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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 인카운터 6 ( 6개의 문 닫기 ) in 5776
이 시간 부터는 사단의 모든 것들이 너무나도 뻔해진다. 영적 전쟁은 너무나도 쉽다. 그 동안 내가 살았던 모든 삶들이 얼마나 허상이었고, 사단의 얼마나 거짓이었느닞, 이제 처리하면 된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벌려놨던 것이, 내가 쌓은 허상의 바벨탑들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벌려놓았다. 싹 처리하면 된다. 하나님과 하나의 연결점이 생긴다.
6개의 문 닫기라는 제목으로 공부해보자
6개의 문 닫기
벤다비드 전도사
약4
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8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두 눈을 감으면 보이는게 있다. 왜냐면 우리는 사실 눈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우리는 보이는 것이 있다. 그것을 우리의 정욕이라고 알고 있다
흔히 눈 앞에 아른거린다고 한다. 눈을 감아도 보이는 것을 위해 우리는 지금까지 그것을 얻기 위해 달려왔다. 그런 삶을 우리가 눈을 감은 것 처럼 어둠으로 가득한 삶이라고 한다. 물론 사단에게 속았기에 어둠으로 가득한 삶을 살았다. 안 보인다고 하신 것처럼, 봐도 본지 모르고, 그런 삶을 살았다. 그래서 내 삶의 문제를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알고 살아왔고, 어둠 가운데서 한 가닥 희망을 위해, 그것을 얻기 위해 다른 사람을 발판삼기도 하고, 사람들의 인맥, 관계를 얻기 위해, 주님도 그것을 얻도록 도우시도록 이용하며 살아왔다.
눈 뜨고 당한다는 말이 있다. 눈은 뜨고 있지만, 무엇이 위협인지 모르고, 악한 자가 와도 선한 자 인줄 착각하다가, 지나고나면 당해있는 경우들을 삶을 많이 사신 분 일수록 그런 경험들이 있다. 사람이 어둠 가운데 있으면 악이 다가와도 모른다는 것이 문제이다. 늘 이유없이 두들겨 맞는 것 같고, 나만 운이 없는 인생 같고, 너무 불공평하다. 그런 인생들 떄문에 많은 경우, 인생 한 번 펴 보고자 주님을 만나왔다.
주님을 만날수록 더 깊은 곳에서 나를 위해 주님을 믿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야고보 사도는 우리 삶이 정욕으로 말미암았다고 말하는데,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자 하는 우리들에게 야고보 사도는 하나님께 복종하라고 이야기한다.
- 복종하다 = 종속되다
ד 달릿 : 종속, 문
여러분은 지금 물리적으로 이 공간의 문을 열고 들어왔기에, 이 공간에서 일어난 일들을 함께하고 있다. 이것을 종속된다고 이야기하는데, 야고보 사도가 동일한 말을 사용해서 하나님께 복종하라, 종속되라, 그 문을 열고 들어오라고 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양의 문이 되신다. 그 문을 열고 들어오면, 우리는 그분께 종속되는 것이다
그런데 종속되는 방법을 마귀가 대적하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פשׁע 파샤 : 대적
- 국가적인 반역을 뜻한다
단순히 마귀에게 속아왔던 것은 개인적으로 혼자 사기당한 차원이 아니라, 국가적으로 어둠의 나라에 속해있었고, 사단의 왕국의 종 노릇을 하고 있었기에, 그것에서 반역하지 않으면 그리스도께 속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야고보 사도가 하고 있다
어둠의 나라에 속해서 당연하게 여겨왔던 것이 악이었으며, 가족의 행복을 위해 내가 열심히 살아왔던 것이 사실 죄였고,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멀리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주님에게 나아가야 할 것이다. 두 마음을 품었음을 고백해야 할 것이다.
복종하라 <-> 대적하라 (대칭구조)
우리는 선을 위해 살고 싶지만, 하나님의 선이 무엇인지 모른다는데 문제가 있다고 배웠다. 그래서 하나님께 복종한다고 했지만, 우리는 많은 경우 내가 원하는 것에 복종했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 내가 생각하는 방법을 썼다. 야고보 사도는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서 손을 깨끗히 하고, 두 마음을 품은 것을 성결하게 해야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이전에 죄의 종으로 행해왔다. 주님의 십자가, 보혈로 인해 자유의지를 사용하게 되었고, 악을 없애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악으로부터 멀리 떨어지는 선택을 하며, 주님께 가까이 갈 수 있도록 하게 하셨다
악을 거절하는 것, 불법에 대해서 반역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고, 마귀를 대적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왜 이런 삶을 살았던 것일까? 여기 계신 많은 분들은 인카운터 정도까지 오실 분이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다 영접하셨고, 그럼에도 이 죄의 지배를 벗어나지 못하는 미스테리하며, 너무 당연했던 삶 가운데, 그렇지만 이것을 또 탈출해보고자 하는 그 마음의 갈망으로 이 자리에 나왔다.
그리고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죄가 나를 사로잡아오는 것을 많은 순간들 가운데 겪었고, 이 삶을 너무나도 떠나고 싶기에 이 자리에 나오게 된 것이다.
이 시간에 이것에 대해 알아보고, 처리하는 시간을 갖겠다. 주님께 복종한다는 것은 그분께 종속되는 것이다. 일회적 순종의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이다. 그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여러분의 마음의 문을 열어드리는 것이다. 내 마음의 문을 열어드린 만큼 주님은 여러분께 들어올 것이고, 여러분은 그만큼 주님께 종속될 것이다. 우리도 사탄에게 문을 열어주었기에, 사탄이 열어준 만큼 더욱 더 큰 영향을 끼쳐왔고, 우리가 그 사탄에게 종속되어왔던 것이다. 사탄의 침입에는 2가지가 있다.
1. 불법적인 침입
요10: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불법적 침입은 문을 열어주었다기보다, 울타리가 파손되었을 때 보수공사를 하지 않는 것을 인해서 틈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울타리가 망가진 것을 방치하거나, 얼기설기 임시방편으로, 죄책감 때문에 힘드니까 대충 회개하고 넘어간 곳을 틈타 사단이 계속 참소하는 것이다.
벧전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우리가 대적하면 사탄은 떠나게 될 수 밖에 없다. 하나님 나라의 파워이다. 불법적 침입에 대해 신고하면 사단은 바로 떠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문제는 적법적인 침입에 많은 문제가 있다.
보이스 피싱이라는 신종 사기가 기승을 부리고, 점점 더 교묘해져가고 치밀해져가고 있다. 당하면 당할 수 밖에 없는, 불법적 침입인 줄 모르고, 합법적인 줄 알고 협조했다가 사기를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너무 방대해져서 못 믿게될 것들이 많아진다
복음에 대해서도 뭐가 뭔지 모르고, 예수님만 믿으면 다 된다는 큰 명제만 가지고, 모든 것을 다 그분이 하시고, 그래서 나의 무지는 괜찮다고 생각하며, 모든 일을 주님께 맡기고 나아가면 된다고 살아왔지만, 사실은 되는 일이 없고 안 되는 것 같고, 우리 마음 가운데 나도 저 사람들처럼 법 좀 피하고, 편법적으로 해도 괜찮지 않을까? 이 정도는 해야 살 수 있지 않을까는 마음으로 계속 기울어지고, 점점 불법적 삶에 물들어왔던 모습들이 있었다
엡4:27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군대에서 코뼈가 부러져서 성형을 하게 되었다. 제대 후에 많은 교회 자매들이 부러워했다. 그런데 세균이 틈타 돈을 내고 원상복구하게 된 이야기가 있다. 성형이 잘 한 것은 아니지만, 코에 난 뾰루지를 짜면서 세균이 침투할 틈을 준 것처럼, 나는 문제를 처리한다고 햇지만, 나는 그것을 통해 수 많은 경우에 사탄이 들어올 수 있는 틈들을 내어주고 있다.
