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시인에 대하여
오늘은 어느 시인을 소개해 드릴까 많은 고민을 하다가 문득
아주 특별한 시인 한 사람이 떠올랐습니다.
여러분은 평생 읽은 시 중 어느 시인, 어느 시, 어느 시구가 가장 기억에 남으시나요? 실제로 한국을 대표한 109명의 현역 시인이 '최고의 시구'를 뽑았습니다. 이름하여 “벼락 치듯 나를 전율시킨 최고의 시구”라는 이름으로 말입니다. 궁금하시지요?
그럼 발표합니다.
1위 김수영 시인 14명,
2위 서정주 시인 9명,
3위는 정지용 시인 7명,
4위는 이상 시인 6명입니다. 그럼 이제
5위는 어느 시인일까요? 진달래꽃의 김소월도 서시의 윤동주도 님의 침묵의 한용운 시인도 아닙니다. 바로 5위는 6명의 추천을 받은 백석시인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백석 시인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아마도 많은 시청자 여러분은 백석 시인이 누구지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백석 시인의 이야기는 또 다른 재미가 있으실 것입니다.
먼저 백석 시인을 유명하게 한 그 시 한 편 들어보겠습니다.
1.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디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시어도 참 어렵지요?
출출이는 뱁새의 방언이고요 마가리는 오막살이의 방언,
고조곤히는 고요히의 방언입니다.
백석, 이 시인을 생각하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시가 바로‘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입니다. 이렇게 본다면,‘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백석 시인에게는 분신과 같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김소월 하면 떠오르는‘진달래’와 같습니다.
우리는 지금껏 이 시인에 대해서 아는 게 이런 단순한 수준입니다.
이 시인은 월북 작가이기에 우리 문단에서는 오랫동안 소개되지 않다가 1980년대, 뛰어난 작가들의 작품들이 해금되면서 이 시인과 이 시인이 쓴 시도 소개되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인은 월북 작가가 아니라, 재북 작가라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이 시인에 대하여 제대로 된 평가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안타까운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시인은 우리가 다 좋아하는 윤동주 시인의 선배이면서, 윤 시인이 이 시인의 ‘사슴’이라는 시집의 필사본을 지니고 다닐 만큼 존경하는 선배로서, 윤시인의 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도 하니, 이 시인의 위치가 가늠되기도 합니다.
이 시인의 대표작 제목에 나오는‘나타샤’는 잘 아는 대로, 톨스토이의 장편소설‘전쟁과 평화’에 나오는 여주인공의 이름인데, 이 이름을 시에 인용한 것을 보면, 시인은 나타샤를 매우 좋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백석 시인의 여러 시 중 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가 유명한 지 아시나요? 바로 이 시에는 우리를 가슴 아프게 한 사랑 이야기가 있어서 입니다. 궁금하시겠지만 우선 백석 시인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하겠습니다.
그래야 여러분이 이 사랑 이야기를 잘 공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명은 백기행으로, 필명은 백석(白石, 白奭)입니다.
과거에는 월북 작가라 해서 그에 대한 언급을 피하는 분위기였지만 나 '월북 문인의 해방 이전 작품 공식해금조치' 이후로는 다시 각광을 받기 시작합니다. 토속적인 우리말로 민중들의 삶을 노래한 뛰어난 시인으로, 지금도 많은 시인들이 인정하고 존경하는 명실상부한 현대시 최고의 시인입니다.
백석 시인은 1912년 7월 1일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에서 아버지 백시박(白時璞)과 어머니 이봉우(李鳳宇)의 장남으로 태어납니다.
1924년 그는 오산 소학교를 졸업하고 오산(五山)고보로 진학합니다. 어릴 적 장난꾸러기 같던 시절과는 달리 백석은 독서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오산학교 재학생들의 문학에 대한 열정에 영감을 받아 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백석 시인의 시 한 편 낭송해 드리겠습니다.
2. 바다 / 백석
바닷가에 왔더니
바다와 같이 당신이 생각만 나는구려
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구려
구붓하고 모래톱을 오르면
당신이 앞선 것만 같구려
당신이 뒤선 것만 같구려
그리고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당신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구려
당신이 이야기를 끊을 것만 같구려
바닷가는
개지꽃에 개지 아니 나오고
고기비늘에 하이얀 햇볕만 쇠리쇠리하야
어쩐지 쓸쓸만 하구려 섦기만 하구려
이제 사랑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전에 말한 나타샤가 나옵니다.
역시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이야기는 사랑 이야기지요?
공부를 마친 "천재시인 백석은 1935년 詩 정주성을 조선일보에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옵니다. 사후, 모던 보이(modern boy)라는 애칭처럼, 문단 최고의 미남으로 평가받던 백석은 같은 해 함흥 영생여고보 영어교사로 일하게 됩니다.
백석과 김영한의 극적인 만남은 함흥 영생여고보에서 이루어집니다. 김영한은 1916년 서울 관철동에서 태어나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할머니와 홀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합니다. 1932년 그녀의 집안은 금광을 한다는 친척에게 속아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어 거리로 나앉게 되었는데 이때 김영한은 열여섯 살의 나이로 조선 권번(券番)에 들어가 기생이 됩니다.
기명(技名)은 진향(眞香). 조선 권번에서 조선 정악계(正樂界)의 대부였던 하규일 선생 문하에서 여창가곡, 궁중무 등을 배웁니다.
문재(文才)를 타고난 김영한은 기생 생활 중에도'삼천리문학’에 수필을 발표하며 인텔리 기생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합니다.
신윤국의 후원으로 도쿄에서 공부하던 중 그는 스승 신윤국이 일제에 의해 투옥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하여 함흥에서 스승의 면회를 시도 했으나 면회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말을 듣고 함흥에 눌러 앉습니다.
