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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사서에도 그 혼돈은 정리되지 못하여 檀과 壇으로 양립하여 기록하고 있다. 상고사학회 이중재회장은 단군은 하늘에 천제를 지내는 임금이었으므로 제터壇을 써야지 임금에게 아무른 뜻도 없는 박달나무를 연관시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제터壇을 쓰게 되었고, 어떤 사람은 기록물의 보존성을 존중해야 하므로 원래대로 박달나무檀을 쓰기도하였다. 이렇게 딜레마에 빠지게 된 우리 桓民族史는 지금 어디로 가야하는가?
제터壇을 써야할 것인가? 박달나무檀을 써야할 것인가? 이에 대한 명쾌한 답을 아래에서 제시 한다.
동 . 서양 언어의 기원은 실담어이다
話者 : 朴 民宇
聽衆 : 華巖 書堂 諸學生
상고시대 우리 조상들이 말하고 생각했던 어원적 요소들은 모두 실담어와 한자음 속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말의 근원과 서양말의 근원이 모두 실담어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실담어는 산스크리트(Sanskrit)를 말하는 것이며 일반적으로 고대 인도어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고대 인도어도 너무 종류가 많기 때문에 산스크리트(Sanskrit)가 고대인도어 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표현입니다. 인도라는 나라가 생기기 전에 천축국이 있었습니다. 천축국은 모두 다섯개나라로 이루어져 그 강역이 동서로 삼만리였다고합니다. 그러니까 고대 漢나라 때 서역은 모두 천축국 강역에 속했던 것입니다. 천축국의 조상은 '신독, 연독, 천독'이라 했으며 그들은 옛 마고성이 해체되고 난 후 그 지역을 떠나지 않고 남아 유목 생활을 하며 살아왔던 우리와 동향이었던 민족이었습니다.
실제로 산해경을 주해한 곽박이라는 사람은 '천독'이 '조선'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말미에 조선은 동쪽 끝에 있는 나라인데 왜 조선이 서쪽 끝에도 있는지 잘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산해경의 기록이 틀렸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래된 사서라고 그 진위를 의심해서는 안됩니다. 산해경에 쓰여져 있는 고대 조선의 위치에 관한 기록은 틀림없는 사실을 기록한 것입니다. 약 3천 년 보다도 더 오래된 옛적에 책을 쓴다면 얼마나 고되고 경비가 많이 들었겠습니까 더군다나 왕께서 직접 만드신 책인데 거짓 기록을 했을리가 없겠지요.
조선천독(朝鮮天毒)에 관한 몇가지 주요한 내용
山海經海經卷十三
山海經第十八
〔海內經〕
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名曰朝鮮.天毒, 其人水居, 偎人愛之.
동쪽 나라 안과 북쪽의 모퉁이에 있는 나라 이름은 조선(朝鮮)이며 조선은 천독(天毒)이며, 그 사람은 물이 있는 곳에서 살고 사람을 사랑하며 가까이 한다.
郭璞云: 「朝鮮今樂浪郡也.」 珂案: 朝鮮已見海內北經
곽박이 이르기를 「조선은 지금의 낙랑군이다」라 하였다. 원가가 생각건대 조선은 이미 <해내북경>에 보인다.
郭璞云: 「天毒卽天竺國, 貴道德, 有文書.金銀.錢貨, 浮屠出此國中也. 晉大興四年, 天竺胡王獻珍寶.」 王崇慶云: 「天毒疑別有意義, 郭以爲天竺國, 天竺在西域, 漢明帝遣使迎佛骨之地, 此未知是非也.」 珂案: 天竺卽今印度, 在我國西南, 此天毒則在東北, 方位逈異, 故王氏乃有此疑. 或者中有脫文와字, 未可知也
곽박이 이르기를 「천독은 곧 천축국이니 도덕을 귀하게 여기고 문서와 금은 돈과 재물 등이 있고 불타가 그 나라에서 나왔다. 진(晉)나라 대흥(大興, 東晉,AD.318∼321년) 4년 천축(天竺)의 호왕(胡王)이 진귀한 보물을 바쳤다.」라고 하였다. 왕숭경이 이르기를 「'천독'은 아마도 별도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곽박은 '천축국'이라 여겼으나, 천축은 서역에 있으면서 한 명제 때 사신을 보내 부처의 뼈를 맞아들여 온 곳인데,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 알지 못하겠다」라고 하였다. 원가가 생각건대 천축은 곧 지금의 인도로서 우리 나라의 서남쪽에 있으며 여기서 말하는 천독은 곧 동북쪽에 있으니 방위가 사뭇 다르기에 왕숭경이 그러한 의심을 품게 되었다. 혹은 그 문귀 가운데 탈락된 문장이 있거나 잘못 전해진 글자가 있다 하는데 알 수 없는 일이다.
