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수행할 것인가 :참회(懺悔) ,포살 (布薩) ,자자 (自恣)
계율을 지키기로 맹세를 하게 되면 반드시 뒤따라오는 공부법이 [참회]이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살아가면서 말로 마음으로 행동으로 계율을 어긴다. 이것을 몸과 마음과 행동으로 업을 짓는다고 말한다.
공동체의 화합과 정화를 가져오는 [포살]과 공동체의 청정을 가져오는 [자자]에 대해 알아보자.
열 가지 잘못의 뉘우침, 십악참회
말로는 망어, 악구, 양설, 기어로 업을 짓고 마음으로는 탐애, 진에, 우치(치암)를 일으키는 업을 짓고 행동으로는 살생, 도둑(투도), 사음의 업을 짓는다. 열 가지 악을 짓는다 해서 이를 십악이라고 한다. 열 가지 업을 짓는 것을 뉘우친다고 할 때 [십악참회]라고 한다.
뉘우쳐 참회하는 것은 있는 허물을 때를 씻어 버리고 깨끗이 하는 절차를 말한다. '참'이란 지나간 허물의 뉘우침을 말하고 '회'란 다시는 이런 허물을 짓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이 참회의 기준은 오계이다.
법의 이치를 알았으면 직접 몸과 마음으로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론과 실천을 동시에 해야 된다. 이론만 있고 실천이 없으면 관념론자에 불과하다. 반대로 실천만 있고 이론이 없으면 맹목적으로 갈 수 있다.
계율에 따른 실천과 참회
실천을 하면 아는 것과 별개로 움직일 때가 많다. 실수를 하게 된다. 실수를 하면서 교정을 하고 그러면서 완성품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계율을 지키지 않고 성불을 하기는 산에 가서 물고기를 잡으려고 하는 것과 같고 나무에서 고기를 구하는 것과 같다. 수행자는 계율이 가장 기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계율을 어길 때가 있다. 어기면 바로 어겼구나 하고 알아차리고 그리고 뉘우치고 다시는 어기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을 해야 된다. 이것이 참회이다.
참회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몸과 마음은 하나기 때문에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느냐에 따라서 몸이 따라서 작용하고 몸이 작용할 때 마음이 따라서 작용할 때가 많다.
그래서 내가 잘못했다하면 몸이 저절로 숙여지고 또 몸을 자꾸 숙이면 마음이 따라서 숙여지기가 쉽다. 그래서 참회할 때는 절을 하면서 한다. 근본은 잘못을 알아차리고 그다음에 뉘우치고 그다음에 다짐하는 것 이것이 참회이다.
포살(布薩)
자기가 스스로 깨달아서 참회를 하는 것을 보통 [참회(懺悔)]라고 하고 대중 앞에 드러내서 여러 사람이 있는 데서 제가 잘못했습니다, 이렇게 대중앞에 드러내서 참회하는 것을 발로참회(發露懺悔), [포살 (布薩) ]이라고 한다.
포살은 같은 계율을 지키는 사람들 사이에서 한다. 같이 계율을 받고 같이 지키기로 약속을 했는데, 못 지킨 경우 다른 사람에게 의혹이 생기기 때문에 드러내서 참회하는 것, 그럼으로 상대의 마음속에 있는 의혹을 없애는 것이다.
이것이 공동체 화합을 가져온다. 참회는 내 자신의 정화를 가져오고 포살은 공동체의 정화를 가져온다.
자자(自恣)
[자자 (自恣) ]는 내가 나를 위해서 도반에게 청하는 것이다. 나도 모르게 내가 계율을 어겼을 수도 있기 때문에 다른 이들에게 혹시 내가 계율을 어긴 것이 있으면 나에게 이야기해 주길 청하는 것이다. "당신들이 혹시 그런 것을 본 것이 있으면 나한테 얘길 좀 해주십시오. 내가 그것을 알면 내 마땅히 참회하고 고치겠습니다." 이렇게 청하는 것이다.
상대가 청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청하지 않았는데 이야기하는 것은 간섭이고 시비가 된다.
자자 (自恣) 의 요건
서로 약속한 계율에 근거해서 상대가 청해한다.
계율에 맞쳐서 내가 보고 듣고 확인한 것을 해야 한다. 뜬소문을 가지고 이야기를 해선 안 된다.
자자를 청한 사람은 이를 감사히 받아들여야 한다.
자자 (自恣) 를 받으면 기본적으로 수용을 해야 되지만 사실이 아닐 때는 해명을 해야 된다. 그러니까 그것을 내가 수용해도 그 허물이 없어지지만 해명을 해도 상대가 갖고 있는 의혹을 없앨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공동체 안의 구성원들 사이에 불신을 제거하고, 이로써 공동체가 청정해지는 법이다.
자자 (自恣) 는 공동체 생활중에 하는 것이 아니고 안거가 끝나는 날에 한다. 공동체 생활(안거)이 끝나고 헤어질 때 마지막으로 자자 (自恣) 를 한다.
계율을 청정히 지킨다는 것은 수행을 해 나가는 것을 말한다. 수행의 목표는 깨달음을 얻는다, 붓다가 된다, 열반을 증득한다, 해탈을 증득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서 있는 현실은 어리석은 범부중생이다. 여기로부터 '내가 이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야 되겠다, 부처의 길로 나아가야 되겠다, 이것이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라고 마음을 내면 이를 [보디사트바], 보살이라고 한다. 깨달음을 얻어야만 진정한 행복에 이를 수 있다.
<법륜 스님 법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