온다. 소요 시간 1시간 30분.
열차:부전역에서 동해남부선을 타고 안강역에서 내려 203번 버스를 타고 4구역을 가면 양동마을이 나온다. 또 부산역에서KTX를 타고 경주역에서 내려 200,201~208,212,217번 버스로 환승해서 40여분간 달리면 양동마을 입구 정류장에 도착한다.
시외버스: 부산노포동 터미널에서 경주행 시외버스를 타고 경주 터미널에서 내려 (소요시간 50분· 요금 4천800원) 경주시내 버스 207, 217 ,203번으로 환승하면 된다.
■맛집 초원식당: 054-762-4436
외바우 맛집: 054-763-7733
강동한우 숯불촌: 054-762-5556
장흥집밥: 054-763-1236
■민박 휴휴산방: 054-763-0521
사랑채민박: 010-8794-7377
낙원별방: 010-8213-8244
경주강산애 펜션: 010-6658-45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