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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답사기>
추로지향으로 꿈꾸다!
影園 김인희
가을의 한가운데 이른 아침 기온은 안개 같은 입김이 나게 했다. 아침 8시에 집결하여 버스를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공주 명탄서원의 주관 유교문화유산답사에 부여 사비문학이 초대되었다. 명탄서원에서 논어 인문학 강의를 하고 있는 회장님 덕분이었다.
일행을 태우고 버스가 출발하기 시작하면서 사무국장으로서 마이크를 잡고 진행을 맡았다. 충북 괴산에 있는 김득신 문학관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인문학 강의가 진행되었다. 중학교 국어 교사로 재직했던 황환택 부회장님께서 한 편의 詩로 문학인들의 마음에 불을 지피고 독서왕 김득신에 대해 강의했다.
백곡 김득신(1604~1684). 조선 중기의 대표적 시인으로 꼽히는 그에 대해서는 책읽기와 관련된 일화가 적잖이 전하고 있다. 백곡이 혼례를 치르던 날의 이야기다.
백곡이 책을 좋아한다는 말을 들은 장모는 소문을 확인하기 위해 신방에 있는 책을 모두 치웠다. 아니나 다를까 첫날밤 신랑은 신부를 제쳐두고 방을 뒤지며 책을 찾았다. 경대 밑에서 백곡이 발견한 것은 책력(冊曆). 밤새도록 읽고 또 읽은 백곡은 날이 새자 “무슨 책이 이렇게 심심하냐”고 말했다 한다.
백곡은 독서광이었다. 부친이 감사를 역임할 정도로 명문 가문 출신이면서도 머리가 나빴던 그는 유명 작품들을 반복하며 읽으며 외웠다. 그는 1634년부터 1670년 사이에 1만 번 이상 읽은 옛글 36편을 ‘고문36수 독수기(讀數記)’에 밝혔는데, 그 횟수가 상상을 초월한다.
“한유의 ‘획린해’ ‘사설’ 등은 1만3천번씩 읽었고, ‘악어문’은 1만4천번씩 읽었다. ‘노자전’은 2만번, ‘능허대기’는 2만5백번, ‘귀신장’은 1만8천번, ‘목가산기’는 2만번, 그리고 중용의 서문과 ‘보망장’도 각각 2만번씩 읽었다….”
백곡이 가장 즐겨 읽는 글은 사기의 ‘백이전’. 그는 ‘독수기’에 백이전을 무려 11만1천번을 읽었다고 썼다. 이를 기념해 서재 이름도 ‘억만재’라고 지었다. 백곡은 ‘장자’ ‘한서’ 등도 읽었으나 읽은 횟수가 1만 번을 채우지 못해 ‘독수기’에는 포함시키지 않았다고 밝혔다.
백곡은 재주가 뛰어난 사람은 아니었다. 그의 자질을 알아본 사람들은 글공부를 포기하라고 권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40여 년간 꾸준히 읽고 시를 공부한 끝에 그는 말년에 ‘당대 최고의 시인’(택당 이식)으로 불렸다.
그는 스스로 지은 묘지명에서 이렇게 말했다. “재주가 남만 못하다고 스스로 한계를 짓지 말라. 나보다 노둔한 사람도 없겠지마는 결국에는 이룸이 있었다. 모든 것은 힘쓰는 데 달려 있을 따름이다.”
‘조선시대의 독서왕’ 김득신의 문집 ‘백곡집’이 처음으로 번역됐다. 한문학자 신범식씨(충북대 강사)가 펴낸 ‘국역 백곡집’(도서출판 파미르) 제1권에는 5언·7언의 절구시 756수가 실렸다. 모두가 ‘다독’에서 나온 격조 높은 작품들이다. 시 가운데에는 역시 ‘독서시’(讀書詩)가 적지 않다.
