追憶어린 길
나는 학창 시절 외국작가로는 펄 벅에 심취한 일이 있다. 그 뒤 미국에서 자취생활을 할 때 TV를 통해서 본 영화 '대지'도 매우 감동적이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대학의 입학보다 기숙사에 들어가는 일이 더 어렵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피바디 시절 배당된 기숙사를 외면하고 자취방을 구해서 나갔다. 생활비를 절약하기 위해서였는데 되도록 싼 방을 구한다고 이집 저집 기웃거렸던 기억이 난다.
나는 이회복(李熙福) 편수관과 방친구가 되기로 약속하고 둘이서 함께 방을 구하러 나섰다. 처음에 들른 곳은 학교에서 가까운 석조건물의 주택이었다. 현관밖에 빈 방 있음의 광고판이 내걸려 있어서 주인을 찾았다. 문밖에 나타난 중년의 여인은 우리를 먼저 정원으로 안내했는데 이것저것 자랑이 대단했다. 정원수며 화훼며 그리고 잘 다듬어진 잔디 등. 다음에는 내밀한 거실까지 대충 보여주어서 그 친절에 은근히 감동이 되었다. 꼭 이 집의 방을 얻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우리나라는 GNP 7, 80불의 생활수준이 말이 아닌 시절이어서 이제 막 둘러본 정원이며 거실의 가구 등이 부럽기 그지없었다. 이제 우리도 잘하면 이런 집에서 기거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뿌듯해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다음 순간 너무 어이가 없어서 나와 이 편수관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 여인이 세놓을 방을 보여준다면서 앞장서서 지하실 계단을 내려갔던 것이다. 지하에도 방이 몇 개 있었는데 위에서 본 방하고는 너무 동떨어져서 실망했다. 오래도록 비워놓았던지 가전제품은 녹이 슬어서 작동이 될는지도 의심스러웠다. 무엇보다도 퀴퀴하고 음산한 분위기가기분을 우울하게 했다. 지상의 낙원이란 말이 바로 이런 경우에도 해당이 되는가싶도록 지상과 지하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이야기가 잠시 옆으로 흐르는데 해방직후에 학자, 문인, 언론인 등이 어우러져서 'she'의 번역을 놓고 치열한 논쟁을 벌였던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그녀'를 비롯하여 '그네' '그미' '그씨' 그리고 성의 구별없이 남, 녀 다같이 그를 쓰자는 등. 하찮은 일로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는 기성세대에 대해서 젊은 학생들이 환멸을 느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그녀에 ㄴ을 붙이라고 꼬집었다. 그러자 여학생들은 ‘he'도 그에다 '놈 자를 하나 더 붙이라고 반박했다고 한다.
그 여인의 경우를 연상해서 한 말인데 지나치게 친절하고 정원으로 거실로 끌고 다니며 뜸을 들인 연유도 알 듯 싶었다. 마음이 약한 외국 학생들의 기를 꺾어놓고 거절하기 어렵게 하는 얕은 수작이라고나 할까. 아무래도 이 여인의 경우도 'ㄴ'자를 하나 붙어 주고 싶은 충동이 솟구쳤다.
솔직히 말해서 그 당시 우리나라는 판잣집에서 기기하는 이재민들이 부지기수였다. 판잣집이 아니더라도 농어촌이나 도시를 막론하고 초라한 주택들이 허다했던 것은 우리가 다 잘 아는 일이다. 사실인지 어떤지는 잘 모르지만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의 초라한 집들을 보고 축사로 오인했다는 말도 있다.어렵게 살던 시절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서 입맛이 씁쓸하다. 그렇다고 국무부 장학금을 받고 있는 우리가 미국 땅에까지 와서 허술한 지하실 생활은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 뒤에 우리는 월세도 적당하고 환경도 쾌적한 방을 만났지만 처음에 구겨진 기분은 여간해서 가시지를 않았다.
우리가 두 번째로 들른 곳은 첫 번째와는 반대로 다락방이었다. 다락방에 관해서는 책에서는 가끔 읽은 일이 있다. 가령 책 안 읽는 대왕보다는 차라리 책 속에 묻혀 사는 다락방의 가난한 선비가 더 부럽다는 영국의 어느 석학의 글 등.
그런데 내가 양옥의 다락방에 들어가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천장의 춤은 낮지만 시설이나 비품 등도 깔끔하고 전망도 좋은 편이었다. 서양의 가난한 학자들은 이런 곳에서 책을 싸놓고 독서에 여념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위인(爲人)은 장차 학자가 될 자질이 부족했던지 이 아담한 다락방도 포기하고 말았다. 사람이 지기를 못 펴고 항상 구부리거나 기어다니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너무 등신스럽게 생각되었다. 비록아무도 보지 않는 방안이라고는 하지만, 우리 한국의 참가자들(Participants)이 방을 구하러 나선 것이 늦어서 조건이 좋은 알짜배기는 다른 학생들이 먼저 차지한 것이다.그래도 학교에서 좀 떨어진 곳에는 아직도 마땅한 방들이 더러 남아있었다.