2. 합법적인 침입
1) 고의적인 죄
a.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의도적으로 행한 죄
갈5
19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현저한 것의 가장 처음 나오는 것이 음행이다.
저는 주님을 만나고, 제 생명을 주님께 드리겠다고 간증했고,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지만, How?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뭔가 주님을 믿었으면 주님이 다 하시니까, 나의 죄에 대해서 Open하는 것이, 교회에서 회개하고 주님께 고백하는 것은 가르쳤지만, 실제적으로 그것들을 고쳐나가고 뛰어넘는 것들은 배운 적이 없었다.
그래서 죄를 멀리해야 한다는 강한 결심이 있었지만, 어떻게 하는지 몰라서, 언제나 제 선에서 해결하기 위해 살아왔고, 사람들 앞에서 말만 거룩한척을 많이 하게 되었다. 그것이 나의 소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 저의 실제 삶에서는 아무도 보지 않으니까 굉장히 음란하였으나, 친구들이 야하고 여자 이야기하고 역겨운 척을 하였다.
물란하게 사는 친구가 있었는데, 걔는 정말 아니라고 하면서 역겨운 척을 하고, 나는 걔와 다르다는 발언들을 친구들과 하게 되었다. 얼마나 그런 척을 했는지, 제가 대학교 졸업할 때 까지 제가 음란한 동영상을 한 번도 안 본 줄 알았다. 종수는 신실하고 독실한 크리스천이라고 친구들은 철썩같이 저를 믿었고, 친구들이 세우는 그것 때문에 그것을 부정하지 못하고, 저를 오픈하지 못했던 죄책감, 그렇진만 그 앞에 가면 거룩한척을 해야 하는 삶 가운데서 자유롭지 않은 삶을 살아왔다
연애할 때는 마음의 욕망은 있지만 표시는 안 하고, 여자친구가 하게끔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여자친구가 물꼬를 터주면, 제가 원하는 것들을 하곤 했다. 점점 더 깊은 스킨십을 위해서 은밀한 곳을 마치 우연히 발견한 것 처럼, 그런 데인지 몰랐던 것처럼 가고, 여자친구의 원함인 척 찾게 되고, 하지만 저의 정욕을 채우기에 바빳던 삶을 살기도 했었다
주님과의 관계를 위한 은밀한 장소가 아니라, 나의 장소를 찾아 헤멨던 것이 나의 삶이었다. 제가 20대, 주님을 만나고, 교회에서 리더십을 신실하게 만나던 때였기에, 그 정죄감은 저에게 말할 수 없는 해결하고 싶지만, 해결할 수 없었다. 아닌척 할수록 저의 모습은 더욱 혐오스러워졌고, 그 모습이 괴로웠지만, 제가 쌓아놨던 이미지가 있어, 어디서도 내어놓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저에게 실망하고 떠나갈까봐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드러날 것이 두려워서 늘 그만두려고 했다.
그렇지만 이런 시도는 늘 실패하는 것 같다. 사람들에게 저의 행동이, 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그리고 그것들을 변명하기 위한 것들을 나름 짜려고 했지만, 잘 되진 않는 것 같다.
여러 생각들을 하면서 그만두고 싶었지만, 두려움이 저를 중독에서 벗어날 수 없게 했다. 처음 목사님과 LTG를 하면서, 목사님도 처음에 저에게 음란의 영역에서 물어봤고, 처음으로 LTG라는 것을 통해 말씀을 드리게 되고, 이 영역들에 대해서 훈련을 하면서 멀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전에는 주님과의 만남이 끊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늘 주님의 강한 역사를 기대해왔지만, 이 영역들이 문을 닫으면서 멀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되고, 계속해서 그 영역을 훈련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이것은 하지 않아야 할 것을 한 죄인데, 의도적인 죄 중에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은 죄가 있다.
b.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은 죄
약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행하지 않은 것 또한 죄가 된다. 생각으로는 매일 말씀을 읽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런저런 핑계로 읽지 않는 일들이 다반사이다. 이것이 죄이다. 우리는 거의 대부분의 영역에서 지금 우리가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의 정답들을 거의 다 알고있다. 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다 지키는 것이 나에게 너무 버겁다는 비겁한 핑계로, 어쩌면 자신을 겸손히 여기는 것 같은 굉장한 교만으로 이것들을 행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말씀을 보려면 제대로 봐야하고, 그럴려면 시간을 더 확보해야 하는데, 나에게는 이 정도 밖에 시간이 없기에, 대충 볼 바에 나 같으면 안 보겠다. 나중에 밤에 시간을 정해서 보겠다는 그런 생각들이 우리로 하여금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법을 지키자니 나만 지키는 것 같고, 나만 손해보는게 억울해서, 해야 할 것을 하지 않는 위법을 어기기도 한다
실제로 제 대학시절에 컨닝이 굉장히 유행했었다. 너무 다 컨닝을 하니까, 위기감이 들었다. 시험을 내가 상대적으로 못 보면 취직이 안 될 것 같아서, 나도 컨닝을 한 적이 있다. 교통사고가 나서 조교 앞에 혼자 시험을 본 일이 있었다. 제가 MP3에 답안지에 목소리를 녹음해서, 이어폰을 빼서, 시험보는 척 하면서 들으면서 본 적이 있었다.
마땅히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않으면서, 그러다보니 학생이 공부를 하지 않게 되면서 결과를 얻고 싶다는 마음이 불법적인 일을 하게 되고, 생각지 못한 기행들을 많이 해왔다. 이것을 기발하게 행했던 저가 스스로 자랑스럽기도 했고, 마치 훈장처럼 이야기했던 일들도 많이 있다.
빌3:16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우리는 내가 조금밖에 알지 못해서 행할 수 없다는 허울 좋은 핑계를 대고 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하라. 아는 것을 행할 때 주님은 더 깊은 깨달음을 주신다
2) 용서치 못함
주님이 알게 하시고, 깨닫게 하신 것들을 반드시 행하기 위해 힘써야 한다. 우리가 사탄에게 문을 열어주는 영역 중에, 용서치 못함으로 열어주는 문이 있는데, 용서하지 못하는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따.