‘이십육년간/등불 걸고 고문을 읽었네/붓은 과보(걸음걸이가 빠른 신화속의 인물)처럼 달리고/기상은 구름위로 솟으려 하네.’(讀罷偶吟·글 읽기를 마치고 읊다)
26년간 책읽기를 마치고 난 뒤에 쓴 시에서는 독서인의 기상이 엿보인다. ‘백이전’을 읽고 쓴 시 ‘제백이전’(題伯夷傳)에서는 ‘기이하구나 사기의 백이전/서애(유성룡)와 오산(차천로)은 만번을 읽었지/나 또한 억번이나 읽었으니/가슴 속에 의심나고 어두운 게 있을손가’라고 읊었다. 그에게 독서는 창작의 원천이자 생활 그 자체였다.
김득신은 조선 중기의 인물로서 엄청난 노력가이자 독서가였다. 하지만 타고난 아둔함으로 지식을 쌓기에는 힘듦이 많았다. 김득신의 아버지는 명문 사대부가 정3품 부제학을 지낸 김치(金緻)였다. 김치는 김득신의 태몽으로 노자가 나타난 꿈을 꾼다. 그런 태몽으로 김득신은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기대를 듬뿍 받고 자랐다. 그러나 김득신의 두뇌는 10살에 겨우 글을 배우기 시작할 정도로 아버지의 기대에 극히 못 미치지는 상태였다. 주변에서는 우둔한 아들을 포기하라는 수근거림이 끊이질 않았다.
아버지 김치는
“나는 저 아이가 저리 미욱하면서도 공부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 대견스럽다네”라는 말을 하면서 아들 김득신의 공부에 포기하지 않았다. 김득신은 나이 스물이 돼서야 스스로 작문할 수 있는 수준이 됐다. 그의 아버지는 “더 노력해라. 공부란 꼭 과거를 보기 위한 것이 아니란다”라고 아들의 학문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가 선택한 공부 방법은 반복학습. 읽고 또 읽고 또 읽는 것이다. 하지만 타고난 둔함으로 인해 수 만 번 읽어도 잊어버리기 일쑤였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것은 책을 읽은 횟수를 기록하고 책에 대한 섬세한 평을 남기는 것이었다. 그는 백이전(伯夷傳)은 1억1만 3천 번을 읽었고, <노자전><분왕><주책><능허대기><의금장><보망장>은 2만 번을 읽었다. 그 밖에 다른 고서들도 2천 번씩은 넘는 횟수를 읽었다. 그는 결국 59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성균관에 입학하게 된다. 그리고 그 시대에 최고의 문장가가 됐다.
말을 타고 하인과 함께 어느 집을 지나다가 글 읽는 소리가 들려 말을 멈추고 한참 동안 듣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 글이 아주 익숙한데, 무슨 글인지 생각이 안 나는구나." 하인이 올려보며 "부학자 재적극박 어쩌고저쩌고는 나으리가 평생 매일 읽으신 것이니 쇤네도 앍겠습니다요. 나으리가 모르신단 말씀이십니까?" 김득신은 그제서야 1억1만3천번 읽었던 <백이전>인 것을 알았다. 하인도 지겹게 들어 줄줄 외우던 백이전이다.
그에 관한 재미난 일화가 또 있다. 그가 한식날 하인과 길을 가다가 5언시 한 구절을 얻었다.
그 구절은 '마상봉한식'(말 위에서 한식을 만나니) 이었다. 그가 한참동안이나 대꾸를 찾지 못해 끙끙대자 하인이 이유를 물으니 대꾸를 못찾아 그런다 했더니 하인녀석이 대뜸 '도중속모춘'을 외치는 것. 즉 '말위에서 한식을 만나니, 도중에 늦은 봄을 맞이하였네!!"로 그럴싸한 구절이 되었다. 깜짝 놀란 김득신이 말에서 내리더니, "네 재주가 나보다 나으니, 이제부터 내가 네 말구종을 들겠다."하니 하인 녀석이 씩 웃으며 "나으리가 날마다 외우시던 당시가 아닙니까?" 하였다. 김득신 왈, "아 참 그렇지!"