郭璞云: 「偎亦愛也, 音隱외反.」 王念孫云: 「宗炳明佛論<弘明集卷二―珂>引作『偎人而愛人』, 又引注文: 『古謂天毒卽天竺, 浮屠所興.』」 郝懿行云: 「愛之, 藏經本作愛人, 是也.《列子》<黃帝篇>云: 『列姑射山, 有神人, 不偎不愛, 仙聖爲之臣.』 義正與此合. 袁宏漢紀云: 『浮屠, 佛也; 天竺國有佛道, 其敎以修善慈心爲主, 不殺生.』 亦此義也, 玉篇云: 『偎, 愛也.』 本此. 又云: 『北海之偎, 有國曰偎人.』 以『偎人』爲國名, 義與此異.」 珂案: 宋本·吳寬抄本正作偎人愛人
곽박이 이르기를 「'偎' 역시 '愛'의 의미이다. 음은 隱偎反이다」라고 하였다. 왕념손이 이르기를 「종병의 명불론(홍명집 권2 ― 원가 주석)에 『偎人而愛人』으로 인용되어 있으며, 또 주석의 문장을 인용하여 『예전에 말하던 천독은 곧 천축으로 불타가 일어난 곳이다』라 하였다」라고 하였다. 학의행이 이르기를 「'愛之'는《장경》에 본디 '愛人(남을 사랑한다)'으로 되어 있으니 그것이 옳다.《열자·황제편》에 이르기를 『열고사산(列姑射山)에 신인이 있어 가까이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으며, 선인과 성인들이 그에게 신하 노릇을 한다』 하였는데 그 의미가 바로 여기와 부합한다. 원굉의《한기》에 이르기를 『부도는 부처이다. 천축국에 불도가 있으니 그 가르침은 착하고 자비심 있는 마음을 닦는 것을 위주로 하며 살생을 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역시 여기서의 뜻과 같다.《옥편》에 『偎는 愛를 말한다』고 한 것은 여기에 근거한 것이다. 또 이르기를 『북해의 모퉁이에 외인(偎人)이라는 나라가 있다』라 하여 『偎人』을 나라의 이름으로 여겼으니 그 의미가 여기와 다르다」라고 하였다. 원가가 생각건대 송본과 오관의 필사본에는 '偎人愛人'으로 바로 되어 있다.
위에 예를 든 내용에는 부처님도 조선에서 나신 분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그러면 간단하게 우리가 그곳에서 살다가 동쪽으로 옮겨온 것이라 생각하면 많은 의문들이 쉽게 풀릴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민족 뿐만이 아니라 고대 마야인, 아메리카 원주민들도 마고성을 떠나 아메리카로 이주한 우리 민족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말과 우리말은 원래 똑 같았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지금은 알아 들을 수 없게 변했지만 상고대로 올라갈 수록 말이 비슷했던 것입니다. 중근동아시아민족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수메르 민족도 우리말과 똑 같았습니다. 이에 대한 설명도 하자면 글이 너무 길어지니 줄이겠습니다.