저는 아버지를 굉장히 미워한 부분이 있었다. 초등학교 치아 발육이 늦어서, 저를 보고 아버지가 교정을 시켰다. 아버지는 병원, 양의학에 대해서 불신을 가지고 계셔서 민간요법에 대한 철학과 합리성을 가지고 있어서, 식초를 못 상처가 발랐다. 낫는 줄 알았다. 1년, 2년이 지났는데, 흉터가 져버렸다. 이게 저의 어떤 치아와 목의 흉터가 주홍글씨처럼 낙인이 되고, 한참 예민한 사춘기 시절에 저를 굉장히 수치스럽게 하고, 수치심을 느낄 때 마다 아빠를 원망하고 미워하게 되었다. 그 생각이 떠오르면 아빠에 대한 분노가 오게 되고, 절대 아빠 말은 믿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게 되었다. 아빠 말을 들어서 저에게 이로운 것이 없었던 몸의 증거들을 가지고있다보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약을 만드는 것이 있는데, 아빠도 나름 속상한 것이다. 저에게는 들어오지 않는 말이 되는 것이다
마18: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만 달란트 탕감받은 자가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이다. 아버지를 용서하지 못했던 저에게, LTG 때 여러분의 부모님은 저를 이 땅에 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받아 마땅하신 분이라고 이야기하셨다.
아버지는 삶을 주시고, 주님을 알아갈 수 있는 기쁨의 과정을 걷게 하셨고, 아버지로 말미암아 이 길을 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아버지를 용서하고, 주님의 길을 가게 되었다고 간증을 썼는데, 아내에게 뭔가 애매한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왜 용서햇냐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정말 용서해서 자유한가 물어보는 것이다. 그 말이 저에게 주님의 음성으로 다가왔다
6개의 문을 위해, 적합한 간증을 떠올리며, 간증을 위한 간증, 삶에서 실제로 용서하지 않았는데, 이런 일이 있었다는 간증을 쓴 것이었다. 삶의 이야기지만 실제 저의 삶은 아닌 것, 용서는 했지만 용서는 없는 그런 이야기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를 용서한다고 했지만, 아버지를 볼 때마다 자유하지 않는 상황이 떠올랐고, 용서할 자격이 있는가, 용서가 무엇일까, 용서를 통해 얻는 자유는 무엇일까? 아내가 저에게 이야기를 했다.
여보의 용서는 당신은 잘못이 없는데, 상대방이 잘못했기 때문에 베풀어주는 용서 같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그 용서에는 자유가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것이 이 아버지와의 에피소드를 읽은 아내의 이야기였다. 저는 간증이라고 했는데, 아내에게는 감출 수가 없었다.
סלח 쌀랔흐 : 용서, 평가를 훈련하는 삶
이게 용서라고 배웠는데, 제가 어떤 평가를 훈련했는지 기도했는데, 저의 용서의 출발점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내게 잘못을 했다는 평가에서 출발했다. 평가를 훈련한다는 용서의 삶은, 저에게 용서는 핸드폰 2년 약정 할부하듯이, 아버지의 용서를 Life time 할부, 평생 할부로, 내가 형편되는대로 용서하겠다. 요금도 내가 내고 싶을 때, 내가 용서해주고, 그러면 고마워해줘야 한다. 이것을 용서라고 하고 있는 저를 발견했다
핸드폰 약정을 하게되면, 사실 이 약정의 노예가 된다. 할부의 노예처럼, 늘 저에게는 용서를 해야 하는 것이 주인이 되버렸다. 나는 용서를 못 해 하면서, 늘 용서해야 한다는 부담으로 용서는 입에 달지만, 용서하고 용서한다고 하는 것들은 가득하지만, 할부가 언제 끝날지 모르는 것처럼, 남아있는 기간이 긴 느낌처럼, 저에게 아버지를 용서하는 것은 너무나도 요원한 일이었다. 그 용서의 기쁨이라는 것이 실제로 오기는 할까?
정말 나도 남들처럼, 부모님 돌아가시면 그제서야 후회하고, 사람들이 이야기하듯이, 살아계실 때 잘 해드릴걸, 하면서 후회하면서 살 것이 나의 인생일 것 같다는 생각이 은연중에 자리잡게 되었다.
용서는 평가를 훈련하는 삶이다. 그러나 그 평가는 하나님의 평가를 훈련하는 삶이다. 그런데, 혹시 저 처럼 나는 다른 사람이 나에게 잘못헀다는 평가를 가지고, 그 설정 안에서 주님의 평가를 훈련하고, 그 용서를 해 나가지는 않으셨는지요? 저의 삶에 용서라는 것이 있을리 만무했다
그래서 아빠가 잘못했다고 믿어왔던 진리가, 정말 진리인가라는 물음을 가지게 되었다. 저의 상처받음이 아버지를 가해자로 만들었고, 아버지께도 제가 가해자라는 낙인을 찍어주었고, 아버지는 평생 자식에게 미안한 마음,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가게 만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왜 과거의 죄책감으로 살아가는 것일까? 왜 늘 미안하다고 하는 것일까? 주님을 못 만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제가 하나님의 평가를 훈련하지 못했고, 자식의 삶이 아버지께서는 먼저 나는 자유하다라고 하실 수 없던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 치유의 시간을 통해서 진정으로 이제 저의 단계에 맞는 용서를 할 수 있게 되었던 것 같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한다고 주님이 말씀하셨다. 제가 진리를 몰랐다는 것이 빛 가운데 드러났음에 감사한다. 자유하지 못했던 저의 그 인생이 드러남에 감사한다.
אמת 에메트 : 진리, 신성(א)의 죽음(מת), 아버지의 죽음, 나의 죽음
- 에메트를 알면 드로르해진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나의 십자가의 죽음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진리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될 때 용서를 해 준다고 했던 저의 관점이 죽어지고, 그분의 평가를 받아들일 때 비로소 우리가 자유케되는 것이다.
דרור 드로르 : 자유
자유는 드로르라는 말인데, 주님께 복종하는 것이 종속(ד)되는 것이라고 배웠다. 자유 또한 달릿으로 시작한다. 주님께 종속되고 복종하는 것이다.
רור 로르 : 흐르다
종속되어 흐르는 삶이 자유이다. 레쉬는 영, 머리, 바브는 못, 연결이라는 뜻이 있다. 종속되는데 두 개의 머리가 있다. 두 개의 영이 있다. 내가 그리스도에게, 그리스도가 나에게, 내가 주 안에, 주가 내 안에 종속되는 삶, 이것이 우리를 자유케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주님의 평가를 받아들이고, 그분과 함께 못 박힐때마다 우리는 주님과 하나가 되고, 그럴때마다 우리는 자유를 누린다. 그 동안 제가 생각한 용서와 진리 안에서, 내가 원하는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자유가 오지 않아서 오히려 용서하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한 감옥 안에 갇혀있던 저의 삶을 보면서 또한 저는 용서라는 감옥에 갇혀있던 저를 용서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6개의 문 닫기라는 강의를 준비할 수 있게 되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저에 대한 진짜 평가를 훈련할 수 있고, 용서가 뭔지 알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용서하고, 나에게 잘못했다고 착각했던 지체들에게 주님의 평가를 훈련하기 원하고, 그분을 받기를 원한다.