또 한번은 그가 친구들과 압구정에 모여 시를 짓고 논 일이 있었다. 그는 하루 온종일 생각하다가 날이 저물 무렵, 큰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오늘 겨우 두 구절을 얻었네만 아주 훌륭하다네"하니 친구들이 "뭔가?"하니 김득신 왈 " '삼산은 푸른 하늘 밖에 반쯤 떨어지고, 이수는 백로주에서 둘로 나뉘었네'일세. 멋지지 않은가?" 하니 친구들이 웃으며 "이게 그대의 시인가? 이것은 이백의 시 <봉황대>일세." 하니 김득신은 풀이 죽어 탄식하며, "천년 전 적선이 나보다 먼저 얻었으니 석양에 붓 던지고 서루를 내려오네." 라고 하니, 듣던 친구들이 웃다가 쓰러졌다. 하도 글을 많이 읽어 자신이 지은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이 정도이고 보면 독서광을 넘어 '책과 한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한 아둔함에도 이에 굴하지 않고, 정진에 정진을 거듭하여 책과 한 몸이 되었으니 정말이지 감탄할 만하다. 실로 그의 삶의 행적은 바르고 올곧았으며, 성품이 따뜻했던 모양이다.
"재주가 남만 못하다고 스스로 한계짓지 마라"
<기록문>에 그의 반듯했던 삶의 흔적이 역력하다. 김득신은 친구 구장원과 서로 사흘 걸리는 거리에 살았는데 몇 년 전에 연월일을 정하여 서로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그런데 마침 비바람이 크게 불고 날이 늦은지라 구장원은 김득신이 오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날 저녁에 과연 그가 이르렀다. 그 독실함이 이와 같았다. 타고난 둔재임에도 불구하고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그 잘 잊어버리는 사람이 몇 년 친구와의 약속은 잊지 않고 지켰던 독실한 성품이었기에 그의 친구들은 그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그 후손들도 또한 본을 받으려 했다. 노력은 재능을 만든다고 한다.
그의 가르침은 아둔한 머리를 탓하며 노력을 게을리하였던 것은 아닌지 반성케 한다.
2차시 강의는 부여전통문화대학교 최영성 교수님께서 조선시대의 대문호 송시열에 대해서 했다. 최영성 교수님은 한문학자로서 저서가 하버드대학에 보관되어 있다고 했다.
1. 송시열의 출신 및 관직생활
아버지는 사옹원봉사 갑조이고, 어머니는 선산곽씨(善山郭氏)이다.
효종의 즉위와 더불어 대거 정계에 진출해 산당(山黨)이라는 세력을 형성했던 송준길(宋浚吉)·이유태(李惟泰)·유계(兪棨)·김경여(金景餘)·윤선거(尹宣擧)·윤문거(尹文擧)·김익희(金益熙) 등과 함께 김장생(金長生)·김집(金集) 부자에게서 배웠다. 26세 때까지 외가인 충청도 옥천군 구룡촌에서 살다가 회덕(懷德)으로 옮겼다. 1633년(인조 11) 생원시에 장원급제하고 최명길(崔鳴吉)의 천거로 경릉참봉이 되면서 관직생활에 발을 내디뎠다. 1635년 봉림대군(鳳林大君 : 뒤의 효종)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이듬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에 들어갔으나, 1637년 화의가 성립되어 왕이 항복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가게 되자 낙향하여 10여 년 간을 초야에 묻혀 학문에 몰두했다. 1649년 효종이 왕위에 올라 척화파와 산림(山林)들을 대거 기용하면서, 그도 장령에 등용되어 세자시강원진선을 거쳐 집의가 되었다. 이때 존주대의(尊周大義)와 복수설치(復讐雪恥)를 역설하는 글을 왕에게 올려 효종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청서파(淸西派 : 인조반정에 간여하지 않았던 서인세력)였던 그는 공서파(功西派 :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공을 세운 서인세력)인 김자점(金自點)이 영의정에 임명되자 사직했다. 이듬해 김자점이 파직된 뒤 진선에 재임명되었다가 다시 물러났다. 그뒤 충주목사·사헌부집의·동부승지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향리에 은거하면서 후진양성에만 전념했다. 1658년(효종 9) 다시 관직에 복귀하여 찬선을 거쳐 이조판서에 올라 효종과 함께 북벌계획을 추진했다.