환(桓)과 단(檀)은 광명이란 뜻으로 둘다 산스크리트입니다. Phan(환)은 밝다, 환하다, 불꽃(煥), 광명 이런 뜻입니다. 환(桓)이나 단(檀)이나 둘다 산스크리트로 Phan입니다. 지혜가 밝은 것도 Phan입니다. 여기에 왕(王)이란 뜻의 Ina가 결합 되면 환인(桓因)이 되지요. 환인(桓因)은 '밝은 지혜를 가지고 세상을 다스리는 임금'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광명이세(光明理世)입니다. 반고(盤古)란 호칭을 보겠습니다. 직역하면 나침반과 같이 틀림이 없고 정확하다는 뜻과 방어하다, 수비하다, 지키다의 뜻이 있습니다.(盤固) 그런데 영국 옥스포드 대학에서 발행한 20만 단어가 수록 된 산스크리트어 사전(Oxford Sanskrit English Dictionary)에서 '반'과 '고'를 찾아 보면, 판(phan) 고(godh)이며 판(phan)은 환하다라는 의미이며 광명의 뜻이고, 고(godh)는 지킨다, 보호한다는 의미의 defend, protect 등으로 되어있습니다. 조합하여 해설하면 환인이나 반고는 같은 의미로써 밝고 환하게 백성을 지키고 보호하는 제왕의 뜻이 됩니다. 즉, 산스크리트나 한자의 발음과 뜻이 모두 동일 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환(桓)을 분석해보면 나무, 하늘, 해, 땅으로 되어있습니다. 환(桓)이란 글자를 만든 사람은 유목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허허벌판에 이정표가 될 나무 한 그루가 서 있고 하늘과 땅의 중간에(中天) 해가 떠 있는 모습입니다. 이것은 솟대를 말합니다. 우리 환민족의 전통신앙입니다. 솟대, 장승, 당산목, 웅상, 신단수, 부상, 소도, 서낭당 이들의 공통된 요소가 바로 桓이란 글자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정표라는 뜻으로 와전 된 것 같습니다. 이제 원래의 뜻을 알았으니 우리의 전통을 잘 지키고 보존하는 사람이 되어야 겠습니다.
제가 '삼신오제본기'와 '신시본기'를 읽어봤는데 이들의 내용속에는 다른 민족들이 밝혀내지 못한 환민족의 철학과 사상과 역사가 들어 있었습니다. 이들 책은 대단히 중요한 우리의 국보입니다. 대부분의 내용들이 산스크리트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는 것을 보고 아주 놀랐습니다.
신시본기(神市本紀)에 "故自天光明謂之桓也自地光明謂之檀也" "하늘에서 비추는 빛을 환(桓)이라 하고, 그 빛으로 땅이 밝은 것을 단(檀)이라 한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십시요, 환(桓)과 단(檀)이 광명이라고 적혀있지 않습니까! 아주 놀라운 일입니다.
복희씨도 산스크리트입니다. 보크-희(Bhok-hi), 산스크리트 語 뜻은 'Focus on Light' '햇볕이 모여서 쨍쨍 내려쪼이는 모습'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환, 단은 밝음을 뜻하고 아침에 해가뜨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영어로 새벽이 오기 전을 'Before the dawn' 이라고 합니다. dawn과 旦, 檀은 광명이라는 어원에서 지어진 말입니다.
檀
박달나무 단(檀)을 풀어보겠습니다. 이것도 桓자와 유사합니다. 그 구조가 같은 것입니다. 이것의 뜻은 땅이 밝은 것이라고 '신시본기'에서 밝혔기 때문에 구태여 박달나무라고 주장하면 무지한 사람이 됩니다. 세상에 박달나무가 있기 때문에 박달나무로 알고 있지만 그것은 와전 된 것이고 그 뜻이 기록돼 있는 경전을 가까이할 수 없었으므로 착각하기 쉬운 함정에 빠진 것입니다. 박달은 '밝은 땅'이라는 뜻입니다. 밝은 땅에 서 있는 나무는 부상(扶桑)입니다. 부상(扶桑)은 해가 뜨는 동방에 나무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동방의 상징이 되는 나무입니다.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을 들어 보았을 것입니다. 뽕나무 밭이 바다로 변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저 단(檀)자에 쓰여진 나무는 뽕나무입니다. 뽕나무는 밝은 땅 수 천리에 무성하게 번식하여 우리 뚱이 민족을 세계 일등 국가로 일어나게 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비단옷을 입고 살았으며 비단옷을 전 세계 사람들이 입어 보려고 우리 밝은 땅에 모여들어 조공하였습니다. 바로 그런 시절이 있었는데 역사에 기록이 없으니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환인씨 께서 천산에서 전 세계를 다스리다가 인구가 불어나 점점 먹고 살기가 어려워지자 아들 환웅에게 무리 삼천과 함께 풍백, 운사, 우사를 데리고 동방으로 나아가 밝은 땅에서 나라를 세우고 자손을 번성시키라고 명하였습니다. 그곳이 삼위태백이고 우리나라와 발해(밝은 땅)입니다.