3) 내적 맹세
마5
33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35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36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홧김에 한 맹세가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다. 아버지 말은 안 믿는다는 맹세가, 늘 아버지를 사랑할 수 없고 불평, 불만밖에 없었고, 아버지와의 관계는 저에게 애증, 사랑해야 하는데 사랑하지 못하는, 죄책감과 미안해서 사랑하려는 관계를 추구할 수 밖에 없었던 삶이 있었다. 이것은 저의 내적 맹세에서 출발했던 것이다
우리가 내적 맹세를 하게되면, 그 맹세로 그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그 굴레에서 내가 절대 하려고 하지 않는 행동을 답습하는 것을 보게된다.
주님은 말씀이시다. 여러분도 말씀이시다. 내가 주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면, 내가 했던 말들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할 수 있다. 우리의 말은 창조 능력이 있다. 내 내적 맹세의 말이 무엇을 창조했는지, 이 시간에 이 문을 반드시 닫아야 한다
4) 비판과 정죄
마7
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비판과 정죄는 저의 전공 과목이다. 딱 보면 딱 드는 것이 있다. 제가 스스로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고 정죄함으로, 사탄에게 가장 많은 횟수의 문을 열어준 문이 이 문이 아닌가 싶다.
저의 어머니는 올해 71세이시다. 어머니 세대에서 제 나이의 자녀를 갖는 것은 그렇게 흔치 않았다. 고등학교 친구가 어머니를 할머니라고 한 적이 있었다. 그것이 부끄러웠고, 5남매중의 막내여서, 늦둥이는 아닌데, 늦게 낳은 편이었고, 어머니는 30대 후반에 임신한 것이 부끄러우셨다고 한다. 그 당시에 저를 임신하시고, 사람들이 많은 곳을 회피하셨다고 한다. 5남매였는데, 부모님은 사실 자녀를 3명가지만 낳으시려고 하셨는데, 넷째를 임신하시고, 낙태를 하셨다고 한다. 낙태 이후에 주님이 죄인지 깨닫게 하시고, 저의 어머니가 깊은 통곡과 회개를 하시고 다시 자녀를 가진 것이 누나였다. 그리고 그 다음에 제가 나왔다.
그래서였을까, 치유, 거절감에서 오는 것들을 보니까, 저의 반응이 굉장히 많았다. 인정받으려는 욕구로 그렇게 살아왔다. 이것은 저의 가치를 더 높이기 위해서 비판하고 정죄한다. 판단이 빠르다는 것으로 포장하고, 조언이라고 포장했지만, 판단과 정죄가 많았다.
비판, 정죄의 최고봉은 언제나 자신에 대한 것이 아닌가 싶다. 뭘 하나 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 생각, 저 생각이 들고, 그런 마음으로 네가 뭘 하겠냐라고 정죄했다. 행동 하나를 하다가도 비판과 정죄 이유가 주렁주렁이었고, 금방 포기하고, 내려놓기 일쑤였다. 이것은 나는 완벽주의라고 했다. 완벽하지 못할 것은 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런 모습은 여전히 발견된다. 아내가 당신은 굉장히 의로운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의의 기준이 여보 자신인 것 같다고 햇다. 모두를 정죄해야 하고, 비판해야 했었다고 한다. 저 자신 조차 말이다. 아내가 저에게 의의 기준이 주님이라는 것을 인정하라는 교과서적인 이야기를 해줬다. 미성년자에게 법적 책임을 묻지 않는 것처럼, 주님의 의의 기준에서, 제가 정죄했던 수 많은 사람들은 정죄받지 않아 마땅한 자라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롬2
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2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판단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의로운 사람이면 그냥 의로운 사람으로 머물러 있으면 되는데, 판단까지 내리는 것이 의로운 것이 아니라, 저 자신이 그 의가 되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의가 무엇인가?
義, 옳을 의 : 양 양 + 나 아
내가 어린 양을 영접하는 것이 우리의 의가 된다. 어린 양이 우리의 의가 되셔서 우리 가운데 오신 것이다. 그런데 내가 의가 되겠다는 것은, 내가 양이 되어서 나르 구원하려는 것인데, 그런 자의 삶이 판단과 정죄이다
이 문을 닫아야 한다. 판단과 정죄야말로 내가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5) 유전적 저주들
-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티격태격하고 대화가 안 되는 것, 이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대적하고 십자가에 못박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다.
6) 영적, 감정적 충격
12년 전에 친구 차를 타고 놀러간 적이 있었다. 거기서 5중 추돌사고에 있었는데, 4번째 차에 타 있었다. 몸은 다치진 않았는데, 사고 직후에 제 몸이 부르르 떨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후유증이 오래 갔다.
몸으로 당한 사고도 이럴진데, 영적, 감정적 충격은 얼마나 심할까? 우리가 어떻게 대응하지 못하고, 사탄에게 너무나 무기력하게 내어주는 부분들이 이 충격의 영역이 아닌가싶다. 어떤 사람은 이 충격으로 인해서, 평생 충격의 지배 아래에 살아가기도 한다.
혹시 우리 가운데에서 그러한 영적 감정적 충격의 지배 아래에서 자유하지 못한 분들이 많이 있을 수 있다. 이 앞서 치유 섹션에서 한 것처럼, 우리가 허상임을 고백하고, 자유케 될 수 있음을 고백하고, 그 동안 열어주었던 문을 닫아야 할 것이다.
사61:1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충격을 받으면 부서진다. 마음이 유리같다는 말씀을 들어보신 분 계신가? 제가 그런 사람이었다. 가장 잘 꺠지는 사람이었다.
שׁבר 샤바르 : 상했다. 부서졌다
주님은 상한 마음, 부서진 마음을 고치신다.
חבשׁ 하바쉬 : 고치다
마음이 상한 자가 주님께 들어가면 헤트를 얻어서 나온다. 머리이신 주님이 이제 삶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들의 상함은 굉장한 기회이다. 영적, 감정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어쩔 수 없고, 무기력하다고 한다면, 상한 마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갈 때, 이 상한 마음에 주님으로 살고 싶다, 샤바르, 주님을머리로 해서 살고 싶다. 그러나 깨어진 나는 그 삶을 살 수 없으나, 주님은 오셔서 그 상한 마음을 싸매심으로 말미암아, 형상의 집을 짓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헤트를, 생명을 허락하신다.
우리 나라에 미세먼지 문제가 많은데, 이것을 피하고자 하는 노력이 대단하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했다. 미세먼지가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들, 내가 열어주었던 문을 통해 들어온 사탄으로 인해, 그 사탄의 영향력 아래에서 나온 나의 어떠함으로 인해, 그것이 나와 가족을 죽였고, 이웃을 죽여왔다.
마12
43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44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45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여러분들이 인카운터와서 치유, 축사 다 했는데, 집이 비어있고 문을 닫지 않았을 때 우리는 더 어려운 형편에 처해질 것에 대한 것을 말씀하신다. 지금 이 순간에 문을 닫지 않는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열어놓은 6개의 문들을 통해서 더 악한 귀신 일곱이 들어와서 더 형편이 악화될 것을 말씀하신다
여섯개의 문을 닫는 것은, 창1장의 여섯 날을 이야기한다. 이 날들과 깊은 연관이 있다.