이듬해 효종이 급서한 후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服喪) 문제를 둘러싸고 제1차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송시열은 기년복(朞年服 : 만 1년 동안 상복을 입는 것)을 주장하면서 3년복(만 2년 동안 상복을 입는 것)을 주장했던 남인의 윤휴(尹鑴)와 대립했다.
예송은 〈대명률 大明律〉·〈경국대전〉의 국제기년설(國制朞年說)에 따라 결국 1년복으로 결정되었지만 이 일은 예론을 둘러싼 학문적 논쟁이 정권을 둘러싼 당쟁으로 파급되는 계기가 되었다. 예송을 통해 남인을 제압한 송시열은 효종에 이어 현종이 즉위한 뒤에도 숭록대부에 특진되고 이조판서에 판의금부사를 겸임한 데 이어 좌참찬에 임명되어 효종의 능지(陵誌)를 짓는 등 현종의 신임을 받으면서 서인의 지도자로서 자리를 굳혀 나갔다.
그러나 이때 효종의 장지(葬地)를 잘못 옮겼다는 탄핵이 있자 벼슬을 버리고 회덕으로 돌아갔다. 그 뒤 여러 차례 조정의 부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향리에 묻혀 지냈으나, 사림의 여론을 주도하면서 막후에서 커다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1668년(현종 9) 우의정에 올랐으나 좌의정 허적(許積)과의 불화로 곧 사직했다가 1671년 다시 우의정이 되었고 이어 허적의 후임으로 좌의정에 올랐다.
1674년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자 다시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제기되어 제2차 예송이 일어났을 때 대공설(大功說 : 9개월 동안 상복을 입는 것)을 주장했으나 기년설을 내세운 남인에게 패배, 실각당했다. 이듬해 앞서의 1차 예송 때 예를 그르쳤다 하여 덕원으로 유배되었고, 이어 웅천·장기·거제·청풍 등지로 옮겨다니며 귀양살이를 했다.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으로 남인들이 실각하고 서인들이 재집권하자 유배에서 풀려나 그해 10월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로 다시 등용되었다. 그뒤 서인 내부에서 남인의 숙청문제를 둘러싸고 대립이 생겼을 때, 강경하게 남인을 제거할 것을 주장한 김석주(金錫胄), 김익훈(金益勳) 등을 지지했다. 이로써 서인은 1683년 윤증(尹拯) 등 소장파를 중심으로 한 소론과,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노장파의 노론으로 분열되기에 이르렀다.
1689년 숙의장씨가 낳은 아들(뒤의 경종)의 세자책봉이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숙종의 미움을 사 모든 관작을 삭탈당하고 제주로 유배되었다. 그해 6월 국문(鞠問)을 받기 위해 서울로 압송되던 길에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2. 송시열의 학문 경향과 정치사상
송시열은 젊은 시절 이이의 학통을 계승한 김장생과 그의 아들 김집의 문하에서 성리학과 예학을 수학했는데 그의 학문은 바로 이러한 기호학파의 학맥을 근간으로 형성되었다. 이기론(理氣論)에서 그는 이황의 이원론적인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배격하고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 사단칠정(四端七情)이 모두 이(理)라 하는 일원론적 사상을 발전시켰다. 또한 정통 성리학자로서 그는 주자의 학설을 전적으로 신봉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평생의 업을 삼았다.
북벌론은 당연히 조선왕조의 부국강병 필요성을 제기하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정치적·사회적인 측면에서 송시열이 강조했던 것은 '세도정치론'(世道政治論)이었다. 이는 강상윤리를 기초로 하는 사회기강의 확립과 주자학적인 의리(義理)·도학(道學)의 실현에 목표를 두는 것이었으며, 또 이의 실현주체로서 성학(聖學)의 수양을 쌓은 성인(聖人)으로서의 군주를 상정하는 것이었지만 그러한 군주가 없을 경우에는 현인(賢人) 재상(宰相)이 전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결국 현실적으로는 세도정치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군자당(君子黨)은 노론뿐이라는 당파적 이해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면에서 그는 주자의 교의에서 벗어나 본래의 공맹(孔孟)에서 유학을 재정립하고 군주 중심의 정치운영방식을 추구하고자 했던 허목(許穆)이나 윤휴 등 남인의 학자들과 커다란 차이를 드러냈던 것이다. 복상을 둘러싼 2차례의 예송에 깊이 간여하면서 남인과 대립했던 이면에는 이와 같은 입장의 차이가 있었다.