책 내용중 부상(扶桑)편에 그 내용이 충분히 나와 있으니 참고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이하 환단원류사에서 발췌 --
봉선서(封禪書)에 기록하기를 발해(渤海)는 삼신산이 있는 곳이라 하였고 봉래(蓬萊), 영주(瀛州), 방장(方丈)등 세개의 산이 있는 섬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신선전(神仙傳)에는 상전벽해(桑田碧海)로 인하여 봉래(蓬萊)가 물에 잠겼다고 말한다.
그렇다, 상전벽해(桑田碧海)란 뽕나무밭이 바다로 변했다는 것인데, 바로 발해(渤海)가 수몰되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부상(扶桑)이 있는 곳은, 발해(渤海)의 해중(海中)이고 그 해중(海中)에 삼신산(三神山)이 있으며 삼신산(三神山)은 봉래(蓬萊), 영주(瀛州), 방장(方丈)을 일컫는 다고 기록되어 있다.
특히, 사마천은 삼신산(三神山)은 발해(渤海) 중에 있어 그 길이 멀지 않았다고 하였으며, 선인(仙人)들이 바람을 일으켜 배를 멀리 보냈다고 하였다. 이것은 십주기(十州記)에서 기록한 " 물살이 크고 거칠며 무서운 파도가 친다. "한 것과 일치한다.
발해는 원래 '뻘밭'을 뜻하는 싯담어이다. 동국정운에 기록한 발(渤)자의 정확한 발음은 '뻘'이다. 즉, 갯뻘을 말한다. 또한 싯담어 사전에는 대평원의 뜻도 있다.
* 발(渤)[] 동국정운 2:29
* va-ra 산스크리트 : 뻘, 갯벌, 안개 자욱할. (강상원, 漢字는 東夷族 文字 註釋 . 한자는 동이족 문자 주석 193쪽)
va-ra(빠라)는 바다라는 뜻이다. 안개가 자욱한 뻘밭을 의미하기도 하므로 바닷물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해변을 말하며 벌(伐)이라는 명사로 사용될 때 평야, 대평원의 뜻도 된다. (비교 : 황산벌, 서라벌, 셔벌 등)
박달이라 하는 것도 발해와 같은 뜻이다. 산스크리트 밝,박,발(渤)은 va-ra : 바다, 갯뻘의 뜻이고, 달(dhar)은 땅(따.地)을 의미한다. 발해(渤海)의 海는 땅과 같은 의미로 쓰였으나 나중에 수몰되어 바다가 되었으므로 발해(渤海)라 하였다.
흔히, 배달(倍達)을 밝달이라 하고 박달이라고도 하는데, 지명을 말할 때는 발해(渤海)라 하고, 민족을 말할 때는 배달(倍達)이라 한다. 박달나무는 배달(倍達)을 상징하는 나무를 말하며 이를 웅상(雄常)이라 한다.
배달(倍達)은 산스크리트 pyaina-tal(뻬야이나 따) : 빼여나게 태어난, (천부적)하늘이 내린, 초월적인의 뜻이 있고, veda-artha(베다 아르 따), "지혜에 통철한 민족"이라는 뜻이다. (강상원, 漢字는 東夷族 文字 註釋 . 한자는 동이족 문자 주석 190쪽)
발해의 원래 뜻이 밝혀진 만큼 고대의 기록들에서 숨겨진 사실들을 잘 해석하면 잃어버린 발해의 강역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옛날 발해(渤海)는, 넓은 평원에 있었던 대동이(大東夷)의 거주지 였다가 약 5천 년 전부터 서서히 뻘로 변해갔으며, 그래도 봉래(蓬萊), 영주(瀛州), 방장(方丈) 등은 높은 지대였으므로 육지가 섬으로 변할 때까지 별 위험을 느끼지 못하고 살았을 것이다. 그후 육지에서 섬으로 변했으며 오랜 세월 동안 신비한 신선들의 세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훗날 단군께서 이곳에 도읍을 정했으나 곧 대홍수를 맞게 되었다. 발해가 결정적으로 물에 잠기게 된 것은 단군조선이 개국한지 37년(甲辰年)이 되던 해에 일어났던 대홍수 때문이었다.