첫째 날, 우리는 빛이 비춤으로 무엇이 어둠이고 빛인지 알게 되었다. 우리가 첫 번째로 닫아야 할 문이 해서는 안 될 것과, 해야 할 것을 한 것이다. 고의적으로 지은 죄들이다. 그전에는 몰라서 했다. 그런데 첫째 날의 빛으로 인해 문을 닫게 되었을 때, 이게 이 일들을 알게 되어서, 해서는 안 될 일을 안 할 힘을 얻게 되고, 해야 할 일들을 하게된다
둘째 날은 궁창을 만드셨다. 궁창, 라키아는 편철이라는 의미가 있다. 두들겨서 얇게 만든 것이다. 우리가 속사람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아 부인이 필요하고, 나를 부인하는 삶이 굉장한 고통이고 두들겨 맞는 삶과 같다. 용서한다는 것은 우리 개념에 있어서 내가 피해를 받았다는 것인데, 우리는 그것을 부인하고, 부정하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평가를 적용하며 훈련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둘째 날의 삶이 된다. 내 자아의 뜻과 다르게, 계속해서 용서하고 허상을 깨뜨리는 것, 무엇이 영이고, 하나님의 생각인지 하나 하나 깨뜨려 나가는 것이 둘째 날의 문을 닫고, 둘째 날의 삶을 사는 것이다
셋째 날은 내적 맹세와 연관되어있다.
אלה 알라 : 맹세, 하나님을 향하게 되는 것
내적 맹세는 내가 하나님이 되어서 나를 향하게 되어있다. 내가 나를 위해 맹세하는 것이 내적 맹세이다. 셋쨰 날은 그 모든 생각과 말이 부활 생명이신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적 맹세의 문을 닫고, 모든 생각, 나의 모든 말들, 서원들이 주님을 향하게 하는 것, 부활을 향하게 하는 것이다.
넷째 날은 나의 빛으로 비춰서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들이 이제 주님의 사랑과 진리, 판단, 평가로 이것들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더 이상 사람들을 바라보고 정죄하지 않게 되고, 이 사람이 이런 자이구나, 하나님이 이 사람을 이렇게 지으셨구나란 것을 사랑과 진리 안에서 발견하는 것이다
이것의 첫 번째는 우리가 비판과 정죄의 문을 닫는 것으로 시작한다
다섯째 날, 유전적인 저주가 있다. 이 땅에서 저주 때문에 허망함을 벗지 못했다. 그런데 다섯째 날에는 물에 물고기가 들끓는다고 한다. 살아있는 하나님의 생각들이 내 생각에 들끓게 되는 것이다
이 유전적 저주는 우리를 생각의 한계에 갇히게 한다. 그런데 이 문을 닫았을 때, 다섯째 날 생각의 한계를 벗게되고, 아버지가 욱하니까, 나도 욱하는 삶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각으로 인해, 하나님과 나의 생각이 같아지게된다. 그러면 여섯째 날에 이르게 된다
토라에서 땅을 마음이라고 표현한다. 지금까지 우리 땅, 마음은 지진으로 맨날 갈라지고, 급격한 지질변화들이 있었다. 그래서 마음이 급격하게 좋아졌다, 안 좋아지고, 갑자기 뚝 떨어지는 마음의 상태가 있었다.
이 충격이 있었을 때 내 마음에서 생명을 내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6개의 문을 닫는 것은 우리가 주님의 형상과 모양이 되기 위해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이 문을 닫지 않고, 창세기 1장의 주님의 형상이 된다는 것은 밑 빠진 독의 물붓기와 같은 것이다. 절대로 가나의 혼인 잔치의 6개의 항아리를 채울 수 없다
שׁער 샤아르 : 문, 주님의 형상이 되기 위해 머리되시는 주님을 보는 것
문은 여러분에게 그것을 제공하고 있다. 여러분에겐 두 개의 문이 존재할 것이다. 어떤 형상을 머리로 하는지, 즉, 나의 어떠함을 완성하기 위한, 나의 형상을 채우고자 하는 문인지,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고자 하는 문인지, 그 샤아르가 언제나 우리 삶에 놓여있다.
그래서 형상이 되기 위해 주님을 바라보시는 여러분은 ,사탄에게 열어줬던 문을 닫고, 주님의 형상이 되는 길을 걸어가게 된다
살다보면 어쩔 수 없이 문이 열린 경우가 많다. 그러나 열린 문은 닫을 수 있다. 이것이 습관이 되야한다. 일 년에 이것을 세번은 할 수 있다.
죄는 장성하여서 사망이 된다. 수 많은 병들은 초기에 발견하면 금방 고칠 수 있지만, 떄가 늦춰지면 손을 놓을 수 밖에 없게되는 일이 많다. 아픔이 심해서 병원에 가면 손쓸 수 없게 되는 경우가 있다. 더 이상 여러분을 방치하지 말라. 내가 느끼지 못한다고 괜찮은게 아니다. 여러분이 이 자리에 있다는 사실이 괜찮지 않다는 주님의 진단이시다. 주님은 그래서 우리에게 이 때를 주신 것이다. 오순절 인카운터라는 때를 주신 것이다. 지금은 주님을 만날 만한 때인 것이다. 지금은 주님이 우리가 열어놓은 문을 닫을 수 있도록 그 빛을 비춰주시는 때이다
이 문을 닫을 때, 주님이 여러분들을 향해 열어놓으신 문들을 발견하실 수 있을 것이다
* 기도
내가 생각한 문을 떠올려보라. 여러분들이 열어놓았던 문을 떠올려보라.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내 방법으로 하는 문을 닫고, 주님이 보시는, 우리가 열어두었던 문들을 주님이 생각나게 해주시기를 간구하자. 그 문을 닫을 수 있도록 힘, 용기, 의지를 허락하여 주소서. 그 문을 닫는 것이 나에게는 너무 멀리 있는 일 같고, 나에게는 너무 힘든 일 같다. 그러나 아버지이신 주님은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들이 돌이킬 때 아직 거리가 멀지만, 주님이 그 거리를 초월하여서 그 문을 닫을 수 있도록 여러분에게 힘주시고 능력을 주시는 분이시다.
내가 열어두었던 문을 이제 닫자. 우리가 알고도 죄의 무게를 알지 못하고, 또 혹은 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해서 그대로 방치했던 것들을 이 인카운터를 통해서 이제 알게 되었다. 이제 주님 앞에 고백하자. 주님, 내가 이 문들을 닫겠습니다. 마귀를 대적합니다. 이 문을 닫음으로 마귀를 대적합니다. 어둠의 나라에 반역합니다. 주님께 순복합니다. 주님께 종속됩니다.
문을 열고 닫는 권세가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천국 열쇠가 있습니다. 이 시간 간구할 때 닫아야 할 문들을 떠올리게 하십시요. 내가 그 문을 닫겠습니다. 그리고 주님꼐 나아가는 그 문을 열고 나아가겠습니다.
* 다비드 목사님
우리는 대부분 이 6개의 문이 열려있을까 닫혀있을까??
이게 지금 무슨 소리인가? 죄의 4가지 길을 해놓고, 왜 또 신경질나게, 언제 끝나는 것이냐? 이번에는 또 뭔가? 사탄까지 끼어들어서, 뭐가 자꾸 틈탄다고 하는가? 이 모든 것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지 잘 알아야 한다. 원인은 김멜에 있다
ג 김멜 : 자유의지
- 인생을 달려가는 자세이다. 자신있다. 해 볼테다. 해보겠는가? 정말 신성으로 살아볼텐가?