기사환국으로 노론이 실각하면서 송시열의 이같은 정치운영론은 일단 실패했으나, 18세기 후반 이후 노론의 일당전제정치 확립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체계로서 정치와 학문 양 측면에서 거의 독점적인 지위를 구축했다.
괴산군 청천면에는 조선 시대 후기 도산서원 등과 더불어 4대 서원으로 유명한 화양서원이 있다. 이곳 화양동 구곡에 서원을 세우게 된 것은 우암 송시열이 병자호란 이후 이곳에 은거하면서 학문을 연마하고 후진을 양성하였던 곳이기 때문이다.
우암 송시열의 유적은 조선 성리학을 계승하고 완성한 우암 송시열(1607~1689)의 애국사상과 중국 청나라의 무력에 굴하지 않은 민족자존 정신이 깃든 곳이라 그 의미가 크다. 괴산 송시열 유적은 우암 송시열이 말년을 지낸 곳으로 조선시대 기호학파 학자들이 많이 모였던 장소인 화양서원과 임진왜란 때 원군을 보내준 중국 명나라 황제인 신종과 위종의 위패를 모신 사당 만동묘가 있다.
화양서원은 조선 숙종 22년 문정공, 좌의정이었던 노론의 영수 우암 송시열의 영정을 모시고 제향하기 위해 그의 문인인 권상하, 정호 등의 노론계 관료와 유생들이 힘을 합쳐 건립된 서원입니다. 전국에 걸쳐 44개소에 이르는 송시열 제향 서원 가운데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서원이며 조선시대 학자들의 모임 장소였다.
전국의 사액서원 중에서도 가장 이름 있고 위세가 당당했던 화양서원은 건립 당시부터도 소론 측의 반대로 중단될 위기에 놓인 적이 있고, 사액을 받을 때도 첩설서원(특정 인물을 제향하는 서원으로 17세기 중 후반부터 큰 사회적 문제로 부각 됨)이라 하여 반대하였다고 한다. 창건된 해에 편액을 받았으며 숙종 42년에는 어필로 현판을 달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릇된 세금 징수로 심한 민폐를 끼쳐 철종 9년(1858)에 폐쇄되었으며 흥선대원군에 서원 철폐령으로 인해 고종(1870)에 건물이 헐렸다. 화양서원의 유적 입구에는 증반청, 존사청 현판이 달린 작은 건물이 좌우로 세워져 있고, 우측에는 풍천재 건물이 잘 보존되어 있다.
만동묘정비는 만동묘를 세우게 된 취지와 제사를 모시고 있는 명나라의 신종과 의종을 추모하는 뜻을 기록했다. 영조 23년에 이재가 글을 지어 세웠으며, 순조 14년에 다시 세웠으나 그 후 일제에 의해 묘정비는 비문을 알아보기 힘들게 만들어 땅에 묻어버렸다고 한다.
만동묘는 송시열의 유언에 따라 권상하가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도와준 명나라 신종과의 종의 위폐를 모시고 제사 지내기 위해 1703년(숙종 29) 충북 괴산군 청천면 화양동에 지은 사당이다.
일제에 의해 1917년에 제사를 금하게 되었으며 1937년에는 위폐와 제사 용구를 불사르고, 1942년 묘당 등 일체의 건물을 철거했다고 한다. 만동묘라는 이름은 경기도 가평군에 있는 조종암에 새겨진 선조의 어필인 '만절필동'을 모본하여 화양리 바위에 새겨놓은 것을 그 첫 글자와 끝 글자에서 취해 지은 것이다.
만동묘는 유생들의 집합장소가 되어 그 폐단이 서원보다 더욱 심해졌고, 1865년(고종 2) 조정에서는 대보단에서 명나라 황제를 제사 지내므로 개인적으로 지낼 필요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지방과 편액을 서울에 있는 경봉각으로 옮기고 만동묘를 철폐했다.