그 기록을 살펴보기로 한다.
규원사화(揆園史話) / 단군기(檀君紀) 발췌
" ... 御國三十餘年, 正値洪水, 浩波溜天, 懷襄遼滿之(時)[野], 浿水漲溢平壤沈潛. 乃遣四子, 遍相土地之宜, 占居阿斯達下唐莊之野, 今文化.九月山下, 有莊莊坪, 卽其地也. "
" ...나라를 다스린지 30여 년만에 홍수를 만났는데, 어마어마한 파도는 하늘까지 치솟아 요만(遼滿)의 들녘을 품으며 올라서니 패수의 물은 불어 넘치고 평양은 물에 잠겨 버렸다. 이에 네 아들을 보내 마땅한 땅을 두루 살피게 하고는 아사달(阿斯達) 아래 당장(唐莊)의 들녘을 차지하여 거처케 하였는데, 지금의 문화(文化) 구월산(九月山) 아래 장장평(莊莊坪)이 있으니 바로 그 땅이다. "
제왕년대력(帝王年代歷) / 단군기(檀君紀) 발췌
" 甲辰, 移都于唐莊京 命肅愼氏 任征伐 鳳凰止于庭 今文化縣.莊莊坪也. 時洪水汎濫, 沈沒平壤, 使王子登阿斯達山而定之 "
" 갑진년에 도읍을 당장경으로 옮겼다. 숙신씨에게 명하여 정벌의 일을 일임하였다. 봉황이 뜰에 머물렀다. 지금의 문화현 장장평을 말한다. 이 때 홍수가 범람하여 평양이 침몰되었기에, 왕자를 시켜 아사달산에 올라 지세를 살펴보고 새로운 거처를 정하게 한 것이다. "
이때는 단군이 나라를 다스린지 37년(甲辰年)이었다.
한 때 단국조선의 도읍지인 '평양(平壤)'은 지금의 요동반도 '대련(大連)'시 앞 바다에 있었으며 지금으로부터 약 5,000년 전에는 이곳이 바다가 아닌 대평원지대 였다. 그러므로 평양(平壤)이라한 것이다. 평양(平壤)이 차츰 물이 차올라서 단군이 나라를 다스린지 36년(bc2297 갑진년)에 대홍수를 만나 수도인 평양(平壤)이 침수되었고, 그로부터 13년 후(bc2284 정사년)에 도읍을 당장경(唐莊京)으로 옮겼다는 기록이다.
제왕년대력(帝王年代歷)은 학자들이 위서라고 취급했지만 단군시대에 있었던 대홍수에 대해서 규원사화(揆園史話)보다도 더 확실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은 아주 놀라운 사실이다.
12000년전~8000년전까지 해수면
5000년전~현재까지 해수면
발해(渤海)는 1만 2천 년전 육지였다가 북극의 빙하가 급격히 녹으면서 전세계 해수면이 상승하므로 서서히 물이 채워진 곳이다. 지금 황해의 평균 해수면은 약 70M(미터)이다. 그 옛날 해수면이 약 5천 년 동안 평균 70~80M(미터)가량 상승했으므로 발해만은 오랫동안 물에 잠기지 않았다고 볼 수가 있는 것이다. 발해만의 평균 수심은 18M(미터)이다. 섬 주위의 수면이 낮은 곳은 겨우 4M미터 밖에 되지 않는다.
저 멀리 제주도에서부터 서서히 물이 차오르기 시작하여 황해가 형성되었다고 본다면 북극 빙하가 녹기 시작하여 세계 평균 수심이 80M(미터)까지 상승하여도 발해만은 대평원이었으며 바닷가에서 부상나무를 보고 있었을 것이다.