김멜에는 모든 보상과 징계의 뜻이 있다. 해보겠다고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둘 중 하나이다. 보상이 오던 징계가 오던이다. 그 날에 주님이 오시면, 뭐가 올 것 같은가?
이게 다 김멜 때문이다. 김멜은 자유의지인데, 자유의지로 했을 때 보상이나 징계가 온다 .자유의지가 하는 것이기 때문에 징계가 온다. 자유의지가 하는 것이 아니면 징계가 안 온다. 내가 알고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 징계를 해냐면, 뭘 했다가 실수해서 징계하는게 아니다. 내가 알고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옥을 내가 알고 선택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여러분들은 보상과 징계에서 열외였다. 이 이야기를 듣기 싫은 사람은 지금 기회가 딱 한 번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나면 보상이나 징계든지가 온다. 그런데 지금까지 이 이야기를 듣기 전에는 보상도 징계도 없었다. 모르고 살아왔으니까, 주님은 절대 징계 안 하신다. 그러나 오늘 이후로는 징계가 있다. 왜? 내가 어떤 일을 선택해서, 지옥을 선택했다면, 지옥을 내가 선택해서 내가 가져온 것이다. 여기에 대한 징계가 반드시 있다. 내 자유의지가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의지가 좋은가 안 좋은가? 골치아프지 않는가? 잘 되면 보상이지만, 어떡하는가? 노예가 좋은가, 자유의지가 좋은가? 전 옛날에 노예가 좋았다. 나는 선택한다고 했는데, 되는 일이 없는 것이다. 자유의지가 있는 것이 싫었다.
김멜, 그러면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인가?
나는 하나님과 하나였다. 그런데, 나는 자유의지를 가질 필요가 없었다. 그냥 하나님의 몸이었으니까, 그냥 나는 있으면 된다. 여러분들의 심장이 자유의지를 가지겠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가? 오늘은 안 뛸래..? 위가 오늘 저녁 나 좀 쉬자.. 그러면 어떡하는가? 문제가 생긴다. 다리가 갑자기 한 쪽은 가려고 하는데, 한 쪽은 나 좀 쉬겠다고 하면?
하나님과 Perfect하게 하나였을 때는 나에게 자유의지가 없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나를 뗴어버리고, 지구에 내어보냈을까? 나에게 자유의지를 주기 위해서이다. 자유의지를 줘야 내가 한 생명이 된다.
하나님은 많은 아들을 얻고 싶으셨다. 하나님은 당신만 생명이 아니라, 많은 생명을 주고 싶으셨다. 생명을 준다는 것은 자유의지를 주는 것이다. 당신과 같은 자유의지를 주고 싶은 것이다. 당신과 같은 생명, 삶을 주고 싶은 것이다. 많은 아들들을 얻고 싶으시다. 그게 자유의지를 줬다는 것이고,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왔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거절감으로 오해했다.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와서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 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내가 선택해야 한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자유의지가 살아나면, 우리는 주님을 만나기 전에 자유의지가 있는 줄 아는데, 절대 없다 .거절 감정 위에 쌓아올린 상처들, 하나님이 나를 버렸으니까 죽을 존재다, 내가 사랑받으려고 하는 이 상처 위에 다 쌓아올린다. 나 상처 받으면 안 된다는 것이 대전제조건이다. 상처받지 않으려고 아주 톡톡 쏜다. 성격이 까칠한 이유가 뭔가? 상처받지 않으려고 까칠한 것이다.
상처에서는 여기는 자유의지가 없다. 오로지 나 살려고 선택한다 이 선택은 뻔하다. 여기엔 자유의지가 있다고 하지 않고, 그냥 욕구의 노예라고 한다. 나 살려고 하는 그 짓만 한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더 심해진다. 왜냐면 점점 죽음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점점 약해지기 때문이다. 더 나를 살려야 하는데 이게 갈수록 잘 안 된다
젊었을 때는 아직 많이 남아있으니까 괜찮다. 그냥 저기서 자지. 할 수 있는데, 이제는 힘도 없어서 안 된다. 왜 나를 이렇게 괄시하냐고 하면서 힘들다. 여기엔 자유의지가 없다. 오로지 나 사는 것만이다. 그런데 주님이 오셔서, 넌 거절된 적 없다. 죽지 않는다. 부활의 몸이다.
주님의 피를 딱 믿으면, 사탄과 딱 연결되어서, 사탄이 주는 모든 미혹, 생각들, 해석들, 이게 다 이것이다. 이 생각들이 갑자기 뚝 끊긴다. 이게 주님의 피를 믿는 자들에게 임하는 어마어마한 축복이다.
내가 죽는게 아니었잖아..? 아까 종수 형제가 아버지를 용서하는게, 이게 아니었지 않는가? 이게 사탄으로부터 오는 해석들이 다 끊겨 나가는 것이다. 그러면 자유의지가 살아난다.
자유의지가 살아나면, 십자가가 자유의지를 정 가운데에 둔다. 그래서 자유의지가 살아나서, 우리는 주님을 믿으면 모든 것이 자동적으로 될 줄 알지만, 그렇지 않고 딱 밸런스만 맞춰진다.
그리고 양쪽에 문이 있다. 자유의지는 이 문을 여는 작업을 한다. 그래서 김멜 다음의 히브리 단어가 달릿, 문이다. 우리 주님은 다윗의 후손으로 왔다. 문을 여는 작업을 하는 것이 김멜이다.
그래서 이 김멜이 한쪽 문을 열면 지옥의 사자들이 들어온다. 인간은 빈 그릇이라고 했다. 인간은 다 영으로 살아간다. 여기에 무엇을 담느냐가 인간을 결정한다. 인간이 어떤 형상이 될 것이냐는 것은 빈 그릇에 무엇을 담느냐가 결정한다. 그래서 지옥의 영들을 담고, 지옥의 영들이 인간 속에 들어오면, 지옥의 영들이 하는 짓들을 한다.
저는 대학 다닐 때 밤만 되면 술을 먹었다. 외 먹었을까? 제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막걸리 토했을 때의 냄새이다. 그런데, 안주로 깍두기만 먹었을 때이다. 그것도 신 깍두기이다. 특히 전봇대 밑에 게워놓으면 그 다으만ㄹ 와서 저게 내꺼라고 생각하면 정말.. 겨울이 되서 얼면..? 더 드러운 것은 등 두드려 줄 때이다. 나는 왜 그렇게 살았을까? 내가 그렇게 살고 싶었다고? 천만의 말씀이다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누가 살았는가? 그러면 네가 산 것이 아니냐? 그런데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나도 모르겠다. 네가 모르면 누가 아냐?
사람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아니다. 사람은 어떤 영이 들어오느냐에 따라서 지배를 받는다. 희한하다. 하나님의 영이 들어오면 사람이 180도 바뀐다. 이게 그리스도의 피가 하는 일이다. 그리스도를 믿으면 피가 바뀌고, 사람이 180도 바뀐다.