'세 번째가 진짜'라는 속언처럼 우리는 마침내 그 다음에 들른 세 번째 집에서 마음이 흡족한 방을 얻게 되었다. Carpers로(路) 2134번지의 배리씨댁 2층인데 그곳의 구조나 시설 그리고 집주인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도 조금 비쳤다. 우리는 정말 마음씨가 다시없는 노부부를 만난데다 방세도 다른 일행들에 비해서는 좀 싸게 얻은 편이었다. 나는 이 베리씨 댁에서 두 학기를 지냈다. 미국체류 기간 중 내내 그곳에서 지내고 싶었지만 셋째 학기는 실습 여행 관계로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서 지내면서 굳이 불편했던 일을 든다면 통학거리가 다소 멀다는 점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한적하고 숲이 우거진 정겨운 거리를 산책길로 여기면서 걸으면 도리어 즐거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곳의 가로수는 아카시아는 아니었지만 영국의 저명한 수필가 A•A 밀른의 아카시아길'이 연상되는 그러한 길이었다. 특히 그 글 속에 나오는 '이 아카시아길은 불행한 일이 일어날 수 없으므로 아주 편안하다‘는 구절이 머리에 떠오른다.
Carpers로는 '트집쟁이'라는 뜻과는 달리 밀른의 아카시아길'처럼 마음편한 바로 그런 길이었다. 아무래도 이 거리의 이름은 누가 일부러 익살스럽게 붙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그곳에서 사는 동안 그 부근의 주민들 가운데서 아무도 트집을 잡는 사람은 없었다. 그보다는 다들 남의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간섭을 하지 않아서 마음 편하게 지냈다.
앞에서 밝힌 대로 그곳에서 이 편수관과 함께 지냈는데 방은 따로 쓰고 거실은 같이 쓰기로 했다. 어느 날 이 편수관이TV수상기를 사다가 거실에 놓았기 때문에 이곳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그때는 미국에서도 컬러 TV는 눈에 띄지 않았고 흑백이 보편적이었다. 우리나라에는 아직 민간이나 공영을 막론하고 TV방송국이 세워지지 않았을 때였다. 그리하여 수상기를 사는 것은 재고해 볼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 편수관 말에는 서울에는 미8군의 TV방송국이 있어서 그 채널을 이용하면 귀국 후도 수상기를 아주 사장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한다. 또 조만간 우리나라에도 TV방송국이 세워지지 않겠느냐고 낙관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가 아득한 옛날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TV의 시청을 자제는 했지만 그래도 학업에 지장이 있지나 않을까 싶어서 은근히 염려도 되었다. 그런데 TV를 통해서 영어실력도 익히고 또 적극적으로 그들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장점도 없지는 않았다. 나는 이 편수관 덕분에 간접적으로나마 새로운 세계를 접할 수 있어서 TV를 굳이 뜬 것 물리듯 하고 싶지는 않았다.
수상기를 들여온 날이 마침 중화민국의 국경일인 쌍십절이었던 것 같다. 어느 채널에서는 중국 특집프로가 방영되었는데, 그 안에 「국부군의 몰락」이라는 기록영화와 펄 벅 여사의 「대지」가 들어 있었다. 「군부군의 몰락」은 우리의 이웃나라의 일이어서 관심있게 음미했다. 해설자는 중국대륙이 완전히 적화되어서 국제정세에 적지 않은 변하가 일어나고 있는 것을 우려섞인 어조로 설명했다. 중국대륙의 정변은 그때마다 우리나라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일은 역사가 증명하는 일이다. 이제는 그 바람이 태평양을 넘어서 미 대륙에까지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모두에서 밝힌 바와 같이 나는 젊은 학창 시절에 펄 벅의 작품에 심취한 일이 있다. 그중에서도 「어머니의 초상」과 「대지」에 큰 감명을 받았었는데 직접 ‘대지'를 영화로 감상하는 감회는 각별했다. 이곳은 미국 땅이므로 잘하면 어느 계제에 작가를 직접 만날수도 있을는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까지 하게 되었다.
나는 지난해 모처럼 국부군 몰락의 자취이자 '대지'의 무대인 중국대륙을 돌아볼 기회를 가졌다. '대지'가 발표된 지 60년이나 지난 뒤여서 상황은 상전벽해 정도가 아니리라고 생각된다.그런데 상황은 중국만 달라진 것이 아닌 듯 싶다. 작품에 매료되어 열렬한 애독자를 자처한 사람이 정말 현지에서는 그곳이 작품의 무대임을 까맣게 잊고 지냈으니 말이다. 애독자고깻묵이고 나이가 들어 노틀이 되면 다 별 수 없는 것 같다.
이런 감상에 잠기다 보니 제법 꿈에 부풀었던 Carpers로의 배리씨 댁에서 자취 생활하던 일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젊은 날의 추억 속에서 마음을 사로잡던 그 길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