일제 치하에서도 유림들의 주선으로 비밀리에 제향이 계속되다가 1940년부터는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영영 끊기게 되었으며 1942년 만동묘 건물을 철거, 괴산경찰서 청천면 주재소를 짓는 건축자재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묘우 및 부속건물은 철거된 채 현재는 빈터였으나 1983년 홍수 때 만동묘 묘정비가 출토되어 옛 자리에 다시 세우고 묘역을 정비 충청북도 기념물 제25로 지정되었다.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이며 주자학의 대가인 우암 송시열의 유적은 철폐와 매몰, 일제하에 파괴되는 많은 시련을 겪었으나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민족 자존심을 지키려는 부단한 노력으로 2006년까지 만동묘 7동과 화양서원 2동을 복원하였다.
유적 주변에는 우암 송시열 선생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아 그의 제자가 지었다는 암서재와 효종이 북벌을 이루지 못하고 승하하자 이를 원통하게 여겨 새벽마다 통곡했다 하여 붙여진 읍궁암 외에 '충효절의','비례부동' 바위에 새긴 글자(암각자)등 우암 송시열 선생과 관련된 유적지가 많이 남아 있다.
두 시간여 동안 진행된 강의는 답사하기 전 예습이 되었다. 괴산군 증평 김득신 문학관에 도착한 후 학예사의 해설이 귀에 쏙쏙 들어왔다. 김득신 문확관 관람을 마치고 화양계곡으로 여정이 이어졌다. 화양계곡에 도착한 후 계곡의 정취를 바라보면서 점심식사를 했다. 차림상이 자연에서 가져온 밥상이었기 때문에 아름다운 대자연과 혼연일체 되는 느낌이었다.
화양구곡의 만산홍엽(滿山紅葉)!
답사 떠나기 전날 설레서 잠을 설쳤다는 회원님의 얼굴과 닮아있었다.
필자는 신선한 충격에 현기증이 났다. 수불석권(手不釋卷)하면서 지내온 시간을 넉넉한 자산으로 여겼던 마음이 일순간에 무너졌다. 한문학을 전공한 교수님의 강의의 깊이를 감히 따라갈 수 없었다.
갈 길이 멀다!
필자 스스로 탄식하면서 교훈으로 간직했다.
답사를 마치고 부여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회원님들의 특징을 말씀드리면서 마이크를 돌렸다. 자신을 소개하고 시낭송을 하면서 아름다운 인연의 고리를 단단하게 묶었다. 부여에 무사히 도착하여 해산한 후 긴장의 끈을 풀고 안도의 심호흡을 했다.
‘사무국장의 명사회가 답사의 절정이었다.’
‘회원들을 하나하나 찬사의 말로 소개할 때 재치가 만점이었다.’
‘똑똑한 사무국장! 잘 뽑았다.’
‘사무국장의 목소리에서 음이온이 나온다. 옆에 있기만 해도 행복해지는 음파가 흐른다.’
‘아름다운 목소리, 재치 있는 입담! 아나운서보다 잘한다.’
밤을 새우고 다음날까지 칭찬의 문자가 쇄도했다. 겸손하게 낮아지고 앞으로 더 잘하라는 주마가편(走馬加鞭)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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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똑똑한 사무국장! 잘 뽑았다.’
‘사무국장의 목소리에서 음이온이 나온다. 옆에 있기만 해도 행복해지는 음파가 흐른다.’
‘아름다운 목소리, 재치 있는 입담! 아나운서보다 잘한다.’
낭중지추는 그대를 두고 한 말!
역시 제가 사람보는 눈은 좋은가 봅니다.
처음 뵜을때
아! 보통사람이 아니다는걸 알았으니까요
공자가 태어난 노나라와 맹자가 태어난 추나라와 같이 예절을 알고 학문이 성해 예로부터 ‘추로지향’
문학회 회원님들 대부분이 어르신이십니다.
제가 가장 어린 회원이었어요.
하여 괜히. 앞으로 더 잘하고 주마가편 하신 게지요.
칭찬을 들으니 기분은 좋았습니다.
부끄럽습니다만. 헤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