여러분이 저 좋아하는가? 옛날 같았으면 어림없는 일이다. 제 별명이 복소수였다. 숫자 중에서 알다가도 모르는 수가 복소수이다. 정체가 없는 수이다. 정의를 할 수가 없다. 유리수, 정수, 마이너스, 분수, 정의가 되는데, 얘는 정체를 모르는 수다.
저 인간의 입에서 뭐가 나올지, 어디로 튈지, 학생 운동을 하는건지 아닌지 아무도 모른다. 어떨 때 보면 학생운동하고, 폐인인 것 같고, 사라져서 뉴질랜스에서 돼지치고 있고, 어떻게 보면 택시운전사로 나타나고, 어떨떄 보면 피라미드하고 있다. 어떨때 보면 자살하겠다고 친구 자취방에서 먹지도 않고 누워있고, 그러다가 극장에 영화보러 나타난다
제가 이렇게 살고 싶었다고? 누가 그렇게 산 것인가?
사람은 다 영의 지배를 받는다. 어떤 영을 선택하느냐? 이것이다. 하나님이 성령을 받으라고 하시는 것이,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이 결합해와야 한다. 그런데 이게 자동으로 되면, 우리의 생명이 없다. 그래서 이것을 우리 자유의지로 선택하게 해 놓았다. 그런데 여기만 있으면 선택이 아니다. 사탄에게 사기 당할때는 맨날 죽을 것만 선택할 것 밖에 없었다. 맨날 결과는 뻔하다. 오바이트 하는 것이다.
엄마가 공부 열심히 하라고 자취방 구해줘도 뻔하다. 인생이 뻔하다.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 봐도 결과는 뻔하다. 이 마음의 공허함이 사라지지 않는다. 정말 미치겠다.
이제 주님이 문을 열도록 양 쪽을 다 선택해줫다. 이것을 גאל 고엘, 구속자라고 한다. 김멜의 하나님, 이분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한다. 이제 우리의 할 일이 남은 것이다. 왜 여섯개의 문을 이야기하냐면, 이제 우리가 할 일이 남았기 때문이다.
이제 주님이 가르쳐주신다. 이 지옥의 놈들이 들어오는 문이 있다. 이쪽 놈들이 들어오려면, 이전에는 대문짝만하게 문을 열고 와서 살라고 하는 것이다(=거절감, 상처). 나는 하나님이 아버지라고 했고, 죽지 않고, 상처받지 않는다고 했다. 이제 더 이상 얘들은 나에게 상처줄 수 없다. 이제는 딱 한 가지 방법이다. 내가 스스로 문을 열어주는 것이다. 그러면 얘는 들어올 수 있다. 그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다.
이제는 자유의지가 살아났기 떄문에, 하나님의 영 조차도 내가 스스로 열지 않으면 못 들어오신다. 그러니까 이 자유의지가 캐스팅 보드가 된다. 이것은 마치 전 우주에서, 이 두 강력한, 천국과 지옥의 세력이 누가 문을 여느냐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참 하나님도 이런 도박을 하셨다. 하나님이 홍해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건너게 할 때, 아쉬라 라도나이 키가오가아 아쑤스, 내가 주께 노래하리라 하면서, 주는 높고 영화로우시다. 이게 고대 히브리어인데, 얼마나 미스테리한 노래냐면, 아쉬라, 내가 주님의 형상을 머리로 할 텐데, 주님은 누구시냐면, 키가오가아, 주님은 가오 가아, 김멜의 신성이다. 김멜을 주시는 분이다. 내가 김멜을 얻었다고 하는게 이스라엘 백성이 하는 노래이다.
이게 대단한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노래에는 가오가아, 이것만 노래하는 것도 있다. 이 김멜을 가지고 장난치고, 김멜이 파괴된 것이 가그이다. 오늘날 레이디 중에 이 김멜을 대적하는, 곡과 마곡의 전쟁을 수행하는 레이디가 있다.
김멜이 내가 무슨 문을 여는가이다. 이것은 이제 법칙이다. 사는 법칙을 배워야 한다. 내가 문을 열면 합법적으로 들어온다. 반드시 배워야 한다.
문이라는 것은 기가막힌 것이다. 우리끼리 있고 싶을 떄 누가 들어오려고 하면 문 닫으라고 한다. 어린 애들이 어렸을때부터 훈련하는 것이 그 문 닫는 연습이다. 이제 우리도 이 연습을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한 번도 안 해본 연습이다. 인생은 이런 것을 하고 살아야 한다.
이 세상에서 지지고 볶고, 피터지고, 결국 사단의 먹이가 되는 것이 인생이 아니다. 이런 인생은 이제 종 쳤다. 이제는 여기서 기가막힌 것이다. 얘들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모든 인간의 삶에는 이 양쪽의 세력이 다 대기하고 있다. 여기도 한 사람이 나타난다면 양쪽 세력이 나타난 것이다. 다 대기하고 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이쪽 문을 딱 열면 여기에 하나님 나라가 임해버린다. 그런데 지옥에서도 수시로 고의적인 죄를 짓도록 노리고 있다. 그런데 대기하고 있는데, 여기서 고의적인 죄를 지었다면..?
어제부터 고의적인 죄 졌는가 안 졌는가? 누가 코 골 때 미워했는가 안 했는가? 사탄은 드립다 코 골게 한다. 왜? 미워하게 하려고 말이다. 그래서 미워했다고 하면 고의적인 죄의 문을 열어버린 것이다. 그러면 지옥의 영들이 슉 들어온다. 그러면 지옥 나라가 임하게 된다. 그러면 악한 영들이 거기서 마음껏 활동한다.
어떤 영들이 들어왔느냐에 따라서, 삶의 기운과 에너지가 달라진다. 기운과 에너지가 달라지면, 그게 주는 영향력, 거기서 진행되는 일들이 달라진다.
베목사님이 턱을 괴고 있는 모습으로 죄를 지으면, 이 영들이 들어오면 그런 일들이 벌어진다. 악한 영들의 일들이 벌어진다.
이제 여러분들이 여섯 가지의 악령들이 들어오는 문이 있다는 것을 아셔야한다. 이 문 중에서도 사람에 따라 제일 약한 문이 있다. 성을 공격할 때 제일 약한 곳을 집중공격한다. 용서치 못하는 문이 약하면, 용서치 못하는 일만 발생하면 문을 활짝 연다. 누가 한번 와서 무시하는 발언을 하고 갔다면, 저것이.. 나 미국에서 왔다고 한구말 잘 못한다고..?! 유 나 무시?? 용서 못해..! 그 순간 다 악령들이 들어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약하면 삶 속에서 자꾸 이런 일만 벌어진다. 용서하지 못할 인간의 줄을 사탄이 내리 세운다. 계획을 하나만 세우는 것이 아니라, 이게 실패할 경우는 조금 더 강하게, 이전 상처를 다 알고 있어서 그것을 또 이용한다.