그는 여러 고민 끝에 다시 함흥 권번으로 들어갑니다.
그때 드디어 운명적인 사랑이 시작됩니다.
함흥 영생여고 영어교사로 근무하고 있던 백석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는데 함흥 영생여고보 교사들의 회식 장소에 나갔다가 백석을 만납니다.
백석은 진향을 옆자리에 앉히고 손을 꼭 잡고는 이렇게 속삭였다고 한다.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에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어요.”
그때 백석의 나이 스물여섯, 김영한의 나이는 스물둘 백석은 퇴근하면 으레 진향의 하숙집으로 가 밤을 지새곤 합니다. 어느 날 백석은 진향이 사들고 온‘당시선집’을 뒤적이다가 이백의 시‘자야오가’를 발견하고는 그에게‘자야(子夜)’라는 아호를 지어줍니다.
‘자야오가’는 장안(長安)에서 서역 지방으로 오랑캐를 물리치러 나간 낭군을 기다리는 여인 자야의 애절한 심정을 노래한 곡입니다.
김영한은‘내 사랑 백석’에서 이렇게 회상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당신은 두 사람의 처절한 숙명이 정해질 어떤 예감에서, 혹은 그 어떤 영감에서 이 ‘자야’라는 이름을 지어주셨던 것은 아닐까.’
함흥에서 서울로 먼저 올라온 사람은 자야였습니다.
백석이 당시로는 최고의 직장인 고보 영어교사 자리를 그만두게 된 것도 자야 때문이었다. 백석은 조선축구학생연맹전 대표선수 인솔 교사로 서울에 올라와서는 학생들만 여관에 투숙시켜 놓고 자신은 정작 청진동 자야의 집에서 사랑을 불태웠지요.
이 사실이 밝혀져 함흥여고보는 발칵 뒤집혔고 백석은 미련 없이 자야의 곁에 있기 위해 사표를 던집니다. 백석은 자야를 따라 함흥에서 서울로 올라와 청진동에서 살림을 차립니다.
혼례만 치르지 않았을 뿐 두 사람은 부부와 똑같았습니다.
사랑 이야기를 계속 이어갑니다.
두 사람은 거처를 명륜동으로 옮깁니다.
백석과 자야가 동거를 한 기간은 3년여입니다.
백석은 자야와 사랑을 하는 동안 사랑을 주제로 한, 여러 편의 서정시를 쓰는데, 그 중‘여성’에 발표한‘바다’와‘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가 그 바로 이 때 쓴 시입니다. 이 두 시는 모두 들으셨지요?
두 사람의 사랑은 뜨거웠지만 시대 환경은 차디찼습니다.
고향의 부모는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해 강제로 백석을 자야에게서 떼어놓을 심사로 결혼을 시키기로 합니다.
백석은 부모의 강요에 의해 고향으로 내려가 부모가 정한 여자와 혼인을 올리지만 손목 한번 잡아보지 않고 도망쳐 나와 자야 품으로 돌아옵니다.
이런 식으로 강제 결혼을 하고 다시 도망치기를 세 차례나 됩니다.
자식으로서 부모에 대한 효와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하고 싶은 열망 사이에서 백석은 괴로워하고 갈등합니다.
백석은 봉건적 관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야에게 만주로 같이 도피하자고 설득하지만 자야는 이를 거절합니다.
백석은‘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라는 시에서 당시의 심경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가쟈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이제 왜 이 시가 나왔는지 아시겠지요?
자야는 자신의 존재가 백석의 인생에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에 괴로워했습니다. 1939년 백석은 혼자서 만주 신경으로 떠납니다.
이것이 백석과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요. 그리고 전쟁이 발발하고 전쟁 후 백석은 함흥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이것이 마지막 이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1995년 북한에서 죽었습니다.
이제 김영한 여사, 즉 자야의 이야기가 남았습니다.
전쟁 후 김영한 여사는 요정을 운영합니다.
우리나라 3대 요정인 대원각,삼청각, 청운각 중 하나인 대원각을 말입니다. 1955년 서울 성북구 인근의 2만3,140㎡(7,000평) 대지에 대원각을 세워 1980년대까지 운영했습니다. 그러다가 1987년 미국에 있을 때 우연히 법정스님을 만나 대원각 시주를 밝혔으나 거절당합니다.
10년 동안 법정스님을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1995년 대원각과 건물 40여채를 송광사에 시주합니다. 1995년 6월 13일 대한불교 조계종 송광사의 말사인 '대법사'로 등록하였으며 1997년에 길상사로 사찰명을 바꾸어 창건합니다. 사찰 내의 일부 건물은 개보수 하였으나 대부분의 건물은 대원각 시절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당시 대원각은 시가로 1000억 원이 넘었다고 합니다.
김영한 여사는 길상사 창건 2년 후 생을 마감합니다.
그녀는 재혼하지 않고 혼자 살면서 백석에 대한 책을 출간하고 백석문화상을 제정하는 등 옛 연인을 그리워했습니다.
그녀가 죽기 전 한 기자가“평생 모은 재산이 아깝지 않으냐”라고 묻자 그녀는“1000억 원도 그 사람(백석) 시 한 줄만 못하다”라고
답 합니다
금강FM방송<시, 머무는 시간>을 사랑하는 애청자 여러분!
여러분은 신록이 짙어져가는 이 계절에 시 한 편을 써 보고 읽어보셨습니까? 여러분이 읽은 시 한 줄의 값은 얼마입니까?
그 시 한 줄이 여러분을 감동시켰다면
오늘 여러분은 1,000억원을 버신 겁니다.
출처 <시, 머무는 시간> 방송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