마지막 20M(미터)의 물이 차오르는 시기는 약 5천 년 전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이 시기는 신시(神市) 환웅시대 말기와 단군시대 개국초가 되는데, 온 천지가 뻘밭으로 서서히(약 500년 ~ 약 1,000년 사이) 변해갔으므로 그런 연유로 발해(渤海)라는 이름이 지어진 것이다. 다시말해, 지금 요동반도 대련지구 앞바다는 환인 때 부터 환웅시대 까지 초목이 우거지고 먹거리가 풍부한 신천지 대평원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평양(平壤)이다.
이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5,000년 전에 발해에 물이 차기 시작했다는 지질학적 연구 결과가 있으므로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 되었다.
관련 논문 : 한중센터 http://www.ckjorc.org/ . yellow sea plain.pdf
ZUM 학습백과 http://study.zum.com/
그림출처 : ZUM 학습백과
현재의 해수면과 과거의 해수면 높이 그래프이다. 오차를 감안한다면 발해만이 물에 잠기는 것은 약 5천 년 전으로 추정할 수 있다.
열자(列子) 탕문편(湯問篇)에 더 구체적인 기록이 있다.
발해(渤海)의 동쪽에 대여(岱輿), 원교(員嶠), 방호(方壺), 영주(瀛洲), 봉래(蓬萊)라 하는 다섯개의 산이 있었는데 그곳은 모두 금(金)과 옥(玉)으로 된 집에서 살며 금수(禽獸)들은 모두 순백색이고, 옥과 구슬로 된 나무가 있고 그 아름다운 열매는 모두 맛이 좋아 먹으면 모두 불로불사(不老不死)한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곳에 사는 신선(神仙)과 성인(聖人)들에게 어느날 근심꺼리가 생겼는데 그들이 자유롭게 왕래하며 평화롭게 지내던 산이 조수(潮水)와 파도 때문에 하루도 편할 날이 없어져 상제(上帝)께 이 일을 해결해 달라고 호소하였으니, 상제(上帝)께서는 이를 보고 산이 서쪽 끝으로 흘러가서 신선(神仙)과 성인(聖人)들이 수재민이 될 것을 우려하여, 마침내 북쪽을 다스리는 신하 우강(禺疆)에게 명하여 일을 해결하게 했으나 우강(禺疆) 천재지변을 다스릴수 없어 끝내 대여(岱輿)와 원교(員嶠) 두 산은 북극(北極)으로 흘러가 대해(大海)에 가라앉았다는 내용이다.
열자 탕문편 (列子 湯問篇)
渤海之東不知幾億萬里, 有大壑焉, 實惟無底之谷, 其下無底, 名曰歸墟. 八紘九野之水, 天漢之流, 莫不注之, 而無增無減焉. 其中有五山焉, 一曰岱輿, 二曰員嶠, 三曰方壺, 四曰瀛洲, 五曰蓬萊. 其山高下周旋三萬里, 其頂平處九千里. 山之中閒相去七萬里, 以爲鄰居焉. 其上臺觀皆金玉, 其上禽獸皆純縞. 珠玕之樹皆叢生, 華實皆有滋味, 食之皆不老不死. 所居之人皆仙聖之種, 一日一夕飛相往來者, 不可數焉. 而五山之根無所連箸, 常隨潮波上下往還, 不得蹔峙焉. 仙聖毒之, 訴之於帝. 帝恐流於西極, 失羣仙聖之居, 乃命禺疆使巨鼇十五擧首而戴之. 迭爲三番, 六萬歲一交焉. 五山始峙而不動. 而龍伯之國有大人, 擧足不盈數步而曁五山之所, 一釣而連六鼇, 合負而趣歸其國, 灼其骨以數焉. 於是岱輿員嶠二山流於北極, 沈於大海, 仙聖之播遷者巨億計. 帝憑怒, 侵減龍伯之國使阨, 侵小龍伯之民使短. 至伏羲神農時, 其國人猶數十丈.