Ex ) 부부싸움할 때도 용서 못하게 하려고 사단은 다 이용한다. 그냥 무시하니까 이제 용서해버린다. 그러면 이러면 안 되니까, 사단 사이에서 2차 작전이 실행된다. 장모님을 걸고 넘어지라고 한다. 처갓집을 걸고 넘어지라고 한다. 으이구, 네 집은 다 그렇지.. 이거 한 마디 하면..! 그러는 너는..?! 어머니랑 너도 똑같지?? 그러면 드디어 문이 활짝 열리고 집안에 악령들이 다 들어와서, 난장판을 만든다. 냄새나도 이상한 짓을 한다. 승질나니까 또 나가서 이상한 짓을 한다. 안에서 승질나니까, 그 때 마침 애는 왜 꺠는가? 두드려 팬다. 이게 내가 하고 싶은 것이라고? 아니다. 자기 아들 때리고 싶은 사람이 어딨는가?
이 문을 절대로 속지 마시기 바란다. 이제 여러분들에겐 자유의지가 있다. 절대 삶은 이렇게 질질 끌려가는 것도 아니고, 이거 모르고 문을 활짝 열어대는 것도 아니다
제 아내랑 신혼 초에 항상 연습한 것이 누구 장단 맞추는 것인가이다. 누가 문 열어주는 것에 장단 맞추는 것인가? 목사님이 밉다? 누가 지금 문 열어달라고 하는 것인가? 사단이 문 열어달라는 소리이다. 절대 속아넘어가지 마시기 바란다. 죽었다 깨나도 열지 마시기 바란다. 다 닫아야 한다
다음 섹션에서는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악한 영들을 쫓아낼 것이다. 합법적으로 들어와서 내 안에 진을 치고 있는 놈들이 있다. 이놈들을 쫓아내야 한다. 그런데 문을 안 닫고 쫓아내면, 도로 들어온다. 쫓아내봤자 내일 버스타고 가면서 들어온다. 간식이 뭐냐고, 차는 왜 막히냐고, 도로 다 막힌다. 내가 인카운터 다시 오나봐라.. 내적 맹세.. 도로 다 막힌다.
이제 우리는 정확한 진리를 배워야 한다. 아주 귀한 것을 배우는 것이다. 절대 유전적 저주, 이런 문들을 열지 말라. 유전적 저주는 생김새라던지, 육신에 속한 것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유전으로 받은 것이 육신이다. 내가 어떻게 생겼다라는 것등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키 쪼그맣다? 이런 육신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거기에 문을 활짝활짝 여는 사람이 있다.
요새 아이돌 그룹들이 성형을 그냥 어마어마하게 한다고 한다. 계속 성형을 한다. 그 어린 것들이, 그리고 나중에 나이들어서 어떻게 살래?라고 하는데, 나중엔 그냥 죽어버리고 싶다고 한다. 지금 TV에 한 번만 성공하면 된다고 한다.
다 육신적인 것을 가지고 계속 문을 연다. 이게 유전적 저주이다. 유전적으로 받은 육신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이것은 다섯째 날에 해당된다. 하나님이 주시는 생각으로 살아야 한다. 이것은 사라질 것인데, 왜 신경을 쓰는가? 사라질 것에 신경을 쓰고, 내가 돈이 얼마나 있고, 어떤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우리 집에는 왜 돈이 없냐? 이게 다 유전적 저주이다. 우리 아버지는 왜 이 모양이고, 우리 엄마는 왜 이 모양이냐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모양이어야 하는가? 다 구원받아야 할 대상으로 태어난 것이다
유전적 저주의 문을 열면, 이 귀신들은 진짜 치사하고 더럽다. 유전적 저주의 문이 열리면, 그래서 귀신들이 다 들어와서, 우리 자녀들을 다 성형하게 하고, 몸 팔게 하고, 그냥 이 땅에서 이쁨받으려고 한다. 온 세상이 지금 미쳤다. 왜 그런지 아는가? 우리들이 다 귀신들을 불러들여서 그렇다
이 땅에서 조금 잘 살려고 하고, 명예 조금 더 얻으려고 하고, 이게 다 우리가 귀신을 다 불러들여서, 자녀들이 그렇게 된 것이다
영적, 충격적인 사건, 충격 좀 받지 말라. 뭐가 그렇게 충격적인가? 다 나 죽으려고 한 것 가지고 충격받는거 아닌가? 나 안 죽는다. 다 나 사랑 못 받은 것 가지고 충격받는 것 아닌가? 어떻게 그 인간이 그럴 수 있냐고? 그럴 수 있다. 죄인인데.. 다 나 죽을까봐, 사랑 못 받은거 가지고 충격받은 것이다.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에게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에게 있다. 이런 것에는 충격 안 받는가?
하나님의 사랑이 나에게 이미 있다. 그래서 나 사랑 안 해준 것, 이런 것 가지고 충격받지 말라. 교회 와서도 사랑이 없다고 충격받는다. 아니 사랑이 있는 인간들이면 왜 왔는가? 다 병자들이니까 여기 와 있다.
여기 이렇게 질서있는 것 자체도 기적이다. 뭘 그렇게 충격인가? 충격 좀 받지 말라. 충격받는다는 것 자체가 지옥의 문을 여는 것이다. 나 사랑받고 싶고, 나 죽는 존재라고 하면서 지옥 문을 활짝 열어버리는 것이다. 그리로 들어온 귀신이 나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내 자녀들, 내 가정을 다 파괴한다. 내 집에 내가 자유의지로 귀신들을 불러들인다. 난장판이다. 귀신의 향기는 아주 드럽다. 가도 아무런 향기가 없고, 구역질 냄새밖에 없다.
이제 인생은 재밌다. 우리는 지옥쪽 이 김멜의 전공자이다. 그러면 반대쪽 문은 안 가르쳐주는가? 가르쳐줘도 모른다. 살아본 적이 없어서 언어가 없다. 반대쪽 문도 여섯개이다. 첫 번째 문을 에하드, 쉔, 슐리시, 아르바임, 하미쉬, 쉐시라고 한다. 대충 알겠는가?
그런데 사실 그게 뭔지 모른다. 그런데 지옥 쪽은 아주 전공이다. 느낌이 팍팍 오지 않는가? 그래서 이쪽 문을 닫으면 천국은 저절로 알게 된다. 지옥과 반대되는 문이 있다
내가 충격을 받을 일이 있었는데, 충격을 안 받으면 반대쪽 문이 열린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한다. 분명히 저 인간이 나에게 해댄 것이 있다. 그런데 그것에 대해 충격을 안 받는다. 그러면 반대쪽 문이 열린다. 나를 죽이려고 했는데, 사랑하는 것이다. 이게 내가 하는 줄 아는가? 아니다. 하늘의 영이 와서 하는 것이다.
유전적인 것, 나는 왜 이 모양이고, 우리 집은 왜 이렇다는 것을 다 닫는다. 그러면 하나님이 주시는 생각, 진리가 들끓게 된다. 종수 전도사가 아버지에 대해서 막 이야기했다. 그런데, 아버지를 용서한다는 그 순간, 저도 울었다. 내가 용서를 해 준게 아니라, 하나님의 평가를 받아들인다. 이 반대쪽 문이 열린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생각들이 쏟아져오면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인생은 김멜이다. 김멜에는 후대하다라는 뜻이 있다. 하나님이 김멜로 살아가는 자를 후대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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