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태고종에 소속된 사찰이다. 신라 선덕여왕(재위:632∼647) 때 의상(義湘)이 창건했다고 하나 당시 이 지역은 백제의 땅이었으므로 신빙성은 떨어진다. 창건설화에 따르면 의상이 이곳에 절을 짓자 한 제자가 ‘왜 이렇게 한적한 곳에 절을 지어 고생을 하느냐’고 물었다. 이에 의상은 ‘학승이나 선승은 배가 고파야 공부가 잘 되는 법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1597년(조선 선조 30) 정유재란 때 불에 탄 것을 1750년(영조 26) 백암리에 살던 모은(慕隱) 박잉걸(朴仍傑)이 중건했다.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 뒤에는 동학군의 은신처가 되기도 했으나 이 때 불에 타버리고 말았다. 그 뒤 가산(迦山) 김수곤(金水坤:1873∼1950)이 중건했고, 1950년 6·25전쟁으로 다시 불에 탄 것을 1973년 탄월(灘月) 조병준(趙竝晙)이 중건을 추진하였다. 1986년에 이르러 법당과 종각을 세워 절의 모습을 갖추었다.
현재 대웅전과 종각·요사·염불전·삼성각 등의 건물이 있으며, 유물로는 범종과 오층석탑·약사불상·십일면관세음보살상 등이 전한다. 대웅전을 등지고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 위를 무제등(舞際嶝)이라고 부르는데, 이곳은 옛날부터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다. 가뭄이 들었을 때 태인읍의 현감이 직접 주관하여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석탄사입구 안내석
석탄사는 깎아지른 산비탈에 선 모습이 아슬아슬하다. 차로 구절제 못 미쳐 허궁실로 접어들어 자동차 한대가 겨우 다닐 수 있는 좁은 도로를 곡예를 하듯 들어가야 하는 절집이다.겨우겨우 굽이굽이 산길을 올라 찾아간 석탄사는 절로 탄성이 나오게 만든다.
석탄사 부도
석탄사 입구
석탄사 범종각
석탄사 오층석탑
석탑에 세겨진 사면상
석탄사 대웅전
석탄사 고사
석탄사에는 「탄사복설」이라는 다음과 같은 고사가 전해진다. 조선조 헌종 때 석탄사 아래 원촌마을에 이안복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남의 집 머슴을 살면서 근근이 생활을 유지하며 살았는데, 하루는 주인집 소를 끌고 가다가 사서삼경을 팔러 다니는 책장사를 만났다. 책장사는 사서삼경을 보이면서 “이 속에 정승판서가 다 있다.”고 외쳐대는 것이 아닌가. 그 말을 들은 이안복은 서슴없이 주인집 소와 그 책을 바꾸어 버렸다. 그 대신 주인집에 와서는 소 값에 해당하는 만큼 몇 년 더 머슴을 살겠다고 자청을 했다. 이안복은 그렇게 해서 구한 책들을 아들 삼형제에게 주면서 석탄사로 가서 공부를 하라고 일렀다. 그러나 아들들은 아이들을 석탄사로 공부를 보낸 이안복은 아들들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는가를 볼 겸해서 석탄사에 올라가보니, 삼형제는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퉁소를 불고 장구를 치며 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를 목격한 이안복은 아무 소리 하지 않고 아들들이 놀고 있는 방문 앞에 밤새도록 엎드려 있었다. 아들 중의 하나가 화장실에 가려고 새벽에 방문을 열고 나와 보니 아버지가 무릎을 꿇고 등에는 눈이 하얗게 쌓인 체 절 마당에 엎드려 있었다. 이를 본 아들들은 눈물을 흘리고 반성하였으며, 열심히 공부에만 정진을 해, 이 후로 삼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게 되었다.
석탄사 대웅전 벽화
석탄사 대웅전
석탄사 요사채
석탄사 삼성각
석탄사 관음상과 지장보살상
석탄사 석수
석탄사 부속건물
석탄사에서 바라다본 전경
석탄사 찾아가는 길
태인 터미널을 지나면 피향정 삼거리가 나온다. 삼거리에서 우회전 하여 30번국도 칠보, 강진 방면으로 계속 직진하여 동진강을 따라가면 수암 마을 삼거리가 나온다. 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계속 직진하다 보면 우측에 칠보 초등학교와 칠보종합 고등학교가 나온다. 계속 직진하여 칠보교를 넘어 산길을 넘어가다보면 우측에 상허하허 마을 표지판과 정류소가 보인다. 이름이 특이한 이 마을표지판에서 우회전하여 2.5km정도 개천길과 꼬불꼬불한 산길을 올라가다 보면 장군봉 정상에 석탄사가 자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