발해(渤海)의 동쪽 몇 억만 리가 되는지 알 수 없는 곳에 큰 계곡이 있다. 실로 끝이 없는 계곡으로 더 이상의 밑이 없어‘귀허(歸墟)’라고 한다. 팔굉(八紘) ․ 구야(九野)의 물이 은하수로 흐르는데 그 흐름이 멈추지 않고 증감(增減)이 없다. 그 가운데에 오산(五山)이 있는데 대여(岱輿)․원교(員嶠)․방호(方壺)․영주(瀛洲)․봉래(蓬萊)이다. 그 산의 높낮이는 두루 돌아 3만 리이고, 그 정상(頂上)의 편평한 곳은 9천리다. 산의 중간간의 거리는 7만 리로 이웃이 거주하고 있다. 그 위에 있는 집의 모습은 모두 금(金)과 옥(玉)으로 되어있으며, 그 곳의 금수(禽獸)들은 모두 순백색이다. 옥과 구슬로 된 나무가 모두 무리지어 살고, 그 아름다운 열매는 모두 맛이 좋아, 먹으면 모두 불로불사(不老不死)한다. 그 곳에 거주하는 사람은 모두 신선(神仙)과 성인(聖人)들로서 하루 낮과 하루 저녁을 날아 서로 왕래하는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리고 오산(五山)의 밑은 큰 대나무 통(箸)에 연결되어있는데 항상 조수(潮水)와 파도를 따라 상하(上下)로 왕복하고 돌아 잠시도 우뚝 솟아나지 않는다. 선성(仙聖)이 이것을 한(恨)하여 상제(上帝)께 호소하였다. 상제가 산이 서쪽 끝으로 흘러가서 선성(仙聖)의 무리가 거주할 곳을 잃을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우강(禺疆)에게 명하여 거대한 자라 15마리로 하여금 머리를 들어 그것을 받치게 했다. 돌아 흐르기를 세 번 하니, 6만년에 한 번 교차한다. 오산(五山)은 처음에는 우뚝 솟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용백지국(龍伯之國)에 거인(大人)이 발을 들어서 몇 보 걷지도 않고 오산(五山)이 있는 곳에 이르러, 한 번의 낚시로 자라 다섯을 잡아서 모두 등에 지고 그 나라로 돌아가서, 점치는 용도로 자라의 뼈를 태웠다. 이에 대여(岱輿)와 원교(員嶠) 두 산은 북극(北極)으로 흘러가 대해(大海)에 가라앉았다. 선성(仙聖)이 흩어져 옮긴 자가 많아 억(億)을 헤아린다. 이에 상제가 크게 노하여 용백지국을 점점 협소하게 만들고 그 백성의 키를 작게 만들었다. 그런데도 복희씨와 신농씨의 시대에 이르러 그 나라의 사람들의 키가 오히려 수십 장이었다. (번역 : 인터넷 자료)
지금 황해는 해수면이 낮아지는 간조(干潮)와 그 반대 현상인 만조(滿潮)의 높이차가 심한데 간조와 만조는 달의 인력이 지구에 미쳐 바닷물을 세게 끌어당겨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즉 바닷가에서 바라보면 시간의 경과에 따라 해수면 높이가 높아지기도 하고 낮아지기도 한다.
바닷물의 간만은 1주야(晝夜)에 2회 되풀이되는데, 만조와 간조의 높이차가 5m ~ 9m이며 세계적으로도 큰 편이다. 남해안은 2m 내외, 동해안은 0.3m 내외인 것을 보아도 확연히 드러난다.
이렇게 바닷물이 차 올라오는데 신선들의 걱정은 이만 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기록의 숨은 진실들을 파헤쳐 본 결과가 예상외로 놀라웠다. 중국인들이 기록한 자기네 역사인 줄로만 알았던 황당무계한 지괴소설류의 사서들이, 사실은 모두 동이족의 실존했던 이야기를 기록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신시본기(神市本紀)'에 봉래, 영주, 방장은 삼신산(三神山)을 말하는 것인데 사해의 제족들이 삼신산(三神山)에 제(祭)를 올리고 숭배하였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삼신은 곧 상제이니 상제가 머무는 곳이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뒷장에서 서술한다.
부상(扶桑)은 삼신산(三神山)에 무성하게 우뚝 솟은, 둘레가 스무 아름이나 되는 엄청나게 큰 나무인데 한民族이 숭배해 온 태양나무이며 봉래(蓬萊)의 연꽃과 함께 태목(太木)의 정기로 태어난 최초의 나무와 뿌리였다. 태초에 동방 태목으로부터 태어나고 길러지고 융성하였으니, 이것이 마고지나(麻姑之那) '종(種)의 기원'이다.